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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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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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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에서 2000으로 넘어갈 때만 해도 숫자가 끔찍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2014년이 되었다. 2014년이라니, 저질스런 농담 같다. 2014라는 숫자에 익숙해지려면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걱정이다.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쓰던 시절에는 해가 넘어갈 때마다 일이 있었다. 일단 서점에서 새로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사야 했는데, 이건 1년의 계획적 생활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상당히 진지하게 공을 들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일기도 손으로 썼으므로 새 일기장도 마련해야 했다. 서점을 돌아다니며 100%의 수첩이나 다이어리나 일기장을 찾는 모험은 퍽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새 수첩, 다이어리, 일기장을 사놓으면 해가 넘어가는 게 좀 기대되기도 했다. 신년이 와야 산 것들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새 수영복을 샀으니 빨리 여름 방학을 했으면 좋겠다는 식이다. 
한편, 그동안 쓴 물건은 한 해가 끝나면 잘 정리해서 박스에 넣어두었다. 정말 옛날에는 서랍에 넣어두었지만, 해를 거듭해서 양이 늘어나자 새 박스를 구해야 했다. 그렇게 다 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정리해서 넣고, 새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첫 글자를 써넣을 때가 되면, 그제서야 새 해를 맞이했다는 실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PDA로 일정 관리를 전산화한 뒤로는 그런 실감이 떨어졌다. 그래서 노트 프로그램에 달력을 그려넣고 진짜 다이어리처럼 사용했는데, 이 방법을 쓰면 해가 지날 때 이 기록을 인쇄해서 박스에 넣을 수 있어서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거기서 좀 더 발전해서 구글 캘린더나 할 일 목록 등을 쓰기 시작한 뒤로는 연말에 딱히 정리하거나 새로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되었다. 그저 낡은 달력을 버리고 새로 받은 달력을 놓을 뿐, 어제나 오늘이나 딱히 달라질 게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새해가 오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나저나 올해는, 아니 작년 말과 올해 초에는 해가 넘어가는 것을 실감한 만한 일이 있었다. 독서 기록을 하던 앱을 더 좋은 앱으로 옮겨 통계를 낸 것이다. 그 결과, 만화와 교재를 제외한 책은 51권을 읽은 것을 확인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충 일주일에 한 권은 읽은 셈이다. 입으로는 바쁘다고 징징거리면서도 몸은 정직하게 책을 읽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얼마나 더 읽었나 궁금한데, 독서에 대해 제대로 기록하기 시작한 게 재작년 말이라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가 없다. 일기는 꼬박꼬박 적으면서 왜 독서 노트는 기록하지 않았나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독서 노트 앱을 정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디지털이 멋은 없을지 몰라도 편리한 것만은 사실이다. 데이터를 새 앱으로 하나하나 옮기는 것은 이만저만 귀찮은 일이 아니었지만, 그 양에 비하면 큰 고생하지 않은 셈이다. 카메라로 바코드를 읽기만 하면 책에 관한 정보는 저절로 입력되니까 내가 할 일은 날짜와 별점을 기록하는 것 뿐이다. 그런 뒤에 통계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손으로 독후감을 쓰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결국 아날로그나 디지털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인데, 해나 달이 넘어갈 때 기기의 테마 변경을 권해주는 앱이나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어떨까. 만든 지 몇 달이 지났으니 암호를 변경하라는 메시지는 지긋지긋하게 여기지만, 새 테마를 권하는 메시지라면 "새해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군"하고 선뜻 따를지도 모른다. 날짜가 바뀌었다고 새로 뭘 하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디지털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새해에 새해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밤을 새워서 어제가 계속 이어지는 기분을 느끼듯이 개운치 않다. 그럴 때 매일 쳐다보는 기기가 달라 보이면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이 되리라. 어쨌든 사람이 사는 데 뭔가를 정리하고 넘어가는 타이밍은 꼭 필요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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