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최신작 “너의 이름은.”을 봤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팬으로서 보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없을까 예매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그건 보기좋게 실패하고, 그 뒤에 전혀 기대하지 않던 시사회에 당첨이 되어 약간 일찍 볼 수 있었죠. 여러가지 면에서 기대 이상의 작품이더군요. 그래서 감상을 빨리 쓰고 싶었는데, 정식 개봉을 하기도 전에 감상을 올리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닌 데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제약도 생기기 때문에 새해가 밝고 개봉을 한지 일주일이 지난 이제야 올리게 되는군요.
(감상치고 상당히 깁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차
너의 이름은.의 훌륭함
(1)줄거리
(2)안정적 소재와 빼어난 구조
(3)꼼꼼한 포석과 회수
(4)빼어난 영상과 음악
PC(Political Correctness)하지 않음
(1)성별 교환과 신체
(2)카메라워크와 대상화
(3)1.5탑의 비중
과연 재난물인가?
다소 난해한 정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의 훌륭함
(1)줄거리
“너의 이름은.”의 파트는 크게 다섯으로 나뉩니다.
1. 도쿄에 살고 있는 소년 타키와 시골 “이토모리”에 살고 있는 소녀 미츠하의 육체가 어찌된 일인지 바뀌고 맙니다. 처음에는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주변 상황에 맞춰서 생활하는데, 육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고, 주변과도 크고 작은 트러블을 일으킵니다.
2. 두 주인공은 메모나 일기를 남기는 방법으로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파악하고 소통을 시작하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 서로에 대해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를 확인하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직접 이야기하는데는 실패합니다. 타키는 짝사랑하던 오쿠데라 선배와 데이트를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츠하는 타키를 만나지만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데 충격을 받은 뒤 자신이 아끼던 머리끈을 선물하고(머리끈을 주는 것은 초반에, 타키를 만나는 것은 후반에 나옵니다) 여름 축제에서 혜성을 봅니다. (이 혜성은 충돌이라는 재난으로 이어집니다)그리고 인격교환은 완전히 끝납니다.
3. 어쩐지 희미해지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타키는 자신이 보았던 주변 경관을 실마리 삼아 미츠하를 찾아나섭니다. 그러나 간신히 찾아간 이토모리는 3년 전 혜성 충돌로 폐허가 되었고, 미츠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야말로 대반전의 파트입니다.
4. 타키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미츠하가 씹어 만든 술을 봉납한 사당으로 가서 그것을 마시며,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3년 전의 미츠하의 육체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마을사람들에게 대재난을 경고하지만 믿어주는 것은 친구들 뿐이라 셋이서 사람들을 피난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미츠하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키는 해질녘의 사당으로 가서 시간과 생사의 뒤틀림 속에서 미츠하와 해후하고, 서로의 이름을 잊지 말자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간이 끝나자 두 사람은 자신의 육체로 되돌아가고, 서로의 이름을 잊고 맙니다. 미츠하는 크게 낙담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소동을 일으키고 이장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사람들을 피난시키는데 성공합니다.
5.대사건으로부터 5년이 지나고, 타키는 구직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미츠하는 오프닝에 잠깐 나왔던 것처럼 정체불명의 상실감에 시달리는데, 어느날 열차에서 마주치고, 미츠하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보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게’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아 바깥으로 내달리고, 계단에서 확신을 갖지 못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가, 결국은 '당신을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말로 해후하게 됩니다.
