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우 거대한 박스. 확장팩 꽂을 자리와 세이브 슬롯까지 마련되어 있다)
기본 시스템
패스파인더 어드벤처(이하 패스파인더)는 유명 TRPG 패스파인더를 기반으로 제작된 카드게임으로, 기존의 게임들과는 차별되는 시스템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차별적 시스템의 혁신성이란 가히 도미니언이 처음 선보인 덱빌딩 개념과 견줄만한데, 그 내용이란 바로 "게임이 저장된다"는 것입니다. 피씨, 콘솔 게임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진행상황을 기록해가는 TRPG에 있어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각 플레이가 개별적으로 완결되는게 당연한 보드게임에서는 놀라운 시도라고 할만합니다. (할 수록 게임이 변화하는 시도가 리스크에서도 있긴 했습니다)
패스파인더에서는 각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태가 하나의 덱으로 표현됩니다. 무기, 방어구, 아이템, 마법, NPC 동료 등이 모두 개인덱에 들어있고, 캐릭터의 특성은 힘, 지능, 지혜, 민첩성, 건강, 매력 수치 이외에 이 덱의 카드 구성으로 표현되는데, 시나리오를 진행하다보면 카드를 획득하게 되고, 한 시나리오를 끝내면 이렇게 얻은 카드까지 사용하여 덱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덱과 구성하는 카드의 숫자가 정해져있기 때문에 카드가 무작정 늘어나지는 않지만, 게임을 여러번 하면 시나리오 클리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덱은 확실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렇게 수정한 덱은 그대로 "슬롯"에 저장한 뒤 다음 게임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자신의 고유한 캐릭터를 키워나가는 TRPG의 시스템을 "덱빌딩" 형식으로 구현한 셈인데, 이 발상에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임 준비
게임의 근간이 되는 이 시스템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무작위적인 조우와 판정, 즉석 덱빌딩이 반복되는 협력 게임이었습니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기 앞서 시나리오를 클리어할지, 아니면 다수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어드벤처를 클리어할 지, 아니면 다수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어드벤처 패스를 클리어할지 결정합니다. 클리어해야 할 시나리오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보상도 좋은 것인데, 작게는 아이템 덱에서 랜덤으로 한 장부터, 캐릭터에 기술을 부여하거나 덱 장수를 늘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뭘 선택하든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 것은 동일한데, 시나리오 카드에는 등장하는 빌런(악당), 추종자, 장소가 적혀있고, 장소 카드들을 꺼내면 여기에는 몬스터가 몇인지, 장애물은 몇인지, 아이템, 동료, 축복 등은 몇인지가 적혀있습니다. 그러면 이에 맞추어 열심히 각 덱을 섞고 표기된 구성에 알맞게 각 장소 덱을 랜덤으로 생성합니다. 앞서 꺼낸 빌런과 추종자들은 총 장수가 장소의 개수와 동일한데, 이를 섞어 랜덤으로 각 장소에 섞어 넣습니다. 즉, 빌런을 잡아야 끝나는데 빌런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모르는 채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죠.

(플레이어들이 폐쇄해야 하는 장소들. 각각 내용과 효과가 다르다)
게임 진행
그렇게 게임을 시작하면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덱을 섞어 정해진 핸드 수만큼의 카드를 손에 든 채, 캐릭터의 시작 장소를 고르고 게임을 진행합니다.

(초기 핸드에 이렇게 여러번 쓸 무기가 없으면 누구에게 받든지 열심히 덱을 돌려야 한다)
축복 덱 진행
자신의 턴이 시작되면 우선 축복 덱에서 한 장을 버립니다. 이것은 30장으로 구성된 덱인데, 시나리오의 타이머 역할을 합니다. 덱이 다 떨어질 때까지 클리어하지 못하면 자동 실패하는 것이죠. 그리고 기본 카드 중 이렇게 버려진 카드 맨 윗장과 동일하게 쓸 수 있는 축복 카드가 있어서 간혹 요긴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카드 건네기
그 뒤 같은 장소에 있는 캐릭터에게 카드 한 장을 줄 수 있습니다. 캐릭터간 특성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 행동을 통해 그때그때 필요한 장비를 지원해 줄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손에 무기가 없으면 당연히 탐험하기가 곤란한데, 이럴 때 다른 플레이어가 남는 무기를 줄 수 있겠죠.
탐험
그 뒤 탐험을 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이 게임에서 하는 가장 주요한 행동인데, 단순히 자신이 있는 장소 덱의 맨 윗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카드는 얻을 수 있는 물건이거나 해악으로 분류됩니다.

(마법은 마법사가 아닌 캐릭터가 얻어봐야 보통 한 번 쓰고 버리게 된다)
판정
얻을 수 있는 카드-축복, 동료, 무기, 방어구, 아이템 등 이라면 그 카드를 얻기 위한 체크를 합니다. 체크를 할 능력치가 있고, 넘겨야 할 목표치가 있어서 능력에 따라 주사위를 굴려 달성하면 손에 넣고, 아니라면 박스로 되돌립니다. 모험에서 NPC를 만나 매력으로 설득하거나, 새로운 무기를 발견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 힘 체크를 하는 등의 상황이죠.
