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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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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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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동아리방은 노천 극장 지하에 있어서, 정전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암흑이 찾아왔는데, 어째서인지 정전이 잦은 편이라 갑자기 정전이 되어도 침착하게 술을 사다 촛불을 켜고 마셨다. 누구한테 마시자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마시고 있으면 오는 사람마다 와서 술을 청하곤 했다. 흐릿하게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마시는 술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가끔은 무서운 얘기도 했다. 밖으로 나가면 멀쩡한 대낮이지만, 무서운 얘기는 어두우면 일단 분위기가 사는 법이라 퍽 즐거웠다. 그러다 불이 들어왔는데도 일부러 선풍기만 켜고 놀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아리 회원 전체가 정전에 대한 내성이 높아지다 보니 나중에는 정전이 되든 안 되든 대수롭지 않게 보드게임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 번은 형광등만 켜지지 않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한 테이블에서는 손전등을 켜고 카탄과 마작을 즐겼고, 한 테이블에서는 모니터 불빛과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서 던전즈 앤 드래곤즈 보드게임을 했다. 그 날은 본 드래곤을 잡는 시나리오를 했는데, 레골라스를 방불케 하는 레인저의 분전으로 간신히 클리어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까지 게임 속 설정대로 어둠 속에서 손에 든 불빛으로 적의 모습을 비추며 주사위를 던진 그 판은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인상깊은 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전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잔디밭에 앉아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기타치며 노래하는 로망이 있었던 한편, 나에게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술을 마시고 보드게임을 하는 로망이 있었던 셈이다. 마치 엘프와 드워프 같은 차이지만, 어째됐든 즐거우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동아리방이 깔끔한 새 건물로 이사한 뒤로는 정전도 되지 않을뿐더러 창문으로 자연광까지 들어와 그런 음험한 로망을 즐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삶의 질은 훨씬 나아진 셈이지만 오랜 한옥 생활을 끝내고 아파트에서 사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쓸 일이 없는 양초는 내다 버렸다. 더 이상 어둠도 오지 않고 나도 졸업했으니, 대낮부터 그런 사특한 파티가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정전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저께 밤에는 아파트 전체가 정전되었다. 차단기가 내려갔나 싶었는데, 창밖을 보니 우리 아파트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곧 변압기가 터져 수리 중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오랜만의 정전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놀란 것은 정전 그 자체가 아니라 정전이 되었는데도 당장 생활에 별 지장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손전등과 핸드폰 플래쉬를 켜고 빨래를 개키셨고, 아버지는 테더링을 통해 그대로 아이패드를 쓰셨고, 형은 전화를 했으며, 나는 (파티를 벌이는 대신) 공포영화를 보며 운동했다. 물론 정전이 길어진다면 난방이 안 되니 집도 추워지고 가전제품도 못 쓰고 이만저만 불편하지 않겠지만, 당장은 정말 큰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들이 전부 별도의 배터리와 조명을 갖추고 있다 보니 배터리가 남아있는 동안은 일상이 유지되는 셈인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모바일 기기가 생활의 가장 큰 축이 되었나 싶어 놀랍다. 당장 형광등이 꺼지는 것보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꺼지는 게 몇 배나 무섭다. 그러고 보면 일상의 범위란 진지하게 모바일 기기의 배터리 걱정을 하는 시점으로 정의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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