(2)안정적 소재와 빼어난 구조
전 원래부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팬이었지만, 그래도 신카이 감독의 작품이 서사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흥행작을 만들 역량을 보였던 “초속 5센티미터”도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고, 지금까지 여섯 번 정도는 본 것 같은데, 아무리 좋은 말로 해도 이것이 좋은 ‘이야기’를 담은 수작은 아니었죠. 주인공은 자신의 안타까운 사랑에 대해 속삭이듯 독백을 늘어놓고, 마음을 전하지 못해 답답해하며, 상실감에 번뇌하고, 나중에는 엇갈린 운명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최근작인 “언어의 정원”은 거기서 더 많이 나아갔지만, 여전히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이 이야기에선 구두장인이라는 남다른 꿈을 가진 소년이 공원에서 맥주와 초콜릿을 먹고 있는 정체불명의 여인을 만나 이름도 모른 채 천천히 가까워지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염원하다가, 이후에 그녀가 자기 학교의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당한 사정으로 전근을 가는 그녀를 위해 격분하며, 그녀를 다시 만나 지극한 행복감 속에서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어쩐지 순식간에 다시 쫓아온 선생님에게 화를 냈다가,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대단히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편으로 클라이막스가 빠져버린 얘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그리고 나온 것이 “너의 이름은.”인데, 이 작품은 같은 감독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성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탄탄한 기승전결은 물론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장면 구성으로 반전의 충격에 이어 따뜻한 감동까지 줍니다. 종종 상영 시간 이상으로 굉장히 긴 이야기를 본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작품도 그랬죠.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상상하게도 하고, 만감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시작은 맥빠지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트 1은 마치 평범한 인격교환물처럼 시작되니까요. ‘우연히 몸이 뒤바뀐 두 소년소녀, 어쩌면 좋아? 넘넘 불안해!’류의 이야기는 정말 20년 전의 “체인지” 때부터 질려버렸습니다. “너의 이름은.”이 이런 식으로 홍보되는 것을 봤을 때도 제 눈을 의심했어요. 신카이가 이런 얘기를 쓸리가 없어, 하고 충격받았죠.
저는 흔히 TS(트랜스 섹슈얼)물이라고 부르는 이 장르, 소재 자체가 약간 치사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길 수 밖에 없는 요소로 웃기는 개그가 그리 세련되지 않은 것처럼,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소재로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덜 기대된다고 할까요. 남녀의 몸이 갑자기 뒤바뀌고, 신체 구조의 변화에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며, 주변에서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인격 변화에 놀라고, 인격이 바뀐 이들이 오랫동안 썩혀온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해버리고, 그러면서 사춘기 아이들이 사랑의 진짜 의미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깨닫게 된다…… 이런 콘셉트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접해온 요즘 세대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안정적인 재미거리를 제공하는 요소인 것도 사실이죠. ‘내가 다른 성별이 된다면…’ 하는 생각은 누구나 즐겁게 떠들 수 있는 얘깃거리니까요.
1997년작 체인지. 제가 어릴 때지만 이때도 이 소재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카이 감독은 보란듯이 이 소재에 다른 소재를 덧붙였더군요. 영혼 교환으로 성별이 바뀌는데, 바뀐 두 사람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사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려고 보니 상대는 과거/미래의 인물이었다는 것이죠. 이런 시간여행 커뮤니케이션 이야기도 찾아보면 제법 많습니다. 제가 본 한국 영화로도 “동감”이 있었군요. 소설 중에서는 최근 히트작으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상대가 겪을 미래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미래인이 정보를 제공해서 상대의 운명을 바꾼다는 전개는 기본적으로 극적 박진감이 있고, 감동을 주기도 참으로 좋습니다.
동감. 무선통신기기의 신비한 혼선으로 과거와 미래의 두 사람이 대화하는데, 뜻밖에도 이 사실은 쉽게 밝혀집니다.
