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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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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리스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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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를 좋아하시는지? 나는 무척 좋아한다. 애초에 도수 말고 맛에는 별로 민감하지 않아서 딱 40도의 위스키라면 대체로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 놀랍게도 위스키가 참으로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제사 지내러 갔다가 큰집에 쌓여 있던 위스키를 두어 잔 마신 게 계기였을 것이다. 아마 임페리얼 어쩌고였던 것 같다. 좋은 술이다. 그런데 지금도 큰집에는 마실 사람 없는 위스키 선물이 한 병 두 병 쌓이고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에게 쌓이는 거라곤 기껏해야 다이어리와 달력 정도니까.

아무튼 못되게도 그렇게 비싼 술에 맛을 들인 이후로 종종 기회가 될 때마다 위스키를 사서 서랍 속에 쟁여두고 1온스씩 마시곤 한다. 가장 최근에 산 위스키는 7월 26일에 산 조니워커 레드였다. 조니워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레드라벨이 국내 마트에서도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두어 달에 한 병씩 사도 좋을 이 녀석을 다 마신 것은 8월이나 9월이 아닌 바로 12월인 이번 달이었다. 아껴서 조금씩 마시다가 마지막 한 잔을 남겨두고 "마지막 한 잔은 영광의 순간이 오면 마셔야지"하고 봉인했던 것이다. 미드 "배틀스타 갤럭티카"를 보면 로봇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물자 공급이 끊기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막막한 여행과 치열한 전투를 반복하는 가운데, 술고래인 부함장이 마지막 위스키 한 병에 눈금을 그어가며 술을 아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한 잔을 비운 그 날이 영광의 순간이 온 날이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예고되었던 고통을 확인했고, 그리고 살짝 취하고 싶었는데 손 닿는 곳에 있는 술이 그것 뿐이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맛은 있었다.

요즘 들어서 그런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요리 레시피도 저장하고 멋진 카페도 저장하고 기가 막힌 맛집도 저장하고 여행 정보도 저장하고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 하고 싶은 게임도 저장하면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당장 이 리스트를 해치워야지' 하고 입맛을 다시는데, 정작 그렇게 리스트를 주루룩 해치울 정도로 여유로운 순간은 도무지 다가오질 않아서 리스트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는 것이다.

읽고 싶은 책만 369권, 보고 싶은 영화는 317편.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이 리스트를 열심히 작성하는 한 평생 걸려도 이것들을 모두 해치울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실현 속도보다 욕망이 쌓이는 속도가 빠른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원히 눈이 내리는 나라에서 제설 작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도 만들다 보면 일이 되곤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버킷리스트의 작성 빈도를 크게 낮추고, 정말 까먹었다간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만한 정보만 모아두고, 영화도 책도 일주일에 하나씩 처리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언젠가' 찾아올 거대한 기쁨 따위를 기대하고 살아봤자 딱히 좋을 일도 없다는 걸 2016년이 증명했던 것이다. 기약 없는 행복 따위는 잊어버리고 소박할지언정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모이겠지만, 거북이처럼 숨도 안 쉬고 달려서 지쳐버리는 것보다는 토끼처럼 그럭저럭 농땡이치고 사는 편이 정신적으로 유익한 것이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좀 늦었다고 산 채로 간을 뽑히는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물론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었다고 깜짝 놀랄 만큼 생활이 변하고 매일매일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나도 ‘거북이처럼 도전하고 토끼처럼 즐겨라' 같은 책을 써서 한몫 단단히 잡았겠지. 단순히 미뤄두기를 그만두고 장바구니에서 썩는 물건을 줄였을 뿐이다. 덕분에 더 바빠졌고, 바로 사 버리는 물건도, 못 본 척 하는 물건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보류, 저장 프로세스를 줄이는 것만으로 삶이 좀더 단순해지고 어깨도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게 이렇게 많은데 현실은 이 모양이라니!'하고 쓸데없이 억울해 할 일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전에 없이 새해의 다짐을 적어보자면, '버킷 리스트를 줄일 것'이다. 원하는 게 있고 2주일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달성할 것. 아니면 그냥 별 가망 없다고 간주하고 아예 잊어버릴 것. 적어도 그 욕망을 형체로 남기지 말 것.

그러니 조만간 마트에 찾아가서 조니워커 레드를 또 한 병 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를 위해 남기는 축배 따위는 필요없다.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것보다는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나 마시는 편이 멋지지 않은가?


-후기

고등학생 때 수학이 약해서 오답노트를 꽤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양이 많아져서 결국은 한 번도 제대로 복습하지 못하고 수능을 쳤죠. 그냥 그 시간에 영화나 보는 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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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너의 한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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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최신작 “너의 이름은.”을 봤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팬으로서 보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없을까 예매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그건 보기좋게 실패하고, 그 뒤에 전혀 기대하지 않던 시사회에 당첨이 되어 약간 일찍 볼 수 있었죠. 여러가지 면에서 기대 이상의 작품이더군요. 그래서 감상을 빨리 쓰고 싶었는데, 정식 개봉을 하기도 전에 감상을 올리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닌 데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제약도 생기기 때문에 새해가 밝고 개봉을 한지 일주일이 지난 이제야 올리게 되는군요.

(감상치고 상당히 깁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차

너의 이름은.의 훌륭함
(1)줄거리
(2)안정적 소재와 빼어난 구조
(3)꼼꼼한 포석과 회수
(4)빼어난 영상과 음악

PC(Political Correctness)하지 않음
(1)성별 교환과 신체
(2)카메라워크와 대상화
(3)1.5탑의 비중

과연 재난물인가?
다소 난해한 정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의 훌륭함

(1)줄거리
“너의 이름은.”의 파트는 크게 다섯으로 나뉩니다.

1. 도쿄에 살고 있는 소년 타키와 시골 “이토모리”에 살고 있는 소녀 미츠하의 육체가 어찌된 일인지 바뀌고 맙니다. 처음에는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주변 상황에 맞춰서 생활하는데, 육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고, 주변과도 크고 작은 트러블을 일으킵니다.

2. 두 주인공은 메모나 일기를 남기는 방법으로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파악하고 소통을 시작하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 서로에 대해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를 확인하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직접 이야기하는데는 실패합니다. 타키는 짝사랑하던 오쿠데라 선배와 데이트를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츠하는 타키를 만나지만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데 충격을 받은 뒤 자신이 아끼던 머리끈을 선물하고(머리끈을 주는 것은 초반에, 타키를 만나는 것은 후반에 나옵니다) 여름 축제에서 혜성을 봅니다. (이 혜성은 충돌이라는 재난으로 이어집니다)그리고 인격교환은 완전히 끝납니다.

3. 어쩐지 희미해지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타키는 자신이 보았던 주변 경관을 실마리 삼아 미츠하를 찾아나섭니다. 그러나 간신히 찾아간 이토모리는 3년 전 혜성 충돌로 폐허가 되었고, 미츠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야말로 대반전의 파트입니다.

4. 타키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미츠하가 씹어 만든 술을 봉납한 사당으로 가서 그것을 마시며,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3년 전의 미츠하의 육체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마을사람들에게 대재난을 경고하지만 믿어주는 것은 친구들 뿐이라 셋이서 사람들을 피난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미츠하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키는 해질녘의 사당으로 가서 시간과 생사의 뒤틀림 속에서 미츠하와 해후하고, 서로의 이름을 잊지 말자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간이 끝나자 두 사람은 자신의 육체로 되돌아가고, 서로의 이름을 잊고 맙니다. 미츠하는 크게 낙담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소동을 일으키고 이장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사람들을 피난시키는데 성공합니다.

5.대사건으로부터 5년이 지나고, 타키는 구직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미츠하는 오프닝에 잠깐 나왔던 것처럼 정체불명의 상실감에 시달리는데, 어느날 열차에서 마주치고, 미츠하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보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게’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아 바깥으로 내달리고, 계단에서 확신을 갖지 못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가, 결국은 '당신을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말로 해후하게 됩니다.


(2)안정적 소재와 빼어난 구조
전 원래부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팬이었지만, 그래도 신카이 감독의 작품이 서사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흥행작을 만들 역량을 보였던 “초속 5센티미터”도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고, 지금까지 여섯 번 정도는 본 것 같은데, 아무리 좋은 말로 해도 이것이 좋은 ‘이야기’를 담은 수작은 아니었죠. 주인공은 자신의 안타까운 사랑에 대해 속삭이듯 독백을 늘어놓고, 마음을 전하지 못해 답답해하며, 상실감에 번뇌하고, 나중에는 엇갈린 운명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최근작인 “언어의 정원”은 거기서 더 많이 나아갔지만, 여전히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이 이야기에선 구두장인이라는 남다른 꿈을 가진 소년이 공원에서 맥주와 초콜릿을 먹고 있는 정체불명의 여인을 만나 이름도 모른 채 천천히 가까워지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염원하다가, 이후에 그녀가 자기 학교의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당한 사정으로 전근을 가는 그녀를 위해 격분하며, 그녀를 다시 만나 지극한 행복감 속에서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어쩐지 순식간에 다시 쫓아온 선생님에게 화를 냈다가,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대단히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편으로 클라이막스가 빠져버린 얘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그리고 나온 것이 “너의 이름은.”인데, 이 작품은 같은 감독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성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탄탄한 기승전결은 물론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장면 구성으로 반전의 충격에 이어 따뜻한 감동까지 줍니다. 종종 상영 시간 이상으로 굉장히 긴 이야기를 본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작품도 그랬죠.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상상하게도 하고, 만감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시작은 맥빠지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트 1은 마치 평범한 인격교환물처럼 시작되니까요. ‘우연히 몸이 뒤바뀐 두 소년소녀, 어쩌면 좋아? 넘넘 불안해!’류의 이야기는 정말 20년 전의 “체인지” 때부터 질려버렸습니다. “너의 이름은.”이 이런 식으로 홍보되는 것을 봤을 때도 제 눈을 의심했어요. 신카이가 이런 얘기를 쓸리가 없어, 하고 충격받았죠.

저는 흔히 TS(트랜스 섹슈얼)물이라고 부르는 이 장르, 소재 자체가 약간 치사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길 수 밖에 없는 요소로 웃기는 개그가 그리 세련되지 않은 것처럼,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소재로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덜 기대된다고 할까요. 남녀의 몸이 갑자기 뒤바뀌고, 신체 구조의 변화에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며, 주변에서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인격 변화에 놀라고, 인격이 바뀐 이들이 오랫동안 썩혀온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해버리고, 그러면서 사춘기 아이들이 사랑의 진짜 의미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깨닫게 된다…… 이런 콘셉트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접해온 요즘 세대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안정적인 재미거리를 제공하는 요소인 것도 사실이죠. ‘내가 다른 성별이 된다면…’ 하는 생각은 누구나 즐겁게 떠들 수 있는 얘깃거리니까요.

1997년작 체인지. 제가 어릴 때지만 이때도 이 소재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카이 감독은 보란듯이 이 소재에 다른 소재를 덧붙였더군요. 영혼 교환으로 성별이 바뀌는데, 바뀐 두 사람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사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려고 보니 상대는 과거/미래의 인물이었다는 것이죠. 이런 시간여행 커뮤니케이션 이야기도 찾아보면 제법 많습니다. 제가 본 한국 영화로도 “동감”이 있었군요. 소설 중에서는 최근 히트작으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상대가 겪을 미래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미래인이 정보를 제공해서 상대의 운명을 바꾼다는 전개는 기본적으로 극적 박진감이 있고, 감동을 주기도 참으로 좋습니다.

동감. 무선통신기기의 신비한 혼선으로 과거와 미래의 두 사람이 대화하는데, 뜻밖에도 이 사실은 쉽게 밝혀집니다.

게다가 신카이 감독은 이 설정에서 여주인공인 미츠하를 사망자로 설정합니다. 혜성 충돌이라는 대재난으로 3년 전에 죽어버린 그녀를 구해내는 것이 파트 3에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과 함께 열리는 새로운 국면입니다. 덕분에 파트 2에서 좌충우돌하는 청춘 스토리가 급변해서 비장해지는데, 관객 모두가 갑자기 숨죽이게 되는 이 전개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과연 미츠하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이 긴장감은 파트4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과연 시간여행으로 사건이 수정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으로 넘어가 신카이 감독의 기존 장기였던 애절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뭐, 전반의 분위기상 만날 것 같긴 하지만, 감독이 그간 해온 짓이 있으니까요. 운명의 두 사람이 안타깝게도 어긋나버린다는 모티브는 이 못된 감독이 가장 좋아했던 것이라, 성인이 된 타키와 미츠하가 육교 위에서 스쳐지나가는 장면에서든 계단길에서 스쳐지나가는 장면에서든 미츠하의 결혼반지를 보여주고 ‘네가 살아있다면, 내 인생은 그것으로 헛되지 않았어,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하고 끝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듯하고 오싹하군요. 그런 점에서 신카이 감독이 집착하던 비극의 모티브를 내려놓았다는 건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아무튼 "너의 이름은.”은 '성전환 시간여행 활극 로맨틱 코미디’라는 독특한 장르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재밌는 건 다 넣은 셈이죠. 소설이나 만화가 아니라 극장판 영화인 만큼 두 시간이라는 시간 제한 안에 온갖 요소를 다 쑤셔넣으면 밸런스가 무너지기 쉬운데, 이 작품은 그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잘 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장면을 어디에 어떻게 넣을지도 치밀하게 계산해서 한 명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한 명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미츠하는 무엇에 그토록 실망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고, 3년의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사건의 진상, 두 사람의 마음을 극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일종의 서술트릭 미스터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으면서도 두 사람이 해후하는 장면에서는 “보이 미츠 걸” 스토리의 감동이 있었죠. 이런 각본을 만드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3)꼼꼼한 포석과 회수
영화를 볼 때 제가 쓸데없이 집착하고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뒤에서 나올 이야기를 앞에서 어떻게 암시했는가 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도 각본이 매우 꼼꼼히 작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뒤에서 나올 중요한 이야기가 앞에서 한 번씩은 나오더군요. 예를 들어 미츠하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것도 초반의 연설 씬에서 드러나고, 이때 미츠하를 탐탁지 않게 보는 반 애들과의 관계도 나타납니다. 이 친구들은 나중에 도쿄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보여주더군요. 그리고 졸업하면 어떡할 거야? 그냥 여기서 일하지 않을까, 하던 친구들(테시가와라, 사야카)도 물론 빼먹지 않고 도쿄에서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향에서 살아야 맞겠지만, 고향이 없어졌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끈이 갖는 의미도 할머니의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되고, 시간 여행의 키가 되는 ‘쿠치카미자케’ 역시 아름답지만 미츠하가 지겨워하는 행사를 통해 사전에 준비됩니다. 시공이 어긋나고 생사가 이어지는 기적의 저녁 무렵도 신카이 유니버스를 공유하는 전작의 유키노 선생님이 나와서 설명해두죠. 그리고 테시가와라가 자판기 옆을 카페라고 농담했던 것 역시 이후에 타키가 그럴듯한 벤치를 만드는 장면, 테시가와라와 사야카가 도쿄의 카페에서 나타나는 장면으로 소화되고, 건축업을 하는 테시가와라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폭파를 배우라고 잔소리처럼 하는 말 역시 후반에는 이 친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해줍니다. 이런 포석이 없어서 아쉬웠던 건 테시가와라가 전파 해킹까지 할 줄 하는 이유가 따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 정도군요.


(4)빼어난 영상과 음악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에서 영상미가 빼어나다는 건 굳이 말하기도 민망한 지점입니다만 그래도 말을 안 할 순 없죠. 예전 이상으로, 한층 더 변태적인 배경 묘사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장기이자 집착 포인트였던, 생활감 있는 도시 묘사는 물론이고 원경으로 잡는 자연 묘사도 스태프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되었죠. 전 특히 감탄할만한 부분으로 파트4의 '해질녘 신비 속에서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을 뽑고 싶습니다. 장면의 콘셉트 자체는 사실 대단할 게 없어요. 이렇게 시공을 초월한 아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계를 초월하여 진심을 터놓는 장면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합니다. 레이스를 하면서도 이런 초월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주먹으로 두들기고 싸우면서도 대화하며, 로봇을 타고 싸울 때도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혼의 진실한 소통’이기 때문에 배경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TV애니메이션이라면 어쩐지 다들 국부가 보이지 않는 뿌연 알몸으로 등장해 어딘가를 부유하곤 하죠. “너의 이름은.”에서도 이 장면을 두 사람이 반짝이는 별만이 가득한 아공간으로 설정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 혜성을 집어넣습니다. 정말이지 변태가 맞긴 맞아요. 심지어 이런 배경 집착이 타키에게 투사되어 이토모리 마을을 찾는 단서로 작용하기까지 하니까요. 사람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하곤 하는데, 그런 감동의 포인트를 신카이 감독은 시종일관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음악은 인기 밴드 RADWIMPS와 함께 작업했다고 합니다. 어느 대학생이 좋은 밴드가 있다고 알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데, 시원하고 모던한 RADWIMPS의 음악이 적재적소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계속해서 히사이시 조의 클래시컬하고 장엄한 음악을 채용하는 미야자키 감독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동화적인 느낌이 강한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에 비해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고 생기가 넘치는 “너의 이름은.”에는 확실히 이쪽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목소리에 “천체관측”을 불렀던 범프 오브 치킨이 작업했다면 더 기뻤겠습니다만. 그리고 약간만 더 조용했으면 싶기도 했습니다.


자, 이제 전반적인 칭찬이 끝났습니다. 이제 좀 다른 얘기를 해보죠. 과히 즐거운 얘기는 아닙니다.


PC(Political Correctness)하지 않음

(1)성별 교환과 신체
사실 시사회를 보면서도 파트 1, 2에서 이건 좀 뭣한 감이 있는데, 하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랬다가 그 이후의 전개로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주위 반응을 보니 이 부분을 짚을 필요가 확실히 있겠더군요.

“너의 이름은.”이 적극적으로 여성은 애를 낳고 집안일을 해야 하며 감성적이고 이성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임금을 덜 받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 현대 사회에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깔려있는 인식을 답습하고 있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대히트 애니메이션이 이렇다는 것은 퍽 아쉬운 일입니다.

