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튼, 그런 학창시절을 보낸 결과 중고등학생의 연애에 대해 알고 싶을 때는 잃어버린 고대 문명의 전설을 조사하듯이 문헌을 뒤적이거나 고대 문명의 후예들을 만나서 증언을 채록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밖에는 순전히 상상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내가 추리한 중고등학생의 연애 활동은 이렇다.
만남
남녀공학이라면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정이 들고 사귀게 된다. 남녀공학이 아니라면 학원이나 교회에서 만난다. 때로는 타 학교와의 교류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초등학교 때는 남자애가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 당당히 고백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니, 교실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상황적으로 당당했을 뿐이지 두 사람 다 별말이 없었던 것 같다. 남자애도 말없이 줬고, 여자애도 받고는 고맙다고만 했다. 조직의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거래하게 된 밀수품을 주고받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통
같은 학교라면 쉬는 시간, 점심 시간, 방과 후에 만난다.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는 정도지만 간혹 교내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어 그 이상의 스킨쉽을 감행하기도 한다. 같은 학교가 아니라면 오랜 시간 각자의 학교에 발이 묶이는 만큼 대부분의 소통은 메시지와 전화로 이루어진다. 고등학교 때 학원의 여자애와 친구를 문자로 소개해 준 적이 꼭 한 번 있는데(문자팅이라고 했던 것 같다), 여자애는 문자에 각종 기호와 알파벳을 섞어서 쓰는 타입이었고, 친구는 그렇지 않아서 언어의 장벽 때문에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일어났다.
데이트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자료가 없는 부분이다. 고등학교 때 커플과 함께 노래방에 간 적은 몇 번 있지만, 그밖에는 본 게 없다. 직접 들은 증언으로는 우선 ‘같이 문방구에 갔다’가 있는데, 이걸 정말 데이트라고 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펜이나 노트를 고르면서도 서로의 연애감정이 발전할 수는 있겠지만, 문방구에 한 시간 넘게 죽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다음으로 데이트는 아니지만 ‘커플 문제집을 푼다’가 있었다. 정말 기상천외한 개념인데, 날짜별로 페이지를 정해서 한날한시에 같은 문제를 푸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같은 문제를 풀고 있어’라는 셈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문제로 함께 고민해 주는 게 바로 배우자라고는 하지만, 나라면 아무리 몸이 떨어져 있어 외로워도 같은 수학 문제를 풀면서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거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약속대로 문제를 풀지 않아서 ‘세 페이지나 풀지 않다니, 우리 사이를 그 정도로 생각하는 거지?’라는 여자 친구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방문형 학습지 선생님과 학생이 떠올라서 재미있긴 하지만, 사귀는 내내 지속된다면 끔찍스러울 것 같다. 어쨌든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는 문제집조차 연애감정을 증진시킬 수 있는 모양이다.
한편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흔히 말하는 보편타당한 ‘데이트’로는, 도서관에 가거나, 공원을 산책하거나, 시내를 돌아다니며 카페에 가거나, 아이쇼핑을 하거나, 노래방을 가거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모양이다. 간혹 DVD방을 가거나 ‘뚫리는’ 술집에 가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인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성인이라고 딱히 매일같이 교외로 여행을 가거나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잔을 기울이고 호텔에서 꿈같은 밤을 보내는 건 아니니까 그도 그럴법하다. 소지금에 따라 규모나 시간은 변하지만, 방법 자체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첨단 문명의 연애도 참으로 별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을 달에 보낸 로켓에 탑재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기기를 누구나 소지하고 쾌적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실감 나는 4D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라도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애든 어른이든 연애라는 활동에서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기야 둘이 즐길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누군가가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을 모두 잘라내고 나면 남는 것은 고작 그 정도이리라. 데이트라는 형식으로 영위되는 연애란 어쩌면 애든 어른이든 그렇게 뻔한 일상의 영역 밖을 조금씩 탐사해가는 것은 아닐까?
그건 그렇고 최근에 “러브장”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접했다. 분명 어릴 때 한 번쯤 여자애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검색해보니, ‘자신이 상대를 얼마나, 왜 사랑하는지 열심히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노트’인 듯하다.
예를 들자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거기 있기 때문이야.”
“눈 덮인 산을 오르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널 좋아해."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나는 널 묻을 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처럼 새콤달콤한 말을 온갖 그림과 함께 페이지마다 적어서 기념일에 준다는데,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창의적이기 그지 없는 연애 방법이다. 이런 걸 받으면 분명 만감이 교차하겠지만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창의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에는 분명 감동할 것 같다. 일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경제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이다. 아직까지 유행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모바일 메신저와 커플 노트 앱 등 최첨단 소통방식이 보급된 요즘에도 계속 남았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감수성은 언제까지고 남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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