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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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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의 방향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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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모두 명품백을 좋아한다!” 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여러모로 잘못된 생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명품백을 갖고 싶어서 목걸이를 잃어버린 마틸다처럼 열심히 일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가방이라는 것 자체에 아무런 애착이 없어서 잰스포트든 에코백이든 비닐백이든 개의치 않고 쓰는 여성도 있고,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비윤리적인 취미라도 가진 것처럼 범주화해서 선언하면 거기 해당하는 사람도, 해당하지 않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A는 모두 B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선언은 대체로 오류를 포함하고 있고, 변변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곤 하는 것이다. “남자는 모두 리그 오브 레전드를 좋아한다!”, “남자는 모두 스포츠를 좋아한다!”, “부자는 모두 골프를 좋아한다!”, “한국인은 모두 김치를 좋아한다!” 등의 범주화 선언이 그러한 것처럼.

한편, “명품백을 좋아하는 것은 사치다!” 라는 생각 역시 별로 권장할만큼 우수한 것은 아니다. 사치라는 것 자체가 필요 이상으로,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한다는 뜻인데,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의 분수가 어떤지 타인이 판단하는 게 정당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누가 무엇을 사든 말든 남이 뭐라고 할 정당한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그렇긴 해도 나라고 고가의 가방을 여럿 구입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기왕이면 더 싸고 기능적인 걸 사면 안 되나?’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것은 아마 내 안에서 가방에 대한 가치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고, 디자인보다는 기능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싸고 기능적인 가방’만을 찾다 보면 그 종착지는 아마도 시장에서 파는 잰스포트의 짝퉁 백팩이 될 것이다. 이 물건들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저렴하고 적재량도 많고 천이 질겨 오래 쓸 수 있다. 모든 여성이 새침한 미니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뒤 그 위에 백팩을 매고 데이트에 나서서 만오천 원에 샀는데 25리터나 들어간다고 기능성을 뽐내는 세상은 어째 초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가방(백)에 대해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르면, 가방에는 가방이라는 기능 이상의 가치가 있으므로 단순히 끈 달린 주머니로 생각해선 안 된다. 가방은 가방으로서 기능에 충실하면서, 아름다워야 한다. 당연히 이런 물건은 비싸진다. TCG에서 발동 비용이 낮으면서 능력이 좋은 카드는 거래가가 비싸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옷, 벨트, 구두, 장신구 등과 매치하려면 똑같은 가방이라도 여러 색, 여러 스타일이 필요해진다. 역시 TCG로 비유하자면, 자기가 가진 다른 카드들과 콤보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TCG를 하다 보면 새로운 덱에 딱 필요한 카드를 살 수도 있고, 새로 뽑은 카드에 맞춰 새로운 덱을 짤 수도 있다. 요는 '똑같은 가방이 있는데 왜 또 비싼 걸 사겠다는 거야!’라는 말은 ‘전에 덱 짜놓고 무슨 카드를 또 사겠다는 거야!’ 라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불합리하다는 뜻이다.

옷과 소품의 매치에 신경써 본 적도 없고 TCG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나 남이 보기에 일견 쓸모 없고 사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비품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지? 아무리 봐도 똑같아 보이는 골프채를 이것저것 사고 또 사는 사람도 있을 거고, 기능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손목시계를 몇 개씩 사 모으는 사람도 있고, 드라이버나 핸드드릴에 군침을 흘리는 사람도 있으며, 얼굴은 다 똑같아 보이는 피규어를 계속 사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누가 보기에는 ‘애들이나 할만한 것으로 보이는 말판놀이’를 끊임없이 사고 파는 사람도 드물게 있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 각자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대체로 합당한 수집의 이유가 나온다. 골프채나 공구는 비슷해 보여도 각각 쓰임새가 다르고, 피규어는 제각각 다른 캐릭터이거나 같은 캐릭터라도 의미가 다르며, 보드게임은 하나하나가 다른 게임이다. 이것들을 모두 ‘합리적 소비’라는 냉철한 기준으로 ‘그거 없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하고 잘라내다 보면 뭐 하나 남지 않는다. 식의주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것 말고 대체 어떤 문화가 합리적이란 말인가? 밥조차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온 것처럼 아이스크림 같은 형태의 우주식으로 때우는 게 가장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거니까 누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언가를 산다면 딱히 뭐라고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만약 그것을 사기 위해 보편적 행복의 구성물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희생하거나 훼손해서 명백히 전반적으로 불행해질 게 뻔하다면 그건 정말 사치가 맞겠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요는 평소에 돈 좀 아끼거나 고된 일을 해서 뭘 사는 것 정도로 뭐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일하고 돈을 모으고 번식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이라면 삶이 너무 끔찍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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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병 장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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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귀찮다. 어깨 위에 커다란 두상을 얹고 다니는 것도 귀찮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여기선 머리카락 얘기다. 어째서 머리는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하는 걸까? 과학의 발달로 머리 길이가 딱 마음에 들 때 정지시켜두는 기술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머리카락은 알게모르게 하루에 50가닥 가량 저절로 뽑힌다고 하니 머리카락의 성장을 억지로 막아두면 그리 오래지 않아서 아주 곤란해질 것이다. 모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선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한단 얘기다. 뭐든 공짜는 없다.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것이라 머리 길이가 어중간해져 눈을 찌르거나 시야를 가리지 않게 야무지게 걷어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머리를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고 만다. 여성들도 ‘단발병’이라고 해서 가끔씩 길게 자란 머리를 확 쳐버리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는데, 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해 보면 퓨리오사처럼 밀어버리는 것이 생활에는 더 편리하긴 하다. 중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포츠 머리로 살았다. 중학교는 교칙이 병영에 가까워서 스포츠가 당연했고, 고등학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애매하게 검열을 피하느니 그냥 하던 대로 살자고 그 머리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머리 때문에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머리가 짧으면 눈을 찔릴 일도 없고, 운동하고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아도 금방 마르며, 샴푸도 덜 쓰고, 이발비도 적게 나간다. 온통 좋은 점 뿐이다. 그게 강제라는 점만 빼면.

그렇다면 역시 자율적으로 머리를 밀 수 있는 지금은 아무 거리낌 없이 당장이라도 머리를 밀어도 되는 게 아닐까? 아니,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남의 눈이 너무나 신경쓰인다. 스포츠나 반삭발은 중고등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효율성을 위한 억압의 상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때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건 개인적으로도 심리적인 거부감이 들고, 남들이 보기에도 인간으로서 뭔가를 포기하고 다른 무언가에 매진하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성이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소리를 듣기 마련인 것처럼 남성이 머리를 밀어버리는 것도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그런 오해는 아무래도 달갑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유부남이 된 원빈이 “아저씨”에서 아주 폼나게 머리를 미는 장면을 찍은 통에 ‘멋진 삭발남’이라는 묘한 환상까지 생겨서 섣불리 머리를 밀었다간 ‘너도 원빈 따라하다 망했구나?’ 하는 시선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 원빈이 머리를 밀어서 멋있어진 게 아니라 멋있는데 머리를 민 것 뿐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만, 보는 사람에게 일일이 그걸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예인의 스타일이란 늘 그런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리고 머리라는 건 한 번 잘라봤다가 ‘아, 별로네’ 하고 바로 컨트롤 Z로 손쉽게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원상복구 되기까지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이런 몇 중의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리를 확 밀어버리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다.

머리가 귀찮지만 않으면 되니까 길러서 “펄프픽션”의 존 트라볼타처럼 올백으로 넘기고 묶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말하자면 ‘장발병’이다. 올백이 가능한 시점만 지나면 이발비도 비약적으로 줄어들 테니 이건 제법 매력적인 선택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긴 머리는 당연히 감기만 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고, 무엇보다 그 시점, 앞머리를 뒤에서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기를 때까지 너무나 긴 고난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당장 지금 머리만 해도 어중간한 길이가 되어 앞머리가 안경에 걸쳐 옆으로 휘고 뒷머리가 옷깃에 걸쳐 위로 휘는 꼴을 보자면 화가 치밀어 오르곤 하니, 역시 장발은 허망한 꿈에 불과한 것이다.

미용실에서는 또다른 대안으로 펌을 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지속성이 떨어지는 데다 비용을 비롯해서 리스크가 너무나 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은 매번 똑같은 머리를 비슷하게 하고 적당히 짜증을 내며 살고 있다. 과학이 발달해서 저렴한 가정용 미용머신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이 반복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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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방문일 기념)신세기 어벤게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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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에바 패러디 두드린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오늘을 위해 세이브해둔 패러디를 올려봅니다.
*캡틴 아메리카1, 2, 에반게리온 TV판 및 극장판에 관한 내용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소재를 엮다 보니 한 명당 역할이 하나씩 딱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패러디가 깨지기도 합니다.


01.
캡틴: 나도 요즘은 여러 무기를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어.

하워드: 그래, 세상에는 훌륭한 무기가 많아!

캡틴: 저 방패, 나중에 쓰게 되면 별 모양 붙여도 돼?


02.
퓨리: 어벤저스가 되어라, 로저스. 되지 않을 거라면 돌아가.

캡틴: 어벤저스라니, 그런 들은 적도 없는 거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70년 만에 깨어나서 기뻤는데...


03.
힐: 사령관님, 퀸젯은 좋은가요?

퓨리: 어어.

힐: 헬리캐리어도 좋은가요?

퓨리: 어어.



04.
캡틴: 목표를 제치며 왼쪽… 목표를 제치며 왼쪽…



05.
팔콘: 조깅은 미군이 낳은 훈련의 극치야.


06.
팔콘: 퓨리가 싫어?

캡틴: 별로, 어찌되든 상관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뒤치닥거리는 싫었어. (어째서 팔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팔콘: 난 네 사이드킥이 되기 위해 태어난 건지도 몰라.



07.
럼로: 낙하산 따위 필요 없어! 캡틴에겐 기스가 날 수록 아름다운 방패가 있으니까!


08.
캡틴: 다음에 만나면 댄스 파티에 가기로 했으면서! 당신도 70년쯤 잠들었어야 해!


09.
팔콘: 언제나 군인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어. 전역하면 할 일이 없으니까 상실감을 느끼지. 유리처럼 섬세하구나, 특히 너의 마음은.

캡틴: 내가?

팔콘: 그래, 동정이라고 할만해.

캡틴: 동정?

팔콘: 마빈 게이를 들으라는 뜻이야.



10.
캡틴: 쉴드에 들어가면 여자친구 하나쯤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어요.


11.
캡틴: 한판 붙기 전에 내릴 놈은 내려!

럼로: … 나라고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게 아닌데...


12.
피어스: 명령 불복종, 동료 폭행, 기물 파손. 모두 처벌감이다. 할 말 있나?

캡틴: 네, 더 이상 쉴드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아요.


13.
나타샤: 캡틴, 키스할까?


14.
캡틴: 다행이다, 버키, 무사했구나!

버키: 네가… 캡틴?

캡틴: 왜 그래, 버키?

버키: 난 아마…가 아니라, 죽어랏!


15.
캡틴: 넌 왜 어벤저스가 된 거야?

나타샤: 바보 아냐? 당연하잖아, 복지가 좋으니까야.

캡틴: ...



16.
나타샤: 뭐야, 내가 비키니를 입을 수 없게 된 게 그렇게 기뻐?


17.
캡틴: 하늘은 질색이야. 난 날 수 없다고.

팔콘: 넌 날지 않아. 나는 건 내가 하는 걸.


18.
캡틴: 저는… 저는 미군의 실험쥐, 스티브 로저스입니다!



19.
힐: 정체 불명의 인물 고속 접근중. 패턴 블루, 윈터솔저입니다!

퓨리: 캡틴, 왜 싸우지 않지?

캡틴: 저건… 저건 버키란 말이에요!

퓨리: … 팔콘을 출격시킨다.

힐: 하지만, 팔콘은 날개가 뜯겨서…!

퓨리: 상관없다. 적어도 쓸모없는 슈퍼솔저보다는 낫겠지.


20.
캡틴: 버키! 내 마음을 배신했겠다! 페기와 똑같이 내 마음을 배신했겠다!


21.
퓨리: 음...싫어,  이상한 거 넣지마... 뭐야...?