어느 부분이 문제인가? 성별 교환을 그린 파트 1, 2가 가장 문제였습니다. 이래서 제가 성별 교환소재를 싫어하는 겁니다. 워낙 뻔한데다가 뻔한만큼 기존 인식으로는 재미나면서도 올바르게 다루기도 힘들고, 올바르게 다루자면 대단히 많은 이야기를 추가해야 합니다. “체인지”에서 두 인물이 발기나 생리 때문에 고생하고 서로에 대해 이해했던 것처럼 다룰 거라면 성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게 주요한 지점이 아니라 ‘재미거리’에 속했던 만큼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큰 고민 없이 재미있어하기 좋은 장면만 남기다 보니 뻔한데다 PC하지 못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가령 육체가 바뀌자마자 타키가 미츠하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나오고, 이 가슴 만지기는 작품 내내 몇 번이고 개그로 활용되는데, 이것은 마치 개그맨들이 얼굴을 까맣고 칠하게 나와서 알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처럼 간단히 재미를 주고 PC하지는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의 구조적으로는 영리한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감독 자신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는, ‘울면서 가슴 만지기’ 씬은 많은 관객을 웃기면서 여러모로 커다란 인상을 남겼죠. 캐릭터의 죽음이라는 진지하고 무거운 전개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마냥 우는 것보다는 재미를 주는 게 훨씬 낫긴 합니다. 게다가 관객은 캐릭터의 행동에 대해 익숙해 질수록 더 큰 재미를 느끼는 법이라 이렇게 웃기는 행동을 의외의 부분에서도 반복시킴으로써 관객이 한바탕 웃고 '이탈했던 일상으로의 회귀’를 실감하게 만드는 것도 작법상으로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이 방식을 꼭 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죠. ‘성별의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웃기고 반복적으로 써먹어도 좋은’ 수단을 떠올릴 수는 없었을까요? 가령 소설판에서는 타키가 새로운 육체를 다루는 감각을 익히려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잠옷바람으로 문워크를 하는 것도 괜찮은 장면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고민스럽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된 남자가 처음으로 하는 것은? 에 떠오르는 첫 번째 답을 영상화했다는 점은 그리 창의적이라고 할 수 없겠죠

미츠하도 타키의 몸에 들어가 성기 때문에 몹시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니까 가슴 만지는 정도는 뭐 어떠랴 싶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구도에서도 애초에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미츠하가 타키에게 신체에 관련된 갖가지 금기사항을 제시하는 한편 타키가 미츠하에게 요구하는 것은 '돈을 적당히 써라', '인간관계를 마구 바꾸지 마라’ 정도라는 것을 볼 때도, 감독이 '여성이 남성의 육체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해’는 거의 없고 그 반대는 대단히 많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이 사실을 별 고민없이 재미거리로 소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지한 고민을 하자면 이런 식으로 다루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죠.

물론 그러자면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이고, 전체적 이야기의 무게중심도 전반으로 몰려 절묘하게 잡았던 균형이 깨지고 말겁니다. 그러니까 요는 '시간의 엇갈림 속에서 멀리 떨어진 운명의 상대를 접하고 구출하고 해후한다'는 콘셉트에 운명의 상대를 접하는 방식으로 ‘이성간의 인격교환'을 추가한 순간 어느쪽으로든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내포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육체 변화에서 일어나는 '코믹한 레퍼토리’를 빼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할 겁니다. 가슴 만져서 웃기는 게 시나리오 작법상 괜찮다곤 해도 그걸 뺀다고 해서 이야기 전반에 균열이 생기진 않으니까요. 그런 게 없더라도 “너의 이름은.”은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은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어온 안정적 개그를 채용했죠. 가슴을 만지고 성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며, 성별에 따른 스테레오 타입의 특성을 이성의 몸으로 드러내 뜻밖의 인기를 얻기도 합니다. PC함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애초에 없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상태에서 대중적인 소재로 안정적인 재미를 추구하려고 했으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겠죠.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인식이나 작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살펴보지 못한 신카이 감독은 창작자로서 게을렀다는 비판을 받을만 합니다. 백인의 천국, 아름다운 공주의 나라였던 디즈니에서 최근에 보이는 행보와는 크게 비교되는 일이죠. 물론 이것은 수많은 스토리 작가들이 이야기를 무지막지하게 뽑아내고 회의해서 완성하는 디즈니 시스템과 감독 개인이 이야기부터 배우를 위한 가이드 녹음까지 완성해버리는 신카이 시스템의 차이이기도 합니다만.


(2)카메라워크와 대상화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문제, 안전한 클리셰 채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는 작품의 카메라워크에서도 드러납니다. 인물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너의 이름은."에서는 시작부터 미츠하의 몸을 다리 아래쪽부터 훑으며 올라오는 카메라워크가 사용됩니다. 워낙 익숙한 방식인데다가 인물 채색이 딱히 명암을 강조해서 색기를 강조하는 방식도 아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면 그랬나 싶을 정도지만, 미츠하가 최소한 세 번 이상 이 방식으로 잡히고 오쿠데라 선배가 두 번쯤 이렇게 잡힐 동안 타키는 그냥 얼굴부터 잡히거나 원경에서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잡힙니다. '여캐는 보통 이렇게 잡지 않아?' 싶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라 할지라도 딱히 필요한 연출 방식은 아니었죠. 시각적인 면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온 신카이 감독인 만큼 이 방식을 대중적인 방식이라고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은 퍽 아쉽습니다. 전작인 "언어의 정원"에서는 성인 여성인 유키노를 잡을 때도 굳이 카메라로 훑지는 않았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가 활약하는 장면에서도 농구하는 미츠하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바스트 모핑'이 구현되었죠. 굳이 속옷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영화판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타키가 브래지어를 깜빡하는 바람에 일어난 해프닝이긴 하지만, 이런 맥락이 제대로 드러날 수 없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 분절해서 넣을 필연적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뒤에 미츠하가 남자 시선 조심하라며 여자의 몸가짐을 강조한다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감독이 설정한 미츠하의 여성상이 일본의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상인 '야마토 나데시코'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 있으며, 대중성이라는 목표를 잡기 위해 서브컬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식을 채용한 결과, 적극적 의도가 있든 없든 남성인 타키가 ‘주체화’ 되는 한편으로 여성인 미츠하는 ‘대상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판에서 브라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자세히 나오지만 대단히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의문스러운 것은 이렇게 전통적 여성상의 범주 안으로 설정된 미츠하지만 "이런 마을은 지긋지긋해요, 다음 생에는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라고 외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실연의 충격으로 청순하고 긴 머리를 잘라낸다는 낡아빠진(작품내에서 실, 끈 등이 인연을 상징하므로 극적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만) 전개 뒤에도 "남자는 항상 연애문제로 생각한다니까" 하고 사야카가 테시가와라에게 핀잔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쩌면 신카이 감독도 이런 설정이 다소 낡았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미츠하의 유형을 야마토 나데시코의 한계 밖으로 잡거나, 이후에 여기서 탈피하는 방향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3)1.5탑의 비중
구조가 기막히게 탄탄하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구성에서도 두 주인공의 비중 문제를 생각하면 완벽히 공평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육체가 바뀐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인만큼 초반의 구성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남주인공인 타키가 잃어버린 운명의 상대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흘러가기 시작하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의 이름은." 역시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타키를 먼저 만나려는 노력을 했던 것은 미츠하였고, 최종적으로 마을을 구하는 결정적 설득을 하는 것도 미츠하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미츠하의 만남이 그저 애처로운 시도로 끝났다는 점을 봐도, 그리고 타키를 만나고 산에서 내려온 미츠하가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긴급한 상황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이나, 대단히 중요한 '아버지 설득' 장면이 결말의 긴장감을 위한 것인지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봐도 공평한 투 탑 구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계단 씬 역시 실망하며 지나치는 미츠하에게 타키가 말을 거는 식이어야만 했을까요? 시원하게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도 보여주고, 계단에서도 동시에 돌아보는 식이면 낫지 않았을까요? 산 위에서 서로의 이름을 잊지 말자고 할 때, "만약 다음에 만났을 때도 내가 못 알아본다면, 그때는 또 다시 말해줘, 너의 이름을." 하고 약속하고 마지막에 동시에 서로를 불러 자기 이름을 말했어도 나름대로 공평한 구조를 취하며 감동적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이미지는 작품을 보고 나니 허구였더군요.

과연 재난물인가?

자연 재해로 인해 하나의 마을이 소멸한다는 설정이 들어간 이상, 이 작품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얼마 없을 겁니다. 신카이 감독 자신도 동일본 대지진이 이 작품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죠. 그러나 이 이야기가 재난에 대해 의미있는 이야기를 했거나,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진력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 자신이 그러한 대재난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거나 주변에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지 않기 때문에 치유에 도움이 되었다, 되지 않았다 단언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영화적 레퍼토리를 통해 생각해보면 "너의 이름은."이 재난물에 기대할 수 있는 주제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희망적인 재난물'의 주제를 설정하려면 작품에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재난 이전의 일상
B. 재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희망적 인간상
C. 잔혹한 재난 이후에도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혹은 새롭게 안정을 찾은 일상.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인격 교환이라는 재미난 이야기를 하느라 A. 일상에 대한 애착보다는 상대에 대한 애착이 더 강조되었고, B. 재난 속에서 세 사람이 고군분투하지만 숭고한 희생이 발생하거나 희망적 인간상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죠. 사야카는 아무런 확신이 없고, 테시가와라는 아버지 앞에서 포기하며, 미츠하 역시 타키를 잊어버렸다는데 충격을 받는 모습만 강조되고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C. 새로운 희망을 찾은 일상을 다뤄야 할 부분에서도 시점이 타키로 돌아가는 통에 이토모리 사람들의 모습이 파편화되어 제시됩니다. 가장 희망적인 게 테시가와라와 사야카의 결혼이었죠.

결국 이 이야기는 “보이 미츠 걸”의 러브스토리였고, 희망적 재난물로서는 많은 부분이 빠져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감독이 ‘흥행을 위해서라면 재난 이야기를 써먹어야지’ 하고 이 이야기들을 단순소재화했다고 보기에는 3년 전의 사건을 알게 된 타키의 충격이나 이토모리를 그리워하는 라멘집 아저씨의 모습들이 먹먹하게 그려졌죠. 요는 여러 소재를 다루면서도 균형은 잘 잡았지만 한계가 있었고, 그 탓에 특정 부분에서 필요한 부분이 여럿 생략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소 난해한 정서

그렇다면 “보이 미츠 걸”의 러브스토리는 빈틈없이 잘 살아남았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 생각은 이 역시 좀 모자라다는 겁니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육체가 바뀐다는 엄청난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애매합니다. 이것은 그냥 신기한 사건으로 그칠 수도 있겠고, “터치 이즈 러브”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상대 자체가 되어 상대를 둘러싼 모든 것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이니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사랑을 “너, 지금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지?”하는 대사로 깨닫게 되는 것보다는 상대의 언동이나 흔적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주어지는 게 낫다는 것이죠. 이 부분은 전작 “언어의 정원”에서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한, 아름답고 평온한 거실에서 ‘지금 이 순간이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아’ 하고 자각했던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신카이 감독이 인터뷰에서 '딱히 타키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상대를 믿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야기 전반에 운명론적인 소재와 정서가 깔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운명의 상대와는 보이지 않는 빨간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심심하면 튀어나온다는 것은 만화 좀 보신 분들은 누구나 아실 겁니다.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기록이 발견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이 이야기가 어쩌다 일본에서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아무튼 “너의 이름은.”은 이런 이야기를 아주 전면적으로 채용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미츠하가 운명의 빨간 실을 잇듯이 자신의 머리끈을 타키에게 넘겨주는 순간 두 사람은 당연히 사람에 빠진다고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고,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도 무방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빨간 실을 가장 좋아하는 단체, 클램프...

그러나 이런 전통적 신비성이 이야기로서의 합리성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좀 아쉽긴 합니다. ‘이것도 인연’ 하면서 은거한 무술 스승님이 부모를 잃고 분노한 제자에게 정신 수양을 시킬 때 할 법한 대사를 하는 것보다는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의 자취와 메모에 새삼 감탄하고 거울을 보며 서로를 더 알고 싶어하고 만나보고 싶어하는 계기가 더 길게 들어가는 게 로맨스로서는 일반적인 결정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영혼의 반쪽인 술을 좀 마셨다는 것만으로 저녁 무렵에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설정 역시 '앞에서 다 말했잖아? 신비하잖아? 그럴법 하지 않아?’ 하고 일본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정서로 퉁치고 넘어가는 감이 있긴 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제삿날에 진짜 조상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 굳이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하죠. 확실히 그렇게 생각해보면 헐리웃 방식으로, 타키가 집안에 내려오는 고문서들을 뒤적여 ‘그래, 저녁 일곱 시면 신비로운 혜성의 힘이 고대 유적에 지어진 사당으로 전달되어 시공이 뒤틀릴 거야, 해가 질 때까지 단 10분 동안 미츠하를 만나야 해!' 하는 것보다는 깔끔한 맛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러한 전통적 정서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순간에는 ‘얘들이 뭔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름답고 멋져…’하는 생각과 동시에 ‘알았으니까 데스노트도 아니고 그놈의 이름 타령 좀 1절만 하면 안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신카이 마코토

이번에는 감독 이야기를 해보죠.
서정성과 시각적 화려함으로 극찬을 받아온 신카이 감독이지만 서사성이나 입체적 캐릭터 구성에서는 그리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대히트작이 된 “너의 이름은.”역시 이러한 평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PC함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죠. 그런데 인터뷰들을 보니 이러한 문제들이 단순히 감독의 인식 문제에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단계에서 실제 인간의 관찰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에서 신카이 감독은 남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섬세한 사춘기 여학생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타인의 말이 수수께끼와 빛으로 가득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고, 그리고 열심히 상상하는 것이 창작의 근본에 있다'고 대답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인상적이기도 하고 그럴듯한 모범 답안이기도 합니다만, '최근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은 실제 인간을 관찰하지 않고 허구의 캐릭터만을 참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미야자키 감독의 발언과 비교해보면 한계가 엿보입니다. 신카이 감독은 캐스팅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미츠하가 어떤 인물일지 이미지가 없었는데, 배우 카마시라이시 모네가 "이런 시골 싫어요" 대사를 하는 것을 듣고서야 이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결정했다고 하니까요.

물론 셰익스피어도 이탈리아 한 번 안 가보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으니까 창작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실제를 관찰하고 체험을 근거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킬리만자로 이야기를 하자고 킬리만자로를 등반할 필요는 없죠. 그렇지만 이번처럼 서브컬처의 논리를 대중적 극장판으로 가져올 때는 실존하는 인간은 어떨 것인가 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캐릭터는 장발, 무녀, 요조숙녀, 부끄러움 많음 등 여러가지 요소의 조합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어떻단 말이냐, 서브컬처 논리는 흥행하는 극장판이면 안되느냐 싶기도 하지만, 신카이 감독이 앞으로도 대중적으로 호소할 생각이 있다면 서브컬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풀에서 여러 요소를 끌어다 조합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편이 현실적이고 좋겠죠. 아니면 그렇게 조합된 설정에 최대한 현실에 기반한 실제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어떤 요소가 파편화되어 구성 요소로만 존재하게 될 때 거기에선 현실성, 인간성이 제거되고 맙니다. 이것은 엔터테인먼트를 구성하는 데는 생산성면에서 썩 유리한 방식이지만, "내일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면, 강렬한 마음으로 뭔가를 붙잡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라던 신카이 감독이 마냥 즐겁기만 한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성향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신카이 감독이 어느날 갑자기 기똥찬 배경의 섹시 아이돌 애니를 만든다면 저야 그 나름대로 이 양반이 작정을 했구나, 하고 양손에 야광봉을 들고 환영하겠습니다만…….

그렇지만 당분간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 같고, 신카이 감독은 예전부터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경험과 자신이 매혹되어 있는 특정 모티브를 중심 소재로 반복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야기꾼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지만, 신카이 감독의 경우는 중첩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하늘과 자연, 고요한 시골, 이름모를 새가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신주쿠, 시골과 도시를 이어주는 핏줄처럼 고독한 철도, 보호자가 부재하는 집안, 운명의 빨간 실로 이어진 듯한 상대가 있지만 안타까운 사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슬픔, 어쩔 도리가 없는 상실감 때문에 반복되는 독백, 상대와 이어지거나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계속되는 자기계발, 우주와 별과 죽음과 부활, 단정하고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 그 여인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수용되는 아픔과 성장......

항상 세트로 사용되면서도 뭔가 살짝 빠진 것 같고, 비극적인 결말을 맺기 일쑤였던 모티브들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너의 이름은."에 와서 이것들은 충분히 활용되면서도 안정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소 아쉬운 점은 있더라도 적어도 관람하는 저로서는 이 일련의 이야기가 시원스럽게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카이 감독은 이제 어떤 이야기를 만들까요? 고전문학에서 힌트를 얻었던 두 작품에 이어서 또다시 고전문학에서 찾아낸 이야기를 확장하게 될까요?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만든다 할지라도 팬으로서 기대가 되는 한편, 그가 했던 이야기를 또다시 반복하거나 자기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미 조합된 이야기의 묶음을 별 비판 없이 도입하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는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는 이야기꾼으로서, 감독으로서 기로에 섰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저는 기존의 모티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별을 쫓는 아이”를 만들 수 있었던 신카이 감독이 다음에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고 나오기를 빌어봅니다.




극중 스마트폰으로 일기를 쓰는데 연도 몰랐다는 건, 한 달에 달하는 일상 생활에서도 한 번을 못 봤다는 건, 어물쩡 넘기긴 했어도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닌지?

덧덧
작중 기후현 다카야마 근처가 몇 장면 등장하는데, 익숙한 장소가 두 군데쯤 나와서 놀랐습니다. 특히 라멘집은 어디쯤 있는지 위치를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기후현 많이 가세요. 성지순례하기 좋습니다.

덧덧덧
개봉 전에 너의 이름은(기미노 나와)을 너의 밧줄(마찬가지로 기미노 나와)로 부르곤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마냥 헛소리만도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신카이 감독의 안배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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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팝콘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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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느긋하게 음식을 먹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드물다. 영화를 보고 듣는 눈과 귀도 즐겁고, 음식을 먹는 입도 즐겁고, 맛있는 냄새를 맡는 코도 즐겁다. 직접 손을 써서 먹는 음식이라면 손도 즐거우니 그야말로 오감이 모두 즐거운 셈이다.

꼭 그런 것을 의식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아무튼 영화를 보면서 먹는 음식으로는 치킨이나 스파게티처럼 끼니를 대신할 수 있는 것보다는 도구 없이 맨손으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스낵 종류가 적당하다. 묵직하고 배가 금방 차는 음식은 두 시간동안 줄기차게 먹기가 힘들고, 도구를 쓰거나 눈으로 자꾸 확인해야 하는 음식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할 수 없어서 적당하지 않다. 요는 영화를 보면서 생선을 발라먹긴 좀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팝콘은 그야말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아닌가 싶다. 눈으로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이 맨손으로 마구 퍼먹을 수 있으며, 그렇게 걸신들린 듯이 마구 입에 쑤셔넣어도 팝콘의 대부분은 공기라 배가 부르지 않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짭짤해서 계속 구미가 당긴다. 

이토록 멋진 음식을 누가 만들어냈을까? 유력한 설 중 하나는 16세기 프랑스에서 파브 백작 2세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파브 1세가 일찍 병사하고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백작위에 올라야 했던 파브 2세는 무척 온화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남자였는데, 그중에서도 연극을 특히 좋아하여 무대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장시간 무대 앞을 지키자니 뭔가 먹고 싶을 때가 많았고, 결국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음식이 뭐가 없을까 직접 여러 재료를 써서 궁리하던 중 우연히 가열되어 퍽 터진 옥수수를 먹어보고 반해서 거기에 조미를 하여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브의 옥수수'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오늘날 팝콘이 되고, 영화관에서 즐기는 음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파브 2세는 팝콘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가들을 아무 대가 없이 후원하고 추운 겨울에는 별채를 빌려주기까지 해서 예술의 성장을 이끈 것으로 소소하게 알려져 있는데, 이름 없는 챔발로 연주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하게 살다, 별채에서 시작된 원인 불명의 화재로 인해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를 기리는 동상과 팝콘 자동 판매기가 파리의 빅토르 위고 저택 근처에 있다니 기회가 되면 꼭 가보시길.