게다가 신카이 감독은 이 설정에서 여주인공인 미츠하를 사망자로 설정합니다. 혜성 충돌이라는 대재난으로 3년 전에 죽어버린 그녀를 구해내는 것이 파트 3에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과 함께 열리는 새로운 국면입니다. 덕분에 파트 2에서 좌충우돌하는 청춘 스토리가 급변해서 비장해지는데, 관객 모두가 갑자기 숨죽이게 되는 이 전개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과연 미츠하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이 긴장감은 파트4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과연 시간여행으로 사건이 수정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으로 넘어가 신카이 감독의 기존 장기였던 애절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뭐, 전반의 분위기상 만날 것 같긴 하지만, 감독이 그간 해온 짓이 있으니까요. 운명의 두 사람이 안타깝게도 어긋나버린다는 모티브는 이 못된 감독이 가장 좋아했던 것이라, 성인이 된 타키와 미츠하가 육교 위에서 스쳐지나가는 장면에서든 계단길에서 스쳐지나가는 장면에서든 미츠하의 결혼반지를 보여주고 ‘네가 살아있다면, 내 인생은 그것으로 헛되지 않았어,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하고 끝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듯하고 오싹하군요. 그런 점에서 신카이 감독이 집착하던 비극의 모티브를 내려놓았다는 건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아무튼 "너의 이름은.”은 '성전환 시간여행 활극 로맨틱 코미디’라는 독특한 장르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재밌는 건 다 넣은 셈이죠. 소설이나 만화가 아니라 극장판 영화인 만큼 두 시간이라는 시간 제한 안에 온갖 요소를 다 쑤셔넣으면 밸런스가 무너지기 쉬운데, 이 작품은 그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잘 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장면을 어디에 어떻게 넣을지도 치밀하게 계산해서 한 명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한 명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미츠하는 무엇에 그토록 실망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고, 3년의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사건의 진상, 두 사람의 마음을 극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일종의 서술트릭 미스터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으면서도 두 사람이 해후하는 장면에서는 “보이 미츠 걸” 스토리의 감동이 있었죠. 이런 각본을 만드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3)꼼꼼한 포석과 회수
영화를 볼 때 제가 쓸데없이 집착하고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뒤에서 나올 이야기를 앞에서 어떻게 암시했는가 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도 각본이 매우 꼼꼼히 작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뒤에서 나올 중요한 이야기가 앞에서 한 번씩은 나오더군요. 예를 들어 미츠하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것도 초반의 연설 씬에서 드러나고, 이때 미츠하를 탐탁지 않게 보는 반 애들과의 관계도 나타납니다. 이 친구들은 나중에 도쿄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보여주더군요. 그리고 졸업하면 어떡할 거야? 그냥 여기서 일하지 않을까, 하던 친구들(테시가와라, 사야카)도 물론 빼먹지 않고 도쿄에서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향에서 살아야 맞겠지만, 고향이 없어졌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끈이 갖는 의미도 할머니의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되고, 시간 여행의 키가 되는 ‘쿠치카미자케’ 역시 아름답지만 미츠하가 지겨워하는 행사를 통해 사전에 준비됩니다. 시공이 어긋나고 생사가 이어지는 기적의 저녁 무렵도 신카이 유니버스를 공유하는 전작의 유키노 선생님이 나와서 설명해두죠. 그리고 테시가와라가 자판기 옆을 카페라고 농담했던 것 역시 이후에 타키가 그럴듯한 벤치를 만드는 장면, 테시가와라와 사야카가 도쿄의 카페에서 나타나는 장면으로 소화되고, 건축업을 하는 테시가와라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폭파를 배우라고 잔소리처럼 하는 말 역시 후반에는 이 친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해줍니다. 이런 포석이 없어서 아쉬웠던 건 테시가와라가 전파 해킹까지 할 줄 하는 이유가 따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 정도군요.
(4)빼어난 영상과 음악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에서 영상미가 빼어나다는 건 굳이 말하기도 민망한 지점입니다만 그래도 말을 안 할 순 없죠. 예전 이상으로, 한층 더 변태적인 배경 묘사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장기이자 집착 포인트였던, 생활감 있는 도시 묘사는 물론이고 원경으로 잡는 자연 묘사도 스태프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되었죠. 전 특히 감탄할만한 부분으로 파트4의 '해질녘 신비 속에서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을 뽑고 싶습니다. 장면의 콘셉트 자체는 사실 대단할 게 없어요. 이렇게 시공을 초월한 아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계를 초월하여 진심을 터놓는 장면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합니다. 레이스를 하면서도 이런 초월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주먹으로 두들기고 싸우면서도 대화하며, 로봇을 타고 싸울 때도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혼의 진실한 소통’이기 때문에 배경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TV애니메이션이라면 어쩐지 다들 국부가 보이지 않는 뿌연 알몸으로 등장해 어딘가를 부유하곤 하죠. “너의 이름은.”에서도 이 장면을 두 사람이 반짝이는 별만이 가득한 아공간으로 설정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 혜성을 집어넣습니다. 정말이지 변태가 맞긴 맞아요. 심지어 이런 배경 집착이 타키에게 투사되어 이토모리 마을을 찾는 단서로 작용하기까지 하니까요. 사람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하곤 하는데, 그런 감동의 포인트를 신카이 감독은 시종일관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음악은 인기 밴드 RADWIMPS와 함께 작업했다고 합니다. 어느 대학생이 좋은 밴드가 있다고 알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데, 시원하고 모던한 RADWIMPS의 음악이 적재적소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계속해서 히사이시 조의 클래시컬하고 장엄한 음악을 채용하는 미야자키 감독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동화적인 느낌이 강한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에 비해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고 생기가 넘치는 “너의 이름은.”에는 확실히 이쪽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목소리에 “천체관측”을 불렀던 범프 오브 치킨이 작업했다면 더 기뻤겠습니다만. 그리고 약간만 더 조용했으면 싶기도 했습니다.
