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슬 여름이 오고 있다. 이제 겉옷은 에어컨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때만 입게 되었고, 낮에는 반팔 차림으로 지낸다. 저번 주에는 선풍기를 꺼내서 닦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반팔을 입는 걸 볼 때야말로 여름을 실감할 때다.”라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선풍기를 닦으면서 생각해보니 선풍기를 닦을 때야말로 여름을 실감하게 된다. 선풍기를 닦는다는 건, 이를테면 적의 진군 소식을 듣고 칼을 가는 것과 같다. 적의 진군 소식을 듣고 나서야 칼을 가는 병사가 있다면 잡아다 베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상비품 목록에는 부채가 추가되었다. 벚꽃이 그려져 보는 사람마다 일본에서 사왔느냐고 묻는 물건인데, 사실은 집 앞의 잡화점에서 3000원에 샀다. 참으로 기만적인 부채다. 그건 그렇고, 부채에 벚꽃 그림은 계절착오적이지 않은가? 기회가 된다면 바다나 계곡이 그려진 부채를 사고 싶다.
여름의 필수품으로 손수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땀이 나면 닦아야 하고, 세수를 한 뒤에도 그대로 마르게 놔두는 것보다는 손수건으로 닦는 편이 개운하다. 세수를 한 뒤 휴지로 닦는 사람들도 적잖이 보는데, 가급적 그런 일은 피하고 싶다.
아무튼, 반팔에 부채와 손수건만 있으면 여름도 그럭저럭 버틸만하다.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물에 적신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찬물을 떠다 발을 담그고 부채질을 하며 책을 읽노라면 여름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름에는 아예 방안에 욕조를 놓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당연히, 여름 내내 이거야말로 여름의 정취라고 즐거워할 수는 없다. 틀림없이 앞으로 한 달만 지나면 습기와 폭염에 지쳐, 여름 따위 세상에서 아예 없어져 버리면 좋을 텐데, 하고 투덜거릴 게 분명하다.
예전에 지인들과 계절에 등수를 매겨본 적이 있다. 대체로 정리된 등수는 일단 가을이 최고다. 선선한 데다 온갖 맛 난 것이 나는 수확의 계절이니 당연히 사계절 중 으뜸이다. 그리고 다음이 겨울이었다. 춥긴 하지만 추위는 옷을 입거나 이불을 덮으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가 봄인데, 보통 가을 앞이나 뒤에 오기 마련인 봄이 3위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봄에는 꼴 보기 싫은 것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봄은 시작과 꽃의 계절인데, 시작이래 봤자 딱히 좋은 일도 없고, 꽃이 피면 가족이며 커플이며 너도나도 꽃구경을 다녀 눈이 고생이라는 것인데, 듣고 보면 일리가 있다. 눈 내리는 게 싫어지는 것처럼, 누구나 해가 지나고 내 것이 아닌 행복이 지천으로 깔리는 게 피곤해지는 시기가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름이 꼴지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여름은 입에 담기도 힘든 저질 계절’이라고도 했는데, 더위와 습기와 땀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름은 노출의 계절이라 좋다는 친구도 있긴 했지만, ‘동일한 노출을 접할 때, 겨울의 두꺼운 코드 속에서 드러나는 쪽이 훨씬 자극적’이라는 말에 논파 당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럴 일이 있을 턱이 없지만.
여름이 이토록 고역스럽고 인기가 없는 것은 역시 열을 보존하는 데 비해 열을 방출하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리라. 간단히 말해서 추우면 옷을 입고 난로를 틀면 그만이지만, 덥다고 옷을 다 벗을 수도 없고 벗어도 딱히 시원해지지 않는다. 부채와 선풍기가 퍽 훌륭한 도구이긴 하지만, 공간 자체의 열을 방출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래서 에어컨이 발명되긴 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열의 방출이란 상당히 비효율적인 짓이라, 여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요는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어컨은 항상 거실 한켠에 선조들이 남긴 유적이나 외계인이 남긴 모노리스처럼 서서, 원래 수행해야 할 기능보다 정신적 위안을 주는데 주력하기 마련이다. '지상에 불지옥이 펼쳐지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에게는 에어컨이 있지’하는 위안인데, 보통 불지옥은 여간해서 펼쳐지지 않는 법이고, 애초에 불지옥이란 가내의 통수권자나 자금사정이 규정하기 마련이라 에어컨도 작동될 일이 없다. 어쩌면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는 게 나은 것처럼, 에어컨도 작동되지 않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판타지 세계에는 여름을 어떻게 보낼까? 설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범하게 부채질을 하고 계곡 물에 몸을 담글 수도 있을 것이고, 신비하고 편리한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키거나 온도를 낮출 수도 있을 것이고, 드워프가 만들어낸 선풍기나 에어컨 비슷한 물건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야기에 엘프가 나온다면 엘프 아가씨가 드러낸 뽀얀 살결에 주인공이 시선을 빼앗길 법도 하다.
그런데 먼 옛날에 <<던전즈 앤 드래곤즈>> 자료집에서 읽은 바에 따르자면, 거기에는 '어두운 불’이라는 게 있단다. 이 불은 일반적인 불과 완전히 반대 개념이라, 빛과 열을 빨아들여 가까이 갈수록 춥고 어두워지며, 불꽃은 타오르는 어둠으로 보인다. 열역학적으로 보면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판타지는 마법의 세계고, 마법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굳이 따질 필요는 없으리라. 아무튼, 무더운 여름에 어두운 불을 피워놓고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와 호빗들이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면 그것만으로 퍽 시원하고 재미있다. 현실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이치를 초월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으니 올여름도 선풍기를 틀어놓고 인간끼리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 정도로 참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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