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은 사치다.”라는 말이 있다. “~은 사치다.”라는 말은 어디에 갖다 붙여도 그럴싸한 말이 되긴 하지만, 끔찍하리만치 온갖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요즘 세상에 고독은 정말 누리기 힘든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놀랍게도 이건 이제 게임에서조차 마찬가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게임을 할 때만큼은 여행을 떠난 것처럼 혼자 새로운 세계를 즐길 수 있었다. 새로이 친구 관계를 맺고, 초대하고, 상호작용을 나눌 수 있는 기능이 부가적인 장점이 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장점이지, 필수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요는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동시에 ‘카카오톡’ 류의 메신저가 당연한 것이 되면서, 정보 공개의 선택권부터 소실되기 시작했다. 일단 이런 메신저에서는 마지못해 번호를 저장한 사람들까지 저절로 ‘친구’가 되어 올려놓은 사진과 생각을 봐야 하고, 내 것도 보여줘야 한다.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인간관계와 정보의 과잉이고 공해며, 반강제적인 사생활 개방이다. 내가 번호를 저장해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디에 여행을 갔다 왔으며, 누구와 사귀고, 애가 얼마나 잘 크고 있는지 모두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슨 훈련소 생활관도 아니고.
보는 쪽이야 보이지 않게 숨겨둘 수야 있지만, 보이는 쪽은 대책이 없다. 나도 예전에는 적당히 쓰면 별 문제야 없겠지 싶었지만, 아웃바운드 마케터가 ‘친구’가 되고 내 프로필 사진의 의미를 꼬치꼬치 캐물어 “아, 그건 말이죠, 메탈기어 솔리드라는 게임에 나오는 조직의 마크인데…….” 하고 식은땀을 흘린 이후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생각이나 생활의 장면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까지 방송되는 것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교사처럼 직업적으로 '공유할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의 번호를 대량으로 저장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하다.
다시 얘기를 돌려서, 게임 쪽도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다. 좀 흥미로운 게임이 나왔다 싶어 보면 어김없이 ‘포 카카오’다. 그 뜻은, 그 게임을 설치하고 실행하는 순간 번호를 저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 사람들이 그 게임을 하고 있다면 뭘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있고, 그 사람들에게 내가 그 게임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뜻이다.
물론 상품을 주고받고 초대하고 초대받는 상호작용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기능에 환호작약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으니까 이런 기능이 등장한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항상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가령 위에 예를 든 아웃바운드 마케터 같은 사람이나, 일 혹은 조모임 때문에 만난 사람, 헤어진 애인, 선생님, 부모님을 게임 속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자신이 게임에서 기록한 몇백만 점을 상사나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자랑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내가 아는 한 쉽게 피할 수 없다. iOS라면 ‘게스트 로그인’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안드로이드는 카카오톡 아이디가 없으면 로그인 자체가 불가능하다. 요는 (iOS기기가 있다면) 게스트로 로그인해서 백업되지 않는 ‘체험식' 게임을 하든지, 군말 않고 '내가 원해서 맺어진 것이 아닌 친구들에게 내가 무슨 게임을 얼마나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공개하면서 게임을 하라는 말이다. 게임에만 사용할 아이디가 따로 있다면 좋겠지만, 카카오톡은 한 회선당 아이디가 하나만 발급되니 정 익명으로 카카오 게임의 모든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다면 회선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보통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마 대부분의 밝고 건전하고 올바른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은 게임 속에서 친구를 만나서 말을 걸고 선물을 주고받고 같이 노는 것을 재미나고 반가운 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일상에서 잠시 탈출하는 ‘여행’에 가깝게 생각하므로, ‘혼자서 논다’는 선택지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은 혼자 하는 게 제일이고, 정말 친한 친구들과 하는 게 그다음 아닌가.
사실 메신저와 게임뿐만 아니라 온갖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수많은 관계가 얽히고설키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너도나도 친하게 지내고 묻지 않은 안부를 말해주며 ‘위 아 더 월드’와 ‘러브 앤 피스’를 외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보면 확실히 좋은 일이고 인류의 진화와 평화의 도래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뭐든 아무리 좋대도 별로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빌보 배긴스가 생일파티에서 절대반지를 끼고 사라졌듯이, 나도 가끔은 시공의 저편에서 고독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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