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해야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지 법도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새벽이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성교하는 시간이라고 하니,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크리스마스는 연인과 함께 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홀로 맞는 크리스마스를 한탄하고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멀리 있는 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면 시차로 크리스마스를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는 연구를 하며 총폭탄 정신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는 걸 보면,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내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행복관이 만연하고 사람들이 여기에 입각하여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행태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예가 아닐까.
각설하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나는 그동안 얼마나 행복했나 싶어, 요 10년간 이브와 크리스마스에 적은 일기를 뒤적여봤는데, 즐거운 날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너무나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기록은 없었다. 평균을 내면 10점 만점의 6점 정도가 아닐까 싶다.
가령 2005년 이브에는 친구들과 모여서 다른 친구가 알바를 하고 있는 노래방에 갔다가, 또 다른 친구가 알바를 하고 있는 PC방에 갔다가, 놀이터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셨는데, 속이 영 좋지 않아 모조리 토하고 말았다. 토하는 동안 친구가 등을 두드리며 캐럴을 틀어줬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한편, 다음날은 친구 집에 모여 러브 액추얼리를 보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검호 2를 하고, 보드게임을 두어 개 했으며, 저녁으로 친구 어머님께서 사다 주신 치킨에 맥주를 마셨다. 지금껏 보낸 크리스마스 중에서 가장 후회 없는 날을 뽑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날을 뽑겠다. 연인과 보낸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어떤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고,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보낸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작작 마실 걸" 같은 후회가 남았는데, 이날은 그야말로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러브 액추얼리를 보며 시시덕거리고, 적당히 보드게임 두어 판을 하고,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이게 뭐냐고 한탄하며 치킨에 맥주를 마셨다. 친구 어머님이 계셨고 나중에 아버님도 오셨지만, 그 분들은 "애들 노는 데 어른이 끼면 불편하겠지." 하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지 다 같이 모여 앉아 치킨을 뜯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흔히 이웃사촌이라고 하지만 그런 이웃사촌이 없었다. 장난처럼 신세 한탄을 했지만 사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남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어서, 그리고 사귀는 사람이 없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완벽히 퇴색해버렸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제외한 누구의 행복도 애써 추구할 필요가 없고, 남의 행복을 보면서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는다. 공부나 노동을 하는 대신 재미있는 영화나 한 편 보고, 치킨이나 뜯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이건 매주 돌아오는 휴일과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결국, 이제 와서 내가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의 행복이란 멀리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모여서 마음편히 영화나 보고 게임이나 하면서 놀든지, 다른 휴일과 똑같이 보내는 것이다. 모두가 가장 특별하게 여기는 날을 가장 평범하게 보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내 성격이 비뚤어진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내가 모든 휴일은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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