힐: …테트로도톡신B에요.



22.
퓨리: 지금쯤 캡틴은 못된 상사라고 경멸하고 있겠지?

힐: 죽어버리는 편이 속이기 쉽죠.

퓨리: 자신을?

힐: 히드라를!



23.
퓨리: 죽음은 신원의 세탁이야!



24.
나타샤: 그대의 갑빠를 원츄! 원츄! 그대의 방패를 겟츄! 겟츄! 키스미 앤드 홀드미! 좋아좋아 정말 좋아! 좋아좋아 정말 좋아! 그대의 전부가… 당장 키스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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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도 에바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정말 꿈도 꾸지 못했는데...
아무튼 사도님 오시라고 부채춤이라도 추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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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을 못 믿어 영어를 공부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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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쉽게 느껴질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는 잘 하게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이유란 학구열이나 자아 실현 따위가 아니라 정말 단순히 자막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를 자막을 이용해 본다는 것 자체가 영화 감상의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더빙판 제작보다 간편해서 외국의 영화를 빠르게 볼 수 있게 해주므로 자막은 무척 고마운 존재지만, 자막이란 일단 관람객의 시선을 끌어내리게 되어 있어서 원래 영상에서 의도한 시선의 흐름이 유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막으로 보다 보면 자연히 작은 부분은 놓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의 현란한 격투 장면에서 둘다 말이 많아 이런 저런 소리를 떠들어대면 단검의 손잡이를 조작한다든가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든가 하는, 미세하고 정교한 표현들을 다 볼 재간이 없다.

게다가 자막이란 필연적으로 등장인물의 발화보다 빠르게 나오기 마련이라 연속적인 영상을 만화처럼 단속적인 컷의 조합으로 해체해 버린다. 관객은 자막으로 먼저 대사를 확인한 뒤에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감독에 가까운 입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전에 사실상 영어가 모국어에 가까운 친구를 끼워 미국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정말 웃긴 대사가 나오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웃어버려 약간 당황했다. 마치 축구 경기를 TV와 인터넷 중계로 보는 듯한 상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의 경우는 자막으로 보는 것이 미래고, 그 뒤에 따르는 것이 정상적인 현재니까 상황이 반대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다른 시간선에 있었던 것이다. 이 익숙한 현상도 이런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 주인공이 적에게 협박 당해서 굴복하는 척 하다가 비장의 무기로 반격하는 장면에서 “네 명령에 따르겠… 죽어랏!” 이라는 대사를 한다면 ‘죽어랏’은 잘라서 뒤로 빼야 한다. 대체로 이 정도는 배려해 주기 마련인데,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서 원치 않게 1초 뒤의 미래를 알아버리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이런 미래 예지 사태는 자막을 최대한 분절함으로써 최소화할 수 있긴 하겠지만, 어순 문제도 있고, 작업이 번거롭기도 하고, 자막 표시 빈도가 올라가면 시선을 자주 빼앗게 되므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문제는 바로 번역이다. 단순 오역은 그냥 명백한 잘못이니까 더 논할 것도 없지만, 일정한 시간 동안 표시할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 때문에 잘려나가거나 단순화되는 부분도 여간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감수성이 예민한 주인공이 “아, 코발트 블루로 넘실거리는 바다,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보고 있자니 윌리엄 터너의 그림이 생각나는군요!” 라고 실컷 떠들어도 자막에서는 “푸른 바다가 무척 아름다워요. 고흐의 그림이 떠올라요!” 라고 간단하게 표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은 그렇다 치더라도 윌리엄 터너가 왜 고흐가 되었는가? 관객이 윌리엄 터너보다는 고흐를 알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번역이라면 언어도단에 가까운 일인데도, 영화관에서는 시간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나야 영어를 잘 못해서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벤져스2”의 대사들도 아주 재치있는 것들이었는데 자막에서 상당부분 깎여나갔다고 한다. 영화가 아무리 재미있었어도 이런 소식을 듣고 나면 어째 기껏 읽은 책이 오역 투성이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분이다. 더 안타까운 점은, 영화는 오역이 정정된 완역판 따위 영원히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억울하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보는 수밖에 없다.

잠시 딴 얘기지만, ‘윌리엄 터너’를 ‘고흐’로 바꿔 버리는 식의 번역이 대중의 보편적인 상식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고자 했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게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고서. 하지만 그렇다면 발생하는 의문은, 어째서 요즘 영화 제목은 거의 번역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더 이퀄라이저”가 무슨 뜻인지 관객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막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려면 “균형의 수호자”  정도로 고치는 게 맞지 않을까? “테이큰” 역시 제목이 이래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영어의 동사 변형에 익숙치 않은 관객을 배려하려면 “피랍”이 맞다. “비긴 어게인”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한치 두시기 석삼 너구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은하 보안관” 정도로 번역하는 게 마땅하다. 물론 제목은 뜻보다 강렬한 이미지가 중요할 것이고, 자막 제작과는 별개의 논리로 만들어지리라는 것은 짐작한다. 하지만 기왕이면 명확한 하나의 기준을 따라주는 게 좋지 않을지? 예를 들어 원제가 “Turist"인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은 꼭 이래야 하나 싶고, 원제를 그대로 쓴 “왓 라이즈 비니스” 같은 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최근에 “캡틴 아메리카 2: 윈터 솔저”를 일본어 더빙판으로 구매해서 다시 봤다. 일본어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들리지 않는 영어를 들으며 자막과 씨름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재미있다. 아니, 훨씬을 넘어서 압도적으로 재미있다. 원서와 사전을 펼쳐놓고 읽는 것과 완역본을 읽는 것의 차이 정도로 다르다. 물론 번역은 여전히 신뢰할 수 없으나 읽던 게 듣는 것으로 바뀐 것만 해도 여간 멋지지 않다. 자막 문제 중 하나는 해결된 셈이니까.

그래서 한국 개봉작들도 기왕이면 더빙판이 같이 나오면 좋겠는데, 개봉은 고사하고 VOD도 많지 않으며, 심지어 연예인, 개그맨이 더빙에 끼어들거나, 유명 잡지에 '성우들의 어설픈 더빙은 들어줄 수가 없다’는 글이 게재될 지경이다. 그렇다고 자막의 완성도가 차츰 높아지는가 하면 실상은 정반대로 놀랍게도 최근 개봉작인 “스파이” 같은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쯤 되면 정말 서러워서라도 영어를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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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약과 기술과 서비스와 가격의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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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의 생명은 첫째가 정확성이고 둘째가 심미성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정확한 시계이기도 한 핸드폰을 누구나 가지고 다니면서부터 정확성의 중요도가 좀 낮아지고 심미성의 중요도가 부각된 것 같긴 하지만, 투박하고 시간이 잘 맞는 손목시계는 찰 수 있어도 예쁘고 시간이 제멋대로인 손목시계는 찰 수 없다. 제아무리 혼을 빼놓을 정도로 예뻐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그건 그냥 예쁜 쓰레기일 따름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아무리 로또에 당첨된다 하더라도 나는 쿼츠 시계를 고집할 것 같은데, 쿼츠 시계는 당연히 동력원이 되는 전지를 가끔 갈아줘야 한다. 지금 애용하는 시계는 계기가 많아서 그런지 일 년에서 일 년 반 정도 가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때가 되었는지 시계가 멈춰 버렸다.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

사실 손목시계가 멈추는 게 컴퓨터가 멈춰 버리는 것처럼 대사건은 아니다. 그대로 차고 나가 시계방에 가서 약을 바꿔달라고 하면 고작 1분 남짓한 시간 내에 원상복구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골치아프다고 생각한 이유는, 시계 뒷판을 열고 약을 교체할 뿐인 그 서비스에 무려 8000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시계 뒷판을 열 공구를 사기로 작정했는데, 문제는 그때 시계 약까지 한꺼번에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타입이 들어가는지 알려면 뒷판을 따야 하는데, 뒷판을 따려면 공구를 사야한다. 그래서 시계 판매점에 전화 문의를 하기도 했는데, 사장은 열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른 가전제품은 어떤 전지가 들어가는지 설명서 따위를 뒤져보면 아주 간단히 알 수 있는 반면 손목시계는 그게 영 쉽지 않다. 애초에 복잡한 기능이 들어간 시계가 아니면 설명서 따위 있지도 않으니까. "약은 약사에게, 시계 약은 시계사에게.” 그게 바로 거대한 시계 산업을 지탱하는 율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은 공구를 먼저 주문해서 시계 뒷판을 열어봤다. 다른 시계에 비해 뒷판의 홈이 얕아서 내가 사실은 이걸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지만, 결국은 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손톱보다도 더 작은 전지의 모델명을 알아냈고, 그 모델과 호환되는 전지를 오픈마켓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유로 깜짝 놀랐다.

첫 번째 놀라운 점은, 시계 전지라는 게 할인가로 찾으면 하나에 기껏해야 900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계방에서는 시계 뒷판을 여는 간단한 기술과 공구, 전지, 그리고 관련 지식이 있다는 이유로 900원짜리 전지를 8000원에 갈아주고 있었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원래 끼워져 있던 전지는 오래 가지 못하는 알칼라인 전지로, 고작 600원짜리였다는 것이다. 나는 자주 가던 시계방에서 재작년에 오래 가는 것과 싼 것 중 무얼로 하겠느냐는 말에 가격을 물으니 각각 8000원, 6000원 정도를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작년에는 그걸 묻지 않기에 당연히 오래 가는 것만 취급하게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600원짜리를 8000원에 갈아준 것이다. 교체에 드는 노력은 완벽히 똑같은데 원가 300원 차이를 2000원 차이로 불린 것도 어처구니 없지만 말도 없이 저가형 전지를 비싼 값으로 끼워 준 것도 분통터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 간다는 전지를 열 개 주문했다. 너댓 개만 사도 충분하지만 배송료가 아까워 그래야 했다.

그래서 다음날 도착한 전지를 넣은 시계는 이상 없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 보고 있자면 왜 시계약을 직접 갈 생각을 이제서야 한 것인지 한스러울 지경이다.

나도 어떤 서비스를 받으면서 "원가는 고작 얼마인데 얼마에 팔아먹다니!" 하는 태도는 별로 논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비스 비용에는 인건비가 포함되어야 하고, 거기에 그 사람이 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존중도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치과에서 ‘고작 몇 분만에 이 하나 뽑고 이렇게 돈을 많이 받다니’ 하고 불평하는 고객에게 의사가 ‘원하시면 얼마든지 천천히 뽑아드릴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얘기도, 순식간에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이 작품을 만드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고 대답했다는 얘기도 그런 ‘사람의 노력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시계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는 고작 일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아주 간단히 전지를 교체했을 뿐으로 보이지만, 실제 시계사가 어떤 시계든 순식간에 열어 알맞는 전지를 끼워넣고 그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기술을 얻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에 대해 비용을 지불해온 것이다.