자, 이제 전반적인 칭찬이 끝났습니다. 이제 좀 다른 얘기를 해보죠. 과히 즐거운 얘기는 아닙니다.
PC(Political Correctness)하지 않음
(1)성별 교환과 신체
사실 시사회를 보면서도 파트 1, 2에서 이건 좀 뭣한 감이 있는데, 하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랬다가 그 이후의 전개로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주위 반응을 보니 이 부분을 짚을 필요가 확실히 있겠더군요.
“너의 이름은.”이 적극적으로 여성은 애를 낳고 집안일을 해야 하며 감성적이고 이성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임금을 덜 받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 현대 사회에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깔려있는 인식을 답습하고 있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대히트 애니메이션이 이렇다는 것은 퍽 아쉬운 일입니다.
어느 부분이 문제인가? 성별 교환을 그린 파트 1, 2가 가장 문제였습니다. 이래서 제가 성별 교환소재를 싫어하는 겁니다. 워낙 뻔한데다가 뻔한만큼 기존 인식으로는 재미나면서도 올바르게 다루기도 힘들고, 올바르게 다루자면 대단히 많은 이야기를 추가해야 합니다. “체인지”에서 두 인물이 발기나 생리 때문에 고생하고 서로에 대해 이해했던 것처럼 다룰 거라면 성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게 주요한 지점이 아니라 ‘재미거리’에 속했던 만큼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큰 고민 없이 재미있어하기 좋은 장면만 남기다 보니 뻔한데다 PC하지 못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가령 육체가 바뀌자마자 타키가 미츠하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나오고, 이 가슴 만지기는 작품 내내 몇 번이고 개그로 활용되는데, 이것은 마치 개그맨들이 얼굴을 까맣고 칠하게 나와서 알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처럼 간단히 재미를 주고 PC하지는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의 구조적으로는 영리한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감독 자신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는, ‘울면서 가슴 만지기’ 씬은 많은 관객을 웃기면서 여러모로 커다란 인상을 남겼죠. 캐릭터의 죽음이라는 진지하고 무거운 전개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마냥 우는 것보다는 재미를 주는 게 훨씬 낫긴 합니다. 게다가 관객은 캐릭터의 행동에 대해 익숙해 질수록 더 큰 재미를 느끼는 법이라 이렇게 웃기는 행동을 의외의 부분에서도 반복시킴으로써 관객이 한바탕 웃고 '이탈했던 일상으로의 회귀’를 실감하게 만드는 것도 작법상으로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이 방식을 꼭 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죠. ‘성별의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웃기고 반복적으로 써먹어도 좋은’ 수단을 떠올릴 수는 없었을까요? 가령 소설판에서는 타키가 새로운 육체를 다루는 감각을 익히려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잠옷바람으로 문워크를 하는 것도 괜찮은 장면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고민스럽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된 남자가 처음으로 하는 것은? 에 떠오르는 첫 번째 답을 영상화했다는 점은 그리 창의적이라고 할 수 없겠죠
미츠하도 타키의 몸에 들어가 성기 때문에 몹시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니까 가슴 만지는 정도는 뭐 어떠랴 싶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구도에서도 애초에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미츠하가 타키에게 신체에 관련된 갖가지 금기사항을 제시하는 한편 타키가 미츠하에게 요구하는 것은 '돈을 적당히 써라', '인간관계를 마구 바꾸지 마라’ 정도라는 것을 볼 때도, 감독이 '여성이 남성의 육체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해’는 거의 없고 그 반대는 대단히 많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이 사실을 별 고민없이 재미거리로 소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지한 고민을 하자면 이런 식으로 다루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죠.
