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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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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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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 세대에 비하면 반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지만, 조기 반공 교육의 잔재를 동화책으로 경험하긴 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걸 동화라고 하는 데는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얘기는 친절한 옆집 아저씨 이야기였다.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옆집에 친절한 아저씨가 이사와서 사탕도 주고 초콜릿도 주길래 좋아했는데, 어쩐지 행동이 수상했다. 세수할 때도 손목시계를 차고 하는 가 하면, 시계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아저씨가 시계를 두고 자리를 비운 틈에 용감한 주인공이 시계의 단추를 누르고 소리를 들어보니 뚜뚜뚜 하고 신호음이 들렸다. 놀란 주인공이 경찰에 신고하고 보니 옆집 아저씨는 간첩이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도 조심하세요, 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보고 느낀 것은 '간첩을 조심해야겠다'가 아니라 '재밌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읽던 책이라고는 모두 '착한 주인공이 나쁜 사람에게 학대받았지만 착한 일을 한 끝에 잘 먹고 잘 살았어요', 혹은 '바다거북은 한 번에 몇 개의 알을 낳습니다' 같은 것이었으니 재미가 없을리가 없었다. 그때는 간첩을 간첩이 아니라 '숨어있는 악'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6.25 전쟁을 그린 동화책도 있었다. 딱히 내용이랄 것은 없고 국군이 적의 치열한 방어에도 굴하지 않고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이 전부였는데, 김일병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하고, 박상병인가 누군가가 부축하기도 하고, 토치카에 수류탄을 까넣기도 했다('토치카'라는 단어는 고딕체였다). 그리하여 고지에는 마침내 태극기가 휘날리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몇 살에 그런 내용을 보고 뭘 배우라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재미는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군사소설이라고는 그 동화책과 블랙호크다운 뿐인데, 블랙호크다운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반면에 그 동화책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고보니 등하교길에 삐라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본 거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노랗고 빨갛고 잔인한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수거했다. 삐라를 가져가면 학용품을 나눠주던 시대도 있었다는데, 나는 뭘 받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나름대로 그런 쁘띠 반공 교육을 체험하면서 자랐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인지, 나는 딱히 반공 정신이 투철한 어린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서 김일성도 죽고, 국민학교도 이름이 바뀌고, 국민 교육헌장도 외우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국기에 대한 맹세도 내용이 바뀌었고, 선생님께 하는 경례도 폐지되었다. 다 잊어버리고 있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변화가 있긴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사회는 정말 자랑스럽고 정의롭고 자유롭게 되었나 생각해보지만, 글쎄, 본질적으로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빨갱이, 종북, 멸공이라는 단어가 잊혀질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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