…라고 생각하려고 애써 노력해봤지만, 600원짜리를 말도 없이 비싼 값에 넣어 줬다는 걸 생각하면 역시 분통이 터진다. 물론 바로 위에 적은 것처럼 정말 존경할 만한 시계사도 있다. 겨울에 시계가 고장나서 모처의 수리 전문 시계사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는 내가 특수 공구 없이는 절대 열지 못했던 뒷판을 롱노우즈 플라이어(펜치) 하나로 페트병 뚜껑 따듯 간단히 열고,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것만으로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고, 수리에는 얼마가 들 거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뒷판에 난 흠집을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이런 전문가에게는 정말 감복해서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600원짜리 전지를 900원짜리인 것처럼 8000원에 갈아준 시계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존경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 시계 약을 바꾸는 방법에 있어서는 나도 공구를 사는 것만으로 그와 비근한 수준의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 시계방은 영원히 가지 않겠지. 아니, 1년 이상 가는 전지를 10개나 사버렸으니 시계가 고장나지 않는 한 나는 시계방에 가지 않고 이 시계를 10년 이상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년에 7000원쯤 버는 셈이니, 이 돈을 차곡차곡 모으면 조만간 애플워치를 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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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뮤직과 음악의 우주에서 답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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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갖는 것보다 빌리는 게 더 간편하고 좋은 시대가 예전부터 천천히 스며오더니 급기야는 아이튠즈로 음원을 팔아오던 애플까지 '애플 뮤직’이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 7월 1일부로 시작한 이 서비스의 무료 체험 기간은 한없이 넉넉한 3개월. 가끔 Jpop 신보를 듣고 싶은데 유투브 같은 것 말고는 마땅한 서비스를 찾지 못했던 나는 지체할 것 없이 가입했다. 이미 일본 마켓에서 앱을 사느라 만들어놓은 카드도 있었고.
(결제 가능 카드가 없으면 가입할 수 없다. 무료 체험에 이어서 자연스럽게 구독을 시키는 게 목적이니까)

업데이트하면서 애플 뮤직과 융합된 음악 앱은 어째 속보이게도 장르나 아티스트로 바로 갈 수 있었던 탭 대부분을 ‘추천 음악’, ‘새로운 음악’, ‘라디오’, ‘Connect’로 갈아치운 데다가 최근 추가한 항목을 상단에 이미지로 띄워놓고 스크롤은 안 되게 고정했으며 확장 버튼은 터치가 안 먹힐 정도로 작게 만든 것이나, 인터넷 접속 없이 쓸 수 있는 항목 표시도 너무 작게 박아놓은 것 등 앱 자체는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신제품의 화면이 좀 넓어졌다고 그동안 일하던 방식을 까먹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러나 음악 앱 말고 애플 뮤직은 예상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시작할 때 선호 장르와 아티스트를 선택하면이것을 기반으로 추천 앨범과 리스트, 신곡 등을 뽑아주는데, 이걸 뒤적이며 자기 리스트에 추가하고 선호 버튼을 눌러 피드백을 보내 새 추천을 받는 재미가 훌륭했다. 일본 유명 가수들의 곡은 아직 상당히 빈약하지만, 나는 고작 삼십 분 만에 이렇게 좋은 앨범을 놓치고 있었다니, 싶은 재즈 앨범들을 몇이나 발견할 수 있었다. 탁월하고 조용한 음악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며 타워레코드 같은 초대형 음반점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거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영어권 인디곡들도 조용하고 괜찮은 것을 골라서 선물해 주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아이패드를 선물받은 여주인공이 “나는 도서관을 선물 받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기뻐하는 장면이 있는데, 어쩌면 그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3개월 동안 나는 언제 어디서나 방대하고 심지어 점점 늘어가는 음악의 우주를 가이드까지 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온갖 음반을 닥치는 대로 들었던 고3때 이후 처음으로 괜찮은 음반이 없나 뒤적이고 배경음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즐기려고 음악을 듣는 시간을 다시 갖게 되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러가지 문제점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이것저것 다 듣기에는 데이터나 저장소 용량이 모자라다. 통신사에서 추가 요금 없이 제공하는 데이터 용량은 한정적이니까 좋은 음반은 다운로드해서 들어야 하는데 워낙 많은 음반을 새로 발견하다 보니 시도때도 없이 용량 부족 메시지가 떴고, 나는 잘 쓰지 않는 앱과 잘 듣지 않던 곡들을 닥치는 대로 삭제해야 했다. 덕분에 지금은 좀 숨통이 트였지만,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되지 않을 것은 뻔하다. 머지않아 또 용량을 정리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이 반복될 수록 고민과 고통의 강도는 강화되겠지. 절대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곡만으로 저장소를 다 채워버리면 그 뒤에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리고 즐겨 들을만한 곡이 갑자기 대폭 늘어버린 데다가 ‘앨범’이라는 개념 자체도 희미해져 언제 뭘 어떻게 들으면 좋을지 혼란스러워졌고, 아티스트, 앨범, 곡에 대한 애착도 옅어진 것 같다. 한창 즐겨 듣는 곡의 제목도, 앨범 이름도, 아티스트명도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문제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어떤 곡이든 ‘이 곡 괜찮네’ 하는 정도로만 흘려들을 것 같다. 듣자마자 끝내준다 싶은 곡만 있는 게 아니라 듣다 보면 은근히 애착이 생기는 곡들도 있는데, 그런 곡들도 몇 초만에 듣고 넘겨버리기 일쑤다. 방금 말했듯이 이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 때문에 생기는 문제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애플 뮤직을 3개월이나 쓰고 나면 그 뒤에는 이걸 안 쓸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1개월이라면 ‘쓸 때는 좋았는데 뭐 원래 안 썼으니 어쩔 수 없지’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3개월이나 쓰면 구독이 끊기자마자 낙원을 잃어버린 아담처럼 비참한 기분에 헐떡일 게 틀림없다. 없어도 상관없던 것도 익숙해지면 당연한 게 되는 법이라지만 이건 정말 오싹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평생 동안 매달 음악을 듣기 위해 만 원 넘는 구독료를 지불하고 살아야만 할 것인가? 평생 어떤 서비스에 예속된다는 건 아무래도 현명한 판단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은 체험 기간이 끝나면 그동안 발굴한 음반들 중 정말 좋은 것들을 하나씩 구입해서 핥듯이 듣다가, 또다시 음악적 방랑벽이 도지면 그때 애플 뮤직의 세계에 접신해서 1개월 동안 최고의 음반을 찾아서 탐험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곡들을 적당히 듣고 넘겨버리지도 못할 거고, 열심히 듣는 동안 애착도 생길 수밖에 없다. 용량이 모자라 허덕이는 사태도 최소화 되겠지.

그러나, 이 방법에는 아주 끔찍하고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애플 뮤직으로 한 달동안 다섯 개의 음반을 발굴했다면, 이 음반 한 장이 만원 정도라고 낙관적으로 가정해도 5개월은 이 음반들로 버텨야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그 돈으로 그냥 애플 뮤직을 구독할 경우 5개월 동안 그 음반들 말고도 무한히 많은 음반을 들을 수 있으니까 사실상 명백한 손해다. 미국의 평균적인 음원 구매액에 맞춰서 구독가를 책정했다더니 정말 절묘한 가격이다. 그렇다면 결국 진리의 바다 같은 애플 뮤직을 맛본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음악세를 상납하며 살 수밖에 없단 말인가?

좋든 싫든 3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답은 찾아야만 하고, 이 답을 찾는 것은 애플 뮤직을 맛보고 만족한 자 모두에게 맡겨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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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전선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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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강당에서 단체로 누워 헌혈한 것 이후로 처음으로 헌혈했다. 어째서 이다지도 헌혈에 무관심했는가 하면, 구멍이 훤히 보이는 바늘을 팔에 꽂는 게 아팠기 때문이다. 달리 헌혈을 안 할 이유는 없고 단순히 아픈 게 싫어서 안 한 셈인데, 이 사유가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정말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 피가 정말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내 몸 아파서 뽑은 내 피 주머니를 만져볼 수도 없다. 400밀리나 되는 피를 뽑았으면 그게 얼마나 따뜻한지, 어떤 빛깔과 어떤 무게감을 갖고 있는지 알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보람조차 주지 않는다. 하기야 간호사(혈액원 근무자를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가 갓 뽑은 피 주머니를 ‘아주 신선한 A형 피에요’ 하고 안겨주는 것도 이상한 광경이고, 그따위 징그러운 것을 궁금해 하는 것도 나 정도일 테지만.

아무튼,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라고는 지저분한 강당에 단체로 끌려가 너도나도 끔찍한 바늘을 꽂고 간이 침대에 누워 피를 뽑는 전쟁터 같은 광경이었고, 그것으로 얻은 보상은 고작 세면도구 세트와 과자, 그리고 친구들과의 낄낄거림, 수업시간 생략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다시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진 않았는데… “매드 맥스”를 보고 헌혈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이미지가 좀 나아졌고, 결정적으로 전혈 헌혈을 하면 햄버거 세트 교환권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욕이 샘솟아서 헌혈의집을 찾았다. 좋은 일도 하고 햄버거도 먹으면 꽤 괜찮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쿠폰을 받지 않고서야 롯데리아 햄버거 따위 절대 먹을 일이 없기도 하고.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찾아간 헌혈의집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호감이 가는 구조였다. 카페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병원보다는 훨씬 나아서, 애들이 겁먹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 소아과의 성인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번호표를 뽑고, 컴퓨터로 전자문진표를 작성하고, 곧 실제 문진을 했다. 혈압을 재고 채혈기로 약지에 구멍을 뚫어 얇은 관에 채웠는데, 어찌나 피가 잘 나오는지 약지로 헌혈을 해도 되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간호사는 뽑은 피를 검사지에 뿌리더니 혈소판인지 뭔지 하는 수치들이 정상이라고 했다. 기껏 피를 뽑았는데 불가 판정이 나왔으면 몹시 우울했으리라.

문진을 끝내고 기다릴 동안 뭘 좀 먹으라고 하기에 나는 그럭저럭 잘 꾸며진 바에서 커피와 과자를 집어다 먹고, 곧바로 피뽑는 자리에 누웠다. 왼팔에서 뽑을지 오른팔에서 뽑을지에 따라 자리가 달랐다. 나는 오른손 잡이니까 왼팔을 골랐다. 다행히 간이 침대는 아니었다. 대신 소파처럼 안락하고 튼튼해 보이면서도 다리 쪽이 높이 올라와 있는 침대였는데, 테이블이 달려서 노트북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나는 팔을 내밀고 자리에 누웠다. 간호사가 와서 “처음이라고 하셨죠?” 하고 묻기에 “아뇨, 아주 옛날에 한 번 했어요.” 라고 대답하자니 좀 부끄러웠다. 그러나 간호사는 그냥 예의상 물어봤다는 듯 별 신경쓰지 않고 “따끔할 거예요”하고 경고하며 바늘을...
찔러넣었다.
과거의 악몽 때문에 적잖이 긴장했는데, 바늘을 일부러 보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늙으면서 아픔에 무뎌진 탓인지 행을 바꿔가며 묘사할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정말 따끔한 정도였고, 그 뒤로는 이물질이 박혀 있는 묘한 간지러움만이 남았다. 기껏해야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걸린다는 설명을 듣고 나는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사은품 메뉴 셋 중에서 생각했던 대로 햄버거 세트를 골랐다. 간호사는 누워있는 내게 안내문과 헌혈증서, 그리고 교환권을 건넸다. 누워서 팔에 바늘을 꽂고 정말 감사하다는 문장을 읽고 있자니 전쟁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같은 기분도 들었다. 실제로 하고 있는 왼손 운동은 “에반게리온”의 신지 같았지만.