물론 그러자면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이고, 전체적 이야기의 무게중심도 전반으로 몰려 절묘하게 잡았던 균형이 깨지고 말겁니다. 그러니까 요는 '시간의 엇갈림 속에서 멀리 떨어진 운명의 상대를 접하고 구출하고 해후한다'는 콘셉트에 운명의 상대를 접하는 방식으로 ‘이성간의 인격교환'을 추가한 순간 어느쪽으로든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내포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육체 변화에서 일어나는 '코믹한 레퍼토리’를 빼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할 겁니다. 가슴 만져서 웃기는 게 시나리오 작법상 괜찮다곤 해도 그걸 뺀다고 해서 이야기 전반에 균열이 생기진 않으니까요. 그런 게 없더라도 “너의 이름은.”은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은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어온 안정적 개그를 채용했죠. 가슴을 만지고 성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며, 성별에 따른 스테레오 타입의 특성을 이성의 몸으로 드러내 뜻밖의 인기를 얻기도 합니다. PC함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애초에 없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상태에서 대중적인 소재로 안정적인 재미를 추구하려고 했으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겠죠.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인식이나 작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살펴보지 못한 신카이 감독은 창작자로서 게을렀다는 비판을 받을만 합니다. 백인의 천국, 아름다운 공주의 나라였던 디즈니에서 최근에 보이는 행보와는 크게 비교되는 일이죠. 물론 이것은 수많은 스토리 작가들이 이야기를 무지막지하게 뽑아내고 회의해서 완성하는 디즈니 시스템과 감독 개인이 이야기부터 배우를 위한 가이드 녹음까지 완성해버리는 신카이 시스템의 차이이기도 합니다만.
(2)카메라워크와 대상화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문제, 안전한 클리셰 채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는 작품의 카메라워크에서도 드러납니다. 인물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너의 이름은."에서는 시작부터 미츠하의 몸을 다리 아래쪽부터 훑으며 올라오는 카메라워크가 사용됩니다. 워낙 익숙한 방식인데다가 인물 채색이 딱히 명암을 강조해서 색기를 강조하는 방식도 아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면 그랬나 싶을 정도지만, 미츠하가 최소한 세 번 이상 이 방식으로 잡히고 오쿠데라 선배가 두 번쯤 이렇게 잡힐 동안 타키는 그냥 얼굴부터 잡히거나 원경에서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잡힙니다. '여캐는 보통 이렇게 잡지 않아?' 싶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라 할지라도 딱히 필요한 연출 방식은 아니었죠. 시각적인 면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온 신카이 감독인 만큼 이 방식을 대중적인 방식이라고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은 퍽 아쉽습니다. 전작인 "언어의 정원"에서는 성인 여성인 유키노를 잡을 때도 굳이 카메라로 훑지는 않았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가 활약하는 장면에서도 농구하는 미츠하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바스트 모핑'이 구현되었죠. 굳이 속옷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영화판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타키가 브래지어를 깜빡하는 바람에 일어난 해프닝이긴 하지만, 이런 맥락이 제대로 드러날 수 없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 분절해서 넣을 필연적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뒤에 미츠하가 남자 시선 조심하라며 여자의 몸가짐을 강조한다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감독이 설정한 미츠하의 여성상이 일본의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상인 '야마토 나데시코'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 있으며, 대중성이라는 목표를 잡기 위해 서브컬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식을 채용한 결과, 적극적 의도가 있든 없든 남성인 타키가 ‘주체화’ 되는 한편으로 여성인 미츠하는 ‘대상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판에서 브라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자세히 나오지만 대단히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의문스러운 것은 이렇게 전통적 여성상의 범주 안으로 설정된 미츠하지만 "이런 마을은 지긋지긋해요, 다음 