두 번째 설은 믿기 어렵지만 팝콘이 존재했던 것은 아주 먼 옛날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즐겼을 거라는 설이다. 뉴멕시코 주에서 기원전 3600년 경의 유적에서도 팝콘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니 정말 까마득한 전통을 가진 음식이다. 아무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전파하여 미국에서 줄곧 명맥을 이어온 팝콘은 19세기 후반부터 과자로 애용되었는데, 그러다 대공황이 닥쳤음에도 값이 별로 뛰지 않아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먹을 때 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영화관 측에서도 환영했고, 그리하여 저렴한 값에 사서 영화를 보며 먹는 음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팝콘과 영화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나처럼 소심한 짠돌이는 떼고 산다

아무튼 팝콘이 뭔가를 조용히 감상하는데 적합한 음식으로 각광받은 것은 분명한데, 사실 나는 여기에 100퍼센트 동의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팝콘이 부드러운 음식이긴 하지만 이것을 먹는 맛의 상당 부분은 중앙부의 딱딱한 부분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나는 정작 영화관에 가서는 팝콘 먹기를 꺼리는 편이다. 쿠폰이 생기거나 옆 사람이 먹으라고 내밀면 잘 먹긴 하지만, 아무래도 팝콘을 씹을 때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거슬리는 것이다. 밴드가 신명나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악당의 기지를 신나게 폭파할 때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먹기가 애매하다. 게다가 팝콘을 먹을 때 나는 소리가 꼭 내 머릿속에만 울릴 거라는 보장도 없어서 더욱 조심스럽다. 실제로 바로 옆 사람이 팝콘을 신나게 먹고 있으면 그 소리가 나긴 나는 것이다. 긴장감이 중요한 공포영화를 보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면 여간 밉살스럽지 않다.

그래서 팝콘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광고 시간에 팝콘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사람도 있는데, 호쾌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서야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는다는 의미 자체가 퇴색하는 것 같다. 중요한 부분에서는 팝콘을 녹여 먹는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무척 매너있는 방법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팝콘을 그런 식으로 먹고 싶지 않다. 바삭바삭하게 만든 음식을 일부러 촉촉하게 만들어 먹고 싶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대공황에도 값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요즘 팝콘 세트 가격이라는 것은 여차하면 영화표 자체의 값에 맞먹을 정도로 비싸서, 나같은 짠돌이는 도통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양한 맛이 썩 좋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폭리와 담합 의혹으로 고발당할 정도라면 좀 심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팝콘을 먹게 되면 거의 반드시 곁들여 먹게 되는 탄산음료 역시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평소에 차를 입에 달고 사는 터라 화장실에 자주 가는데, 그 탓인지 두 시간을 넘어가는 영화를 보면서 음료수까지 마시면 반드시 중간에 화장실을 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 말고 화장실에 간다는 건 자기 자신도 번거로운 짓이지만 남에게도 이만저만 민폐가 아니라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이런 이유들이 맞물려 최근에는 영화를 볼 때 두 시간 넘게 껌 하나만 씹고 마는데, 감상에 방해되지도 않고, 남에게 피해주지도 않으면서 입을 즐겁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 같다. 게다가 저렴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요즘 영화관에서 점점 메뉴를 늘리고 있던데 영화 감상용 껌을 파는 것은 어떤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랬다간 영화관 곳곳에 껌딱지가 마구 붙을 것 같아서 안 되겠다.

각설하고, 영화를 보며 음식을 먹는다는 건 참으로 호사스럽고 멋진 일이지만, 수십 수백명이 들어찬 공간에서 하기에는 좀 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팝콘 정도야 관객들 사이에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겠지’ 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셈이지만,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점점 더 다양한 상품을 팔아보려는 시도를 벌이고 있어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팔면 무조건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하나? 버터구이 오징어의 냄새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인가? 만약 영화관에서 팟타이나 똠얌꿍, 치킨스테이크 정식을 판다고 해도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고, 영화관에서도 전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영화표 자체의 매출보다 부가 수익이 훨씬 높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아무거나 팔아치우는데 관객은 남의 매너만을 믿고 들어가서 버텨야 한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계속 음식 종류를 늘리고 싶은 거라면 아예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는 상영관을 따로 운영하든지, 아니면 구르메 상영관 같은 걸 만들어 극장에서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한 것들을 팔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값비싼 음식을 팔아치우면서도 상영관 안에서 일어나는 불편은 관객에게 맡기는 행태는, 팝콘이 영화관에서 각광받은 이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심지어 예술을 사랑한 파브 백작의 박애 정신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라고 쓰고 싶지만, 물론 파브 백작 이야기는 내가 생각나는 대로 꾸며낸 것이다. 누군가를 기리는 팝콘 자판기가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빅토르 위고 저택 주변에는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팝콘이 반 만년 넘는 역사를 거치며 전해내려온 아메리카 대륙 전통 음식이라면... 백인들이 약탈한 자리에서 만들어낸 문화의 극치를 감상할 때 팝콘을 즐기는 기분이 좀 숙연해질 것 같군요.



후기

운 좋게 호사스러운 시사회에 당첨되어 드넓은 자리에 앉아 와인과 칵테일을 마시며 씬시티 2를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술을 파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별 문제는 없더군요. 관객들이 그 영화를 정말 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 아무튼 상영관 관리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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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트레이너는 잔혹한 현대인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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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되자마자 온 세계를 들썩거리게 했던 “포켓몬스터 고”가 몇 박자 늦게 한국에 출시되었다. 늦어도 꽤 많이 늦은 셈이라 맥빠진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고, 포켓몬스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나 역시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긴 했으나……. 나름대로 얼리어답터 비슷한 짓을 흉내내길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남들 다 하는데 혼자 팔짱 끼고 서서 “그런 게 재밌냐?” 같은 소리를 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하여 포켓몬 트레이너의 소박한 꿈을 안고 시작한 포켓몬스터 고!(이하 고켓몬) 시작하자마자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포켓몬이 나타났고, 몬스터볼을 두어 개 던져 포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잡은 내 인생 첫 포켓몬은…… 뭐였더라?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면 어떠랴. 아무튼 시작한지 한참 지난 뒤에서야 포켓몬 몇 마리를 그냥 보내고 나면 피카츄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포켓몬스터니까 꽤 잡을만 했는데, 아쉬운 노릇이다. 굉장히 먼 나라에 여행갔다가 어떤 마을을 한참 지나친 다음에야 그곳에 아주 좋은 기념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분이다. 비행기를 타고 나갔다 오면서 술을 사지 않은 격이다. 놓친 것을 영영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구하려면 적잖은 비용이 소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사실로 검증되고 말았다. 설 연휴에 시골에 내려가는 길에 들른 수산시장에서 피카츄가 다시 나타났는데 맥없이 놓치고 만 것이다. 분명 갈고닦은 솜씨로 몬스터볼을 적중시켜 단번에 포획했는데, 광분한 피카츄는 뚜껑을 뚫고 튀어나와 길길이 날뛰다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 그 뒤로 피카츄는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으니, 과연 피카츄의 몸에는 앞에만 털이 나 있고 뒤는 반질반질한 모양이다. 아니, 이건 피카츄가 아니라 기회였나…….?

그런 한편으로 허탈하게도 해외출장으로 단련된 형은 바로 옆자리에서 미끼를 던지고 더 강력한 몬스터볼을 써서 피카츄를 포획하는데 성공했다. 유학과 조기교육이 중요한 것은 더이상 현실만의 일이 아닌 모양이다. 포켓몬 트레이너의 세계에서도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논리는 엄격히 적용되어 다른 스타트라인을 만들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번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소모되며, 이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것은 바로 이 체제를 만들어낸 자들이다. 타인의 빈곤은 어디서나 돈이 된다. 게임에서는 결국 이게 잘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장황하게 쓰긴 했지만 사실 그리 낙담한 것도 아니긴 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포켓몬도 디지몬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후레쉬맨과 바이오맨의 차이인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포켓몬 세대가 전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어릴 때 내 주변에 포켓몬스터에 열광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나도 빵따위를 사먹으며 씰을 수집할만한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그 시기에 머나먼 외국으로 유학이라도 갔다온 사람처럼 묘하게 열풍에서 비껴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탓에 솔직히 게임을 그럭저럭 이어가는 지금조차도 마음 한구석에선 아무렴 어떠랴 싶은 감이 있다. 그냥 귀여운 괴생명체를 포획하는 것만으로는 열광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메마른 것이다.

그러고보니 “피카츄”가 고유한 개체에 붙은 이름이 아니라 종의 이름이라는 것도 최근에 겨우 알았다. 즉, 지우는 피카츄를 내 친구라고 부르며 고압의 전류를 방출하도록 혹사시키는 주제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콜리 종을 알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견도 ‘래시'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이건 너무한 처사다. 피카츄도 사실 지우를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내가 놓쳐버린 피카츄가 ‘원래 이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지만 게임으로 만들면서 어쩔 수 없이 여럿 나오게 된 것’ 이 아니라 ‘원래 여럿 있는 것’ 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니 다행히도 놓쳤다는 사실이 그다지 아쉽지 않게 되었다. 현상 자체야 똑같지만 의미가 다르다. 같은 ‘아아, 피카츄를 놓쳐 버렸어!’라도 그것이 원래 유일한 것이라면 ‘아아, 닛타 미나미를 놓쳤어!’가 될 수 있지만, 그냥 수많은 존재의 이름에 불과하다면 ‘아아, 가물치를 놓쳤어!’에서 그치는 기분이다. 요는 희소한 느낌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피카츄 얘기는 슬슬 그만두고 고켓몬 자체에 대한 얘기를 하자. 게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포켓스탑에서 보급을 받고, 지나가다 포켓몬스터가 나오면 남획하고, 그리고 걸어다니면서 알을 부화시키고, 트레이너 레벨을 올리며, 저급 포켓몬을 박사에게 팔아넘겨 받은 사탕을 억지로 복용시켜 포켓몬을 진화시킨다. 진화한 포켓몬스터로는 체육관 쟁탈전을 벌인다. 체육관을 점거하고 있으면 나름의 인센티브가 나오는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지배자로서의 명예가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마치 관할구역의 아지트를 쟁탈하는 “컬러 갱”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 체육관 대전쟁은 무림 고수의 영역 같은 것이고, 나처럼 유행 타서 시작해본 소프트 유저는 걸어다니며 몬스터 사냥하는 재미가 전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만으로 재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제자리에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돌아다니며 보급을 받고, 어떤 몬스터가 많이 서식한다는 정보를 받고 찾아가 미끼를 놓고 사냥을 하는 과정은 그동안 나온 다른 게임들을 생각하면 참 시답잖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 사냥과도 비슷해서 중독성이 있다. 방안에 처박혀 있던 오덕들이 덕분에 산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과장이겠거니 싶었지만,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다. 당장 나부터 일상생활을 할 때도 포켓스탑이 있는 방향으로 수십 걸음은 더 걷게 되었고, 약속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서점에 들어가는 대신 포켓스탑을 순례하며 사냥을 하게 되었다. 스태미너가 아까워서 자다 일어나 게임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던 것처럼 포켓스탑을 지나치는 게 아까워 더 걷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었다. 인간을 조종하는 방법은 의외로 참 간단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한편으로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가 과연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런 생각과는 달리 고켓몬은 지금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당장 눈앞에 희귀한 포켓몬이 나타났는데 던질 몬스터볼이 없으면 즉석 결제하는 것밖에 답이 없는 시스템이니 그도 그럴법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안에서 일어난 붐은 금방 꺼져서, 부장님이 젊은 애들이랑 놀 때 어색하지 않으려고 요즘 노래 찾아 듣는 수준으로 하는 게임이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단 내가 포켓몬의 팬이 아니라는 게 결정적인 이유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게임을 하려면 앱을 꼭 켜두어야 하는데, 앱을 켜두면 트위터를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없다. 결국 고켓몬을 동시에 돌리려면 스마트폰 하나를 더 쓰든지, 포켓몬 고 플러스, 혹은 애플워치라는 주변기기를 동원해야 한다. 드래곤볼을 찾으러 다니는 부르마처럼 지도만 보고도 두근거릴 수 있다면 돌아다니면서 내내 고켓몬을 쳐다보겠지만, 그 정도의 유인이 없으니 다른 불편을 감수하기가 싫어진다. 그렇다고 실행이 빠른 것도 아니라, 별 생각 없이 걷다가 ‘아, 여기 포켓스탑인데 깜빡했네, 하고 앱을 실행하면 접속까지 30초 가량이 걸린다(아이폰 5S로). 생활속에 녹아드는 게임치고 이건 너무하지 않은지?

그리고 세 번째는, 박사와 사탕의 정체가 뭔가 수상해서 찝찝하다는 점이다. 다들 농담삼아 하는 얘기고 나 역시 지금 반쯤 농담으로 꺼낸 얘기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정말로 수상하기 짝이 없다. 음험한 냄새가 풀풀난다. 포켓몬들을 남획한 다음 그중에서 약한 것들은 골라서 ‘박사’에게 보내고 그 포켓몬의 이름이 붙은 ‘사탕’을 받아 그 포켓몬에게 먹이는 것이 일상인데, 대담한 상상력을 가동하지 않더라도 쓸모없는 가축을 갈아서 남은 가축에게 먹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른 게임에서 당연한 관례로 사용한 ‘합성’ 시스템이면 차라리 무감각할 텐데 괜히 사탕이라는 과정을 더 넣는 바람에 묘한 현실감이 부여되고 말았다. 갈아만든 포켓몬이 아니라면 설명을 더 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방생하고 포인트를 받았다고 해주든가.

이렇게 귀여운 포켓몬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하다보면 도무지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다

게다가 현실 속의 동물보다 가상현실 속의 포켓몬을 먼저 접하고 다루는데 익숙해진 아이들이 동물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도 괜히 걱정이 된다. 뉴트리아처럼 아무렇게나 붙잡아서 팔아넘기면 되는 사냥감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포켓몬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지, 별 이야기도 없이 진짜 자연 상태인 것처럼 진행되는 이 게임에 등장하는 포켓몬들은 노랫말처럼 ‘친구’로 삼을 만큼 애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역할이나 실제성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고켓몬은 포켓 몬스터들이 아무데나 있고, 몬스터볼로 두들겨 붙잡으면 관리할 필요도 없으며, 약해서 싸움에 쓰기 힘들면 거래처에 냅다 팔아버리는 게 당연한 일상인 세상을 첨단 기술로 구현해주고 만 것이다. 애완동물을 기를 때 이것만은 지켜져야 한다는 황금률로 ‘그 동물이 자연 상태에 방치되어 있을 때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할 것’이 제시되곤 하는데, 여기에 비춰 보면 고켓몬의 플레이어는 내가 볼 때는 그다지 자랑할 정도로 윤리적인 직업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내가 감추어진 설정을 모르는 통에 멋대로 한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제 설정은 나날이 악화되는 환경 탓에 포켓몬들이 모두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되어, 포켓몬 트레이너가 이들을 붙잡아 박사에게 보내고 박사가 이들이 멸종하지 않도록 적절히 수술해서 방사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먼 곳까지 찾아가서 희귀 포켓몬을 포획하는 보람이 있다. 앞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작정이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복잡한 쪽으로 흘러가고 말았는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조금 있긴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쳐빠져 산책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던 현대인들에게 집을 벗어나 걸어다닐 이유가 생겼다는 점만은 확실히 환영할 일이다. 미국에서 은근한 신호로 “우리집에서 넷플릭스 볼래?” 라는 말을 한다는데, 산책하고 싶다는 뜻으로 “우리 포켓몬 잡으러 갈래?” 하는 것도 퍽 건전하고 귀엽지 않을까 싶다. 나쓰메 소세키가 “I love you”를 시대에 맡게 옮길 말로 생각해냈다는 “달이 참 아름답네요”까지 합하면 삼종 세트로 “우리 포켓몬 잡으러 갈래?” → “달이 참 아름답네.” → “우리집에서 넷플릭스 볼래?” 로 돌려 말하기 풀코스 완성이다. 그런데 고켓몬으로 시작해서 넷플릭스로 얘기가 끝나다니, 이런 사람이 윤리같은 단어를 들먹여도 되는 것일까…….




후기

사실 AR시스템을 쓰는 게임으로 령제로가 나와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카메라로만 보이는 유령을 포착해서 공격해오는 순간 제령! 이거라면 유령이니까 어디에 팔아먹든 주얼을 뽑아먹든 거리낄 것도 없고 좋겠죠. 테크모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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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지하철 멀리 영화관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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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영화 관람은 전국민에게 여가의 기본이 된 것 같다. 모처럼 쉬는 날이 되면 일단 나가서 영화라도 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든, 가족끼리든, 친구끼리든, 아니면 데이트든, 일단은 시간이 날 때 괜찮은 영화를 보면 시간을 재미나게 보내기로 반 이상은 성공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변에서 영화 말고는 반복적으로 즐길 수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도통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데이트라면 영화처럼 저렴하고 시간 보내기 좋은 것을 찾기가 도통 쉽지 않다. 물론 '오늘은 경복궁을 갔으니 다음에는 수족관, 그 다음에는 수영장...' 하는 식으로 매번 새 코스를 짤 수 없지야 않겠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벅차고 무엇보다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고 마는 것이다. 아예 혼자라면 딱히 여기저기 돌아다닐 의욕도 잘 생기지 않고. 결국 집 근처에서 영화를 보는 게 제일 적당하다. 어쨌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면 새로이 볼 게 걸려있기 마련이다. 같은 코스라도 그 안의 콘텐츠는 늘 새것으로 바뀌니까 영화관이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영화 관람은 여가에서 생필품적인 요소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대체 영화관이 없었을 때는 여가로 뭘 하고 지냈을까? 산책? 등산? 카페의 사색적 대화? 나도 그만큼 옛날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 여가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보급되고도 수 년이 지나도록 친구집에서 이것저것 게임하고 노는 게 전부였으므로, 다른 집단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추측하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졸업과 함께 집단과 거리가 먼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전보다 영화를 더 자주 보게 되었는데...... 점점 바빠지면서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에는 30대 초반의 영화관람률이 떨어졌다는 기사도 보았다. 씨지브이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 의하면 30세에서 34세 관객비율은 2012년 19.9%에서 2016년에는 15.7%로 떨어졌단다. 30대 초반이면 아직도 구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한창 사회에 진입해서 일에 치일 무렵이다. 여유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유가 없으니 영화관에 간다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간단히 계산해봤더니 확실히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부담이 크고, 각오가 필요한 짓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딱히 어려운 계산은 아니다. 나의 경우, 생활권역에서 가장 가까운 영화관까지는 30분 가량이 걸린다. 하지만 여기에 씻고 어쩌고 준비하는 시간, 여유 시간 30분을 더하면 1시간이다. 여기에 영화 상영시간을 2시간이라고 가정하면 침대에서 일어나 영화를 보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데 총 4시간의 시간이 소모된다. 그런데 이건 가장 낙관적인 계산이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시간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영화를 본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떠들썩하게 광고하는 블록버스터, 혹은 제작 배급 상영이 한 그룹 돈으로 이루어지는 한국 영화가 아니라면 멀쩡한 시간대가 없다. 개봉일에서 하루이틀만 지나도 상영관 수가 팍팍 줄어들고, 시간대도 저녁시간대는 거의 없고 아침 9시 언저리, 혹은 10시에서 새벽 1시 따위만 남는다. 별 인기 없는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보는 내게는 여간 힘든 상황이 아니다. 그 탓에 영화 하나 원하는 시간에 보자고 명동, 신촌, 압구정 같은 독립영화 전용관같은 곳까지 찾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동 시간이 심하면 1시간까지도 늘어난다. 편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영화 관람 2시간의 앞뒤로 1시간 반을 붙여 영화 한 편 본다고 5시간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보자고 5시에 출발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것은 10시다. 5시간을 밖에서 보내면서 밥때를 피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식사시간 30분에서 1시간을 추가하면 영화관을 선택하는 것만으로 한나절 스케줄 종료다. 그나마 서울에 영화관이 우후죽순으로 생겨서 이 정도다.


