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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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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낙원 술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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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까지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는데, 유교가 들어오면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퍼져서 차를 마시는 문화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그렇다고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은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한국의 ‘술자리’ 문화에만은 그리 정이 가지 않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자리라면 다 ‘술자리’이긴 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술자리’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친해지려고 술을 마셔대는 자리다. 대학 때부터 사람들은 항상 그런 자리가 없으면 사람들이 절대 친해질 수 없다고 믿는 것처럼 술자리를 만들어왔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남이 원치 않는 술을 강제로 먹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놓고 마시라고 하지 않아도 잔이 비었다고 채워주고 짠, 하자고 건배를 해대는 것도 술을 억지로 먹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개인의 자유의지는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즐거워 보이니 ‘문화’라는 미명하에 계속 유지되는 모양이다. 

이런 식의 술자리가 사람들을 친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일단 다같이 취해서 제정신을 잃어가는 꼴은 보고 있으면 퍽 재미있기도 하고, 그러다 누군가는 서로 눈이 맞기도 한다. 알콜이 부리는 신비한 마법이라면 마법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나도 꽤 즐기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친해지는 것은 사실 약물로 사리판단을 흐리고 마음의 벽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라, 정말 친해지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 감이 있다. 전혀 친해지지 않았느냐면 그건 또 아니긴 하지만... 이를테면 얘기도 얼마 나누지 않은 남녀가 어쩌다 키스부터 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로맨틱하고 좋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애든 다른 인간관계든 순서대로 나아가는 게 마음 편하고 좋다. 

고차원적인 얘기를 떠나더라도, 당장 그런 자리에서 마시는 술은 소주든 맥주든 맛도 없는 데다가, 마시다 보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나는 과음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토하고 마는데, 이게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니다. 게다가 대학 때 식도염으로 한참 고생한 적도 있어서, 토하고 나면 또 그런 고생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술도 탄산도 단 것도 짠 것도 기름진 것도 매운 것도 먹을 수 없는 기간은 평생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런 반면에 차를 마시는 자리는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전쟁 중의 지하대피소처럼 어두운 대신, 모델하우스처럼 밝고 깔끔한 공간에서, 악착같이 뭔가를 먹거나 마셔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커피나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편안히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술을 마셔야만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고 친해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술 게임을 하거나 끊임없이 건배를 해대는 자리보다는 이렇게 차를 마시는 자리가 훨씬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만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셔서는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말이다. 

요즘은 다들 겉멋이 들어 값비싼 카페만 늘어나고 있다고들 하고, 나도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술집이 늘어나는 것보다는 낫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다들 고생했는데 커피나 한잔 하지?’라고 말하는 상사나, '꽃도 피고 날도 좋은데 나가서 차나 마실까?' 하는 교수도 생겨나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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