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괴수의 침략에 맞서서 거대 로봇을 만들어 싸운다는 내용의 영화를 길예르모 감독이 만든다니, 이걸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영화의 콘셉트만 듣고도 기대에 가득 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개봉을 해서 드디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더군요.
일부러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일단 스토리가 너무 심심했습니다. 괴수가 등장하고, 이것을 무찌를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고난이 생기고, 이것을 극복하는 한편으로 이런 류에서 흔히 나오기 마련인 박사가 열심히 연구한 끝에 괴수들의 비밀을 밝혀, 그 비밀을 공략하여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온다는 전형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고난'과 '비밀'이 별 대단할 것 없이 넘어가는 통에 스토리에서 박진감을 느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지' 싶은 부분에서는 오마쥬의 재미가 아니라 진부함이 느껴졌습니다. 길예르모 감독의 예전 작품 중에 인간이 해충을 없애기 위해 풀어놓은 유전자 조작 생물이 진화하여 인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의 "미믹"이 있는데, 괴수를 다루는 방식은 거기서 크게 발전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거대 로봇과 동기화하면서 서로의 과거를 알게되고 트라우마까지 공유한다는 설정은 볼만한 성장 드라마를 뽑아내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드라마와 볼거리를 다루느라 그랬는지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막상 중요할 때는 나오지 않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런 반면에 볼거리만은 확실히 충실했습니다.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거대 괴수, 거대 로봇물 답게 이런 막대한 에너지를 가진 덩어리들이 싸우는 무게감 하나는 굉장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항상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탓에 때때로 누가 나와서 누굴 어떻게 때린건지 헷갈리는 장면도 많았고, 대체 왜 저 따위로만 싸워야 하는가 답답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작중에 플라즈마 캐논이라는 유용한 무기가 기본 장비로 등장하는데, 보는 내내 '왜 저 좋은 걸 더 크게 만들어서 안전하게 장거리에서 저격하지 않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더군요. 물론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애초에 인간형 로봇을 만들어 싸우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므로 이런 류의 의문은 굉장히 매너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중에서 어떤 무기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것을 봐도 '화랑' 하면 '담배' 하고 넘어가듯 로봇만화에서 흔히 관례적으로 준비해두고 사용하는 변명조차 할 생각(또는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컷 한심하게 싸우다 나중에서야 어떤 무기를 사용하면, 일반적인 로봇 만화에서는 '드디어 완성됐다, 받아라!'라거나 '한 번도 테스트 해보지 않았다', 혹은 '탄 수에 제한이 있다', '파일럿에게 심한 부담이 간다' 등의 변명거리를 던져주기 마련인데, 퍼시픽 림에서는 이 역시 언급 없이 지나가서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퍼시픽 림은 일본에서 유행했던 추억의 소재들을 가져다 헐리웃 영화의 흔한 틀에 집어넣은 작품이었다는 게 제 감상입니다. 때문에 영상적으로는 굉장히 볼만했고, 로켓 펀치나 브레스트 파이어 등의 오마쥬 역시 꽤 멋있게 나왔지만, 개인적인 기대와는 달리 이러한 소재가 빛을 발했던 "정수"는 별로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로봇물을 보고 자란 저는 "로봇물" 하면 떠오르는 연출이나 전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필살기를 쓰는 것부터,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믿는 일을 주인공이 죽을 힘을 다해 해내고 마는 장면, 계기판의 게이지가 가득차는 장면,
복잡한 톱니바퀴와 실린더가 척척 맞물리면서 증기와 불꽃을 뿜어내는 장면 등 여러가지가 있죠. 저는 로봇 자체보다는 이런 것이 바로 로봇물의 정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 힘든 한편으로 헐리웃 영화로서의 서사적 구조도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만은 했지만 별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합도 키스도 없다"는 점이 영화의 애매한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tag : 퍼시픽림
일부러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일단 스토리가 너무 심심했습니다. 괴수가 등장하고, 이것을 무찌를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고난이 생기고, 이것을 극복하는 한편으로 이런 류에서 흔히 나오기 마련인 박사가 열심히 연구한 끝에 괴수들의 비밀을 밝혀, 그 비밀을 공략하여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온다는 전형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고난'과 '비밀'이 별 대단할 것 없이 넘어가는 통에 스토리에서 박진감을 느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지' 싶은 부분에서는 오마쥬의 재미가 아니라 진부함이 느껴졌습니다. 길예르모 감독의 예전 작품 중에 인간이 해충을 없애기 위해 풀어놓은 유전자 조작 생물이 진화하여 인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의 "미믹"이 있는데, 괴수를 다루는 방식은 거기서 크게 발전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거대 로봇과 동기화하면서 서로의 과거를 알게되고 트라우마까지 공유한다는 설정은 볼만한 성장 드라마를 뽑아내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드라마와 볼거리를 다루느라 그랬는지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막상 중요할 때는 나오지 않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런 반면에 볼거리만은 확실히 충실했습니다.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거대 괴수, 거대 로봇물 답게 이런 막대한 에너지를 가진 덩어리들이 싸우는 무게감 하나는 굉장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항상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탓에 때때로 누가 나와서 누굴 어떻게 때린건지 헷갈리는 장면도 많았고, 대체 왜 저 따위로만 싸워야 하는가 답답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작중에 플라즈마 캐논이라는 유용한 무기가 기본 장비로 등장하는데, 보는 내내 '왜 저 좋은 걸 더 크게 만들어서 안전하게 장거리에서 저격하지 않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더군요. 물론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애초에 인간형 로봇을 만들어 싸우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므로 이런 류의 의문은 굉장히 매너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중에서 어떤 무기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것을 봐도 '화랑' 하면 '담배' 하고 넘어가듯 로봇만화에서 흔히 관례적으로 준비해두고 사용하는 변명조차 할 생각(또는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컷 한심하게 싸우다 나중에서야 어떤 무기를 사용하면, 일반적인 로봇 만화에서는 '드디어 완성됐다, 받아라!'라거나 '한 번도 테스트 해보지 않았다', 혹은 '탄 수에 제한이 있다', '파일럿에게 심한 부담이 간다' 등의 변명거리를 던져주기 마련인데, 퍼시픽 림에서는 이 역시 언급 없이 지나가서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퍼시픽 림은 일본에서 유행했던 추억의 소재들을 가져다 헐리웃 영화의 흔한 틀에 집어넣은 작품이었다는 게 제 감상입니다. 때문에 영상적으로는 굉장히 볼만했고, 로켓 펀치나 브레스트 파이어 등의 오마쥬 역시 꽤 멋있게 나왔지만, 개인적인 기대와는 달리 이러한 소재가 빛을 발했던 "정수"는 별로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로봇물을 보고 자란 저는 "로봇물" 하면 떠오르는 연출이나 전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필살기를 쓰는 것부터,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믿는 일을 주인공이 죽을 힘을 다해 해내고 마는 장면, 계기판의 게이지가 가득차는 장면,
복잡한 톱니바퀴와 실린더가 척척 맞물리면서 증기와 불꽃을 뿜어내는 장면 등 여러가지가 있죠. 저는 로봇 자체보다는 이런 것이 바로 로봇물의 정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 힘든 한편으로 헐리웃 영화로서의 서사적 구조도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만은 했지만 별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합도 키스도 없다"는 점이 영화의 애매한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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