생에는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라고 외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실연의 충격으로 청순하고 긴 머리를 잘라낸다는 낡아빠진(작품내에서 실, 끈 등이 인연을 상징하므로 극적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만) 전개 뒤에도 "남자는 항상 연애문제로 생각한다니까" 하고 사야카가 테시가와라에게 핀잔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쩌면 신카이 감독도 이런 설정이 다소 낡았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미츠하의 유형을 야마토 나데시코의 한계 밖으로 잡거나, 이후에 여기서 탈피하는 방향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3)1.5탑의 비중
구조가 기막히게 탄탄하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구성에서도 두 주인공의 비중 문제를 생각하면 완벽히 공평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육체가 바뀐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인만큼 초반의 구성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남주인공인 타키가 잃어버린 운명의 상대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흘러가기 시작하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의 이름은." 역시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타키를 먼저 만나려는 노력을 했던 것은 미츠하였고, 최종적으로 마을을 구하는 결정적 설득을 하는 것도 미츠하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미츠하의 만남이 그저 애처로운 시도로 끝났다는 점을 봐도, 그리고 타키를 만나고 산에서 내려온 미츠하가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긴급한 상황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이나, 대단히 중요한 '아버지 설득' 장면이 결말의 긴장감을 위한 것인지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봐도 공평한 투 탑 구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계단 씬 역시 실망하며 지나치는 미츠하에게 타키가 말을 거는 식이어야만 했을까요? 시원하게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도 보여주고, 계단에서도 동시에 돌아보는 식이면 낫지 않았을까요? 산 위에서 서로의 이름을 잊지 말자고 할 때, "만약 다음에 만났을 때도 내가 못 알아본다면, 그때는 또 다시 말해줘, 너의 이름을." 하고 약속하고 마지막에 동시에 서로를 불러 자기 이름을 말했어도 나름대로 공평한 구조를 취하며 감동적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이미지는 작품을 보고 나니 허구였더군요.
과연 재난물인가?
자연 재해로 인해 하나의 마을이 소멸한다는 설정이 들어간 이상, 이 작품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얼마 없을 겁니다. 신카이 감독 자신도 동일본 대지진이 이 작품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죠. 그러나 이 이야기가 재난에 대해 의미있는 이야기를 했거나,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진력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 자신이 그러한 대재난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거나 주변에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지 않기 때문에 치유에 도움이 되었다, 되지 않았다 단언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영화적 레퍼토리를 통해 생각해보면 "너의 이름은."이 재난물에 기대할 수 있는 주제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희망적인 재난물'의 주제를 설정하려면 작품에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재난 이전의 일상
B. 재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희망적 인간상
C. 잔혹한 재난 이후에도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혹은 새롭게 안정을 찾은 일상.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인격 교환이라는 재미난 이야기를 하느라 A. 일상에 대한 애착보다는 상대에 대한 애착이 더 강조되었고, B. 재난 속에서 세 사람이 고군분투하지만 숭고한 희생이 발생하거나 희망적 인간상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죠. 사야카는 아무런 확신이 없고, 테시가와라는 아버지 앞에서 포기하며, 미츠하 역시 타키를 잊어버렸다는데 충격을 받는 모습만 강조되고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C. 새로운 희망을 찾은 일상을 다뤄야 할 부분에서도 시점이 타키로 돌아가는 통에 이토모리 사람들의 모습이 파편화되어 제시됩니다. 가장 희망적인 게 테시가와라와 사야카의 결혼이었죠.
