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은 의식적으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 깨어있는 시간의 태반을 앉아서 보내는 데다가 영양 공급은 과하게 하니, 억지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살이 찌고 근육은 퇴화한다. 하지만 오늘부터 정말 운동뿐이야, 하고 운동을 시작해도, 사실 운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귀찮고 괴로운 것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동기부여를 하지 않으면 장기간 지속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운동을 하면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 왜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인가 하면, 일단 내가 애니메이션을 이것저것 챙겨보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시간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본편이 약 20분 정도인데 중간에 한 번 잘라주기까지 하니 중간에 쉬기도 좋다.
이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일단 육체적인 변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온갖 볼 거리 중 운동을 하면서 볼만한 것을 따로 골라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보자면 뭐든 못 볼 거야 없지만, 적어도 배꼽이 빠지게 웃긴 것은 운동하다 말고 힘이 빠져서 안 된다. 같은 이유로 보고 있자면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도 곤란하다. 보고있자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로맨스도 팔굽혀펴기나 윗몸 일으키기 따위를 하며 보기에는 영 어색하다. 몹시 진지하거나 내용이 복잡한 것도 운동에 집중할 수 없어서 피한다.
그렇게 이것저것 빼다 보면 결국은 그다지 재미없는 것들만 남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것들을 “운동용 영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별 재미도 없는 것들을 굳이 봐야하나 싶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예능이든 뭐든 세상에는 딱히 보고 싶지는 않지만 봐둘 필요가 있는 것, 봐서 나쁠 거야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교지 같은 것 말이다. 교지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다 읽고 나면 다음 편이 언제 나오나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읽어서 해가 될 것은 없다. 오히려 도움이 되는 편이다.
그런 “운동용 영상”을 운동할 때 보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일단 의무감이나 특정 목적 때문에 봐야 하는 영상을 해치울 수 있고, 또 그런 영상을 그냥 보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운동을 하게 된다. 한때는 정말 재미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틀어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재미난 것이라면 앉아서 차분히 보고 싶어지기 마련이라 효과가 좋지 않았다. 정말 “이런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다니, 나도 참 시간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군.”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한심한 영상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고 하면 좀 심한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달갑지 않은 일 두 가지를 동시에 처리하면 신기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서, 운동도 감상도 그렇게까지 괴롭지 않게 된다. 양쪽 모두 그 자체를 넘어선 목적과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즘은 그런 “그저 그런” 작품을 만나면 반가움이 앞서는데, 그렇게 반가운 것들이 많은 분기는 흉작이라는 뜻이라 마음이 복잡하고, 풍작인 분기에는 운동용 영상이 줄어들어 마음이 복잡하다. 한편으로 보던 작품이 영 그저 그렇게 전개되면 운동하며 봐도 되겠다고 안심하고, 운동하며 보던 작품이 흥미진진해지면 더 이상 운동하며 볼 수 없게 되어 섭섭하다.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이 복잡해진 것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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