피를 뽑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트위터 따위를 뒤적였는데, 나는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왼손을 훨씬 많이 쓴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모처럼 피를 400밀리나 뽑고 있는 와중에 더 재미난 걸 할 수는 없었을까 싶었지만, 병실이 그러하듯이 딱히 특별한 게 없었다. 피가 주머니에 차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시야 밖에 있었다. 그래서 별 재미없이 순식간에 피를 뽑았다. 핸드폰으로 마작이라도 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등학교 때는 그랬던 기억이 없는데, 피를 뽑은 뒤에도 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혈대를 차고, 거기에 10분으로 설정된 귀여운 알람 시계를 붙이고 앉아서 쉬어야 했다. 피를 뽑고 갑자기 큰 운동을 하면 현기증이 올 수 있다는 모양이다. 나는 그걸 좀 느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하라는 대로 얌전히 앉아서 과자와 주스를 먹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아니었다. 나는 병원이나 미용실에 앉으면 평소에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잡지 뒤적이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 잡지도 없었다. 사람들이 뽑은 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는지 알려주는 책자라도 있으면 감개무량하게 읽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동기부여 측면에서 과자나 햄버거 교환권만큼이나 그런 보람을 안겨주는 것도 중요할 텐데, 아쉬운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맞은편에 앉은 고등학생 커플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정도로, 애 같지 않은 요즘 애들이 아니라 확실히 애들 같은 느낌이 드는 애들이었다. 폴로셔츠로 된 하복이 산뜻했는데, 여자애는 검은색 가디건을 덮고 있었다. 둘은 번갈아가며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실력이 엉망이라고 상대를 비난하고 깔깔 웃었는데, 패스트푸드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을 헌혈의 집에서 보자니 신기했다. 기껏해야 두 번째 온 주제에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기특해 보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만, 둘이 합쳐 두유 팩 넷에 달하는 피를 뽑고서 앉아있는 커플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 게 잘못은 아니겠지. 자진해서 피를 뽑고 싶어하는 커플은 공익광고에나 나올 만한 것이니까.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어릴 때 싱싱한 피를 좀 뽑아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술도 담배도 하지 않던 시절에 뽑는게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커플은 나보다 먼저 나갔는데, 과자를 먹다가 보니 남자애가 학생증을 놔두고 갔기에 간호사에게 전해주었다. 간호사는 곧장 그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어린 커플이 놀러 가서 핸드폰이 울리는지도 모를 곳이라고는 피씨방이나 노래방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피를 800밀리나 뽑아놓고 사이좋게 가상현실에 접속하거나 미러볼 밑에서 키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거야말로 사이버펑크적인 광경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내가 찾아줄 것도 아니니까 다시 앉아서 기다렸는데, 어째 알람이 울리지 않아서 보니 시작을 눌러놓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말하니 5분만 더 있다 가라기에 알람 없이 오 분을 앉아있다가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간호사들은 그때 식사중이었는데, 누가 오든 가든 완벽하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기야 누가 와서 훔쳐갈만한 물건이라고 해봤자 피나 과자 뿐인데, 둘다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만한 물건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헌혈전선에 복귀했는데,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다른 부수적인 이득이 없더라도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우대받는 경험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이라 마음에 들었다. 생각만큼 아프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대로 할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일본에는 헌혈 카페 같은 게 있어서 메이드 같은 간호사들이 아주 상냥하게 피를 뽑아준다는데, 한국도 헌혈 인구를 늘리려면 거리에서 피켓 들고 행인들에게 힘없이 말을 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게 좋지 않을지? 카페처럼 만들 수 없다면 안락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하면서 별로 아프지 않게 헌혈할 수 있고, 그렇게 받은 피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하고 있다는 홍보라도 확실히 하면 좋겠다. 그러면 나처럼 어릴 때의 막연한 공포 때문에 헌혈을 꺼리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을까?

아무튼 두 달 안에 파격적인 변화가 생길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니, 다음에는 피뽑는 상황을 즐길만한 것들을 알아서 준비해볼 생각이다. 귀족적 뱀파이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으며 마작을 쳐야지. 할 수만 있다면 레드와인도 마시고 싶지만, 그런 짓을 놔둘 것 같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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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1 아이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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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의 외국인이 어떻게 사는지 본 적이 없어서 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인은 나이를 먹으면 건강을 위해 불확실한 돈을 투자하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이 확실하다. 옆에서 냉정히 생각하면 이런 게 효과가 있을 리가 있나 싶은 것들도 자꾸 구매해서 보기에 안타깝다.

최근에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원래 굉장히 비싼 것을 싸게 떨이로 판다고 건강 팔찌를 세 개나 사왔다. 가족이 넷인데 왜 셋을 사셨느냐고 물으니 넷이나 사기에는 비싸서 그랬단다. 아마 만 원쯤은 했던 모양이다. 사이즈에 상관 없이 찰 수 있는 금속 밴드형이고 안쪽에 지름 3밀리쯤 되는 원석Z(혹시 모를 잡음을 방지하기 위해 검열)가 규칙적으로 박혀 있었는데, 상인의 설명으로는 밴드도 티타늄이라 원석Z가 빠져도 몸에 좋단다. Z에 열광하는 중년이 하도 많아서 Z가 어느 정도는 몸에 좋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왔던 나는 그 설명을 전해듣자마자 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티타늄이 우수한 금속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몸에 두르고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 건강이 개선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다간 라듐이나 폴로듐을 몸에 좋다고 파는 상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강에 좋으니 쓰라고 주시는 물건을 매도하고 진실을 낱낱이 규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순순히 받아들었다. 정신적인 위안이 된다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Z-티타늄 브레슬릿 (건강+1)’이라는, 차고 있는 것만으로 아다만티움 발톱을 막아내고 미스릴 갑옷을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막힌 아이템을 착용하고 며칠을 생활해 봤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바다표범 기름을 마시며 건강 보조 영양제는 그 효과를 도통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쓴 것처럼 이런 건강 보조 기구들 역시 그 효과를 체감하기가 영 쉽지 않다. 차라리 운동 기구라면 아무리 이상한 물건이라도 쓰는 동안은 운동 효과를 느낄 수 있겠는데, 차고 있으면 건강해지는 팔찌의 효과는 어떻게 느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고민 끝에 그것을 차고 잤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비교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침에 느낌이 다르긴 했다. 팔찌를 차고 자면 팔 전체에 차가운 기운이 끼어 있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물감이라면 이물감이고 개운하다면 개운한, 희한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이 Z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금속 팔찌를 차고 자서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긴 탓인지 알 길이 없었다. 굳이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럭저럭 어깨가 시원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양도 그리 나쁘진 않아서 이 정도면 계속 착용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며칠 전 오픈마켓에서 Z 팔찌를 검색했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네 개 다 사기에는 비싸서 셋 만 샀다는 팔찌의 가격은 놀랍게도 1400원이었던 것이다! 뭐든 가격으로 따지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가격이 나름대로 신빙성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바가지를 썼으리라는 것은 일단 무시하고, 냉정히 생각해서, 차고 있는 것만으로 명백히 건강해지는, 심지어 영구적인 효과를 가진 팔찌가 고작 맥주 한 병 값이라면 누가 왜 그것을 사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즉시 원소 Z의 효과에 대해 한국어, 영어, 일어로 검색해 보니, 이건 참으로 가관이다. 이온을 어떻게 해서 인체의 밸런스를 잡아주고 산소를 공급해서 세포를 활성화하고 숙면을 유도하고 빈혈을 없애며 심지어 암 치료에도 효과가 있단다. 이걸 곧이 곧대로 믿자면 연금술사들이 그토록 찾던 현자의 돌이 따로 없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 설명도 제각각이다. 과학에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이걸 다 믿을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명백한 매커니즘이 있다면 이렇게 얘기가 분분하진 않으리라. 백번 양보해서 효과가 있을 수는 있어도, 아직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료를 찾아보고 나니 이 신비의 팔찌는 당장 거추장스럽고 촌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자고 일어났을 때의 묘한 감각도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마 위약 효과 때문이었으리라. 사람의 믿음이란 상상 이상으로 굉장한 것이라, 좋은 것이라고 믿으면 정말 좋은 것 같고, 나쁜 것이라고 믿으면 정말 나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팔찌도 좋은 것이라고 인식되는 동안은 정신적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가만 있다간 어머니가 언제 14만원이나 140만원짜리 아이템을 사올지 모르니 언젠가 말을 꺼내볼 일이다.

(삽입된 이미지는 본문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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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스크린의 자유, 광고의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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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락스크린에 광고를 띄워서 락을 해제할 때마다 돈을 적립해주는 앱을 설치했다. 광고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터넷 기사 같은 것도 보여줘서 락스크린을 볼 때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모니터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래서, 핸드폰을 이렇게 만드는 대가로 받는 돈이 얼마인가 하면, 락스크린을 해제할 때마다 기본으로 2원이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핸드폰을 락스크린을 해제했다가 다시 슬립모드로 변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몇 초 정도일지 계산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기업은 더 영악해서 이 기본 보상은 1시간에 한 번만 받을 수 있다. 다신 앱을 실행해서 기사를 읽거나 앱을 설치하는 등의 액션을 취하면 기본 보상의 수십배에 달하는, 막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꽤 귀가 솔깃하지 않은가?

하지만 앱을 설치하는 것까지는 귀찮아서 도저히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기왕 핸드폰을 쓰는 거 락스크린에 뜨는 기사나 가끔 보면서 천천히 돈을 모으자고 생각했다. 정확히 한 시간에 한 번씩 보상을 받으면 하루에 자는 시간 8시간 빼고 16시간이니까 32원이나 벌 수 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이것을 30일간 반복하면 거의 천 원에 필적하는 960원. 365일간 반복하면 무려 11680원이다!

아니, 티끌 모아 태산은 개뿔, 티끌은 티끌일 뿐이다. 심지어 아이폰은 원래부터 락스크린에 위젯을 마음대로 깔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이를 비켜가려고 광고를 음악과 앨범 커버 형식으로 만든 탓인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앱이 꺼져버려 새로 켜야 하고, 이걸 자꾸 까먹는 탓에 시간 당 2원조차 적립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 주가 지나도록 나는 아직 1000원밖에 모으지 못했다. 그나마 그중 500원은 친구 초대로 모은 돈이다. 고생하지 않고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렵고 치사스러운지 느껴보고 싶으면 이런 락스크린 광고 앱을 설치해보길 바란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보면 평소에 락스크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좋아하는 캐릭터 이미지를 깔아놓아 전쟁 영화에서 곧 죽을 병사처럼 가끔 열어보며 흐뭇해하곤 했는데, 그것도 사실 몇 번 뿐이라 자꾸 새 이미지로 바꿔줘야 하는 게 귀찮기도 했던 것이다. 괜히 괜찮은 배경화면이 없나 뒤적이느니 그냥 자동으로 바뀌는 광고나 가십거리를 깔아놓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다만 이런 식으로 일상의 한 부분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게 유행이 되면 광고가 어느 곳이고 침입해 버릴 것 같다는 걱정도 든다. 예를 들어 통화 대기음에 광고를 심는 대가로 통화당 5원이라든가,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광고를 심는 대가로 대화한 상대당 10원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파트 베란다에 집열판을 설치하면 서울시에서 설치비의 반을 지원해주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광고판을 설치하는 대가로 기업이 광고비를 주는 사이케델릭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런 광고는 노출 빈도가 낮아서 하지 않는 거겠지만, 반대로 노출 빈도만 높으면 광고는 아무데나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스마트폰 락스크린도 그렇게 차출당한 셈이고. 같은 논리로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구글 글래스가 보편화되거나 인류의 전뇌화(電腦化)가 진행되면 시야에 주기적으로 팝업 광고창을 띄우려 드는 기업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그리고 광고를 보는 계층과 보지 않는 계층이 나뉘겠지.
“걔 금수저야. 전뇌에 광고창도 안 깔았대."
“그래? 책 읽다 중간에 팝업창 끌 필요도 없단 소리야?"
“난 안 부러워, 난 광고 보는 거 좋아하거든."
이런 대화를 생각하자면 참으로 오싹한데, 어쩐지 어색하진 않다. 영화관 스크린에서도, TV에서도 줄곧 광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이미 광고의 디스토피아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이렇게 써놓고 면목없지만, 지금 내 블로그 두 곳에도 광고 배너들을 설치해 놓았다. 딱히 돈이 되진 않는데도 이렇게 방치해 둔 것은, 아직 지급 받을 수 있을만한 돈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앞다투어 볼만큼 대단한 콘텐츠를 연재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앞으로도 블로그의 한 부분을 희생한 대가를 받기까지는 인류가 진화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몇 안 되는 독자분들께는 정말 면목없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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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는 트럭에 대한 안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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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피는 봄날, 미소녀에게서 ‘트럭,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청춘과 열정의 트럭 드라이브 이야기가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얼떨결에 좋아한다고 대답했다가 트럭부에 입부해서 풋내기 드라이버로 시작하지만, 차츰 트럭의 묘미에 빠져 진정한 트럭맨이 된다는 전개죠. 전세계의 트럭 매니아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을 게 틀림없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다고요? 그건 당신의 내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설마 이 비슷한 얘기가 어디 있을라구요.

어쨌든, 정말로 트럭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따져본다면 저는 그 둘 중 어느 쪽이라기보다는 ‘안쓰럽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트럭이 나왔다고 기뻐 날뛸 이유도 없고, 꼴도 보기 싫다고 채널을 돌릴 이유도 없지만 안쓰러울 이유는 있어요. 왜냐하면 여러 매체에서도 트럭이 별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섭니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해요. 시뮬레이션 게임인 “유로트럭”은 플레이 영상만 봐도 어쩐지 트럭이 좋아질 정도로 멋진 게임이고, 자동차 전문 프로그램에서 고성능 트럭과 슈퍼카가 대결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예외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고, 그밖에는 트럭이 나왔다 하면 십중팔구는 사고 또는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화에서 트럭이 나왔다 하면 누군가 자동차째로 받혀서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박살이 납니다. 유조차는 꼭 폭발하구요.
 