결국 이 이야기는 “보이 미츠 걸”의 러브스토리였고, 희망적 재난물로서는 많은 부분이 빠져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감독이 ‘흥행을 위해서라면 재난 이야기를 써먹어야지’ 하고 이 이야기들을 단순소재화했다고 보기에는 3년 전의 사건을 알게 된 타키의 충격이나 이토모리를 그리워하는 라멘집 아저씨의 모습들이 먹먹하게 그려졌죠. 요는 여러 소재를 다루면서도 균형은 잘 잡았지만 한계가 있었고, 그 탓에 특정 부분에서 필요한 부분이 여럿 생략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소 난해한 정서
그렇다면 “보이 미츠 걸”의 러브스토리는 빈틈없이 잘 살아남았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 생각은 이 역시 좀 모자라다는 겁니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육체가 바뀐다는 엄청난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애매합니다. 이것은 그냥 신기한 사건으로 그칠 수도 있겠고, “터치 이즈 러브”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상대 자체가 되어 상대를 둘러싼 모든 것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이니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사랑을 “너, 지금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지?”하는 대사로 깨닫게 되는 것보다는 상대의 언동이나 흔적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주어지는 게 낫다는 것이죠. 이 부분은 전작 “언어의 정원”에서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한, 아름답고 평온한 거실에서 ‘지금 이 순간이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아’ 하고 자각했던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신카이 감독이 인터뷰에서 '딱히 타키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상대를 믿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야기 전반에 운명론적인 소재와 정서가 깔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운명의 상대와는 보이지 않는 빨간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심심하면 튀어나온다는 것은 만화 좀 보신 분들은 누구나 아실 겁니다.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기록이 발견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이 이야기가 어쩌다 일본에서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아무튼 “너의 이름은.”은 이런 이야기를 아주 전면적으로 채용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미츠하가 운명의 빨간 실을 잇듯이 자신의 머리끈을 타키에게 넘겨주는 순간 두 사람은 당연히 사람에 빠진다고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고,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도 무방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빨간 실을 가장 좋아하는 단체, 클램프...
그러나 이런 전통적 신비성이 이야기로서의 합리성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좀 아쉽긴 합니다. ‘이것도 인연’ 하면서 은거한 무술 스승님이 부모를 잃고 분노한 제자에게 정신 수양을 시킬 때 할 법한 대사를 하는 것보다는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의 자취와 메모에 새삼 감탄하고 거울을 보며 서로를 더 알고 싶어하고 만나보고 싶어하는 계기가 더 길게 들어가는 게 로맨스로서는 일반적인 결정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영혼의 반쪽인 술을 좀 마셨다는 것만으로 저녁 무렵에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설정 역시 '앞에서 다 말했잖아? 신비하잖아? 그럴법 하지 않아?’ 하고 일본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정서로 퉁치고 넘어가는 감이 있긴 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제삿날에 진짜 조상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 굳이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하죠. 확실히 그렇게 생각해보면 헐리웃 방식으로, 타키가 집안에 내려오는 고문서들을 뒤적여 ‘그래, 저녁 일곱 시면 신비로운 혜성의 힘이 고대 유적에 지어진 사당으로 전달되어 시공이 뒤틀릴 거야, 해가 질 때까지 단 10분 동안 미츠하를 만나야 해!' 하는 것보다는 깔끔한 맛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러한 전통적 정서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순간에는 ‘얘들이 뭔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름답고 멋져…’하는 생각과 동시에 ‘알았으니까 데스노트도 아니고 그놈의 이름 타령 좀 1절만 하면 안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신카이 마코토
이번에는 감독 이야기를 해보죠.
서정성과 시각적 화려함으로 극찬을 받아온 신카이 감독이지만 서사성이나 입체적 캐릭터 구성에서는 그리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대히트작이 된 “너의 이름은.”역시 이러한 평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PC함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죠. 그런데 인터뷰들을 보니 이러한 문제들이 단순히 감독의 인식 문제에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단계에서 실제 인간의 관찰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에서 신카이 감독은 남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섬세한 사춘기 여학생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타인의 말이 수수께끼와 빛으로 가득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고, 그리고 열심히 상상하는 것이 창작의 근본에 있다'고 대답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인상적이기도 하고 그럴듯한 모범 답안이기도 합니다만, '최근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은 실제 인간을 관찰하지 않고 허구의 캐릭터만을 참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미야자키 감독의 발언과 비교해보면 한계가 엿보입니다. 신카이 감독은 캐스팅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미츠하가 어떤 인물일지 이미지가 없었는데, 배우 카마시라이시 모네가 "이런 시골 싫어요" 대사를 하는 것을 듣고서야 이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결정했다고 하니까요.
