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낮술'이라는 단어는 익숙해도 ‘밤술'이라는 단어는 별로 익숙하지 않다. ‘여교수’라는 단어는 잘 써도 ‘남교수’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밤술’은 일반적이고 당연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낮술을 하면 자기 부모도 못 알아본다.”라는 속담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낮술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낮술이든 밤술이든 맛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낮에 마시는 술은 가벼워서 좋다. 밤에 마시는 술은 어찌 되었든 그걸로 하루가 끝난다는 비장함이 있지만, 낮에 마시는 술은 그렇게 하루를 끝낼 수는 없으니까 가볍게 즐기게 되어 마음이 편하다. 맥주를 곁들이면 영화도 좀 더 재미있고, 게임도 더 신 난다. 특히 게임을 하며 병맥주를 마시고 있노라면, 옛날 비디오 게임을 전문적으로 리뷰하며 욕설을 아끼지 않는 <Angry Video Game Nerd>의 제임스 롤프 같은 기분이 되어, 게임이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마귀 같은 놈들…”하고 뇌까리는 재미가 있다.
아예 밖으로 나가서, 흩날리는 벚꽃을 구경하며 마시는 낮술도 맛있다. 대학마다 다르겠지만, 캠퍼스와 건물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모 대학에서는 꽃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잔디 광장에 학생들이 둥글게 앉아 따뜻한 햇살 아래 배달 음식을 시켜다 먹으며 잡담을 하고 <<아이 앰 그라운드>> 같은 놀이를 하며 술을 마시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맥주나 청주를 마시는 것도 봄에만 즐길 수 있는 낙이다. 밤에 그렇게 마시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셔대서 보기에 그리 좋지만은 않지만, 낮에 마시면 수업 때문인지 적당한 수준에서 즐기게 되어 활기차고 마냥 신 나 보인다.
꽃이 피지 않더라도 날씨만 좋으면 그냥 잔디밭이나 그늘에 앉아서 혼자 책을 읽으며 마시는 맥주도 훌륭하다. 밖에서 혼자 두어 병을 늘어놓고 마시면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겠지만, 한 캔이나 한 병 정도는 술이 아니라 날씨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남의 눈도 덜 신경 쓰게 된다. 실제로 남들은 혀를 차면서 지나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만큼 좋은 날씨에는 보통 나처럼 나온 사람들이 좀 있기 마련이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그렇게 혼자 해변에서 썬탠하듯이 맥주를 마시며 책도 읽고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있노라면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고, 거기서 즐길만한 것 하나둘쯤은 찾을 수 있다는 실감이 든다.
낮에 기차에서 마시는 맥주도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멋지다. 옛날에는 춘천가는 기차를 탈 때마다 카트에서 맥주를 사다 마셨다. 안주가 없어도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술에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일상의 배경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마시는 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행기에서 마시는 술도 퍽 맛있는데, 비행기에서 마시는 술은 명목상 공짜인 데다 빠르게 잠들 것을 상정하고 마시는 술이라 종목을 가리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그건 그렇고 춘천 가는 기차도 없어졌고 카트도 사라져버렸는데, 그 대신 생겨난 ‘매점 칸’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다. 조용한 매점 칸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자면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바를 찾아 가볍게 칵테일을 한 잔 마시는 듯한, 어딘지 모르게 호사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는 3000원도 되지 않는 저렴한 맥주지만, 싼값에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경제적이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낮술을 즐기는 데는 한 가지 철칙이 있다. 아무리 즐거워도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밖에서 마시니까 술이 남아서 안주를 시키고 안주가 남아서 술을 시키는, 술집 주인만 신 나는 사태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낮에 완전히 취해버리면 그 뒷 시간이 완전히 날아가버려 생활 주기가 엉망이 되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대낮에 술이 깨며 느끼는 두통도 달갑지 않으니 맥주도 정해놓고 마시는 게 좋다. 요컨대 적당히 즐길 만큼만 마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여행지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같이 간 친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내가 가져간 것은 보드게임뿐이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TV를 보면서 로마 귀족처럼 소파에 가로로 누워 냉장고에 있던 양주를 마시는 것 뿐이었다. 아침 햇살에 호박색 위스키가 빛나는 것을 보며, 나는 천상의 여유와 즐거움이 여기 다 있구나 싶었는데, 역시 술은 즐기는 수준이라면 시간과 무관하게 멋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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