저는 언제부턴가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보니 정말이지 트럭의 취급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술취한 운전사가 몬 트럭이 부부 중 남편을 죽이고 아내에게는 평생을 괴롭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근미래 호주의 폭주족 두목을 받아서 죽이기도 하며(뭐 이건 잘됐습니다만), 기업화된 조직 폭력배의 회장을 암살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어째선지 신선조 일원을 죽이는가 하면, 심지어 스티븐 킹의 소설과 TV 영화에서는 생명을 얻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닙니다. 마지막 건 본 건 아닌데, 검색창에 “트럭이 사람 죽이는 영화”라고 검색하니까 나오더군요. 맙소사.

제가 기억하는 한, 영화에서 트럭이 사고에 휘말렸는데 우습게 넘어간 것은 “백 투 더 퓨처”에서 비프와 똘마니들이 비료 트럭을 들이받아 똥범벅이 되는 장면 뿐입니다. 마티가 신나게 도망치고 비프는 입에서 똥을 뱉으며 구시렁대죠. 이쯤되면 사람들이 트럭을 '노상의 살인기계’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게 명백합니다. 너무하죠. 트럭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트럭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세요. 배송과 물가가 어떻게 될지. 제가 트럭이었으면 여간 억울하지 않았을 겁니다. 매일 죽도록 일하는데 정작 이미지는 공포의 살인기계라뇨.

물론 절대 트럭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넣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죽일 수도 있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시각적으로도 꽤 박력있으니까요. 다만 허구헌날 이런 식인 건 너무하지 않을까요? 가령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노트북을 쓰는데 영화에서 노트북이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깨부수는데만 쓰인다고 생각해 보죠.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 생각해 보니 이건 좀 재미있군요. 전 맥북 에어를 쓰는데, 이게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목을 썰어버린다면 자랑스러울 것도 같습니다. 비유가 잘못됐군요. 하지만 이게 수십 년간 당연한 걸로 다뤄지면 그것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제작자는 ‘도로에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트럭 불러!’보다는 좀 더 독특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트럭이 사람 죽이는 건 클리셰인데 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마 그게 보편적인 상식일 겁니다. 하지만 어떤 소재가 클리셰로 이용되고 또 이용되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화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스테레오 타입의 대표격인 ‘못된 계모’를 보죠. 이 유형은 정말 너무나 오래되고 유명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계모’ 하면 표독하고 질투심 많고 딸을 학대하는 여자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부모가 재혼을 한 가정은 어쩐지 다른 가정보다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이미지마저 있습니다. 편견일 뿐인데도 말이죠. 저는 외할머니가 어머니의 새어머니인데, 실제로 아무 문제도 없어요.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청소나 시키고 무도회도 못가게 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못된 계모 캐릭터, 예를 들어 백설공주 엄마를 볼 때마다 이건 어째 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세상인데, 어릴 때부터 재혼으로 인해 자식이 가사노동에 시달리고 숲속에 버려지고 종이옷을 입고 겨울에 딸기를 따러 가는 얘기 따위를 듣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어요. “스탭맘”처럼 새어머니가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적대시 당하면서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해 행복해진다는 얘기도 각광 받아야 합니다.

그러고보니 트럭 얘기를 하고 있었군요. 다시 얘기를 돌려서, 트럭도 이미지 개선을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트럭을 너무 좋아하게 된 나머지 달리는 트럭에 자꾸 다가가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되겠죠. 그렇게 보면 트럭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게 공익적으로 나은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폭주족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한다는 가짜 의도를 가져야 했던 “매드맥스 1”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딱히 트럭 살인이 공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 같진 않고, 단순히 상상력의 고갈 때문에 대충 편리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에 불만을 가지는 건 오로지 저 뿐이니까, 트럭이 사람 죽이는 장면은 아마 앞으로도 쉴 새 없이 나올 겁니다. 아마 트럭보다 더 강력하고 시각적으로 강렬한 존재가 일상화되기 전까진 그러겠죠. 드론 기술이 발달해서 하늘을 거대 드론이 수놓고, 이것들이 가끔 떨어져서 사람 머리를 깨부수거나 프로펠러로 목을 따버리는 일이 기사로 다뤄지지도 않는 시대가 되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트럭이 사람 죽이는 장면이 질렸다는 겁니다. 이게 ‘이사를 갔더니 새 집에서 이상한 일이…’처럼 반복하며 곱씹어도 나름의 맛이 있는 클리셰나 서사 장치 같지도 않구요. “캐빈 인 더 우즈”에서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모조리 비틀어 명작을 만들어낸 것처럼 살인 트럭도 누군가 재미나게 비틀어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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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재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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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매주 연재해온 (언제부터인지 찾아보기는 귀찮아서 포기했습니다...) 수요잡설입니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당분간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칼럼이나 웹툰도 아니고 블로그 포스팅에 불과해서 휴재 공지를 하는 것도 몹시 민망한데, 그래도 몇 분이나마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이렇게 공지를 올립니다. 

그간 아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9월중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복잡한 휴가철 잘 지내시길.


다양한 구독 서비스의 멋짐과 허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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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소유의 종말”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말 소유 대신 접속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정말 비싸서 쉽게 소유할 수 없는 것들만 빌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체 누가 집을 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슬슬 빌려쓰는/접속하는 상품의 가격대가 낮아져서 이제는 가전제품을 빌려쓰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고, 콘텐츠들도 ‘구독제'로 즐기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음악도 매달 얼마를 내고 서비스 내에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즐기는 방식이 정착되었고, 영화, 드라마도 당연스럽게 구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독제는 그 영역을 넓혀서, 정말로 구입하는 게 당연했던 상품까지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최근에 론칭한 프로젝트 Anne. 이 서비스는 놀랍게도 어지간해서는 장만하기 힘든 고가 브랜드 옷과 가방을 ‘스트리밍’ 으로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8만원이면 네 점을 받아서 즐기고 반납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에 들면 아예 사버릴 수도 있다. 70만원짜리 코트나 20만원짜리 블라우스, 170만원짜리 핸드백 같은 것을 각 2만원에 한 달씩 빌려쓸 수 있다는 건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제법 흥미로운 제안이다. 물론 이것들이 정말 고가 라인에 속한다고 볼 순 없겠지만, ‘스트리밍’으로 즐기던 사람이 상품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아예 주문해버리게 만드는 것도 주요한 수익모델일테니 꽤 적정한 가격 선정으로 보인다. 내 돈을 다 내고 사긴 힘들지만 일단 써보면 살짝 무리해서라도 갖고 싶어지는 상품. 생각할수록 영리한 구조다.

먹을 것도 당연히 자기가 사 먹는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몸에 좋은 다이어트 식단을 정기구독해서 먹는 서비스는 애저녁에 나왔고, 요즘은 간식거리까지 이렇게 구독해서 먹을 수 있는 모양이다. SnackCrate라는 서비스는 매달 세계 각국의 과자를 모아서 배달해준다. 가장 저렴한 게 대여섯 품목이 들어가는 14달러짜리 박스. 미국 서비스긴 하지만, 나처럼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시켜봄직하다. 동아리방에 붙어 사는 사람들이나 학교 근처에서 모여사는 친구들이 계를 해서 신청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세계 과자파티와 세계 맥주 파티를 열면 꽤 신날 것 같다. 왜 이렇게 좋은 것은 내가 늙고 나서 나온 것인지…?

관심을 가질 사람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비슷한 구조로 전자담배 액상을 구독하는 서비스도 있다. Zamplebox라는 이 서비스는 싸게는 19.99달러에 랜덤 액상 3병, 비싸게는 44.99달러에 11병을 매달 배송해주는데, 세심하게도 서비스를 신청할 때 자기가 원치 않는 맛은 골라서 빼달라고 할 수도 있다. 과자는 가끔 즐기는 것이지만 전자담배는 없이 못 살 지경이 된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만한 서비스지만, 배송료를 비롯해서 이래저래 따져보면 대단히 메리트가 있진 않아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그러고보니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멋진 꽃다발을 한아름 받는다는, 참으로 소박하고 이루기 힘든 판타지가 하나 있는데, 이것도 구독 서비스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놀랍게도 “모이”라는 서비스로 예쁜 꽃다발을 정기구독할 수 있는 것이다! 2주에 한 번, 4주에 한 번 등으로 빈도를 선택할 수 있으며, 가격은 서비스 기간에 따라 할인률이 다르지만 대략 회당 2만원 내외. 결혼하고 수십 년이 되도록 매주 아내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로맨틱한 남편 얘기 같은 게 종종 인터넷에 떠도는데, 이 서비스에 돈만 갖다 바치면 플로리스트가 제작한 부케를 꼬박꼬박 받아볼 수 있다. 배우자도 로맨스도 없지만 가장 중요한 꽃다발 하나만큼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와 구독서비스 만만세다.

일상 속의 멋진 선물은 돈을 내고서라도 받을 가치가 있다

정말이지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갖기 마련인 꽃다발에도 구독제가 도입된 것을 보면 좀 더, 결코 돈을 내고 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던 것들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애완동물도 구독제 서비스가 있었다. 1년에 9만원 가량을 내면 파트타임 애완동물을 빌려서 놀 수 있는 것이다. 검색해보니 2007년에 등장한 해당 서비스는 이미 사라진 것 같지만, 시간 단위로 개를 빌려주는 서비스는 여전히 존재한다. 짧게는 90분에 20달러, 길게는 4시간에 45달러. 개가 나보다 압도적으로 돈을 잘 버는 셈인데, 시급 문제는 둘째치고, 슬슬 이쯤되면 아무리 ‘케어’ 할 필요 없는 남의 애완동물이 좋더라도 동물을 돈주고 빌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집에 있는 쥐를 잡게 고양이를 빌려달라는 식이 아니니까.

여기서 한 술 더 뜨자면, 일본에는 ‘소이네添い寝’ 서비스라는 것이 등장했다. 소이네, 그러니까 '곁에서 자는’ 서비스다. 미국에서도 '잘 자게 안아주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물론 성매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엄격한 규칙이 존재한다. 구독제는 아니지만 구독제가 나오지 않을 이유도 없고, '관계’까지도 빌리게 되었다는 점에선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가면 명절 벌초와 제사, 문안인사도 세트로 구독해서 처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기술과 서비스는 늘 윤리 논의보다 앞서가기 마련이니까.