물론 셰익스피어도 이탈리아 한 번 안 가보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으니까 창작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실제를 관찰하고 체험을 근거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킬리만자로 이야기를 하자고 킬리만자로를 등반할 필요는 없죠. 그렇지만 이번처럼 서브컬처의 논리를 대중적 극장판으로 가져올 때는 실존하는 인간은 어떨 것인가 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캐릭터는 장발, 무녀, 요조숙녀, 부끄러움 많음 등 여러가지 요소의 조합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어떻단 말이냐, 서브컬처 논리는 흥행하는 극장판이면 안되느냐 싶기도 하지만, 신카이 감독이 앞으로도 대중적으로 호소할 생각이 있다면 서브컬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풀에서 여러 요소를 끌어다 조합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편이 현실적이고 좋겠죠. 아니면 그렇게 조합된 설정에 최대한 현실에 기반한 실제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어떤 요소가 파편화되어 구성 요소로만 존재하게 될 때 거기에선 현실성, 인간성이 제거되고 맙니다. 이것은 엔터테인먼트를 구성하는 데는 생산성면에서 썩 유리한 방식이지만, "내일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면, 강렬한 마음으로 뭔가를 붙잡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라던 신카이 감독이 마냥 즐겁기만 한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성향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신카이 감독이 어느날 갑자기 기똥찬 배경의 섹시 아이돌 애니를 만든다면 저야 그 나름대로 이 양반이 작정을 했구나, 하고 양손에 야광봉을 들고 환영하겠습니다만…….
그렇지만 당분간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 같고, 신카이 감독은 예전부터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경험과 자신이 매혹되어 있는 특정 모티브를 중심 소재로 반복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야기꾼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지만, 신카이 감독의 경우는 중첩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하늘과 자연, 고요한 시골, 이름모를 새가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신주쿠, 시골과 도시를 이어주는 핏줄처럼 고독한 철도, 보호자가 부재하는 집안, 운명의 빨간 실로 이어진 듯한 상대가 있지만 안타까운 사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슬픔, 어쩔 도리가 없는 상실감 때문에 반복되는 독백, 상대와 이어지거나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계속되는 자기계발, 우주와 별과 죽음과 부활, 단정하고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 그 여인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수용되는 아픔과 성장......
항상 세트로 사용되면서도 뭔가 살짝 빠진 것 같고, 비극적인 결말을 맺기 일쑤였던 모티브들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너의 이름은."에 와서 이것들은 충분히 활용되면서도 안정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소 아쉬운 점은 있더라도 적어도 관람하는 저로서는 이 일련의 이야기가 시원스럽게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카이 감독은 이제 어떤 이야기를 만들까요? 고전문학에서 힌트를 얻었던 두 작품에 이어서 또다시 고전문학에서 찾아낸 이야기를 확장하게 될까요?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만든다 할지라도 팬으로서 기대가 되는 한편, 그가 했던 이야기를 또다시 반복하거나 자기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미 조합된 이야기의 묶음을 별 비판 없이 도입하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는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는 이야기꾼으로서, 감독으로서 기로에 섰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저는 기존의 모티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별을 쫓는 아이”를 만들 수 있었던 신카이 감독이 다음에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고 나오기를 빌어봅니다.
덧
극중 스마트폰으로 일기를 쓰는데 연도 몰랐다는 건, 한 달에 달하는 일상 생활에서도 한 번을 못 봤다는 건, 어물쩡 넘기긴 했어도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닌지?
덧덧
작중 기후현 다카야마 근처가 몇 장면 등장하는데, 익숙한 장소가 두 군데쯤 나와서 놀랐습니다. 특히 라멘집은 어디쯤 있는지 위치를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기후현 많이 가세요. 성지순례하기 좋습니다.
덧덧덧
개봉 전에 너의 이름은(기미노 나와)을 너의 밧줄(마찬가지로 기미노 나와)로 부르곤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마냥 헛소리만도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신카이 감독의 안배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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