슬리퍼만 끌고 순식간에 영화관에 갈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여행길을 각오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이동 시간에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니까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린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게임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통수단으로 이동하는 시간이란 반드시 중간중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분절되어 맥이 끊기고, 걸어다니거나 차를 기다리는 몇 분 몇 분으로 소멸해버린다. 택시로 이동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도무지 한 덩어리로 쓸 수 없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니 그 시간을 은근히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용도 비용이다. 영화를 만원이라고 치고, 이동에 약 3000원, 식사에 7000원이라고 가정하면 2만원인데다가, 만약 영화 관람을 택하는 대신 그 시간에 최저시급으로 일을 했다고 가정하면 내가 다섯 시간 동안 벌 수 있었던 돈이 32350원이다. 물론 요따위 생각을 머리에 담고 다니면 도무지 여가라는 게 성립할 수 없겠지만, 나는 비뚤어진 구두쇠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특히 기대하고 본 영화가 재미없었을 때.

그마나 저렴해서 국민적인 여가인 영화 관람이 이렇게 혹독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복잡해진다. 휴일에 하루 종일 침대에 나자빠져 있어도 모자랄 판에, 영화 하나 보고 오자고 일어났다가 최소 4시간 후에 돌아오게 된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문화생활은 분명 멋지고 삶에 색채를 더해주지만, 그 앞뒤 과정이 상당한 고통을 주고 마는 것이다. 죽도록 피곤할 연령대의 관객이 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굳이 영화 보자고 영화관까지 갈 필요도 없는 시대가 아닌가. 막 개봉해서 따끈따끈한 영화를 극장에 앉아 느긋하게 관람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드물긴 하지만, 방구석에 앉아서 이불을 덮고 원할 때 정지시켜 맥주와 안주를 가져오며 보는 영화의 즐거움도 결코 만만치 않다. 경제적으로는 더욱 그렇고. 누굴 만날 일이 없다면 스트리밍 서비스로 명작을 저렴하고 편하게 보는 게 합리적이다. 문화생활에 합리성 따위를 따지는 것처럼 슬픈 일도 없지만, 다들 그런 식으로 아무데서나 가성비와 합리성을 따지고 사는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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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선 고딕체, 종이에선 명조체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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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란 급진적인 개념일까, 보수적인 개념일까? 가독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에는 급진적이었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낡고 보수적인 개념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전자기기 화면으로 보는 텍스트는 대체로 고딕체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딱히 신경쓰지 않고 큰 위화감이나 불편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가독성이란 종이 매체에 집착하는 고전적 독서가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아닐까?

그러나 '책 읽는 맛'에서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나 역시 당장 이 글을 고딕체로 쓰고 있고, 다른 블로그나 인터넷 기사가 고딕체라고 분통을 터뜨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서체에 따른 가독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익숙한 서체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만화는 명조체에 장평을 줄여서 날씬하게 만든 것이 가장 좋다. 딱히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옛날에 많이 읽던 만화들이 그런 서체를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만화들이 정사각에 가까운 서체를 쓰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영어를 읽다가 중국어를 볼 때 느낄 법한 갑갑함이다. 아무튼 말풍선에 들어가는 글자는 얄쌍한 게 좋다.

한편 잡지에 들어가는 글자는 어쩐지 명조체든 고딕체든 별로 상관없는 것 같다. 칼럼처럼 호흡이 긴 글은 명조체로 써줬으면 하고, 실제로도 많은 잡지가 그렇게 편집하는 것 같지만 칼럼에 고딕체를 썼다고 페이지를 넘겨버리진 않는다.

게임 카드 같은 데 들어가는 텍스트는 어느쪽도 나쁘진 않지만 고딕체가 낫고 익숙하다는 기분이 든다. 게임 카드에 넣는 텍스트가 명조 계통이면 글귀의 무게가 어쩐지 무겁게 느껴진다. "카드 1장을 뽑는다" 정도는 가볍게 읽을 수 있어야지, "펜은 칼보다 무겁다" 처럼 묵직한 마음으로 읽으면 심리적으로 좀 지치는 감이 있다.
사실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겠지만 이것은 아마 매직 더 개더링을 5판부터 시작한 탓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소설만큼은 절대적으로, 반드시 명조체여야 한다. 이것은 결코 양보하고 싶지 않다. 고딕체로 써놓은 소설을 읽으라는 것은 라면을 포크로 먹으라는 것처럼 끔찍하고 잔혹한 일이다. 결코 불가능한 짓은 아니지만 도무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아이북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한국 책에 명조체를 적용할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탈옥을 감행하기도 했다. 모 전자책 서점이 대성하게 된 것은 전자책을 깔끔하게 만들고 독자들에게 명조체를 돌려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요즘이야 대부분의 전자책 서점이 서체 변경을 지원하게 되어 전자책 읽는 맛도 썩 나쁘지 않지만, 초창기에는 전자책따위 누가 읽을까 싶을 정도로 고역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전자책을 열었다 하면 반드시 설정을 나눔 명조나 코펍 바탕으로 바꾸는데, 글을 쓸 때는 코펍 바탕이 가장 나은 한편 읽을 때는 나눔 명조가 약간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이것도 코펍 바탕으로 인쇄된 종이책을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실 서체 때문에 구시렁대며 눈을 비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는 텍스트를 다루는 생산자 일을 하면서도 그런 것에 눈꼽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 크라우드 펀딩으로 산 잡지와 티알피지 룰북 두 권이 시원스러울 정도로 가독성을 무시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룰북은 서체 자체는 괜찮았지만 줄간격이 좁아서 좀 답답했고, 잡지는 부제목에 쓸 서체와 본문에 쓸 서체를 반대로 써서 읽는 내내 눈에서 진땀이 날 것 같았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이래서야 도무지 읽고 싶지 않다.

이것은 아마추어니까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겠는데, 프로라고 꼭 이런 사항에 민감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몇몇 웹소설 사이트는 기본을 고딕으로 해놓고 변경할 옵션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글자 크기나 배경색은 조절할 수 있어서 이중으로 화가 날 지경이다. 어쩌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적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사용자 경험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영리적으로 유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이런 것을 세심하게 신경써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웹소설 사이트는 원래 종이책 만들던 민음사에서 만든 브릿지가 유일하다.

이렇다보니 인터넷을 쓰면 쓸수록 명조체니 고딕체니 굳이 따지는 것은 어쩌면 나뿐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명조체 따위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런 현상에 대해서 살짝 가설을 세워봤는데, 그것은 바로 가볍게 즐기는 스낵컬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명조체는 꺾이는 부분이 글자마다 특징을 주어 구분하기 쉽기 때문에 호흡이 긴 글에 쓰고, 고딕체는 직선적이고 각지고 커 보여 명시성이 강하기 때문에 호흡이 짧은 글에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호흡이 긴 글이 줄어들고 있으니 명조체가 줄어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탓에 명조체만 보면 궁서체를 보는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고딕체가 서체의 기본으로 자리잡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오래지 않아서 종이 소설책도 고딕체로 나올지 모른다. 명조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몹시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취향이 다변화되더라도 시장 논리에 의해 소수의 취향은 무시되는 세상이다. 20년쯤 뒤에는 고딕체로 나온 소설을 타이핑해서 불법적으로 명조체본을 만든 뒤 돌려보는 불온서체모임이 생길 수도 있다. 아마 안 생기겠지만, 생기면 나도 금방 유혹당하겠지. 아무튼 정말로 명조체란 서체적으로 소수성을 갖게 된 것일까? 웹소설 사이트에선 왜 명조체 옵션을 추가하지 않는 것일까? 이 의문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후기

최근에 종이책으로도 나온 제 소설 “심야마장”은 다행히도 명조체로 인쇄되었습니다. 안심하시고 구입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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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쇄소는 찾기 힘들고 선명한 미소녀는 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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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인쇄해야 할 문서 13장이 있다. 그것도 미소녀 일러스트가 가득 들어간 문서가. 어떡할 것인가? 아마 이런 상황에 마주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 하지만 나는 취미상 가끔 그런 숭고한-다만 어디다 자랑하기는 힘든- 임무를 띠곤 한다. 그 때문에 예전에는 무한 잉크 공급 장치를 장착한 프린터를 사용했다. 잉크젯 프린터의 카트리지에 호스로 잉크탱크를 연결하여 저렴하게 구입한 벌크 잉크를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개조 장치다. 하지만 그 프린터가 고장난 이후 새로 구입한 프린터는 정품 카트리지만을 사용하는 모델이다. 혁신적인 기술로 잉크 소모량을 절감했다는 말에 혹해서 산 것인데, 정작 몇 번 시험해보니 고화질 인쇄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잉크가 덜 들어가지도 않았다. 컬러로 열 장 스무장 뽑아대면 순식간에 잉크가 반절로 떨어지는 것이다. 저렴하지도 않은 비용으로 깔끔하지도 않은 인쇄물을 얻을 이유가 없다. 프린터 회사에서 하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어쩔 수 없다. 이제 인쇄소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쇄소가 어디있단 말인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라면 인쇄소따위 골라서 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일반 주택가에서 괜찮은 인쇄소를 찾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아파트 단지마다 하나씩 있어도 좋으련만. 다들 컬러 인쇄를 어디서 하고 있는 걸까?

그리하여 결국 내 행동 반경 안에 있는 사무지구의 대형 사무용품 전문점을 찾아갔다. 컬러 인쇄 350원. 썩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다만 인쇄에 쓸 수 있는 컴퓨터가 단 한 대라서 앞 사람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는 한참 기다렸다. 그러다 옆을 보니, 다른 사람이 직원에게 직접 메모리를 넘겨줘서 인쇄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쪽이 빠르고 편할 것 같긴 했다. 그러나 미소녀들이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표가 들어간 문서를 직원에게 보여주면서 "아, 거기서 거기까진 두 장씩이고, 나머지는 한 장씩이에요."하고 지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못할 것도 없지만, 못할 것도 아니라고 굳이 가시밭길을 갈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다음날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모니터를 보니 청록색 바탕에 해상도가 매우 낮은 바탕화면을 쓰고 있는 컴퓨터는, 놀랍게도 운영체제가 XP였다. 운영체제 자체는 문제될 게 없지만, 낮은 해상도가 컴퓨터의 파멸적인 성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껏해야 800*600 정도가 아닐까? 맙소사, 요즘은 재활용하는 날 길바닥에서 주워온 컴퓨터도 저것보다는 성능이 좋을 것이다. 이 가게는 뭐가 문제란 말인가? 아무튼 그 컴퓨터가 50메가쯤 되는 파일을 멀쩡히 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메모리를 꺼냈으나, 꽂을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가 카운터 뒤쪽 저 밑에 있었다. 인쇄하는 가게에서 메모리를 자율적으로 쓰게 놔두지 않았다. 정말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낡아빠진 컴퓨터에서 기밀이라도 훔쳐갈까봐? 아니면 바이러스라도 옮을까봐? 아무튼 나는 길게 탄식한 뒤 발을 돌렸다.

그리하여 다음날,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고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해상도가 낮은 나머지 폰트가 뭉개져 보이는 포털사이트에서 파일을 다운받았다. 그런데 한글 파일에 연결된 프로그램이 아크로뱃 리더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일단 실행해봤다. 파일을 열지 못했다. 잠깐, 그러니까, 인쇄를 하는 가게에서 한글 파일을 열지 못한단 말이지. 나는 이런 황당한 사태를 예견하고 PDF파일을 만들어뒀어야 하는 것이다. 멍청한 나, 한심한 나. 나는 시선을 돌려 옆 자리를 보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직원에게 물어서 그를 부른다면 파일을 복사해서 인쇄를 시도할 수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직원 어디있느냐고 사람을 불러들여서, 파일을 복사시킨 다음 미소녀가 즐비한 파일을 자랑할 기분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쯤 되니 인쇄가 멀쩡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쓸만한 인쇄소를 찾아다니는 내 마음속의 풍경이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가게를 탈출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지도 앱을 켜서 인쇄소로 검색했다. 그리고 뜻밖에 가까운 곳에 인쇄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쇄, 제본등을 전문으로 하는 체인점으로, 24시간 운영하는 데다, 외관이 무척 깔끔하고 모던했다. 이만하면 기대할만했다. 그리하여 약간 쭈뼛거리며 들어가, 인쇄 전용으로 보이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운터 너머의 남자 직원이 인쇄할 거냐고 말을 걸어왔다. 검은 뿔테를 쓴, 키 큰 호시노 겐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컬러 인쇄가 되느냐고 물었고, 그는 된다며, 몇 장이냐고 대답했다. 13장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장당 천 원이라고 말했다. 장당 천 원이라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서 되물었지만 역시 장당 천 원이라고 했다. 대체 뭐 얼마나 굉장한 인쇄기술을 쓰기에 한 장에 천 원을 받는단 말인가? 즉석에서 필름을 뽑아서 옵셋 인쇄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인쇄술이라는 것도 여러가지 옵션이 있으니 그런 가격이 걸맞는 인쇄물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뽑을 이미지는 가로 65밀리에 기껏해야 480 픽셀밖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 엄청난 인쇄술은 필요없다. 그냥 컬러 레이저 프린터로, 백상지에 뽑으면 그만이란 말이다.

옆에 350원짜리 인쇄소가 있는데 뭘 믿고 그렇게 비싸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론 그냥 비싸다는 말만 하고 돌아나왔다. 인쇄하러 들어갔다가 돌아나온 게 대체 몇 번째지? 학교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때는 정말 골라가며 인쇄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에 인쇄소가 넘쳐났던 것이다. 대학교라는 인프라는 상상 이상으로 막대한 힘이 있었다.

아무튼 막막해졌다. 선택지는 둘이 남았다. 한글 파일을 PDF로 변환해서 다시 그 사무용품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면 그냥 돌아가서 당당하게 직원을 불러 뽑아달라고 하는 것. 어느쪽도 절대 불가능한 짓은 아니었다. 직원에게 파일을 보여주는 것도 잘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긴 했다. 직원 쪽에선 그냥 일거리에 불과하고, 내가 골라놓은 이미지들도 수위는 전연령에서 넘어가지 않으니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시 그 재개발 현장에서 출토된 듯한 컴퓨터를 생각하면 도무지 가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 컴퓨터만 아니었더라도 벌써 인쇄를 하고도 남았으리라.

고민 끝에 나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다니는 도서관의 자율 프린터였다. 장당 500원. 가격은 그리 싸지 않다. 350원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비싸게까지 느껴진다. 350원으로 13장이면 4550원. 그러나 500원으로 13장이면 6500원. 무려 1950원 차이다. 역시 파일을 변환해서 다시 찾아가볼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자신이 참으로 비참하고 궁상스러운 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0원도 안 되는 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아깝다고 이 고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저저번주에는 분명 디즈니 캐릭터 가챠에 3000원을 써서 두 팔이 잘린 듯한 우디 피규어를 뽑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나는 고작 장당 150원 더 쓰는 게 무서워서, 고색창연한 컴퓨터 환경에 맞추기 위해 파일을 변환하고 이메일로 보내고 그것을 다시 일회용 로그인을 통해 다운받고 인쇄 버튼을 누르는 게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2000원은 가까운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하는 대가로 요구할 경우 빵이나 사 먹으라고 그냥 줄 수도 있는 돈이었다. 사생활 보장 비용으로 추가될 경우에도 낼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동시에 사생활을 보장받는다는 생각으로 도서관의 자율 프린터를 사용했고, 당장 내다버려도 아깝지 않은 컴퓨터와 싸울 필요도 없이, 남의 눈길을 신경쓸 필요도 없이 간편하게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럴 작정을 했더라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었으리라. 궁상이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아주 사소한 뭔가를 아낀다고 온갖 고민을 하고 난리를 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다. 50만원짜리 핸드폰을 살까 60만원짜리 핸드폰을 살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5000원짜리 짜장면을 먹을까, 5500원짜리 짜장밥을 먹을까 고민하는 식이다. 자신의 편안함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기면 고민할 일도 줄어들 텐데, 도무지 그걸 못 하는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돈 문제 이전에 뼈에 스민 사고 방식에서 오는 라이프 스타일인 것 같다.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선 안 된다. 좀 더 대담하고 편하게 살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막 인쇄해서 온기가 남아있는 신데렐라 걸즈 이미지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후기

요즘 혹독하게 바빴네요. 그리고 전 이 난리를 쳐놓고 며칠 전 치경부마모 치료에 18만원을 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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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상아질은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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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전부터 이가 약간 신통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신 음식이나 초코바 같은 것을 먹으면 어금니쪽이 시려왔다.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걸까? 사실 그럴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식사한 뒤에는 꼬박꼬박 성실하게 이를 닦고 있는 데다가, 일하는 동안 군것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집안 대대로 치아가 엉망이라 어릴 때부터 양치에 대한 잔소리를 꽤 많이 들었고, 그래서 치아 관리에는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재작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충치 치료를 해봤을 정도다. 말하자면 치아적 우등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재작년에 치과 진료 기록이 남고 말았다는 걸 보면 내가 뭔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치아적 우등생으로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어느새인가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지. 타성에 젖었을 수도 있다. 내가 양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양치가 나를 하는 상황. 칫솔에 치약을 바르고 적당히 쑤셔댈 뿐인, 거품을 뱉는 것만이 목적으로 바뀐 듯한 양치. 과장하자면 그런 식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성스럽게 이를 닦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럭저럭 값이 비싼 시린 이 전용 치약을 사서 이를 닦기 시작했고, 그 덕인지 한동안은 괜찮게 되었다. 불소가 상아질을 코팅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몇 주 전부터 증상이 재발했다. 또다시 치과에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양치를 더욱 가열차게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지? 이럴 리가 없는데? 조금 더 열심히 했어야 했나? 하지만 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버티기에는 위험한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곧 장기간 한국을 떠나야 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무려 12일에 걸친 여행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 기간동안 증상이 악화되어 이가 마구 아프기 시작한다면 이만저만 낭패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저주스러운 경험이 되리라.

