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날이 더우면 맥주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맥주 딱 한 캔을 마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맥주 한 캔에도 비용이 필요하고, 마실 시간과 장소가 요구되며, 그것을 마심으로써 책임이 발생한다. 물론 맥주 한 캔 정도야 아무 편의점에서 사다 길거리에서 마셔도 누가 뭐라고 하진 않지만, 맥주 한 캔이라도 마시고 나서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하는 기분을 만끽하려면 이런저런 조건이 충족돼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귀갓길에 맥주를 마시고 싶어 눈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맥주가 아니라 칵테일이라도 좋으니 어디서 단 30분만 앉아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들어가서 조용히 쉴 수 있는 술집이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좋은 맥줏집이 조용할 턱이 없으니 바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집 근처의 바를 몇 군데나 가봤는데, 대체로 문 앞까지만 갔는데도 시끄러워서 포기해야 했다. 한 군데는 조용하고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와서 딱 좋구나 싶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게다가 그 음악은 내 아이패드가 오작동해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지하철에서부터 그랬다면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지하에 있는 바였는데, 문 앞까지 가보니 퍽 조용한 게 마음에 들었다. 큰마음을 먹고 들어갔다. 그리 넓진 않았는데, 중년의 남성 두 명만 바 앞에 앉아 바텐더와 잡담을 하고 있었다. 맨 끝자리에 앉자 진한 화장에 어깨가 깊게 파인 옷을 입은 바텐더가 와서 메뉴와 안주 한 접시를 내밀었다. 아무튼, 조용하긴 했으니까, 나는 누가 어떻게 생각한들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가리라고 생각하며 메뉴를 펼쳤다.
그런데 메뉴판을 아무리 뒤적여도 칵테일이 보이지 않았다. 묻자니, 칵테일 바가 아니라 칵테일은 없단다. 조용히 술을 마시고 싶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주를 마실 수는 없었으니까 사과하고 부리나케 도망쳐 나왔다. 안주에 손을 대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주를 하나라도 집어 먹었다면 저승에 간 페르세포네처럼 그곳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라고 기본적으로 칵테일을 하는 것은 아니며, 요즘은 칵테일은 없고 양주와 잡담을 주로 제공하는 "모던 바"라는 것이 늘어났단다. 삶에 지친 중년이 가는 곳인지, 아니면 소주에 들뜬 중년이 가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내가 갈 곳은 아니었다.
결국,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다 그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마시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마신 맥주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맛있지 않았다. 원치 않는 자리에 끼어서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술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옆에 버려진 과자 봉지 안에 남은 과자를 보며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나는 맥주 한 캔이라도 괜찮은 환경이 뒷받침해줘야 제맛이 나는구나 싶었다. 예를 들자면, 무더위 속에서 힘든 일 하나를 끝마친 뒤, 아니면 재미있고 신 나는 영화를 볼 때, 혹은 운동하고 씻은 뒤나 놀이공원에서 놀다 지쳤을 때가 딱 좋다. 이 중에서 특히 놀이공원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한데, 근심 걱정이라고는 다리 아픈 것밖에 없는 상태에서 완벽히 머리를 비우고 눈치 볼 것 없이 마시는 낮술이기 때문이다. 비용은 잊어버렸고, 장소는 제공되었으며, 책임 같은 것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야말로 꿈과 환상의 세계다. 맥주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이상과는 정반대로, 요즘은 맥주 한 캔조차 제대로 즐기는 게 쉽지 않다. 다른 게 충족되어도 꼭 뭔가 하나가 모자라다. 뭐든 그렇지만 맥주도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마셔두는 게 좋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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