해악이라면 이것을 퇴치할 수 있는가 판정하게 됩니다. 체크 방법은 위와 마찬가지입니다. 함정이 나와서 해체 시도를 하거나, 몬스터와 조우해서 전투를 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데, 만일 몬스터라면 판정에 실패했을 때 목표치와의 차만큼 피해를 입습니다. 즉, 12가 나와야 하는데 10이 나왔다면 2의 피해를 입습니다. RPG게임이니 피해라면 당연히 HP개념이 있을 것 같은데, 독특하게도 손에서 카드를 버리는 방식입니다. 이게 당장 플레이어를 리타이어시키는 피해가 되지는 않지만, 딱 잘 맞게 나온 무기, 마법 등을 버리면 당장 게임이 어려워집니다. 많은 게임에서 HP가 10이든 1이든 멀쩡히 진행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전투로 무기와 방어구가 파손되는 상황을 구현하고 있어 현실감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다만 이렇게 해악을 물리침으로써 보상을 얻게되어 있지는 않아 좀 아쉽긴 합니다. 몬스터를 물리치고 아이템을 얻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신나는 일인데, 이 부분은 몬스터를 지혜롭게 피해갈 수도 있는 TRPG의 맥락을 따른 것 같습니다.

(무기는 보통 공개하는 것만으로 쓸 수 있다)
추종자와 장소 폐쇄
탐험을 하다 “추종자”를 만나 물리치는 데 성공하면, 혹은 장소 덱을 모두 해결하면 "장소 폐쇄"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컴호러에서 게이트 닫는 것과 비슷한 느낌도 드는데, 폐쇄 방식은 장소에 따라 다릅니다. 카드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고, 판정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빌런
그런데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걸어나오는 아컴호러도 아닌데, 어째서 장소를 폐쇄해야 하는가, 이것은 “빌런”이 “도주”라는 성가신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빌런을 만나면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전투 판정을 하는데, 이때 다른 장소들이 열려있으면 이기든 지든 어딘가로 도망칩니다. 축복 카드와 빌런을 섞은 뒤 각 장소 덱에 섞어넣는 것이죠. 그러면 플레이어들은 또다시 이 악당을 찾아 각지를 탐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한참 시간이 지나겠죠. 물론 이때 장소 임시 폐쇄를 시도할 수 있어서 빌런이 도망칠 장소의 범위를 좁힐 수는 있습니다. 또, 지면 축복 덱을 깎아먹고, 이기면 장소가 폐쇄되므로, 가급적 임시폐쇄를 하고 이기는 게 좋겠죠. 만약 빌런이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면, 빌런을 쓰러트리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합니다.
장소 폐쇄
탐험을 한 뒤 자기 장소에 카드가 없다면 폐쇄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폐쇄에 관한 내용은 위에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핸드 리셋과 사망
손에서 원하는 만큼 카드를 버리고, 캐릭터의 핸드 사이즈에 맞춰 자기 덱에서 카드를 뽑습니다. 그리고 카드를 뽑을 수 없다면 그 캐릭터는 사망합니다. 즉, 소모품을 써버리거나, 피해를 입어서 손에 든 카드가 줄어들었다면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죠. 말하자면 "모험가가 죽는 것은 HP가 다 떨어졌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모험 수단을 써버렸을 때"라는 시스템인 셈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캐릭터가 죽으면 그 캐릭터는 정말 죽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장비를 떨어뜨리고 죽어 없어집니다. 플레이어는 다음 시나리오를 시작할 때 새 캐릭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게임 자체가 다른 TRPG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여기선 융통성을 발휘할 마스터가 없으니까 캐릭터가 얄짤없이 죽어버립니다. 콘솔 게임으로 치면 항상 하드코어인 셈이죠.
게임을 처음 해보면 설마 죽을 일이야 있겠어? 싶지만 기본 덱이 15장이고 이 중 5장쯤은 초기 핸드로 들고 시작하므로 사실상 HP는 10입니다. 핸드가 두 번 바뀌면 끝입니다. 죽음의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더군요.
감상
텍스트 기반과 덱 빌딩의 보장된 재미
텍스트 기반 게임답게 카드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재미가 퍽 훌륭한데, RPG면서 덱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무엇을 언제 쓰면 좋을지 선택하는 묘미도 있어 그 재미가 배가됩니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굴려 10을 넘겨야 하는 몬스터를 만났는데, 자기가 가진 무기의 기본 공격력은 12면체입니다. 하지만 카드를 한 장 덱 아래 넣으면 6면체를 추가하고, 덱 아래 넣는 대신 버리면 6면체를 또 더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축복 카드를 한 장 버릴 때마다 결과에 1을 더할 수 있습니다. 드워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4면체를 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투자해야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을까요?
또 모험중에 훌륭한 NPC를 만나서 동료로 맞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힘으로 대결을 해서 이겨야만 동료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손에 있는 빠루를 쓰는 게 좋을까요? 이런 “선택과 집중”, 그리고 능력 활용의 재미가 뛰어납니다.