그래서 망설이던 끝에 치과에 갔다. 아침 일찍. 재작년에 갔던 치과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사랑니를 뽑으라고 종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갔다. 도착하고 보니 전에 간 곳보다 썩 넓고 깔끔한 곳이었다. 원장이 오기 전이라 간호사가 증상을 간단히 듣고는 기다리라고 했다. 아침 햇살이 따뜻한 테이블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꺼내 일기를 쓰다가, 원장이 온 뒤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편안하고 오싹한 의자에 앉아 입을 벌렸다. 적당히 나이가 있는 원장은 내 이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더니, 의자를 일으켜 세워 내 이빨 사진을 모니터에 띄우고는 간단히 설명했다.

단 것을 얼마나 먹고 안 먹고는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론적인 부분만 말하자면, 치경부마모였다. 치아의 아래쪽, 잇몸과 닿는 부분이 닳아버렸다. 어금니 세 개의 치경부가 그꼴이 되어 신경이 민감한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이를 잘못된 방법으로-특히 가로로 힘차게 문질러대서 생긴 증상이란다. 원장은 쇠막대 같은 것으로 잇몸을 눌러 시큰한 맛을 보여주며 환부를 확인하고는 설명했다. 굳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었지만, 아무튼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마모된 부분은 자연회복 되지 않기 때문에 레진으로 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레진이라면 충치 치료 때 조사해봐서 대강 알고 있었다. 치아나 잇몸과 비슷한 색으로 만들 수 있고 이물감이 없는 데다 부착이 간편해서 널리 쓰이는 재료지만 결정적으로 보험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건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누구 잘 보일 사람 없으니까 좀 추하고 싼 걸로 해주세요, 할 수도 없었고, 아, 그냥, 좀 시리다고 죽는 것 아니니까 그냥 갈게요, 할 수도 없었다. 치아 문제가 대부분 그렇듯이 저절로 나을 일은 없고 방치해서 증상이 악화되면 신경 치료까지 하느라 호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당장 치료하는 것이 가장 저렴하고 현명한 길이었다. 나는 맥없이 치료에 동의했다.

아말감으로 때우는 것과는 확실히 달라서, 잇몸에 레진을 부착하는데는 총 15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발견한 곳 한 군데를 추가로 치료하고도 그 정도였다. 빠른만큼 감사하고 잘 된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귀중한 휴일에 깨어나보니 하루가 이미 다 지나버렸을 때 느낄법한, 사소한 억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치료비는 할인해서 18만원이 나갔다. 내가 알던 시세보다 싸서 다행이다 싶은 한편으로, 정말로 중요한 뭔가를 어처구니 없이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저번 주에는 고작 2000원쯤을 아끼느라 인쇄소를 세 군데나 돌아다녔다. 그리고 취미생활에 도저히 20만원이나 되는 돈을 쓸 수 없어서 PS Vita도 포기한지 꽤 되었고, 핸드폰도 그럭저럭 나쁠 거 없지 하고 합리화하며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 18만원이, 아침 햇살을 받은 물안개처럼 사라진 것이다.

더욱 억울한 것은 이 치아 문제가 나의 나태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재작년에 충치 치료를 한 뒤로 나는 이를 열심히 닦았고, 그리고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후로는 더 열심히 닦았다. 다만 그 방법이 매우 잘못되었을 뿐이다. 오래 살자고 수은을 먹은 것과 비슷한 꼴이다. 말하자면 나태가 아니라 무식이 죄였는데, 왜 그 누구도 이를 가로로 닦아대면 치경부 마모라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일까? 역시 20대 후반쯤 되면 30대를 대비해서 올바른 건강 정보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채널을 하나쯤 구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애/섹스 칼럼도 재미야 있겠지만, 30대쯤 되면 상실한 뒤로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치아 건강이란 정말 오싹하리만치 중요한 것이다. 상어가 아니니까 한 번 난 영구치가 새로 날 일은 없다. 썩었다고 뽑아버리고 아, 내년쯤에는 새로 나겠지 뭐, 하고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다. 60년이고 90년이고 똑같은 놈을 망가지지 않게 잘 관리하며 사용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인체에서 가장 힘을 많이 받는 부위인 데다가, 시도때도 없이 산성물질 따위를 처바르는 마당에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다. 그런 부분이 한 번 손상되면 절대로 스스로 회복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겨우 복구할 수야 있지만, 그건 결국 원본을 모방한 가짜에 지나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고도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땜질한 것에 불과하다. 원래 ‘나’ 였던 부분을 잃고, 내가 아닌 것을 내가 잃어버린 부분의 모양으로 만들어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손상되지 않은 원래의 나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내 입안에는 느껴지지 않는 이물질이 자리하고 만다. 그리고 나를 대체하는 이물질의 비율은 앞으로 점점 늘어나겠지.

지우개 가루를 다져서 똥을 만드는 것보다도 빠른 치료가 끝난 뒤, 간호사는 다른 이상이 없느냐는 내 질문에 충치는 이제 거의 안 생길 것이고, 마모나 잇몸 문제로 올 일이 더 많을 거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말은 마치 작은 상처를 받지 않는 요령은 늘었지만, 그 요령이 쌓여서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가져올 거라는 예언처럼 들렸다. 물론 치과 간호사가 그런 악담을 할 이유가 없으니 이건 순전히 내 확대해석이지만, 어쨌든 충치를 피하려는 노력이 잇몸을 갈아버린 것만은 분명하다. 제대로 된 방향도 모르고 하는 노력은 늘 이런 비극을 초래하고 마는 것이다. 좀더 일찍 제대로 된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며칠 뒤, 스케일링을 받으러 갔던 어머니가 충치뿐만 아니라 치경부 마모까지 있어 50만원 가량을 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고 맙소사. 매일같이 건강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어머니에게도 제대로 된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후기

최근에 개의 치아를 유전자 복제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미래에 돈만 많으면 자기 이빨을 제조해서 심을 수 있다는 뜻이겠죠. 솔직히 그보다는 양치해주는 로봇이 먼저 나와주길 바라지만……. 아무튼 우리는 돈을 벌면서 미래를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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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투어는 잔혹한 여행의 여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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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박 12일짜리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듣기에는 썩 멋지긴 합니다만, 실상은 패키지 투어로 어머니를 따라갔다 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네, “패키지 투어” 말이에요. 유럽은 두 번째지만 패키지 투어는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아니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물론 패키지 투어 자체를 무가치하고 여행을 즐길 줄 모르는, 형편없는 기형적 행태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습니다만, 막상 해보니 분명 아주 깔끔하고 편리한 여행법이라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언제 어딜 어떻게 갈 것인지 일정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고, 여럿이 다니니까 안전한데다, 곳곳에서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그야말로 아무 문제 없이 계획표에 있는 여행 전체가 패키지로 수행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책자를 뒤져서 여행 정보를 착착 찾아내고 구글맵을 써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며 영어나 간단한 현지어로 교섭을 할 여유나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저렴하고 깔끔한 여행으로 선택할만 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완전한 자유여행만 해온 저로서는 당연히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여행에는 자유가 없었으니까요. 여행이란 원래 자유를 느끼러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 아닌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패키지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나 답사에 가까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어느 여행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돈을 받으면서 해야 할만한 일정을 여행으로 소화하고 있다고요. 정말 여행하는 내내 그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더군요.

아무튼 이번 여행에서 고통스러웠던 점을 몇 가지 추려보죠.


1.특공대 같은 일정

유럽이면 거의 지구 반대편이죠. 가는데 비행기로 도합 열 세 시간쯤 걸립니다. 전 아랍 에미리트로 가서 환승한 뒤 이탈리아로 갔는데, 대강 여덟 시간에 여섯 시간? 그쯤 걸렸던 것 같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느낀 고통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죠. 아무튼 그런 다음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몸은 찝찝하고 머리는 떡지고 면도도 못한 상태에서 밀라노를 구경했습니다. 정말 그림같이 멋진 도시더군요. 고풍스러운 아케이드는 물론 밀라노 대성당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어요. 그곳을 한 시간 반쯤 구경했습니다.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이틀처럼 느껴지는 시간 내내 비좁은 비행기에 갇혀 있었는데, 거기서 나와서 끝내주게 멋진 도시에 도착해놓고 아주 잠깐 사진 찍는 것 말고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짧은 자유 시간 중 절반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공중화장실이 없어서 카페에서 영어를 못하는 직원을 상대로 빵을 산 다음 거기서 주는 표를 갖고 건물 최상층에 있는 화장실의 개찰구에 표를 찍고 들어갔다 내려와야 했거든요. 빵 먹을 시간도 없었고, 당연히 밀라노 대성당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습니다. 한 100미터 밖에서 사진 찍고 버스를 탔죠. 그게 이번 여행에서 만든 밀라노의 추억입니다. 그런 다음에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갔죠. 이탈리아는 안녕입니다. 뭔소린가 싶겠지만 정말이에요. 이탈리아는 더 볼 일이 없었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의 숙소까지 다섯 시간쯤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 정신없이 씻고 자고 일곱 시에 일어나 식사하고 여덟 시에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두 세 시간 이동해서 다음에 도착한 지역은 두 시간쯤 구경한 것 같군요.

세비야 대성당 안마당에서

여행이 전반적으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일곱 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엉덩이가 부서지도록 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에 아주 짧은 시간 구경하고, 그리고 이동해서 점심을 먹고, 구경하고, 다시 이동해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하면 씻고 아주 잠깐 숨을 돌린 뒤 자고 또 짐을 챙겨 나가는 겁니다. 무슨 훈련소에 다시 온 줄 알았어요. 평소에 전 여덟 시에서 아홉 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버스는 한 달에 한 번쯤 타죠. 종일 앉아서 일하긴 하지만 한 시간에서 두 시간에 한 번은 일어나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피웁니다. 게다가 하루 대부분을 혼자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흘간 생활패턴을 그렇게 바꿔야 했던 겁니다. 모든게 거의 정반대였죠.

특공대나 훈련소 같았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게, 가이드들이 친절하고 좋긴 했지만 아무리 친절해봤자 일정이 달라지지도 않고 자유 시간이 늘어나거나 여행 성격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이게 게임 속의 작전 수행이면 어떨지 변환해봤습니다.

“현지 시각 0700시 기상. 식당에 집결하여 아침 식사를 마친 뒤 0800시에 버스에 탑승하여 다음 작전지 A시까지 이동한다. 이동 시간은 네 시간으로 예상된다. 이동 중 휴게실은 단 한 번 가게 되니 용무를 제때 마칠 수 있게 주의하도록. A시에는 알다시피 A 대성당이 공사중이다. 귀관들의 임무는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 뒤 한 시간 안에 대성당의 각 입구와 실내 곳곳을 촬영하는 것이다. 임무 완수 여부와 관계 없이 한 시간 뒤 재집결하여 다음 작전지로 이동한다. 그리고 작전지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도가 높은 곳이다. 안전과 개인 물품 관리에 유념하도록. 사고가 발생할 경우 영사관은 귀관에 대한 책임을 일체 부정할 것이다.”

과장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었다고 해도 일정 자체는 별로 변할 게 없겠죠. 애초에 고작 열흘 만에 너댓개의 국경을 넘나들게 되어 있었으니 이런 일정이 나올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느긋하게 구경하고 숨돌릴 자유를 넣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꽃할배에도 나왔던 콜럼부스의 관

그동안 했던 여행에서 가장 멋진 순간들이 어떤 것이었나 생각해보면 모두 내가 선택한 순간의 기쁨과 음미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가게에 무턱대고 들어갔는데 아직 개업을 준비중인 가게라 시험삼아 만든 타코야키를 얻어먹었던 것도 멋졌고, 사찰의 정원이 너무 평온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서 쉬었던 것도 좋았죠. 어떤 길이나 건물이 멋져서 서너 번씩 같은 자리를 맴돌 때도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패키지 여행에서는 선택의 자유 자체가 없었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수신기를 끼고 설명을 들어야 하며, 아주 짧은 자유시간에도 사진을 찍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쇼핑을 해야만 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죠. 세비야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였는데, 그때 마침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시작되더군요. 세비야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는 최대인 성당이라 정말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싹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백발이 성성한 연주자가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까지 시작했다구요. 단 10분만이라도 좋으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그 음악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바쁘기 때문에 “여러분은 운이 참 좋으시군요” 하는 가이드 설명을 줄줄 들으며 성당 안쪽을 관람해야 했던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기분이란,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아귀의 심정이랄까요. 대체 얼마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기에 사사로운 감정은 끌어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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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투어는 잔혹한 여행의 여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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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버스를 탄 자에겐 안식조차 없다

평생 이렇게 버스를 오래 탄 기간이 없을만큼 버스를 오래 탔는데, 끔찍하게도 버스가 편하지도 않았습니다. 아, 비행기도 마찬가지였군요. 비행기 얘기부터 먼저 하죠.

아랍 에미리트의 에티하드 항공을 이용하게 됐는데, 일단 USB 충전 포트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다 구비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던 모양이군요. 덕분에 보조배터리를 활용하면서 불안 속에 작업해야 했죠(그렇습니다. 전 마감을 앞두고 일감을 가져갔습니다). 그건 뭐 그렇다 칩시다. 결정적인 문제는 엉덩이가 아팠다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엉덩이가 아팠던 적이 없어요. 엉덩이가 우그러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파서 결국에는 바람을 넣는 목베개를 깔고 앉았다 두 시간쯤 후에 빼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나무 의자에 앉아도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약간 싸늘하게 식어가는 프리타타와 미지근해서 면이 풀리다 만 닛신 컵라면을 먹으며 일을 하다 보니 이것도 일종의 고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명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한 자리에 계속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즐겁고, 그래서 비행도 즐긴다'는 내용의 수필을 쓴 적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정정합니다. 제가 건방졌습니다. 그건 비행이 서너 시간일 때 얘기고, 하룻밤을 자야 할 정도로 긴 시간 내내 맛없는 식사를 하며 일을 하는 건 도저히 즐길 수 없습니다. 어쩌면 비행을 즐기기엔 제 육체가 너무 늙은 것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비행을 끝내고 나서 탄 버스는 한층 더 끔찍했습니다. 우등 고속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토록 고통스러울 줄이야. 일단 엉덩이가 아픈 건 말할 것도 없어서 여행 내내 그놈의 베개 쇼를 해야 했습니다. 만약 베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군요.

사실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 겁니다. 적어도 잠들어버리면 고통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놈의 돈이 뭐라고 버스에서도 일은 해야 했습니다. 무릎 위에 가방을 올리고, 그 위에 태블릿을 놓은 채 핸드폰을 두드렸죠.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이 잘 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움직이는 버스라는 열악한 환경인 데다가, 기기의 한계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소음이었습니다. 패키지 투어는 아는 사람들이 두 명 네 명 뭉쳐서 신청하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이 얘기하기 시작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자연히 끼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지쳐서 좀 조용해졌다 싶으면 친절한 가이드가 일어나 목적지에 대해 설명하거나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도난사고 따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그때마다 전 그걸 들을 수도, 듣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관광지에 가면 아는만큼 보이기 마련이라 간단한 설명이라도 들어두는 편이 당연히 좋습니다. 주의사항은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어적인 일을 한다는 건 한 손으로 세모를 그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것과 비슷한 짓입니다.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 지친 저는 결국 이어폰으로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좀 낫더군요. 그러나 장시간 버스 여행의 진정한 공포는 고작 소음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저는 둘째 날 깨닫게 되었습니다.


3.재난은 입으로 들어가 밑으로 나온다

위에도 짧게 적었지만 최대 여섯 시간까지 버스로 이동하는데 화장실은 고작 한 번 들렀다 간다는 걸, 둘째 날까지도 몰랐습니다. 여행 계획표에 당연히 그따위 것은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때가 되니 그런 흉악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전 솔직히 선진국으로 가서 장시간 버스를 타니 당연히 버스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세비야 대성당의 성스러운 화장실

전 화장실을 자주 가는 사람입니다. 앉아있는 시간 내내 차를 마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차를 마시지 않을 때라도 여차하면 화장실에 가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방광 자체가 퇴화했는지도 몰라요. 두 시간을 넘어가는 영화를 볼 때 음료를 조금이라도 입에 댔다간 반드시 후반에 화장실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장시간 버스에 갇히게 되었으니 당연히 불안해서 뭘 입에 댈 수 있을리가 없겠죠. 장시간 이동에서 거의 유일한 낙 중 하나인 군것질을 포기하고 작업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휴게실이나 관광지에 도착했을 때 뭘 시원스럽게 먹을 수도 없습니다. 인체란 '방금 먹었는데 화장실 가서 싸고 왔으니까 괜찮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요. 그리하여 식사를 하면서도 ‘목이 마르지만 지금 물을 더 마셨다간 이따 제발 버스를 세워달라고 애원해서 벌판으로 뛰어가야 될 거야’ 따위 생각에 뭘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버스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일반적으로 세 시간 정도 500밀리 가량의 소변을 저장하고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광이 가득찰 때까지 두 번의 요의를 느낀다고 하죠. 처음이 옐로 카드, 두 번째가 레드 카드인 셈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옐로 카드가 신경쓰여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감각은 이상하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이상한 법이니까요. 그때문에 출발 직전에 화장실에 가서 일행을 모두 기다리게 만든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작업에 매달리면 버틸 수 있다는 걸 깨달아 그나마 나았지만, 승객 전원에게 그런 위안거리가 있었던 건 아니었죠.

딱 한 번 긴급한 상황이 닥쳐왔습니다.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아주머니 한 분이 다급함을 호소했던 것이죠. 그러나 고속도로 아무데나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괜찮겠느냐는 둥, 심호흡을 하라는 둥 심각한 말들이 오가고, 양수가 터진 임신부를 태운 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버스는 20분을 더 달려 예정에 없던 휴게소에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군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고생해서 간 화장실 사정도 그리 시원치는 않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유럽은 화장실에 대단히 야박해서, 관광지에서 화장실을 쓰려면 어느 가게를 이용하고 그곳 화장실을 빌리거나, 아니면 0.5유로에서 1유로까지 하는 유료 공중화장실을 써야만 했으니까요. 물이 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역사적으로 똥오줌을 길바닥에 버리는 게 당연한 시절이 길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공원 화장실에도 ‘화장실 요금 징수원’이 있었습니다. 좌우의 남녀 화장실 가운데에 TV와 의자, 냉장고 싱크대 따위를 놓은 직원 생활공간이 마련된 화장실도 있더군요.

유럽 서쪽 끝의 유료 화장실에서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중에는 좀 과장해서 지금 관광지 구경을 다니는 것인지 화장실 탐색을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화장실 이용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숙련된 킬러가 어딜 가든 탈출구를 확보해두듯이 어디서든 화장실이 있는 곳을 숙지하고 도착해서 한 번, 출발하기 전 또 한 번 이용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화장실이 없어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는 일이고, 이건 별 생각 없이 웃어넘길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간의 기본적 생리현상을 신경쓰고 억제하는 게 열흘간이나,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지역에서 계속되면 슬슬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의 문명이 본능적 욕구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발달해왔다곤 하지만, 사실 여러 욕구중에서 배설욕구만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법이고 인류는 이를 대비해 곳곳에 화장실을 건설해왔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 화장실이 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죠. 그러니 원할 때 화장실에 가서 배설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아닐까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기본권은 어디까지 제한될 수 있을까요? 다 큰 어른이 고작 화장실 때문에 진지하게 불평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번 여행을 가장 끔찍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화장실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꼴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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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투어는 잔혹한 여행의 여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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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얘기하긴 힘들고 듣기 싫은 말은 많이 듣는다.

