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544

오늘밤은 당신에게 맥주를 뿌려

$
0
0
며칠 전 외신에서 한국 맥주가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얘기가 나와서 논란이 일었는데, 맥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한국 맥주가 세계 최악임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첨단 설비를 사용하는 한국이 어떻게 북한보다 맛없는 맥주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첨단 설비가 반드시 맥주 맛에 직결될 수는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균일한 품질의 맥주를 위생적으로 대량생산하는데는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좋은 칼을 쓴다고 형편 없는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하기는 힘들 테니까.
아무튼 한국은 주세가 너무 높다든가, 맥주에 들어가는 맥아가 터무니 없이 적다든가 하는 얘기는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니 굳이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기로 한다.
여기부터는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니라 나 개인의 취향과 생각인데, 한국 맥주가 그렇게 파멸적으로 맛이 없어서 먹자 마자 흙탕물로 입을 씻고 싶어질 지경은 아니다. 사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시원하게 마실 때의 가볍고 청량함은 썩 괜찮은 편이고 안주에 곁들여 먹기에는 좋다(맥주에 안주를 곁들이는 게 아니라 안주에 맥주를 곁들여 먹어야 한다). 그리고 맥주도 술인 이상 마시다보면 감각이 무뎌지기 마련이라 한 두 모금은 '이거 역시 싱거운걸'하고 불평하다가도 한 캔을 비울 때 쯤에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썩 괜찮은 맥주가 여럿 나오고 있다. 하이트 드라이 피니쉬는 아사히 수퍼 드라이의 훌륭한 대체재가 되었고, 오비 골든라거도 제법 풍미가 있어서 만족스럽다. 하이트 스타우트는 가격 때문에 잘 먹지 않을 뿐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든다. 요는 편의점에서도 큰 돈 들이지 않고 제법 괜찮은 맥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요즘은 대형 마트만 가면 한국 맥주보다 값싸고 훨씬 맛있는 외국 맥주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궁지에 몰려있을 때가 아니라면 맥주를 편의점에서 사 먹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트 맥주 중에서도 홀스텐 5.0 오리지널 바이젠(주황색콜라 캔 같은 디자인의 그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가성비를 자랑해서 최근에는 이것만 먹고 있다. 그동안 맥도날드 빅맥을 3500원에 먹고 있었는데 버거킹 더블 와퍼를 3300원에 먹게 된 격이다. 한 번은 마트에서 아주머니가 맛있는 맥주를 골라달라기에 홀스텐의 맥주 3종을 하나하나 설명해준 끝에 오리지널 바이젠을 사게 만든 적도 있다(나의 2012년 최대의 선행이었다). 아무튼 고소한 맛이 풍성한 밀맥주를 2000원도 되지 않는 값에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2000원으로 잔돈까지 남기면서 즐길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다.
그나저나 맥주를 마시는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고, 하루키는 '맥주는 병으로 마셔야 제맛'이라고 하지만 나는 캔으로 마시는 것을 가장 즐긴다. 냉장고에서 차게 식은 캔 맥주를 꺼내서 딸깍 하고 딴 다음 차가운 금속의 질감을 느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순간만큼 즐거울 때도 드물다. 특히 이 '벌컥벌컥'이라는 느낌은 캔으로 마실 때가 아니면 좀처럼 느끼기 힘든데, 병으로 마시면 공기를 찔끔찔끔 넣어 줘야 해서 귀찮고, 잔에 따라 마시면 색을 즐길 수 있어 좋긴 하지만 금속의 차가운 질감을 느낄 수 없는데다 따르는 과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수고로운 면이 있다.
하지만 파인트 잔이라면 그 묵직한 맛 덕에 좋아하는 편이다. 캔의 기쁨이 마실 때에 있다면 잔의 기쁨은 테이블에 호탕하게 내려칠 때에 있다. 잔을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치면서 '크으!' 하고 열락에 들뜬 신음을 흘리는 순간도 캔 맥주를 마시는 순간 만큼이나 멋지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 장점을 하나로 합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는 쓸데 없이 두껍고 무거운 캔이 나와주면 좋겠지만 제조사가 건전한 상식을 유지하는 한 그런 물건은 나오지 않을 테니 그럭저럭 절충안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주석잔인데, 이것은 금속인 만큼 마실 때 입에 닿는 금속의 차가운 느낌을 주면서도 적당히 무거운 잔이기 때문에 테이블에 내려치는 즐거움도 훌륭하다. 게다가 대체로 디자인이 화려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마실 때에 비해 대단히 호사스러운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예전에 한 불닭집에서 꼭 한번 그 기분을 즐긴 적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어딘지 잊어버렸다. 여름이 오기 전에 주석잔 구입을 검토해야겠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떤 맥주를 어떻게 마시든간에 일을 마치고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킬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 틀림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런 기회가 바란다고 항상 찾아오지는 않는 것이다.


tag :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544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