골치 아픈 윤리 얘기와 어쩐지 좀 수상한 서비스에서 벗어나서 다시 실생활 얘기로 돌아오자면, 이런 구독제 서비스는 일단 싸서 좋긴 하지만 하나씩 쌓이다보면 은근히 강렬한 부담이 된다는 게 문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할부금을 갚고 있는 기분이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매달 왓챠플레이가 약 6000원, 음악이 1000원(이벤트 할인중이다), 에버노트가 2500원(결제는 한번이지만 12개월로 나눠서 계산하면)이라 대략 10000원쯤이 빠져나간다. 여기까진 괜찮지만 거기에 조금 욕심을 내서 애플 뮤직을 쓰기 시작하거나 넷플릭스, 훌루, 혹은 크런치롤 등을 구독하면 2만, 3만으로 착착 뛰어오르는데, 이런 상황에서 매달 중간 수준으로 과자도 받고 액상도 받고 꽃다발도 받으면 이래저래 10만원 가량이 나가는 셈이다.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비용으로 싸다면 싼 값이지만, 핸드폰 요금이나 교통비처럼 결코 내 의지로 줄일 수 없는 지출액을 합쳐보면 슬슬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런 서비스는 '대여와 접속'인 만큼 중단해버리면 따뜻한 경험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도 상당히 허망한 감이 있다. 음악 스트리밍이라면 ‘나도 옛날엔 재즈를 꽤 이것저것 들었지’ 하고 책장에 꽂힌 음반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하다못해 폴더를 정리하는 재미조차 없는 것이다. 구독이 끝나면 그야말로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헤어진 연인처럼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되어버린다. 마치 골든 티켓을 잃어버리고 VIP클럽에서 쫓겨나는 꼴이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봤자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결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골든 티켓을 다시 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서비스들이 정말 저렴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애플뮤직을 8900원이라고 볼 때, 같은 가격이면 한 달 반에서 두 달이면 음반 한 장을 살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방대한 음악에 대한 일시적 접속권한까지 세트로 구독하는 것 보다는 그냥 한두 달에 한 번 음반 한 장을 사서 열심히 듣는 게 경제적인 게 아닐까?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역시 기껏 신청해놓고 바빠서 단 한 편도 보지 못한 달도 있다. 몇 편만 봐도 이득이긴 하지만 신청한 이상 본전을 생각하면 좋든 싫든 계속 이용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다. 리조트 이용권이 있으면 바빠도 어쨌든 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리조트 이용권과는 달리 이런 구독 서비스들은 사람을 움직일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므로 대단히 편리한 게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 종류는 늘어만 갈 것이다. 근미래에는 육체를 비롯해서 정말 내가 소유한 것이 뭐 하나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집도 핸드폰도 노트북도 육체도 빌리고 애인이나 배우자도 구독하고 애완견도 효도용 자식도 구독하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정말 터무니 없군. 하지만 이 글부터 당장 빌린 자리에서 빌린 맥북으로 구독중인 에버노트에 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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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내리막길과 식성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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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C.K.가 (통칭 루이스 C.K.)가 40대란 참 슬픈 나이라고, 젊어서 힘이 넘치는 나이도 아니고 늙어서 누가 돌봐주는 나이도 아니라는 취지의 불평을 한 적이 있는데, 발을 들인지 좀 지나고 보니 30대도 그리 좋은 나이는 아니다. 심지어 나조차 옛날에는 30대 하면 '사회인으로서 독립하여 완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멋지고 힘이 넘치는 나이…' 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부동산 문제를 비롯하여 온갖 사회적 문제가 겹치면서 실상 ‘권리는 20대와 딱히 다를 것도 없는데 책임은 갈수록 막중해지는’ 나이대가 되고 말았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나 할까. 아니, 빛이라도 좋긴 한지……?

아무튼, 그런 비극 속에서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은, 몸상태가 도무지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 없이 늙는 것도 서러운 판에 앞으로는 건강마저 잃는 길만 남았다 이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에서 이미 여러 번 30대를 성숙의 정점에 이른, 상대가 무엇을 원하면 그것을 줄 수 있는 나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체계적인 운동을 통해 건강을 관리했을 때의 얘기라, 그야말로 너무나 허구적으로 느껴진다.

몸상태가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 자체만큼이나 괴로운 점은, 이런 육체의 변화를 정신이 아직 익숙하게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급격한 속도로 어른이 되어가는 2차 성징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다. 성장하면서 ‘어라? 이제 늦게까지 안 자도 괜찮은데?’ ‘술이라는 거 맛있잖아?’ 를 느꼈다면, 이제는 ‘어라? 어제 좀 무리했나?’ ‘이상하다, 내가 술에 이렇게 약했나?’ 따위를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 괴리를 빠르게 눈치채고 익숙해질 수록 건강하게 늙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대단히 모자라긴 해도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2차 성징이란 이런 거예요. 여러분이 어른이 된다는 뜻이죠.’ 하고 가르치듯이 30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도 ‘30대란 이런 거예요. 여러분이 늙어간다는 뜻이죠’하고 대대적인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정당한 고용계약, 올바른 주택계약, 건강한 성생활, 부모님의 노화, 내 몸의 노화, 이렇게 세트로 의무교육을 하면 좋지 않을지?

각설하고, 육체의 변화 중에서 특히 놀랍고 아주 가끔 절실하게 느껴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식성의 변화다. 일단 예전 같으면 실컷 배불리 먹으면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할 텐데, 요즘은 ‘아, 이렇게 굶주린 짐승처럼 처먹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기 마련인데다, 심하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칼로리도 칼로리대로 겁나고, 소화가 안 되거나 배탈이 날까 무서운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여차하면 과식한 뒤에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릴 때도 있고, 소화가 안 되거나 설사에 시달려 약을 찾게 될 때도 있다.

양념이 너무나 강한 음식도 영 꺼리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매운 음식이라면 일단 도전하고 보는 무모한 인간이었고, 철판볶음밥이든 타코든 무조건 맵게 먹었다. 고등학교 때는 내기를 해서 피자 한 조각에 핫소스 세 팩을 뿌려 먹고도 까딱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남들 멀쩡히 먹는 철판 볶음밥을 같이 먹고도 혼자 배앓이를 할 지경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이제 매운 음식을 먹는게 그리 즐겁지도 않다. 좀 든든하게 먹고 싶을 때는 순대국밥을 배불리 먹곤 했는데 최근에는 그것조차 부담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생활에 있어서 한국인의 가장 저렴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는 치맥조차 100퍼센트 행복하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한 3년 전의 나에게 한대도 전혀 믿으려 들지 않겠지?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쩔 수 없다. 바삭바삭하게 막 튀겨낸 치킨과 시원한 맥주를 먹는 것은 여전히 끝내주는 일이고 언제든 먹을 용의가 있지만, 서너 조각 먹고 있자면 점점 그 강렬한 맛과 기름기가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입은 더 먹고 싶어해서 딱 한 조각만 더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니… 이것도 참 고역이다. 물론 이럴 때는 그만 먹는게 정확한 판단이고, 더 먹지 않아도 이미 배는 부르다. 다신 못 먹을 음식을 먹듯이 치킨 한 마리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우던 때가 아니다.


치킨을 먹는다고 무조건적으로 기뻐 날뛸 시기는 슬슬 지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욕망과 건강의 기로에서 욕망을 포기하는 길을 택하는 버릇을 들이고 있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후라이드 치킨보다 찹쌀밥을 채운 전기구이 통닭, 아니면 피자를 택하고, 무제한 뷔페보다는 적당한 요리 몇 가지를 시켜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어지간해서는 뷔페가 싼 경우가 많지만). '맥주가 무제한!' 이라는 문구를 보면 예전처럼 흥분하기야 하지만 금방 진정한다. 슬슬 육체적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대강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매일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나라도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며 1.5리터 넘는 맥주를 마시는 건 무모한 짓이다. 정말 맥주를 즐길 거라면 식사할 때 말고 위장에 여유가 있을 때, 과자와 함께 즐기는 게 안정적이다.

이런 식으로 위장의 노화를 따라가고 있긴 한데, 이 추격의 안타까운 점은 역시 추격이 잘 된다고 해서 딱히 쉴 틈이 생기진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질 게 없다. 한동안 산속에서 수련만 거듭한 전사가 칼을 뽑고 나서듯이 ‘슬슬 뱃속 컨디션도 괜찮으니 오늘은 치킨이나 한 마리 통으로 뜯어볼까?’ 하고 나설 수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과식 앞에 적당선을 그려놓고 그 앞에서 돌아서는 생활을 반복해야 할 것이며, 그 선은 점점 육체를 조여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점점 불행하게 될 뿐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부터 우울해지지만,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도 아니니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우울함을 피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치킨 대신 피자를 선택했듯이 행복의 포커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위장(혹은 간)을 쓰지 않고 더 높은 고양감과 만족감을 추구하는 데 행복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말해봐야 나도 그게 무엇일지, 니코틴 말고 다른 답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지만.




-후기

이 글을 쓴 뒤로 여행(이라기보다는 엠티에 가까웠지만)을 다녀왔습니다. 그럭저럭 엇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여 긴 시간을 보내자니, 노는 형식은 대학 시절과 똑같아도 그 내용은 어째 많이 달라졌더군요. 일단 포식을 포기하고 좋은 숙소를 선택했고(막상 가보니 엉망이었지만), 카레, 스튜, 미역국처럼 제법 건강한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술은 피로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즐겼고, 치킨을 시켜먹자는 얘기에도 누구 하나 흥분하지 않았으며, 밤샘에는 실패했고, 다같이 둘러앉아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조촐한 고통의 야매 안마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러다 내후년쯤에는 다같이 모여서 황금알을 보고 사슴피라도 마시러 다니는 게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드는 여행이었습니다만, 나 혼자 이런 게 아니라는 사실은 다행이었습니다. 다같이 늙는다는 건 적적하지 않아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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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에는 소중한 걸 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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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는 서울시가 도읍으로 정해진지 600년이 되는 해였고, 한국은 이를 기념하여 남산골 한옥마을에 타임캡슐을 매설했다. '서울 1000년 타임캡슐'이라고 명명된 이 타임캡슐은 보신각 종을 본딴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시민 공모를 통해서 현대 생활과 서울을 대표할 수 있는 물품 600점을 선정하여 보존했다.

600점. 많은 것 같지만 매년 나오는 베스트셀러와 음반, 영화 등 콘텐츠만 생각해보더라도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거기에 유행하던 옷, 음식, 생활품 등등을 세어 보면 600점은 무슨 1000점도 모자랄 판이다. 당연히 깊은 수준의 논의를 거친 끝에 선정했을 게 분명한데, 놀랍게도 이 600점의 보존품 중에는

정력팬티

가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자리를 빛내고 있다는 표현을 써야하나? 아무튼, 착용자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성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아이템이 현대인의 생활과 서울을 대표하여, 서울시가 도읍으로 정해진지 600년을 기념하여 지금 서울시 지하의 타임캡슐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지금 당장 2394년의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소중한 문화를 떠올려보자. 2394년이라니, 까마득한 미래다. 그때까지 서울이 존재하기나 할지도 불확실하고, 대한민국이 존재할 것인지도, 한국인이 몇 명 남아 있기나 할지도 모를 미래다. 어쩌면 스카이넷 같은 악랄한 AI가 인류를 지배하거나 한창 몰살하는 도중일지도 모른다. 그때 레지스탕스의 해커 한 명이 타임캡슐의 위치를 알아내어, 위대한 반격의 희망을 품고 한 중대를 거의 다 잃어버린 끝에 타임캡슐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고 치자. 미래를 예견하고 중요물품을 매설해놓은 선조들의 지혜에 감사하며 슬근슬근 톱질해서 타임캡슐을 열었더니, 이게 왠 걸, 정력팬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카이넷은 정력팬티를 입은 채 절망한 레지스탕스 리더를 붙잡아 한껏 비웃을 게 틀림없다.
-인간은 정말 한심하군. 그렇게나 종족보존을 하고 싶다면 원하는대로 해주지.
그리고는 레지스탕스 리더를 인간 농장 같은 곳에 가두고 건강한 종마처럼 취급하겠지. 덕분에 살해당하진 않았으니 정력팬티 만만세다.

정력팬티와 그밖의 물건 599점이 묻혀있는 자리


잠시 극단적인 상상을 해봤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타임캡슐은 미래의 전쟁을 위한 보급품이 아니라 사료니까, 그 당시 유행하던 물품을 정직하게 넣은 것이리라. 강남 스타일이 유행하던 때라면 강남 스타일 음반을 선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런 계통의 물품이 기막힌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를 보진 못했으므로 정력팬티의 효용이란 옥장판과 비슷한 수준으로 느껴지고, 결국 아무리 그래도 너무 쓸데없는 걸 넣은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뭐, 내가 고른 것도 아니고, 평가야 2394년의 사람들이 할 일이지만. 어쩌면 그때쯤 정력팬티 관련 주식을 사놓으면 돈방석이나 팬티방석에 앉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잘 메모해 두시면 큰 도움이 되겠죠?

그나저나 PDA를 쓰기 시작한 2005년 이전까지 나는 수첩을 애용하는 사람이었다. 일기도 2006년 초까지 손으로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날로그 기록이었는데, 이게 단문을 자유롭게 기록하기는 편하긴 해도 이후에 검색하기는 무척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라, 일기는 작년에 고생해서 전산화를 마쳤다. 하지만 중고딩 때 쓴 수첩에 기록된 것은 딱히 이제와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알림장’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 그대로 놔두었는데,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노릇이라 PDA와 함께 박스에 잘 넣어 침대 뒤편 어둠속에 매설했다. 이것도 나의 타임캡슐이라면 타임캡슐인 셈이다.