사실, 부모님이 전에 간 투어에는 젊은이들이 많았다기에, 그래도 몇 마디 잡담할 사람 두어 명은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니더군요. 방학 시즌도 아니라 그런지 정말 청년층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 다음으로 어린 사람이 장년층으로 넘어가는 나이였고, 그래서 전 정말 TV프로그램에 나오던 ‘혼자 어린 인솔자’ 비스무리한 기분을 맛봐야 했습니다.

물론 진짜 인솔자는 따로 있으니까, 직접 안내하고 식사할 자리를 예약하는 등 진짜 노동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낫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가이드가 없는 자리에서 모자란 영어로 통역을 하거나 핸드폰 설정을 도와야 했다는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도통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는 겁니다. 대화가 원만하게 진행되려면 문화적 배경이 비슷해야 하죠. 그리고 한국처럼 취미가 삭막한 나라에서 문화적 배경의 형성에는 나이가 가장 큰 역할을 할 겁니다. 무슨 동호회 모임에서 간 투어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되겠어요.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얘기하고, 전 그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효도하는 아들 얼굴로 웃고 있거나 핸드폰을 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끔 화제가 튀긴 하더군요. 뻔한 방식으로 말이죠. 나이, 직업, 배우자 유무, 애인 유무… 이런 호구조사부터 하고 상황에 맞는 잔소리를 하는 겁니다. 덕분에 좋은 여자 만나서 빨리 결혼하라는 얘기를 꽤 많이 들었습니다. ‘명절 in 유럽’이더군요. 다른 대화가 이루어질 법한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게 된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렇게 이해한다고 딱히 기분이 덜 나쁜 건 아닙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냥 말을 걸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스페인 광장의 마차. 듣기 싫은 말과는 별 관련 없지만 아무튼 이건 꼭 탈만합니다.



그리하여 전 틈틈이 사진 관련 일을 하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진 찍기에 열중, 혹은 열중하는 척 해야 했는데, 그것도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5.사진은 여행을 지배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카메라 선전 문구가 있었죠. 굉장히 잘만든, 멋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말이 맞기도 하구요. 그만큼 기록은 중요한 겁니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죠.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 하잖아요. 좋은 곳에 갔으면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가 적당히 많은 걸까요? 어차피 적당히 추려내면 되니까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디지털 카메라는 아무리 찍어대도 돈이 드는 게 아니잖아요.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는 것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를 가져가야 하죠. 스마트폰으로 찍는다면 더 챙겨봤자 셀카봉 정도니까 괜찮지만, 정말 ‘카메라’를 쓴다면 이것을 운반하는 데 노동력이 들어갑니다. 전 기왕 가는 김에 화질 좋은 사진을 남기자고 형의 DSLR을 빌려갔는데,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장비를 항상 갖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성가신 일이더군요. 목에 오래 걸고 있으면 목이 뻐근하고 어깨에 걸고 다니면 반드시 어딘가에 부딪치기 마련이라 대체로 손에 들고 다녀야 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기본 장비가 많기도 했어요. 스마트폰으로 위치 정보와 텍스트 기록을 남겨야 했고, 자꾸 먹통이 되는 로밍 에그를 자꾸 리부팅 해줘야 했으며, 거기에 여행사에서 빌려준 무선 수신기를 목에 걸고 이어폰을 귀에 낀 채로 설명을 듣는 동시에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카메라를 번거롭게 가져갔으니 당연히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비교적 자제해서 1500장 나오더군요. 요는 그 많은 사진을 찍는 내내 저는 그 멋진 풍경을 눈이 아니라 조그만 뷰파인더로 봤다는 뜻입니다. 360도 끝내주는 광경을 어떻게 잘라낼까 궁리한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지는 계산도 못하겠군요. 사진을 무한정 찍을 수 있는 만큼 눈에 보이는 것을 즐기는 대신 사진 찍을 궁리를 하는 시간도 무한정 늘어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세상에 내가 찍은 사진보다 훨씬 멋있게 찍은 사진이 얼마든지 많을 텐데 나까지 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풍경을 찍어봤자, 혹은 매번 똑같은 포즈로 내가 보고 싶은 방향의 반대 방향에 있는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사진 찍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죠. 물론 이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어지간하면 보정도 하고 추려내서 자랑도 할 텐데, 볼 사진이 1000장을 넘어버리니 정리도 귀찮아서 시차 때문에 어긋난 날짜 정보만 고치고 처박아버렸습니다. 딱히 다시 꺼내보면서 아, 여긴 정말 좋았지, 하고 감상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대체 왜 찍었던 걸까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진은 중요한 것이고, 여행지에서 사진 찍는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투어를 하는 동안 사진과 여행의 중요도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여행에서 찍는 사진은 즐겁고 경이로운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구경도 하고 감상도 하고 그런 다음에 '멋있으니까 사진을 찍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일단 도착했으니 사진을 찍고, 사진 찍게 저기도 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건 ‘보수를 받는 사람’이 하는 여행 방식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걸어다닌 것, 그리고 사진 찍은 것을 빼고 나면 도무지 경험이라고 남은 게 거의 없으니까요. 하다못해 옛날에는 삼각대 없이 동행이 같이 사진에 나오려면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관광객이나 행인에게 말을 걸어야 했고, 그런 기억이 재미로 남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셀카봉이 있어서 모조리 자체 해결합니다. 뭐랄까, 최후의 보루 같은 게 무너진 느낌입니다.

톨레도의 아름다운 광경. 물론 이 사진도 높은 곳에 10분 정차했을 때 찍은 것.

물론 이것도 전부 패키지 투어의 목적이 '가성비를 최대화해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곳을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이라도 일반적인 여행에서는 앉아서 차든 맥주든 한 잔 마시면서 숨돌릴 시간을 갖기 마련인데, 고작 30~45분 자유시간에서 15분 화장실 갔다오면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마무리.

불평을 하자면 한없이 더 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구체적인 투어 비난이 될 것 같으니 그만 정리하죠. 요는 열흘 넘게 유럽 구경을 했지만 그것은 구경과 촬영일 뿐 여행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적어도 제 기준에선 말이죠. 하다못해 하루 세 끼가 부족할 식사마저도 현지 식단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고 한식, 중식, 호텔식으로 때웠으니 말 다했죠. (남프랑스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요리점에 가는게 말이 되는지…?)

물론 즐길 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좋은 설명을 들으며 안전하게 여러 곳을 본 것도 사실이고, 나중에는 어른들 농담에도 적당히 페이스를 맞출 수 있었으니까요. 정리해서 패키지 투어를 갈 거라면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 최대한 여유 있는 일정으로 좋은 버스를 타는 상품을 고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수학여행 가는 기분은 맛볼 수 있을 거고, 더 잘하면 투어 속에서도 여행하는 시간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저는 어떻냐구요? 글쎄요, 패키지 투어를 하기에 저는 체력적으로(특히 엉덩이와 방광이) 너무 늙었고, 정신적으로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또 한다면 체력적으로 다시 젊어지거나 정신적으로 더 늙은 다음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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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셔요, 초미세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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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온갖 악당이 난리를 치는 고담시 주민들은 왜 이사를 가지 않을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답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직장, 집, 학교 등등 삶의 터전이 거기 있는 데다, 무엇보다 집값이 바닥을 쳤을 테니 도무지 이사를 갈 수 없는 것이리라. 고담시 주민들은 그곳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사건이 터졌을 때 감을 잡고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곧 괜찮아지겠거니 기다리다가 결국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냥 살다 보니 테러 한 두건 일어나도 북한 미사일 발사 바라보는 한국인처럼 ‘뭐야, 또야?’할 정도로 무심해졌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가열되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요즘 미세먼지 예보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대기질이 나쁘다는 말까지 듣는 상황이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을 떠나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더러, 애초에 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 뉴스에서 연일 초미세먼지가 1급 발암물질인데 내일은 경보니까 실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둥 부지런히 떠들어댈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한동안 오염도가 낮은 시기가 지속된 데다 대선까지 다가오니 이제 모두가 미세먼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금 이 글을 쓰는 도서관은 창문을 모두 활짝 열고 몇 시간째 ‘신선한' 바깥 공기로 환기하고 있다. 마치 미세먼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선에 흘러들어온 기분이다.

하지만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게,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는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도 아니고 강렬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데다 하늘은 늘 뿌얘서 뉴스로 확인하지 않으면 가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마트폰으로 앱을 설치해서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마시고 있는 공기에 발암물질이 섞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서 굳이 앱까지 설치하고 수시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한편 나는 지금 대기 상태를 확인하는 앱을 세 가지나 깔아놓았다. Dusty, 미세미세, AirVisual이 그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세 가지 앱에서 전하는 정보가 전부 제각각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기 상황을 다수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에반게리온에서 캐스퍼, 발터자르, 메르키오르 세 대의 슈퍼컴퓨터가 분석한 결과를 참고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앱에서 끔찍한 상황이라고 하는 판인데 간혹 ‘쾌적’이라고 주장하는 게 어째 허황된 것 같아서 Dusty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다수결을 쓸 수 없게 된 셈인데, 그러면 어떻게 결정하느냐? 둘을 다 보고 더 낫다고 하는 쪽만 참고한다. 한 쪽이 심각, 한 쪽이 보통이라고 하면 흠, 보통인 것 같군, 하고 창문을 여는 것이다.

당연히 나도 이게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국민들이 기분 나쁠까봐’ 기준을 낮춰서 설정한 국내 관계부서나 다름없는 짓이지만 어쩔수가 없다. 담배를 피우려면 창문을 열거나 밖에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이 정도면 바깥 공기를 마셔도 별 문제 없을 거라는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담배나 피우면서 대체 무슨 폐걱정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폐를 망가뜨리는 생활 습관이 있기 때문에 더 민감한 것이다. 실컷 발암물질을 빨아들인 다음에 또 발암물질 섞인 공기로 숨을 돌리면 영 좋지 않을 것 아닌가? 적어도 발암물질을 마셔야 한다면 내가 선택한 것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꾸 핑계를 만들다 보니 결국은 만사가 귀찮아지게 되었다. 미세먼지가 심각할 때 담배 피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니 ‘담배 좀 오래 피웠다고 생각하지’ 싶기도 하고,
‘나쁨이면 뭐 어때, 종일 나다니는 것도 아닌데’하는 생각이 점점 확장되어 몇 시간씩 밖을 돌아다닐 일이 있어도 마스크를 따로 챙기지 않게 된다. 미세먼지 좀 마셨다고 다음날 당장 기침이 나고 머리가 깨지게 아픈 건 아니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인터스텔라’ 초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먼지 때문에 접시를 매번 엎어놓고 새로 닦아야 할 정도라면 이렇지 않았겠지. 그렇다고 그쪽이 낫다는 것도 아니지만.

2027년, 미세먼지를 뚫고 출근중인 한국인들(아님)

아무튼 다들 무감해지다 보니 정말 미세먼지 따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특히 건물 안에 들어가면 그냥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깔끔하고 안전한 곳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을 놓는 것 같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공기청정기가 가동되지 않는 곳은 깔끔이고 안전이고 없는 게 아닐까? 창문을 닫아 놓으면 분명 미세먼지의 유입은 차단될지 몰라도 환기가 되지 않는 실내 공기는 금방 탁해져서 건강에 해롭다. 그렇다고 환기를 하면 미세먼지가 들어온다. 이산화탄소와 발암물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셈이다. 그러니 미세먼지가 심각한 날에는 반드시 창문을 닫고 공기 정화기를 가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공기 정화기도, 그것을 가동하는 것도 전부 다 돈인 반면 미세먼지에는 아무런 실감이 없기 때문에 그냥 유난 떠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창문을 여는 게 보통이다.

마스크도 마찬가지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는 말을 들으면 마스크를 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쓰기는 귀찮다. 마스크란 본질적으로 귀찮은 물건이다. 모자처럼 머리에 덮어쓰는 것도 아니고 천으로 호흡기를 막아야 하는데, 이 천을 고정하는 방법이라는 게 대체로 귀에 끈을 걸거나 머리 뒤로 고무줄을 감는 것이다. 어느 방식이든지 나처럼 세 걸음 떼면 이어폰을 꽂는 인간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다. 이어폰을 쓴 사람에게 마스크가 줄 수 있는 고통의 백미란, 역시 마스크를 쓸 때는 이어폰을 먼저 꽂았는데 뺄 때는 이어폰 부터 빼려다가 끈이 걸리는 것, 그리고 그게 싫어서 마스크부터 쓰고 이어폰을 꽂았는데 마스크부터 벗었다가 이어폰이 툭 빠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보 같지만 꼭 이걸 헷갈린단 말이지. 그렇다고 마스크를 쓰기 위해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 귀찮은 것도 짜증나는 마당에 아무 마스크나 쓸 수 없다는 것도 까다롭다. 초미세먼지는 정말 지극히 작은 입자라서 일반 마스크로는 걸러낼 수 없으니 방진 등급이 인증된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데, 이것은 또 일회용이다. 하루는 쓸 수 있다고 쳐도 하루밖에 못 쓰는 마스크를 계속해서 사들이는 것도 이만저만 부담이 아니다. 말 그대로 숨만 쉬는데 돈이 나가는 셈이니, 그냥 미세먼지고 뭐고 무시해버리는 게 속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일회용 방진마스크를 몇 달 째 계속 갖고 다니는데, 이건 이제 마스크라기보다는 그냥 나도 여차하면 호흡기를 보호받을 수 있다는 위안을 주는 부적이 된게 아닌가 싶다. 여차하면 더위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오벨리스크처럼 모셔놓고 청소도 하지 않는 에어컨처럼.

그리하여 이래저래 결과적으로 초미세먼지의 실체없는 위협을 그야말로 공기처럼 받아들이고 있는데, 확실히 몸에 나쁘긴 나쁘다니 이삼십년 후에는 너도나도 폐가 상해서 어느 공기 좋은 시골로 요양을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터널을 지나 눈덮인 마을에서 아름다운 처자를 만난다든지, 아니면 꿈만 같은 소울메이트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자기 할머니였다든지, 뭐 그런 일들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창작물 속에서 폐병을 앓아 시골에 갔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사람은 어째서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이것도 근현대 판타지의 틀이 아닐까?

하지만 미세먼지가 거국적으로 날아드는 이 상황은 거짓말 같지만 멀쩡한 현실이고, 개인의 질병도, 어느 한 지방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이라면 어딜 가도 터널을 빠져나가봐야 진국塵國이고 매드맥스일 따름이다. 정말이지 나중에 국가에서 무슨 소릴 할 지 알 수 없으니 돈이나 열심히 벌어야 하는 것일까……. 답답해서 도무지 담배를 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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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가는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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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늙어서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남보다 젊은 감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이 안이한, 근거 없는 자만이고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다(엄밀히 말하면 몇 달 되었다).

후배들과 잡담을 하다 노래방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노래만 부르는, 한 때 유행했던 ‘토토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졸업해서 뿔뿔이 흩어진 뒤로는 노래방 갈 일도 거의 없었으므로 그러기로 했다. 이 제안은 특히 내게 구미가 당길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란 내가 ‘최신 가요’ 같은 것은 도무지 듣지 않는 인간이라 다같이 옛날 노래나 부르면서 ‘아, 이 노래 진짜 오랜만이네' 같은 소리를 하면 생판 모르는 노래를 주구장창 들을 때보다 훨씬 흥겹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야기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대여섯 명이 노래방에 모였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아서 두 가지 문제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내 레퍼토리가 사실상 애초부터 토토가에 근접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신곡’을 가장 활발하게 듣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시기라 CDP를 갖고 다니며 매일 음반 몇 장을 챙겨 핥듯이 듣고, 질린다 싶으면 새 음반을 사거나 이것저것 모아서 구워댔던 시기다. 그러다가 인권을 획득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가요를 끊고 J-Pop이나 애니 삽입곡을 듣기 시작했으니, 지금 노래방에 가봤자 타임슬립으로 미래에 떨어진 사람처럼 비슷한 노래만 빙빙 돌려 부를 수밖에.

두 번째는 후배들의 ‘추억의 노래’ 레퍼토리가 나와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쿨’이나 ‘클론’ 처럼 알기 쉽거나 공전의 히트를 친 발라드 몇 곡은 괜찮았다. 하지만 후배들이 가장 신나게 부르는 것은 ‘슈퍼-쥬니어’, ‘빅-뱅’ 같은 아이돌 그룹의 히트곡이었다. 아이돌과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담을 쌓고 사는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아이돌과 거리가 있는가 하면, 그나마 몇 명인지 아는 그룹이 소녀시대, 젝스키스, 신화, SES 정도인 수준이다. HOT도 핑클도 몇 명인지 헷갈린다. 3의 배수가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니 종종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잘은 모르는 노래들을 들으며 ‘다들 신난 것 같으니 다행이군’ 따위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딴에는 비장의 수단이라고 '영혼기병 라젠카', ‘슬램덩크'처럼 국내 방영했던 만화영화 주제곡을 몇 곡 불러봤지만 이것도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친척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너바나를 부르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도 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에야 비슷한 작품들을 보고 지내니까 동시대 사람으로 지낼 수 있지만, 국내 방영작은 정확히 그 시기에 TV를 봤어야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굳이 주제곡을 부를 거라면 ‘포켓몬’ ‘디지몬’ ‘나루토’ 등을 불렀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내 시대의 추억이 아니다.

한날 한시에 노래방에 가도 품고 있는 추억은 서로 다르다


그리하여 요즘 노래 대신 옛날 노래로 추억에 젖어보자는 계획은 보기좋게 빗나가서 나는 개강 파티에 끌려온 지도교사 같은 느낌을 맛보고 말았고, 2000년대 중반의 애니 삽입곡으로 간신히 늙은이의 여명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젊게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가끔은 자신이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사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튜브에 누워 자다가 먼 바다에서 깨어나 ‘응? 여기가 어디야?’ 하듯 당황하는 사태에 직면하고 마는 것이다. 늙는 건 서럽지만 그걸 직시하지 않으면 더욱 서러워진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이래저래 나이 들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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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앞의 메뉴판 염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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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보면 사기꾼이 자신은 돈 자체보다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킬 때 가격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갈구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대사를 보고 돈 없는 사람의 피로를 참 잘 포착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워낙 궁상스러운 사람이라 여러 음식점 중 하나를 골라서 들어가야 할 때 바깥에 가격표가 나와있지 않으면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마치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뱀파이어처럼 문 밖에서 기웃거리며 벽에 걸린 메뉴판이 보이지 않을까 안쪽을 엿보곤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딱히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가게 안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까봐 먼 발치에서 눈을 찡그리고 엿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실 가게쪽도 저렴한 가격이 장점이라고 생각하면 값을 잘 보이는 곳에 붙이든 메뉴판을 내놓든 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웃거려봤자 십중팔구 발길을 돌리게 되어 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네로같은 심정이다. 까짓거 뭐 얼마나 한다고 그걸 못 들어가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전에 우리 가족이 6만원을 예상하고 간 대게집에서 16만원이라는 대지출을 하는 걸 목도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까짓거 뭐 얼마나 하겠어’ 라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아무튼 사무실이 많은 지구에서는 특히 뭘 얼마에 파는지 알아보는데 상당히 애를 먹게 된다.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가 등지와 비교하면 영 편치 않다. 대학가는 500원만 해도 상당한 경쟁력이 발생하는 곳이라 가격을 잘 보이게 해놓든지, 아니면 무턱대고 들어가도 딱히 근심스러울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어른들은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일까? 그렇게 보면 나도 나이에 비해 지갑이 제법 젊고 생생한 셈이다. 앞날이 창창하다.

