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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오빠’라고 불린 적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대학 이전에는 주변에 그럴만한 연하의 여성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대학 이후로는 ‘선배’라고 불렸으니까 별수 없는 일이다. 친척 중에는 분명 나를 ‘오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연하의 여자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나를 부르지 않는다. 호칭 없이 사람과 소통하는 것도,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긴 해도 가능하긴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오빠라고 불리고 싶은 것인가 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오빠라고 불리는 것도 인생 전반적으로는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들뜨는 것도 사실이지만, 계속 오빠라고 불리면 마음이 영 편할 것 같지 않다. 오빠라는 단어가 연인 사이에서 여성이 남성을 부르는 대표적인 호칭이 되었기 때문인지 내게 ‘오빠’란 대단히 가까운 관계에서 쓰이는 애칭 혹은 실제 혈연관계에서 쓰이는 호칭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일본어에 빗대는 건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일본어에서 갑자기 요비스테로 불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어에서는 보통 이름을 부를 때 ‘군’, ‘상’, ‘짱’ 등 다양한 호칭을 붙이는데, 그런 호칭 없이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요비스테’라고 한다. 그리고 이 요비스테는 어지간히 친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 선배가 갑자기 저를 요비스테로 부르는데 무슨 뜻이 있는 걸까요’ 라는 식의 연애 칼럼도 보이곤 하는 것이다.
요즘이야 남녀 간에도 허물없이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오빠라는 호칭에 이런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고 ‘오빠’라는 호칭이 평범하고 중립적인 표현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쪽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할지도 모르겠다. 미니스커트를 보고 풍기문란이라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이 있는 사회보다는 모두가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사회가 나은 것처럼. 하지만 그런 호칭으로 불린 경험이 거의 없는 탓인지 내 사고 방식은 쉽게 변할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오빠라는 호칭은 가급적 피하고 싶으며, 당연히 주변에 요구하지도 않는다. 같은 이유로 누구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고 부르라고 하지도 않는데, 어쩌면 나는 단순히 누군가 실제로 친밀해지기 전에 뉘앙스로 문을 열어젖히고 오는 게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주 곤란하게도, 이런 호칭을 피할 수 없는 관계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어떤 집단의 선후배 관계도 아니면서 나이 차이가 나고, 그렇다고 ‘씨’를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친해진 관계다. 이럴 때는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실 오빠라고 불리는 게 불쾌한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은 좋은 편이니까 대단한 고생은 아니다.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상대로부터 친한 호칭으로 불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지금까지 한 얘기와 완전 상반되는 소리지만, 감정은 논리로 느끼는 게 아니니까 어쩌겠는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일단 해보면 재미있는 게임이 있는 것처럼, 별로 듣고 싶지 않지만 일단 들으면 좋은 말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 꼭 한 번, ‘오빠’라는 호칭에 나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오빠’라는 호칭에서 어느 정도 그런 ‘과장된 친밀함’ 같은 뉘앙스를 느끼고 있었고, 게다가 여대를 나와서 그 호칭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근데 우리는 하필 서로를 선배라고도, 후배라고도 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씨’를 붙일 수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친해지는 통에 말을 놓게 되었다. 말은 놓고 ‘씨’는 붙잡고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씨’도 마침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우습게도 양쪽 다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도 불리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친하게 지내며 반말은 하지만 서로를 호칭하지는 않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호칭만 배우지 못한 사람들처럼 괴이쩍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역시 한국어에는 단어도 호칭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는 단순히 우리들이 편협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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