게다가 카드를 얻으면 앞으로 이 게임을 하는 내내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탐험을 하다 새로운 아이템, 동료, 주문 등이 나오면 그것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얻으면 열광하고, 실패하면 낙심합니다. 이러한 희로애락이 플레이어의 표정을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위기감의 부족
게임 한 판 한 판의 재미는 사실 마찬가지로 TRPG에서 파생된 게임 D&D 어드벤처 시리즈에 비해 덜한 감이 있습니다. 디앤디의 경우 위치에 따라 누가 어떤 역할을 할지 쉴 새 없이 논의하게 되는 반면에 패스파인더는 각 장소가 개별적으로 나뉘어 있어서 각자 특화된 능력에 맞는 방향으로 가버리고 나면 서로 논의해서 도울 일이 적은 편입니다. 돕는데 특화된 캐릭터나 카드도 상당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체로 자기 일을 묵묵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몬스터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도 카드가 섞여버리므로 즉시 도울 수가 없습니다. 가서 또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하죠. 즉, 디앤디가 하루의 던전 크라울링을 다룬 미시모험이라면 패스파인더는 몇 번의 TRPG 세션 내용을 압축한 거시모험인 셈입니다. “맙소사, 저기 언덕 거인이 있어!”가 아니라, “이 산에 언덕 거인이 출몰한다던데…” 라고 하면 어떤 느낌인지 전달될 지 모르겠군요.
위기가 등장했다가도 섞여버린다는 이 시스템은 결정적으로 몰입감을 주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같은 문제는 같은 카드+주사위+협력 게임인 “엘더싸인”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엘더싸인에는 항상 기본적인 위험이 공개되어 있고, 이것을 해결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위기가 명백합니다. 주사위가 줄어들고 정신력과 체력이 깎이며, 몬스터가 출몰하고, 시간을 넘기면 “고대신"이라는 궁극적인 위기가 발생합니다. 이런 각각의 위험요소를 평가하고 역할과 순서를 정해서 해결해나가는 것이 바로 엘더싸인의 재미의 근간이고, 이것은 그동안 등장한 다른 협력 게임에서도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그런 반면 패스파인더에서는 순간 위험했다가도 그 위험이 숨어버려, 얽혀가는 위험을 하나씩 풀어가는 재미나, 위험을 푸는 데 실패해 상황이 눈에 띄게 악화되는 긴장감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물론, 각 장소덱이 그렇게 두꺼운 것도 아니고, 후반에 접어들면 덱이 줄어들어 어디에 어떤 위기가 있는지 또렷해져서 누가 어디에 가고 무엇을 담당하는 게 좋을지 결정하는 재미도 긴장감도 높아집니다만, 플레이어가 꼭 탐험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나리오에 실패한다고 무슨 페널티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다소 아쉽습니다. 이 문제는 추후 확장에서 플레이에 남아 지속적인 압박을 주는 카드가 추가되거나, 시나리오 실패에 따른 페널티가 추가되어 해결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반드시 탐험을 해야 하고, 캐릭터가 사망하면 베이직 아이템을 제외한 나머지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추종자나 빌런을 만나 장소를 얼마나 빨리 닫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바뀌는 경향이 있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
패스파인더가 굉장한 게임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할 수록 재미있어진다는 것이죠. 할 때마다 새로운 장비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고, 캐릭터를 점점 강하게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모험을 끝내고 노획한 물건들을 펼쳐놓은 뒤 동료들과 교환하고 다음 모험을 위해 짐을 꾸리는, 판타지 세계에서 가장 느긋하고 행복한 시간을 이 게임은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템이나 능력을 얻고 그것을 시험하러 나갈 때처럼 가슴뛰는 순간이 있을까요.
확장팩으로 게임에서 즐길 수 있는 요소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 역시 매력적입니다. 확장판을 추가할 때마다 새로운 시나리오와 아이템이 생기죠. 마치 DLC와도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확장을 자꾸 사게 만드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패스파인더에서는 굉장한 메리트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출발이 TRPG였던 디앤디 어드벤처는 피규어와 맵이 들어가는 구성품 특성상 시나리오 공급이 어려웠는데, 카드만으로 구성된 패스파인더는 저렴한 값에 새 시나리오와 새 아이템에 대한 엄청난 기대감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게임을 진행해보면 다른 플레이어를 돕고, 덱을 보는 등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점점 많아진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확장팩이 게임의 단점을 보완하고 양상 자체를 바꿀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결론적으로 패스파인더는 협력게임으로서는 좀 아쉬운 감이 있지만 플레이어와 함께 게임의 재미 자체도 성장하는 놀라운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만나서 많은 게임을 돌려보는 보드게이머들에게는 맞지 않겠지만 고정 멤버와 같은 게임을 여러 번 즐기는 파티라면 몇 번이고 더 하고 싶어질 겁니다. 콘셉트가 똑같은 만큼 콘솔 게임 “드래곤즈 크라운”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퍽 재미있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tag : 보드게임, 패스파인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