근사한 식당일수록 가격을 알 수 없어서 가게를 코앞에 두고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한다

하루 한 끼 5000원짜리 식사를 하는 대신 좀 더 고급스럽게 6000원짜리 식사를 하면 어떨지 진지하게 계산해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짜장 대신 볶음밥을 먹는 식이다. 한 달에 서른 끼 정도를 먹는다고 가정하면 당연히 3만원의 추가 지출이 발생한다. 일 년 내내 이 수준을 유지하면 36만원이 더 나간다. 딱히 흉악한 지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작 그걸 아껴서 그럭저럭 목돈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돈을 모으는 것보다 알파고가 인류를 지배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러니 식사 수준을 높여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삶의 질을 간단히 높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월 30000원짜리 식생활 업그레이드 패키지 서비스 구독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당장 쓸 돈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당장 엊그제만 해도 TRPG 제작 크라우드 펀딩에 약 10만원을 후원했을 정도다. 얼핏 들으면 제정신이 아닌 소리 같지만, 그렇게 문화적으로 소비할 돈을 끌어오려면 예산에서 줄일 수 있는 게 식비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돌려막기가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 먼 옛날 아주 어릴 때부터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손쉽게 선택한 것은 식비 줄이기였다. 그때는 정말 줄일 게 전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좀 싼 것으로 배를 채운다고 당장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 그리하여 어릴 적 예산 편성 방식이 늙도록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스무살의 예산 편성이 여든 살까지 가는 게 아닐지?

아무튼 그 결과 음식점 앞에서 기웃거리며 가격표를 염탐하는 수상한 남자가 탄생하고 만 것이다. 고담시 빌런도 아니니 딱히 자랑스럽진 않지만, 이렇게 뼛속까지 스며든 습성이 문제가 되는 순간이 있다. 당연히 타인과 식사를 할 때다. 아무리 나라도 적당한 상식과 한줌의 체면이 있으니 남들과 식사를 할 때는 가격표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 견실한 수입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메뉴판을 보면 머릿속에 '고객님의 주문 내역과 별점 내역을 기반으로 메뉴을 추천해드립니다' 하는 배너가 뜰 것이다. 내 머릿속에도 뜨기는 한다. 하지만 난 그걸 일단 옆으로 치워놓고 메뉴를 저렴한 순으로 정렬해 본다. 그러고 있자면 이번에는 칼로리 표가 시야에 어른거린다. 그렇게 세 가지 표를 대조해가면서 먹고 싶은 것중에 비교적 증세를 덜 해도 되며 칼로리가 가혹하지 않은 메뉴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격이 저렴하며 가볍고 성능이 좋은 노트북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다. 완벽한 교집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느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기껏 놀러나와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걸 먹느니 안 먹는 게 나은 노릇이라 결국은 돈이나 칼로리를 포기한다. 그러면 이후에는 가혹한 증세로 위장 복지금을 삭감하거나, 운동할 여력이 없으니 밥을 대충 때우며 담배나 피울 수밖에 없다.

사실 예산을 식비에 더 투자하기만 하면 이런 궁상스러운 짓을 조금이나마 덜 할 수 있다.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을 즐기자고 식비를 줄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쓸모없는 짓을 즐기자고 사는 것이 아닐까? 생존 이외의 부분을 다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인간에게 관보다 더 큰 집은 필요없는 게 아닐까?

물론 고급스러운 식사도 분명 식문화니까 이런 논리로 식비 줄이기를 합리화하다 보면 식문화 자체를 부정하기 쉽다. 흔히 ‘커피 마실 돈으로 책을 한 권 샀으면…….’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논리도 확장하면 사람은 죽지 않을 만큼 피죽만 먹고 살아도 된다. 끔찍한 말이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가끔씩 그럭저럭 인테리어가 괜찮은 식당에서 맛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

결국 이 궁상은 내게 있어서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고 식문화의 우선순위는 다른 문화 콘텐츠에 비해 낮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돈이 좀 더 늘어나거나 우선순위가 바뀌면 가게 앞을 서성대는 짓을 그만두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식문화에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할 것 같진 않으니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는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적었듯이 이 짓을 하루이틀 한 게 아니라 거의 본능에 가까운 습성이 되었다. 고양이가 밥먹는 곳 근처에서는 물을 잘 마시지 않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설령 연금복권에 당첨된대도 비슷한 패턴이 평생 이어지지 않을까…….

그러니 식당 주인 여러분, 부디 메뉴판을 더 잘 보이게 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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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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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보건지소에 가서 인바디 측정을 했다. 길만 두 번 건너면 큰 보건소가 있긴 한데, 그곳은 다른 구라서 깊은 골목길 안에 있는 우리 구 보건지소로 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새로 지은 보건지소가 썩 깔끔하고 예뻤다는 사실이다. 뭐랄까, 소자고령화와 이촌향도로 노인들만 남은 일본의 촌동네에 새로 생겨 마을 사람들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는 뉴스에 나올 것만 같은 건물로, 그리 크진 않지만 건물 안의 통로를 한 공간처럼 쭉 잘 보이게 빼놔서 넓어보이고, 목조 내장재를 잘 써서 부자 호빗의 집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인테리어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안에 들어가서 바로 접수하고 직원 안내를 받아 2층의 검사실로 올라갔는데, 상담을 해주는 담당자가 두 곳을 격월로 옮겨다녀서 이번 달에는 안 계신다고 했다. 격월로 담당자를 기다려야 하다니, 정말 서울 같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전극이 달린 기계에 맨발로 올라가 전극이 달린 손잡이를 잡고 측정을 시작했다. 마치 전기를 이용한 처형도구나 인간 개조 기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으아아아, 아이캔두디스!!"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썩 재밌었겠지만, 물론 그러진 못했다. 그러나 한없이 치솟는 체지방량 게이지를 보고 있자니 장난이 아니라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듣기로는 이게 이 모양이면 정상 범위라는 것 같아요" 하는 식의 직원 설명을 듣고 나와서 건강의 성적표를 천천히 살펴봤다. 나도 수치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구체적인 수치를 말하지는 않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다 표준이고 체지방량만 과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내장지방은 아니지만 '고도비만' 그룹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적게 먹고 운동도 하며 신경을 쓴 줄 알았는데 형편없는 점수였다. 97점 나왔을 줄 알았는데 79점이었던 수능 수리 점수를 봤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가장 안정적인 날만 운동하고, 영 신통치 않은 날엔 대체로 술을 마셔댔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체중을 재지 말고 줄자를 쓰라는 말이 있는데 고통의 수치가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아 줄자는 사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그 성적 자체가 아니었다. 여기서 더 노력할 자신이 도통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젊고,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었다면 까짓거 운동 좀 하면 되지, 하고 매일 운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 성과도 금방 올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그만한 에너지가 없다. 의욕도 없고 시간도 없고 수단도 없고 총체적으로 난국이다.

당장 떠오른 것은 물론 먹는 것을 줄이는 것이었으나, 이미 세끼 다 상식적으로 챙겨먹고 있지 않아 한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섭취 칼로리를 더 떨어뜨리면 생산성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명백히 삶의 의욕도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육체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초대사량이 평균치 중에선 꽤 낮은 편이었다. 인간은 덜 먹을 수록 기초대사량이 점점 낮아지고 이것은 다이어트를 끝냈다고 평소대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덜 먹는 다이어트를 할수록 더욱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섭취 칼로리를 떨어뜨리는 다이어트를 할 거면 평생 그렇게 먹으라는 말인데, 나는 여기서 더 내려가진 못하겠다.

검색만 하면 쏟아지는 건강한 식사를 누가 몰라서 안 먹나


그래서 먹는 걸 줄이는 건 포기했다. 그럼 당연히 운동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운동하면 지방이 연소되고 기초 대사량이 늘어나니까 상식적으로 가장 현명한 결정이다. 다만 운동에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다. 당장 직접적으로 돈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결정적으로 시간이라는 가장 귀중한 자원이 들어간다. 게다가 매일 운동을 시작할 정신적 에너지, 그리고 그 운동을 필요한 만큼 유지할 육체적인 에너지가 요구된다. 아무래도 내게는 뭐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를 어쩌란 말인가? 매일매일 죽겠다는 생각을 하며 귀가해서 늘어지는 사람이 어떻게 카드 광고처럼 열심히 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출퇴근을 하면서도 운동따위 따로 하지 않아도 건강하고 힘이 넘쳐나던 시절을 떠올렸다.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다. 그때는 자전거로 출퇴근해서 하루에 한 시간 넘게 상당한 수준의 운동을 했으니까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럼 그때처럼 나도 자전거를 타고 다녀볼까?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것도 상책은 아니었다. 일단 한밤중 라이딩이라는 건 상당히 위험천만한 짓이다. 구청에 자전거로 출퇴근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는 길이 거의 다 인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하철 이동 시간을 갉아먹으면 그만큼 독서 시간도 줄어들게 된다. 또 무엇보다 요즘 대기질이 엉망이다. 살 빼다 폐가 먼저 망가지겠다.

이렇게 저렇게 핑계거리를 찾다 보니 문득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니, 입을 옷도 있고 그렇게 심하게 쪄 보이는 것도 아닐 뿐더러 비만으로 인한 질병이 없으며 내 몸매에 사실상 큰 불만도 없고 누구 잘 보일 사람도 하나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서러울 정도로 고생해서 살을 빼야 한단 말인가? 현대 사회의 실상과 맞지 않는 비정상적 지표와 외모 지상주의가 나를 두 번 울리고 있다! 나는 건강하고 내 몸을 사랑한다!

……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어봤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 몸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는 않는다. 미운정이 들었을 뿐이지. 그리고 불안에 떨지 않으며 술을 마시려면 최소한 현상유지는 해야 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평소에 하던 운동 강도를 훨씬 높이기로 했다. 비참해질 정도로 노력하진 않기로 했다. 요즘 들어서 더 낫게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음달에 전국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니 지속발전 가능한 운동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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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화된 취미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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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에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상당히 많은 덕질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도 결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영위되곤 한다. 요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나서 블루레이 박스 세트를 산다든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피규어를 산다든가 하는 식이다. 사람은 보통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자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태를 가진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덕질에는 금전 이외에도 심각한 제약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실존하는 물체를 모으는 ‘현물 덕질’을 지속하면 공간이 모자라게 된다!

까짓거 책 한 권, 음반 한 장 이런 것 사는 게 자리를 차지해봐야 얼마나 차지하겠어? 싶기도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 짓을 몇 년 지속하면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특히 그렇게 모으는 물건 중에서 가장 흉악한 타입은 ‘박스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피규어, 프라모델, 한정판 게임, 블루레이 박스세트……. 이런 박스가 딸린 물건은 살 때는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 어째 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박스 부피의 5분의 1이 될까말까 한 내용물 뿐인데, 이런 박스들이 방안을 잠식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건 한 사람 뿐인데 결혼하고 보니 그 집안 식구가 모조리 딸려온 상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이건 너무 암담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제 쓸모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레이스테이션 1, 2, 3 게임 같은 것들. 그렇지 않아도 재미있는 신작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마당에 대체 언제 시간을 내서 구기기로 명작을 다시 한단 말인가? 진짜 명작이라면 리메이크 되거나 이식되기 마련이므로 굳이 게임을 고이 갖고 있을 필요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나처럼 새 기기를 마련할 때 구 기기를 팔아버리는 사람도 많다. '갖고 있으면 이 기기의 값은 땅을 치겠지만 옛날 게임을 언젠간 또 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때도 이미 값이 너무 떨어져 차마 팔지 못했거나 추억이 너무 강렬해서 계속 간직하게 된 게임들은 고스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추억의 보존은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마물들을 보고 있자면 그때 팔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지만 역시 대수롭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골칫거리가 되는 것들은 다름아닌 책이다. 단순한 덕질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국한되기 마련이라 그 증식량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하지만 책을 한 권 다 읽으면 다음 책을 고르는 게 당연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직업적으로 책을 봐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게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쉬면 산소가 사라지고 이산화탄소가 쌓이듯, 방안의 공간이 줄어들고 책이 쌓이고 마는 것이다.

만약 생활공간이 지금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어떡할 것인가? 일상의 안정성이란 살얼음판 위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어서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 책장을 볼 때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오싹한 생각이다. 그래서 장서를 어떻게든 감축해보자고 생각은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팔아치우자니 만원 넘는 책을 천 원 이 천원에 넘기는 게 여간 아깝지 않다. 제아무리 지독한 책이라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긴 있기 때문이다. 추악한 지옥 마귀의 샘플을 실험실에 전시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적어도 천 원에 넘기는 것보다는 갖고 있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도통 처분할 수 있는 책이 없다. 결국 두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을 고르고 골라 매서운 각오로 팔아치우고 푼돈을 손에 쥐며, 어지간한 책은 빌려보거나 전자책으로 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책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주거 환경을 위협할 정도로 큰 문제거리인 책을 실물이 아닌 전자책으로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대부분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바꾸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업체를 통해 책을 스캔하는 것은 불법이 되어 돈을 주고도 못하는 짓이 되었고, 그렇다고 북스캐너를 사서 하나하나 스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책을 넣기만 하는 것만으로 스캔이 완료되는 인공지능 북스캐너가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니 지금은 그냥 나오는 전자책이나 살 수밖에 없다.

아무튼 전자책 서재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취미도 전부 전자화해버리는 것은 어떨까? 몇 년째 그 유행의 불길이 사위지 않는 CCG나 가챠 게임을 보고 있으면 이미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 전자 아이돌의 전자 콘서트를 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나 역시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화면 속의 캐릭터를 갖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갖고 있는 캐릭터 카드를 실물로 만져볼 수 없다고 아쉬워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아예 수많은 취미를 통합해서 전자적 취미방을 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VR 기기를 이용해서 무한정 늘어날 수 있는 가상의 방을 만들고 그 방안에 전자책도 놓고 포스터도 마구 붙이고 피규어도 프라모델도 닥치는 대로 전시하는 것이다. 한정판 블루레이도 전자 한정판 박스세트에서 꺼내 재생하고, 이런 것들을 직접 관리하기 귀찮으면 전자 집사나 전자 메이드에게 관리를 시키면 된다. 요는 현실에서 개처럼 벌어 전자공간에서 짐승처럼 쓰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책장이 모자라 물건을 살까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삶의 만족도도 압도적으로 높아지지 않을까?


당신만의 행복을 잡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집안 정리를 하면서도 그럭저럭 기운이 난다. 천년 만년 일해봤자 내 집 장만은 못할지라도 VR기기 하나쯤은 마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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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먹는 파스타 사먹는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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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는 퍽 좋은 음식이다.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딱히 싫어할 이유도 별로 없다. 물론 음식에 대한 취향은 제각각이니까 파스타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있고 파스타란 단어만 들어도 빠드득 이를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외국 음식 중에서 특별히 무난하고 편한 음식이 아닐까?

나 역시 파스타를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맛있는 파스타집을 찾아서 방방곡곡을 찾아갈 정도의 '애호'라기 보다는 이틀에 한 끼쯤은 파스타로 해결해도 별로 불만은 갖지 않을 만한 '일상화'에 가깝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요는 밥에 가까운 셈이다. 그러고보니 세상에는 밥을 너무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된 캐릭터가 있어서 그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 상영 중에 팬이 스크린을 향해 레토르트 밥을 집어던진 사건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파스타를 좋아하는 캐릭터도, 그 캐릭터를 위해 레토르트 파스타를 집어던진 사람도 아직 등장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자취하는 분 중에 혼자 밥을 해서 먹는 것이 상당히 소모적이고 번거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식을 파스타로 바꿔버린 분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나도 그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집은 파스타가 기본 보급품, 그러니까 떨어지면 반드시 사놓는 물건 중 하나라 딱히 먹을 것이 마땅치 않으면 대체로 스파게티를 해 먹는다. 두 종류의 파스타가 들어가지만 주가 되는 것은 면이니까 스파게티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해먹는다고 하면 뜻 자체는 요리를 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사실 이렇게 먹는 스파게티는 인스턴트 라면을 좀 호화롭게 해먹는 수준에 불과하다. 면을 삶으면서 양파와 스팸을 볶고 다 되면 합쳐 소스를 부어 먹는 정도다. 다른 맛을 즐기고 싶으면 두유를 넣고 크림소스를 흉내내거나 조개를 넣는다. 정말이지 대단할 게 없어서 요리부터 식사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분만에 끝난다. 일상적인 식사로서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한가지, 간편히 먹는 것 치고는 설거지할 거리가 많이 나온다는 게 좀 불만이었는데, 최근에 인터넷에서 '원 팬 스파게티'라는 조리법을 발견한 뒤로는 또다시 신세계가 열렸다. 말 그대로 팬 하나에 재료를 때려넣고 끓여서 스파게티 조리를 끝내버리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과연 이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실제로 시험해보니 양파와 스팸이 너무 삶은 것처럼 되었다는 점을 빼면 훌륭한 방법이었다. 면 삶은 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졸여서 더 깊은 맛이 난다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중독적인 탄수화물 맛이 아주 일품이다. 관심 있는 분은 한 번 찾아보시길.

처음부터 끝까지 팬 하나만을 사용한 원 팬 파스타. 면 끝이 좀 탔다.


