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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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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예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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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군대가 없듯이 가고 싶은 예비군도 없겠지만, 군대를 가기 싫게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회와의 격리’인 데 비해 고작 하루 가는 예비군을 가기 싫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는 ‘고독’이 아닐까 생각한다.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는 것 자체부터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고 안보 교육은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훈련은 귀찮고 피곤하지만, 같이 가서 투덜거릴 친구라도 하나 있으면 그나마 버틸 만은 한 것이다. 
학교에서 받는 학생 예비군은 그런 점에서 좋았다. 반을 과와 이름별로 나누고 나면 지인 중에 이름이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결국 혼자가 되긴 하지만, 훈련이 끝나고 학교에 도착해서 다 같이 투덜거리며 맥주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살 만했다. 게다가 같은 학교의 같은 과가 모이니까,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잡담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 분위기도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단위로 모이는 훈련은 놀라울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만 모이니까 정반대다.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없이 모여서 버스를 타고, 미라처럼 잠들었다가 훈련장에 도착하면 조용히 깨어나 버스에서 내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담배를 피운다. 총과 탄띠와 방탄모를 받을 때도 조용하고, 연병장에 앉아서도 태양 빛을 증오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으며, 실내교육이 시작되면 대다수가 관 속에 누운 뱀파이어처럼 의식을 잃고, 야외 훈련에서는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대답하고 움직이고 중간중간 담배를 피운다. 그야말로 침묵의 군대다. 네크로맨서가 방금 무덤에서 끄집어낸 좀비 군단도 이보다는 활기찰 것 같다. 이영도님의 소설 “퓨처워커”에 나오는 데스나이트들은 지역 예비군에 비하면 노래도 하고 화도 내고 기뻐하기도 하는, 여고생처럼 감정 풍부한 존재다.
고작 하루짜리 훈련에 재미난 대화나 뜨거운 전우애가 필요하지는 않겠지만-어쩌면 오히려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사고로 시공의 저편에 끌려온 것처럼 고독하게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씁쓸하다. 이 영화는 인간이 약물을 이용해 감정을 제거해버린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데, 완벽히 똑같은 옷을 입고 말없이 전투기술을 익히는 모습은 영화 이상의 디스토피아다. 
서양인들을 모아놓았다면 흔히 비행기 옆자리 사람과 떠들듯이 몇 명은 재치있는 농담도 하고 복무 중에 있었던 일을 자랑하기도 할 법하다고 생각하니, '개인보다는 집단을 생각하고 개체보다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인의 사고방식’ 어쩌고 하는 소리가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허황된가 싶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영국 남자가 단둘이 무인도에 떨어지면 소개해 줄 사람이 없어서 대화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는데, 한국 남자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제는 사수의 사격이 끝나고 표적지를 떼어다 주는데, 총구멍 여섯 발이 거의 붙어있고 나머지도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잘 쏘신 것 같은데요.”하고 말해봤지만 ,사수는 표적지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수가 퇴장하고 내가 사수가 되어 사격했다. 애초에 총이 익숙하지 않지만 카빈을 쏴보는 건 처음이라 더 익숙지 않았다. M16보다 반동이 심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 발을 쏠 때마다 뿌옇게 보이는 표적지를 다시 조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사수가 말없이 가져다준 표적지를 보니 단 네 발만이 모여있었고, 나머지는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나는 말없이 퇴장해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나머지 훈련을 받았다. 분대장이었지만 그 날 내가 한 나머지 말은 상황 보고와 명령 하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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