이밖에도 타임캡슐처럼 잘 보존된 것들이 제법 있다. 고장난 이어폰들도 언젠가 한꺼번에 수리해서 잘 쓸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모아두었더니 서랍이 검무덤 비슷하게 되었고, 연극, 공연 팜플렛이나 티켓, 고등학교 시험지 따위도 잘 모아서 곳곳에 쑤셔박았다. 심지어 내 방에는 형이 연애하던 대학시절의 추억을 모은 사랑의 상자도 매설되어 있다. 내 물건 놓기도 모자란데 그런 물건을 내 방에 숨기다니, 이거야말로 Not in my back yard!라고 주장할 일이다.

그런데 가끔 공간이 모자라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 되면 대체 왜 이런 것들을 굳이 모아놨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괴로워진다. 가끔 꺼내보면서 추억에 젖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전산화했으니까 나머지는 좀 버려도 될 것이다. 애초에 추억에 젖을 시간도 별로 없는 마당에 굳이 이어폰과 팜플렛까지 갖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하여 최근에는 신변 정리하듯이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보지 않을 책은 팔고, 팔 수도 없고 쓰지도 않을 물건은 버린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들부터 그렇게 처리하고 있는데, 몇 박스를 그렇게 치워버리고 나니 마음이 좀 가뿐해진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추억을 보존하는 데에도 알게 모르게 비용이 소모되는 것이다.

이 대규모 과거 청산을 미래의 내가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겠다. 타임캡슐이나 뒤적일 정도로 한가해질 나이까지 살아있다면 그때 그걸 버리지 말 것을, 하고 자신을 저주할지도 모르고, 더 일찍일찍 버리고 깔끔하게 살 걸 그랬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정력팬티처럼 시답잖은 물건을 놓아두면 스스로 부끄러워질 것은 확실하다. 버릴 것은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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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선 싫은 생선 따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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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정말 좋아하지만 생선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생선도 물고기니까 고기가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고기는 고기 육 자를 쓰고 생선은 물고기 어 자를 쓰니까 같은 카테고리에 넣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같은 카테고리면 또 어떻단 말인가? 내가 이건 좋고 저건 별로라는데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하진 않겠지.

아무튼, 생선의 결정적인 문제라면 역시 가시다. 흔히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니 어쩌니 하지만 생선은 그렇지도 않아서, 엄청나게 맛있지도 않은 주제에 귀찮게시리 가시까지 있다는 게, 흔히 말하는 ‘애기 입맛’인 나의, 생선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이다.

그러고보면 이 ‘애기 입맛’이라는 변명도 쓰자면 참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어른이라면 응당 즐겨야 하는 음식, 예를 들면 콩, 나물, 국밥, 해장국, 해물탕, 생선찜 따위가 굳건히 있고 이것을 즐기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문화가 있어서, 그런 걸 먹지 않는다고 하려면 어쩐지 민망함을 느끼며 구구절절 이유를 갖다대야 하는데, 그런 귀찮은 변명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방편으로 발명된 것이 바로 ‘애기 입맛’이 아닌가 싶다. 확실히 애기 입맛이라고 해 버리면 많은 면에서 편해지는 게 사실이긴 하다. ‘하하, 제가 애기 입맛이라서…’ 하면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괜히 먹기 어려운 음식 따위를 권해서 귀찮게 굴지 않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애기 입맛’이라는 카드를 쓸 필요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게 아닌지? 내가 뭘 먹든 안 먹든 이상한 사람도 아닐 뿐더러 거기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각설하고, 가시 때문에 생선의 가성비, 즉 그것을 먹기 위한 노력에 대한 맛의 정도는 평균적으로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선은 달다. 하지만 생선을 먹기 위한 노력은 심하게 쓰다. 당장 집에서 조기를 구워 먹는다고 생각해보더라도, 냄새도 냄새고, 발라먹는 것도 귀찮고, 쓰레기도 제법 나온다. 그러면서 그만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음식들에 비해 엄청나게 맛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값이 싼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보관이 아주 오래 되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생선이란 퍽 호화로운 요리가 아닌지?

그래서 생선구이는 역시 나가서 사먹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물론 나야 조기구이를 돈 주고 사먹고 싶지 않지만, 생선구이 전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라 삼치 정도라면 가끔은 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삼치는 가시를 발라내기가 무척 간편하고, 닭가슴살처럼 통통한 살코기가 맛도 있다. 할수만 있다면 노력 경제성 인증 마크 같은 걸 만들어 찍어주고 싶다. 아구찜도 마찬가지다. 만들기는 아주 번거롭지만 가시를 바르긴 어렵지 않고, 얼큰한 국물이 배어든 살을 입에 넣고 씹는 맛이란 다른 요리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가시를 발라내기가 편한 생선이 합격이니까, 가시를 발라낼 필요가 아예 없는 생선들은 당연히 합격이다. 합격을 떠나서 이쪽은 대체로 대환영일 지경이다. 일단 회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멋진 음식이다. 자연의 은총이다(단, 세꼬시 제외). 연어는 연어대로 부드럽게 녹는 듯한 맛이 훌륭하고, 광어는 광어대로 통통하고 은근히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즐겁다. 참치도 멋지다. 언젠가 참치 전문점에서 질리도록 참치 회를 먹어보는 게 소박한 소원 중의 하나다.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연어 요리

회를 먹을 때 간혹 딸려 나오는 꽁치 구이도 아주 좋아한다. 꽁치구이의 미덕은 역시 가시를 씹어먹어도 된다는 것이라 아무런 걱정 없이 즐길 수 있고, 살을 한 웅큼씩 떼어다 와사비 간장에 찍어먹으면 구운 꽁치 특유의 불 맛과 와사비의 알싸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 다른 생선들과 마찬가지로 꽁치도 머리쪽으로 갈수록 쓴맛이 강해지는데, 이것도 썩 나쁘지 않다.

같은 이유로 빙어도 좋아한다. 먹을 기회라곤 딱 한 번 뿐이었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걸 쥐고 억지로 입에다 쑤셔넣는 게 부담스러워 죽은 것이나 튀긴것만 먹었지만, 통통하고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아주 훌륭했던 걸로 기억한다. 시샤모 튀김도 딱 한 번 먹어봤는데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장어가 있었지. 장어를 좋아한다는 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전달되었겠지만, 아무튼 장어 구이도 멋진 음식이다. 여름철 보양식의 대명사에 가까운 이 요리가 정말 스태미너에 도움이 되는지는 과학적으로 측정해본 적도 실감해본 적도 없지만, 어쨌든 기운 빠질 때 기름지고 맛난 것을 먹고 ‘이제 좀 낫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최근에는 나처럼 식비를 아끼려는 이에게는 구름 위의 음식이나 다름없었던 장어 덮밥이 편의점 도시락으로 출시된 덕에 몇 번이나 저렴한 가격에 호사를 누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간편하게 장어 덮밥을 먹고 있자면 세상이 (자본주의적으로) 더 진보해가고 있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가끔은 가시가 그렇게 문제라면 가시가 있든 없든 신경쓰지 않고 씹어 먹으면 될 게 아닌가? 하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받을 때가 종종 있다. ‘가시는 씹어 삼켜!’라는 어른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인데, 글쎄, 그게 되는 생선의 폭이 나는 많이 좁은 모양이다. 어릴 때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고생한 적도 있고.

어른들이 가시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생선 중에는 그 유명한 ‘전어’ 도 있다. 이것은 어찌나 별미로 여겨지는지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까지 있을 지경인데, 최근에 우연히 먹어보니 어째 명성이 부풀려진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는 씹어먹을 정도로 작거나 연하지 않은 주제에 많기까지 해서 발라내기가 대단히 고역스러웠고, 살이 맛있긴 했지만 고작 그걸로 집 나간 며느리 운운할 수준도 아니었다. 고양이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전어 굽는 냄새에 지긋지긋한 가사노동이 플래시백 된 며느리가 더블배럴 샷건을 들고 돌아온다면 또 모를까.

그건 그렇고 나는 애기 입맛임을 방패로 사용하면서도 그런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취향을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삭힌 홍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슈르스트뢰밍 다음으로 냄새가 지독한 음식이라는데, 내 입엔 맛있는 걸 어쩌겠는가? 홍어는 뼈를 바를 필요도 거의 없고, 통통한 살을 씹는 맛도 좋으며, 입에 넣었을 때 확 끼쳐오는 그 화한 느낌도 훌륭하다. 멘솔 담배를 피우는 것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멘솔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과 삭힌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어쨌든 삭힌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 평생 딱 두 명 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나는 홍어를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먹지 못하느냐고 묻거나 꾹 씹어 삼키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맛있는 건 혼자 먹고 싶기도 하고, 내가 절대적인 마이너리티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시가 많은 생선을 좋아하는 건 메이저일까 마이너일까?

생선을 좋아하는 게 메이저인지 마이너인지 한국에서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일본에서 메이저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생선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일본 가정식 아침으로는 생선 구이가 메인 디쉬로 나오곤 하는데, 생선 구이라면 일단 겁을 먹고 보는 나도 조우할 때마다 맛있게 잘 먹을 수 있었다. 가시가 적은 연어나 붉은살 생선일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름지고 맛있는 생선 구이와 흰 쌀밥으로 아침부터 배불리 먹는 즐거움에는 육고기로는 맛볼 수 없는 깔끔한 충실함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일본에 놀러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큐슈에서 먹은 모듬회 덮밥.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아름답군요.

그런데 대체 왜 한국에선 장수의 비결로까지 지목되는 붉은살 생선 말고 흰살 생선을 많이 먹는 것일까?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이건 타고난 민족적 취향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어획량의 문제였다. 태평양을 면한 일본은 덩치 큰 붉은살 생선이 많이 잡히고, 그렇지 못한 한국은 조그만 흰살 생선이 많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 때문에 한국에선 생선을 회로 먹을 때 산 채로 운반해서 신선한 활어회로 먹는 경우가 많고, 일본에선 큰 생선을 오래 살려둘 수 없어 며칠 숙성해 먹는 선어회나, 그것을 밥에 올려 먹는 초밥으로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는 나도 태평양 연안에서 태어났다면 ‘생선은 대체로 좋아하지만 흰살 생선만 좀 별로인 것 같아요’ 하고 생선 애호가를 자처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지리적 특성과 어획량이 이렇게 사람의 미래를 바꿔놓기도 하는군요. 생선 좀 가려 먹는다고 딱히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지만.





-후기
본문에 ‘연어나 붉은살 생선’이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어째서일까요? 정답은 '연어는 흰살 생선이기 때문’입니다. 저만 최근에 안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붉은살 생선은 역시 최고라고 생각하며 먹어온 연어는 원래는 흰살 생선인데 먹는 것들이 붉어서 그렇게 빨개진다는군요. 꽃게를 빨간색 크레파스로 그리는 아이 같은 착각이었습니다. 뭐 어쨌든 빨갛든 하얗든 맛만 있으면 그만이 아닐까요? 아, 연어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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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소중한 것은 놓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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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의 도래로 너무나 굉장한 세상이 되었다는 얘기를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두드린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멋지다. 한 손에 스마트폰만 들고 있으면 언제나 광활한 정보의 세계에 접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 아주 조금 접)할 수 있다니,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 멋짐은 화장실에서도 결코 바래지 않는다.

하기야 변기에 앉아있는 시간은 정말 애매한 시간이라, 장문의 글을 읽기도 뭣한 만큼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거나 커뮤니티를 돌아다니거나 포털 사이트를 구경하는 게 가장 적합하긴 하다. 고백하건대, 나도 변기에 앉아서는 트위터를 들여다보거나 칼럼을 한 편씩 읽고 있다. 화장실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게 위험한데다 비위생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나름대로 조심하며 손도 잘 씻으니까 괜찮겠지.

그런데, 내가 정말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변기에 앉았을 때가 아니다. 변기 앞에 섰을 때다. 즉, 남자 화장실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광경들이다.

정말 놀랍게도, 그리 낮지 않은 빈도로 소변을 보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한 손으로 방뇨를 컨트롤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하고 불안할 것 같은데 어떡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인지? 굳이 해야 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테러범이 등에 총을 대고 ‘30초 안에 이 사이트를 해킹해 주셔야겠어, 오줌을 싸면서 말이지.’라고 협박하지 않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스워드 피쉬”라는 영화에선 해커인 주인공이 테러범의 권총 앞에서 펠라치오를 당한다는 극한 상황 속에서 엄중한 보안을 해킹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도 그리 달가운 상황이 아니긴 마찬가지다.