일상적으로 해먹는 음식이 늘어난다는 것은 퍽 멋진 일이다. 다만 이런 음식이 생기면 외식 메뉴를 정할 때 '굳이 내가 그걸 돈 주고 사먹어야겠어?'하고 의식적으로 그 음식을 제외해버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라멘은 잘 사먹으면도 파스타는 어쩐지 그렇게 전문점에 큰 점수를 주지 않게 된다. 기묘한 가난뱅이 근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것만은 꼭 먹어봐야겠다고 작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게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삼겹살 스파게티'였다. 말 그대로 스파게티를 잘 구운 삼겹살과 함께 상추에 싸서 먹는 것이다. 상추쌈에 밥 대신 스파게티를 넣다니 이 무슨 짓인가 싶은 심정이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나도 예전에 엠티에 갔다가 상추와 라면만 남아서 라면을 상추에 싸 먹은 적이 있었다. 그건 솔직히 추천할 만한 조합은 아니었다. 그냥 상상 그대로의 맛이었다. 그런 반면에, 삼겹살 스파게티는 잘 구운 고기가 들어간 데다 느끼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특제 소스가 절묘했던 덕에 대단히 맛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샐러드와 스파게티, 고기가 딱히 어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는 삼겹살 스파게티


아무튼 기껏해야 테이블 여섯 개 정도밖에 없는 대학가 골목의 작은 파스타 전문점에서 맛본 이 스파게티는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조그맣고 인테리어가 깔끔한 가게에서 뭔가를 잘 먹으면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추운 밤거리를 헤매며 성냥을 팔다가 '잠깐 이리 와서 쉬면서 이것 좀 마시고 가렴' 하고 푸근한 주인장이 데워주는 우유를 마시고 가는 듯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돈을 안 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뭔가를 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가게 주인의 감성이랄까, 세심한 철학 같은 것이 잘 느껴지고 그게 또 나와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남들 잘 모르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비웃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개인의 허영 때문이라기보다는 서울 어딜 가도 대기업 프랜차이즈 뿐이라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굳이 찾아다녀야만 하는 도시 상황과, 그런 수고와 비용을 들여 취향을 가꿀 여유가 남아있지 않은 사회 전반적 경제 상황 때문에 불거진 냉소주의 탓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맞는 가게는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런 가게와 취향을 하나씩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다 맛집과 인생의 재미 얘기를 하게 되었지? 다시 얘기를 스파게티로 돌리자. 삼겹살 스파게티를 먹어본 이후로 집에서 비슷한 시도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결국은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집에서 삼겹살을 굽는다는 것부터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고, 삼겹살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만족도의 선을 넘어버리기 때문에 거기다 굳이 요리를 더할 동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이성을 따져보면 이것은 분명 원 팬 스파게티와 대척점에 있는 스파게티다. 역시 번거로운 음식은 나가서 사먹는 게 제일이니, 나는 오늘도 맛과 편이성의 곡선이 그리는 교차점을 찾아 머나먼 부엌으로 떠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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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원에 아이폰을 바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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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고 있는 아이폰 5S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 집안에서는 신중하게 다루지 않는지라 몇 번 떨어뜨렸더니 액정에 아주 살짝 금이 갔고, 언제부턴가 사진에 희끄무레한 점이 몇 개 보이기에 먼지가 낀 줄 알고 서비스센터에 갔더니 렌즈에 금이 갔단다. 여기에 프레임까지 휘어 있는 데다가, 배터리도 슬슬 20%까지 내려가면 순식간에 10%미만으로 떨어지는 상황이니 매물로서는 사형선고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판매가를 10만원대 후반으로 잡는대도 제대로 쓰려면 대공사를 치러야 하니, 누가 이런 물건을 사려 하겠는가?그렇다고 10만원대 초반으로 값을 내리느니 그냥 공기기로 갖고 있다가 긴급 상황에 서브 폰으로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수리해서 팔아버리는 방법도 있긴 있다. 수리 키트를 갖고 있으니 부품만 사면 약간의 고생을 거쳐 부활시킬 수 있다. 하지만 부품이라고 공짜가 아니고, 익숙하지 않은 핸드폰 수리 작업이란 20만원짜리 폭탄을 망치로 두드리는 기분이라 영 내키지 않는다. 요는 그냥 쓰자면 큰 불편 없이 쓸 수 있지만 바꾸자면 당장 막대한 손해가 발생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냥 계속 쓸 작정이었는데, 요즘 게임 사양들이 높아진 데다, 핸드폰으로 책을 읽을 일도 많아져서 더 넓은 화면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 이 기회에 6S로 바꿔버리자! 나도 좋은 것 좀 써보고 살자! 무엇보다 가장 자주 쓰는 물건일수록 좋은 것을 써야 삶의 질이 올라간다고 하지 않나? 좋은 폰을 쓰는 것은 현대인의 기본권 같은 것이다!

더 넓고 좋은 스마트폰의 가치는 얼마로 추산할 수 있을까?

그렇게 결심하고 중고 매물 검색을 시작했다. 가격은 30만원 중반에서 50만원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30만원대는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남들은 일반적으로 40만원 언저리에서 파는데 왜 그렇게 싸단 말인가? 뭔가 하자가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사기는 아닐까? 물론 일반적으로는 급전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만, 그중에는 정말 사기 매물도 있었다. 눈여겨 보고 있던 매물이 사기 신고 게시판에 올라온 것이다. 나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기가 아니더라도 불량화소나 터치 오류 같은 문제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배터리도 당연히 노후되었으리라. 이런 것들을 오래지 않아서 직접 교체해야한다고 생각하면 그냥 깔끔하게 새것을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50만원에 올라온 미개봉 매물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까짓거 질러! 50만원으로 2년쯤 쓰다 팔면 되잖아! 2년 내내 넓고 멋진 화면을 즐기는 거야! 그런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면 크기의 확대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뭐 일단 게임도 잘 돌아가고 보기도 시원하고 책 읽기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안 되던 게 되는 것은 아니다. 화면을 제외하면 6S로 간다고 엄청난 기능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그동안 못 하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3D 터치는 아직 필수적이지 않은 곁다리 기능 같은 것이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옛날 같으면, 혹은 안드로이드라면 핸드폰마다 인터페이스나 기능이 달라서 정말 기기를 바꾸는 보람을 느끼기 쉽겠지만 아이폰은 막말로 뭘로 바꾸든 결국 쓰던 폰의 크기만 달라지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애인의 키가 5센티쯤 커지는 변화라고 할까. 키가 좀 커지면 좋기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이고 딱히 더 스윗해지거나 엄청난 천재가 되는 게 아니니 냉정히 말해 굳이 내가 없는 형편에 돈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50만원이 그렇게까지 엄청난 돈은 아닐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은 몇 년 내내 하루 종일 소지하고 쓰는 제 2의 두뇌 같은 것이니까 50만원으로 개선할 수 있다면 개선을 하는 편이 낫다. 50만원이 없다고 인생의 전환점에서 기회를 잃어버릴 가능성도 낮다. 적어도 50만원 때문에 집을 못 사게 될 우려는 없는 것이다. 주거 쪽으로 생각하면 50만원은 납골당 관리비로나 의미가 있는 돈이 아닌가?

하지만 그 50만원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벼운 돈도 아니다. 이 궁상맞은 생각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밥값이었다. 50만원이면 5000원짜리 식사를 100끼 먹을 수 있다! 과연 더 넓은 화면이 밥 100끼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 심지어 500원 때문에 포기했던 메뉴를 1000번이나 먹을 수 있다. 돈까스 대신 치즈 돈까스를 먹자는 결정을, 혹은 목 마른데 생수라도 사서 마시자는 결정을 500번 할 수 있다. 맥주를 250캔 넘게 마실 수 있다. 이번에는 책으로 생각해보자. 만 원짜리 책 50권이다. 원고 노동자에게 책 50권은 장기적으로 보면 밥 100끼보다 훨씬 거대한 재산이다. 이것은 먹고 싸면 끝나는 식사와 달리 평생 이어지는 삶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괜찮은 패키지 게임을 돌릴 기기가 없다시피한 상황인데 50만원이면 이것이 거의 해결된다. 데스크톱을 새로 장만할 수도 있고, 콘솔 기기를 살 수도 있다. 집 사는 데는 도움이 안 되지만 VR기기로 마음의 집을 마련하는데는 큰 도움이 된다. 아이폰을 바꾸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분명 안 되던 게 되는 소비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역시 아이폰을 새로 바꾼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나는 매물 검색과 교섭을 전부 집어치우고 배터리를 주문해서 교체했다. 반도체 기술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다고 하지만 뜻밖에도 보급형 휴대기기의 발전 속도는 점점 느려져서 몇 년 전 기기나 최신 기기나 대단히 다를 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럴 때는 다행스럽다. 아이폰 5S는 아마 도저히 더 쓸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쓰지 않을까?

아무튼 과거의 삶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이 호된 고생을 하는 것처럼, 과거의 핸드폰에 이상이 생기면 새 핸드폰을 장만하려 할 때도 별 생각을 다 하게 되는 법이군요. 핸드폰 아껴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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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브릿지에 공포(라지만 약간 개그스러운 구석이 있는) 단편소설 "피 말리는 밤의 붕붕 드링크"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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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샐러드의 저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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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가 건강에 좋은 것이야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맛도 있다. 샐러드 나름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어디서 돈 받고 파는 샐러드를 먹고 맛없어서 괜히 먹었다고 짜증이 난 적은 없었다. 이것은 샐러드가 재료만 괜찮다면 누가 만들든 어느 선 이하로 맛이 없어지지 않는 음식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복된 음식이다(여기서 사라다는 논외다).

요즘은 건강 걱정도 되고 해서 저녁을 종종 샐러드로 해결하고 있다. 서브웨이가 샌드위치만 파는 게 아니라 그 메뉴 그대로 샐러드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 덕이기도 하다. 이렇게 요긴한 정보는 왜 아무도 안 알려준담? 아무튼 나는 원래부터 서브웨이와 맥주 한 캔 먹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으므로 서브웨이 샐러드도 반갑게 맛있게 먹는 중이다.

매일 아침을 아름답고 근사한 샐러드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샐러드는 사먹는 음식이다

서브웨이를 이용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고심 끝에 메뉴를 선택하고도 더 생각할 거리가 많다. 일단 치즈를 둘 중 하나로 골라야 한다. 이때는 특별히 애착이 있는 치즈가 없어서 그냥 기분따라 아무거나 고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채소중에서 뺄 것을 골라야 하는데, 나는 항상 오이와 피클을 뺀다. 그냥 오이든 가공 오이든 모조리 빼는 것이다. 오이는 날 것으로 따로 먹으면 맛있게 잘 먹는 편인데, 이상하게 다른 음식에 들어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고, 구체적으로는 2004년 겨울부터 오이를 섞어먹는 게 싫어졌다.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탔던 네덜란드 항공에서 제공한 샌드위치에 섞여있는 오이 냄새가 너무 역했던 것이다. 실온의 샌드위치라면 그나마 나았겠는데, 어째서인지 이것을 뜨뜻하게 데워놓아서 오이 향이 모든 재료를 자신의 색채로 물들여버린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샌드위치였다. 그 뒤로 오이를 섞어먹는 것도 싫어졌고 네덜란드 음식도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네덜란드 음식중에 뭐가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덜란드산이라면 맥주밖에 믿지 않는다.

다시 서브웨이로 돌아와서, 채소 다음에는 드레싱을 고르는데, 사우스웨스트와 랜치, BBQ를 주로 선택한다. 옛날에 대충 골라본 것이 맛있어서 그냥 계속 고정해둔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뭐가 어떤 맛이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름 옆에 재료와 맛을 좀 설명해주면 좋겠는데, 귀찮은 것인지 아니면 그 정도는 일반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편, 나도 검색해 보면 될 것을 어쩐지 귀찮아서 그냥 시켰던 것만 반복해서 먹고 맛을 까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드레싱에 관한한 미맹이 되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만들어진 샐러드는 양이 그리 적지 않다. 정신 없이 먹어도 15분은 걸리는 것 같다. 무슨 맛이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맛도 있다. 미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브웨이에 앉아서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있으면, 아침 일찍 매디슨 스퀘어 공원 같은 곳에서 조깅하는 류의 사람이라도 된 듯 건강한 기분이 든다. '얼마든지 다른 걸 먹을 수 있지만 나는 이 정도로 자신을 가꾸는 사람이야' 싶은, 좀 속된 기분도 든다. 건강해진다면 좀 속된 기분을 느낀들 뭐가 문제겠느냐만.

샐러드를 먹는 순간의 심상 풍경

다만 샐러드 식사의 결정적인 문제는 역시나 첫 번째가 가격이다. 6천원 내외니까 한끼 식사 가격으로 부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궁상스러운 성격상 다른 식사들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해 김밥집의 돈까스가 6천원이다. 버거킹에서는 3900원에 패티가 두 장 들어간 버거 세트를 먹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탄수화물이란 정말 어마어마하게 싼 식료품이구나 싶다. 탄수화물 끊기가 달리 어려운 게 아니다. 싸고 맛있고 배부르니 피해갈 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건강을 위해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감수할 수 있다. 하루 2000원으로 질병을 막는다면 싼 값이겠지?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감수할 수 없는 단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속시간이다. 6시에 샐러드를 먹으면 9시쯤에는 슬슬 배가 고파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집에 돌아가서 과자 하나라도 주워먹게 된다. 여기서 정도가 심해지면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육체적으로 배가 고픈 상태니까 과자에 곁들여 술을 마시게 된다. 흰 쌀밥에 돈까스를 먹는 것과 샐러드와 과자와 술을 먹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건강에 해로울까? 해악의 정도를 수치로 계산할 수 없으니 정확히는 모를 일이지만, 역시 이럴 바에는 그냥 밥을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채식동물들이 방대한 풀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서브웨이는 딱히 영양은 없지만 압도적으로 저렴하고 양이 많은 채소를 발견해서 추가 메뉴로 넣어주면 어떨까. 양념 건초라든가....... 하기야 그런 게 있으면 이미 보편화 되었겠지. 아니면 두부라도 추가해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역시 건강이란 손쉽게 유지할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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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추억의 공간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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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쓸모없는 물건을 모으는 버릇이 있다. 나름대로 미니멀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할 작정이면서도(돈이 없으면 명예를 위해 추구해봄직한 스타일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 '어쩌면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등등의 이유로 버리지 못하거나 모으는 물건이 제법 있어서, 이것들만 두고 봐도 빈말로도 미니멀한 라이프가 어쩌니 하는 헛소리는 할 수 없을 상황이다.

꿈꿀만한 미니멀 라이프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봤던 시험지라든지. 처음에는 물론 오답 체크라는 성실한 목적 때문에 모으기 시작한 것인데, 이게 어째 나중에는 기록 수집 그 자체에 의의를 두게 되어 오답 같은 건 시험이 끝나고 한 10분만에 다 체크했으면서 도무지 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반으로 접었을 때 7~8센티 정도 두께가 되는 시험지들이 여전히 내 책상 책장에 고스란히 꽂혀있다. 그렇지 않아도 책장이 모자라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라 버릴까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악착같이 모은 기록을 버리는 것도 아쉬운 느낌이 들고, 그렇다고 전부 사진을 찍고 버리자니 번거로운데다 또 보지도 않을 것을 왜 그렇게 찍어야 하나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릴 때 쓰던 수첩들도 버리지 않고 모아놓았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필요한 메모를 수첩에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들도 귀중한(어디가 귀중한진 모르겠으나) 기록이 아닌가 싶어서 모두 박스에 잘 넣어 보관하고 있다. 마치 정상적인 정부의 관공서가 처리했던 문건을 모두 지하서고 같은 곳에 갈무리해 두듯이. 요 10년 사이 스마트기기가 등장해서 기록들이 디지털화 되었다는 것은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스마트기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서너대 되는 PDA를 썼고, 이것들을 팔아치울 타이밍을 잡지 못해 이 기기들도 고스란히 넣어두었다. 이건 정말 누가 봐도 공간 낭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기는 쓸 일이 전혀, 장담코 절대 없고, 데이터 역시 따로 컴퓨터로 빼서 백업해두었으니 완벽하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비싼 돈 주고 사서 자나깨나 곁에 두고 다닌 물건이라는 이유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처분할 시기를 놓친 핸드폰들도 보관해두었으니, 이것 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도통 공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처사다. 공간 죽이기의 마술이다.

한편으로 뭔가 확고한 의미를 가졌던 것 같으면서도 나중에 흐지부지된 케이스도 있다. 영화표가 그것이다. 자신이 본 영화표를 모아두는 행위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예 티켓을 붙이고 옆에 감상을 적는 앨범 같은 것들도 나왔으니까(아직도 시판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버리긴 뭣하다 싶어 영화를 봤던 순서대로 상자에 모아두었다. 사실 이 '뭣하다 싶어'라는 발상이 가장 문제지만, 어쨌든 상자에는 '반지의 제왕' 부터 영화표가 차곡차곡 지층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화관에서 비용절감이랍시고 표를 영수증으로 교체하면서 모으는 맛도 의미도 희박해졌고, 모으는 것 자체도 힘들어졌다. 여럿이 봤을 때 한 장으로 나오는 것도 곤란하구나 싶었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자 표를 인쇄하는 행위 자체를 생략하게 되었다.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자연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자연 보호를 위해 우표는 이제 생산하지 않습니다' 라는 선언을 들은 우표 수집가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내가 일생동안 본 영화표를 모두 모아뒀지' 하는 기록으로서의 의미도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애초에 표가 감열지로 바뀌었을 때, 영화표의 글자들도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린 마티 맥플라이의 사진처럼 사라질 것이 예정 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아무튼 허탈하기 짝이 없는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난처할 따름이다.

그러고보니 잡지 역시 처치 곤란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2년 정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구독했는데,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아무리 훌륭하고 재미있는 잡지일지언정 한 번 보고 나면 영 다시 볼 일이 없는 것은 다른 잡지와 딱히 다를 바가 없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터들은 전화만 걸었다 하면 종이책으로 놔두고 두고두고 보는 게 얼마나 뜻깊은 일인지 일장연설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쩌자고 이렇게 처분이 난처한 물건을 전자책으로 보지 않았나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한때 프라모델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 후회막급이다. 그리 많이 산 것도 아니고 조립할 때 아주 신나게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끝난 뒤는 영원히 문제가 된다. 프라모델을 놓을 곳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 감성이 늙어서 쒸융쾅쾅 하며 갖고 놀수도 없으며, 프라모델이란 꼭 다 만들어도 반드시 부품이 미묘하게 남기 마련이라 박스를 버리기 애매해진다. 애니메이션처럼 프라모델이 움직이며 싸우는 '건프라 배틀'이라도 생기면 좋으련만........ 하지만 완성된 프라모델을 유용하게 활용할 방법이라곤 장식하는 것 뿐인데 장식할 수 없으면 순전히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니, 만드는 데 90퍼센트 이상의 의의가 있었던 셈이다. 고양이가 아무리 귀여워도 키우려면 책임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처럼 프라모델이 아무리 멋있어도 만들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살 일이다. 하다못해 레고처럼 재조립이라도 가능하면 좋으련만.

기타등등 동인지를 비롯해서 딱 한 번 즐기고 다시 즐길 확률이 심하게 낮은 것들, 그러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매컬리 컬킨이 부잣집 아들로 나왔던 영화 '리치 리치'를 보면 도둑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부부를 협박해서 쳐들어간 창고에 가족들의 추억에 관한 물건들만 가득해서 황당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어지간한 물건은 그런 창고에 잘 보관해두고 싶다. 물론 내가 '창고'라는 것을 갖게 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정리를 하지 않은 근미래의 내 방

결국 시간이 가면 언젠가는 새로운 삶을 위해 미련을 하나씩 내다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어릴 때 썼던 장난감들을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이제 와서 후회하듯이 요즘 산 책이나 장난감들을 내다버리고 60대쯤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모든 걸 안고 살다간 추억에 파묻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추억은 결국 추억이 아닌가? 중국에서 문화재가 너무 많이 출토되면 대충 사진만 찍고 폐기처분한다는데, 나도 그 자세를 좀 본받아야겠다. 딱히 인류학에 도움이 되기 위해 사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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