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일을 근거로 '여성들은 모두 삼국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군’ 하고 일반화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삼국지를 꼭 읽지 않았더라도 재미있는 게임과 소년만화를 찾아서 방랑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삼국지를 접하는 것은 마치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원주율이 발견되는 것처럼 당연한 섭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과 무관하게 게임과 소년만화에 딱히 흥미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접할 일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삼국지가 수능 문제에 전면적으로 출제되거나, 여성이라면 누구나 봐야 할 정도로 끝내주는 걸작 순정 삼국지 만화가 있거나, 반지의 제왕처럼 세계적으로 흥행한 삼국지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삼국지가 대중적인 콘텐츠라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한편 얘기를 돌려서, 나는 스포츠에 관해 아는 게 없다.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느냐면 그건 아니라 농구에서는 발을 쓰면 안 된다든가, 축구에서는 손이나 이빨을 쓰면 안 된다든가 하는 상식선의 규칙은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으로서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 때문이지, 선수들이 뛰는 현실로서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다. 현실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경기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적은 전국민이 축구팬이 되었던 2002년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올해도 남들이 월드컵을 하든 말든 별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잠만 잤다. 그 시각에 밤을 새워가며 경기를 응원한 사람들을 보면 정말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정말 감탄스러울 ‘따름’이라, 나도 함께 즐기고 싶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이 축구를 즐기느라 나를 상대하지 않게 되면 아무리 나라도 ‘사커 만세! 비바 축구!’하고 외치며 공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도 순수한 마음으로 축구를 즐기고 있지는 않으리라. 전 세계의 축구 팬들에게는 죄송스러울 따름이지만, 축구 게임은 재밌게 해도 현실의 축구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심지어 이 현실 경기에 대한 무관심은 자기 자신이 낀 경기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는 이런 일마저 있었다. 축구 인원이 모자란 나머지 친구들이 나에게 골키퍼를 시킨 적이 있는데, 마지못해 골키퍼를 하던 나는 수비수를 하던 친구와 잡담을 하다가 다른 친구의 ‘패스’를 보지 못하고 자살골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딱히 욕을 먹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는 누구도 나에게 축구를 하자고 한 적이 없다. 참고로 그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욕을 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삼국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스포츠에 도통 관심을 갖지 못하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심이나 취향이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이 내리치듯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서서히 형성되는 것이라 어느 시점이 지나면 그동안 형성되어온 경향성을 크게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개개인에게도 ‘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서려면 굉장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르바이트 동료들에게 삼국지란 정말 재미난 고전이고, 그걸 이용해서 나온 게임도 한둘이 아니라고 설파한대도 별로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피터 잭슨이 삼부작으로 삼국지를 찍지 않는 한은. 마찬가지로 누가 내게 아무리 축구가 정말 인류가 만들어낸 스포츠의 극치고 경기를 응원하는 게 깜짝 놀랄정도로 신난다고 말한들,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뾰족한 대안도 없다.
하루키의 단편 '빵가게 습격'을 보면 빵을 털러 온 주인공 일행에게 빵가게 주인이 빵을 가져가는 대가로 ‘바그너를 좋아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선교사 같은 방법으로도 성인의 취향이나 관심을 정말 움직이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문화를 움직이는 것은 역시 문화여야 한다. 예를 들어 하루키가 축구 소설을 쓴다면 나도 축구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보다는 피터 잭슨의 ‘삼국지’를 더 보고 싶지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tag : 수필, 에세이, 삼국지, 축구, 스포츠, 관심,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