어쨌든, 소변을 보면서 스마트폰을 보든 말든 그건 개인의 결정이고, 스마트폰을 변기나 화장실 바닥에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눈을 떼면 안 되는 뭔가를 보고 있다면 그건 그만큼 중요한 일일테니까 도덕적으로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방뇨가 신성한 행위도 아니고 꼭 집중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그런데 최근에는 마가 낀 것인지 더 기상천외한 모습을 여럿 목격했다.

일단, 퍽 고급스러워보이는 헤드폰을 끼고, 거기에 연결된 스마트폰을 변기 앞쪽 선반에 올려두고 영상을 감상하면서 소변을 보는 사람. 이건 비교적 안전한 편이고, 즐거워보였으니까 딱히 뭐라 할 말은 없다. 단지 멋진 헤드폰과 방뇨라는 두 개념이 잘 매치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웠을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두 개념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은 무라카미 류가 쓴 소설의 SM 플레이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로는 술집에서 화장실에 갔을 때인데, 한 남자가 소변기 앞 선반에 엎드리듯이 기대어 두 손으로 스마트폰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뭐, 취했으면 거기 서서 게임을 할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옆에 서보니 이 남자는 시원하게 방뇨중이었다. 내 눈이 의심스러웠지만, 분명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손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방뇨를 하는 동시에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어린 애들이 하반신의 옷을 전부 끌어내리고 자유롭게 소변을 보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옷을 다 입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잊어버리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방뇨 행위에만 집중했지만, 내가 일을 끝낼 때 쯤 그는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핸드폰을 선반 위에 놓고 아예 두 팔을 베고 엎드려 버렸고, 나는 그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당시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배는 ‘발기한 게 아닐까요?’하고 가설을 내놓았는데, 생각해보면 확실히 의복의 장력을 견디는 상태라면 그게 타당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글쎄, 술집 화장실에서 발기한 채로 소변을 보며 두 손으로 게임을 하다 엎드리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물론 본인은 딱히 좋아서 발기한 것도 아닐 것이고, 자기가 편해서 핸즈프리로 소변을 보고 있었을 테니 대단한 문제도 아니고, 만약 이 글을 보면 상처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분상 그렇단 말이다. 애초에 화장실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어떤 놀라움도 발견하고 싶지 않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남자들은 뜻밖에도 델리케이트한 면이 있어서, 타인의 바로 옆 소변기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마저 있는 것이다. 때문에 5개의 소변기가 있을 때 2번이나 4번을 쓰는 것, 그리고 1번을 쓰는 사람이 있을 때 4번을 쓰는 것 등은 다음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그러나 누구도 지적할 수 없는 사소한 비매너 행위로 간주되는데… 음, 이건 정말 딴 얘기군.

각설하고, 술집 화장실에서 받은 충격을 다스리며 일주일 쯤 보냈을 때였다. 도서관 화장실에 들어가니 그럴듯하게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분이 반듯하게 서서 두 손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과연 도서관인가, 한국 도서 시장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구나, 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신사분은,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소변기 앞에 서서 방뇨 중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댄스댄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친구 고탄다가 소변을 보는 모습마저 멋있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문장을 체현한 듯한 신사였다. 노르웨이의 전나무보다 더 곧고 반듯한 자세라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면 나도 저렇게 멋진 신사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할 법한 분이었다. 소변을 보는 중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니, 소변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둘 중 하나만 하고 있었더라도 별 문제 없이 멋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신사분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고 멋진 자세로 일을 보고, 옆구리에 책을 낀 채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각박함이 사람들을 이 정도로, 소변 보는 시간조차 뭔가를 하도록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수불석권이라는 사자성어가 있긴 하지만, 이런 일들을 목격하고 나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흔히 어떤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 그 행위를 모든 사람이 한다고 생각해보라고 하는데, 남자화장실에서 모든 사람들이 방뇨하며 스마트폰을 보거나 반듯한 자세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기이해서 도저히 그들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손 씻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넉넉히 1분 정도는 보던 걸 내려놓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게 분명하다. 무한한 정보의 세계가 멋지긴 하지만, 어쩌면 눈앞의 즐거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우리는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홍보


제가 카카오페이지, 네이버북스, 리디북스, 미스터블루 각종 서점에서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심야마장 - 레드다이아몬드 살인사건 여전히 팔고 있다는 소식인데요, 진득한 미스터리 좋아하는 분들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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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은 불편하기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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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안경을 써왔으므로 안경이 딱히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지만, 내 몸이 아닌 것을 얼굴에 걸치고 다닌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이다. 자신이 쓴 안경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는 분이 있는지? 전자담배라는 취미 때문에 전자저울을 보유한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20.47그램이다. 대단치 않은 것 같아도 상당한 무게다. 조그만 물약병 한 통 분량의 물을 코와 귀에 얹고 생활하는 셈이다. 이 생활을 몇 년만 하면 얼굴이 눌려서 안경을 쓰지 않은 모습이 어색해진다. 끔찍하기도 하지. 각종 허구(주로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는 매일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다니던 소년/소녀가 안경을 벗고 살짝 옷을 갈아입은 것만으로 엄청난 미소년/미소녀가 되곤 하는데, 이건 사실 안경이 아니라 머리 모양과 패션의 문제로 보는 게 맞다.

아무튼 무게도 무게지만 안경이 커버하는 시야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기껏해야 정면의 시력만 보정해주니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시야의 50퍼센트 정도가 아닐까? 당연히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빠르게 확인해야 하는 스포츠, 운전 등에 적합하지 않다.

렌즈가 더러움에 취약한 것은 물론이고, 기온차에 취약하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라면이나 우동처럼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먹을 때는 안경을 벗든지, 아니면 김이 식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어느쪽도 식사를 완전히 즐기는데 좋지 않다. 물론 눈이 적당히 나쁜 사람이라면 안경을 벗는다고 딱히 문제 될 건 없겠지만, 나처럼 -10디옵터를 넘어가는 고도근시자라면 당장 젓가락으로 집은 게 뭔지도 모를 판이니, 이래저래 식사의 질이 약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초점 렌즈니 몇 중 압축이니 하는 것들이 계속 쏟아지는데 왜 김서림 방지 렌즈는 보급되지 않는 것인지?

안경을 벗을 수 없어서 곤란한 상황하면 역시 목욕탕도 빼놓을 수 없다. 씻으려면 안경을 벗는 게 당연한데 그럴 수가 없다! 당장 면도할 때도 거울에 코를 박을 정도로 가까이서 해야 할 지경이니, 안 그래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데다 어두침침한 목욕탕 안을 맨눈으로 다니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그냥 알몸에 안경만 걸치고 들어가게 되었는데, 참으로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꼬락서니가 아닐 수 없다. '저 사람, 안경을 쓰고 들어왔어, 변태 아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물에 들어갈 때마다 안경을 벗어서 어딘가에 잘 놓아야 하니, 번거롭고 마음도 편치 않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목욕탕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잘 때는 안경을 벗어야 한다는 점도 은근히 곤란하다. 요즘처럼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보면서 시간을 죽이다 잠드는 때에는 특히나 깨어보면 안경이 보이지 않아 난감하기 짝이 없다. 눈이 보여야 안경을 찾을 텐데, 눈이 보이려면 안경을 써야 한다니?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있나. 이 끔찍한 상황을 탈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시력이 멀쩡한 누군가를 부른다. 혹은 안경을 쓴다. 그래서 형은 종종 아침에 나를 불러 안경 수색을 의뢰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도 영 귀찮다 싶어 눈이 안 보여도 찾을 수 있는 자리에 예전 안경을 하나 보관하고 있다가 긴급 상황에 착용한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잘 보이는 자리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서 한숨을 쉬고는 바꿔 끼는 것이다. 흔히 '안경' 하면 학구적인 이미지의 아이콘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 꼬락서니에는 해학적인 느낌마저 감돌고 있다.

게다가 안경은 패션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마저 안고 있다. 물론 안경을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시점에는 그때그때 이미지를 바꿀 수 있어 대단히 전문적이고 멋진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안경 없이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이 안경을 바꿔끼는 것 뿐이다. 나는 옷에 따라 안경을 바꿔 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름대로 로망을 갖고 있는데, 고도 근시라면 이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10만원이 넘어가는 안경을 두 개나 맞추는 것도 무시무시한 일인데, 심지어 나는 그렇게 맞춘 안경을 계속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눈이 계속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성인이 되면 시력 약화가 멈춘다고들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 눈은 쉬지않고 불철주야 나빠지고 있다. 예전에 맞춘 콘택트 렌즈도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안경을 둘이나 맞춘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래서야 도수를 넣은 선글라스조차 만들 수 없다. 생활 습관이 엉망이라 이 모양인지?

책 읽는 대신 야외에서 노는 게 시력 저하를 막는 길이라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눈이 나빠지는 건 흔히들 '책을 많이 봐서'라고 하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빛을 덜 쬐서'라고 한다. 어둠속에 사는 종족의 눈이 나빠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음, 그렇다면 눈이 점점 나빠지면서 초음파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더듬이에서 빛을 뿜어 먹이를 유인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기대해볼 법도 하지만, 아직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지도, 더듬이가 돋아나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불공평한 세상이다.

각설하고 시력 보정의 방법으로는 안경 말고 콘택트 렌즈도 널리 사랑받고 있고, 나 역시 하드 렌즈를 두 번이나 맞춰 봤지만 몇 번 사용하지 못했다. 넣고 빼는 것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았는데, 눈동자가 가려운 이물감도 견디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8시간도 가지 못해 눈이 마르고 빨갛게 되어 곤란했다. 렌즈를 빼서 보관할 케이스와 안경까지 다 들고 다니자면 슬슬 뭐하러 렌즈를 쓰는지 알 수 없을 판이다. 그래도 렌즈를 고집할 이유가 하나 있다면 '나도 그럭저럭 멋은 내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 정도가 있겠는데, 불운하게도 그때 내 주변에는 안경을 벗었다고 훨씬 낫다고 해 주는 사람이 있긴커녕 "렌즈는 뭐하러 했냐? 잘 생겨지는 것도 아닌데"라고 독설을 내뱉는 사람 뿐이었으므로, 콘택트 렌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고 수고로운 낭비가 되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누가 큰 돈을 들여 돌이킬 수 없는 뭔가를 저질렀다면 빈말로라도 잘했다고 해주거나 모른척하는 게 상식입니다. 정말이지.

아무튼 안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라식이나 라섹 수술도 남긴 했다. 하지만 일단 눈을 뜬 채로 수술을 받는 것도 무서울 뿐더러, 수술 한 방에 심학규처럼 깔끔하게 '보인다!'하고 일어나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안정을 취하고, 그 후로도 선글라스를 쓰고 안약을 넣어야 한다는 걸 견딜 수 없어서 수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판판이 놀던 시절이었다면 또 모를까 눈이 빠지게 보고 읽어야 할 게 많은 요즘에는 그런 손해를 감수할 수도 없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 면허를 따기 힘들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물론 그 이전에 수술할 돈도 없지만. 그 돈이 있으면 그냥 여행이나 가고 말겠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일본 라디오 방송에서 뽑은 놀라운 발명품 중에 '끼고 자면 눈이 좋아지는 렌즈'가 있었다. 요는 렌즈를 끼고 자면 렌즈가 눈을 압박해서 그걸 빼고도 하룻동안 시력이 보정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불편하게 렌즈를 끼고 다니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편리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게 그토록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면 쓰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테니, 찾아보지 않아도 보정 가능한 시력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10 디옵터를 가장 저렴하고 간단하게 보정할수 있는 것은 역시 안경 뿐인 모양이다. 알파고가 인간을 제패하고 불가사의한 반영구 동력이 나사에 의해 인정받기까지 하는 세상인데 안경에 한해선 기술 발전이 너무 느린 것 아닌지? 벗길 게 하나 더 많아서 좋으니 어쩌니 하는 허구도 아닌 현실 속에서 나는 언제까지 안경을 쓰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후기

예전에 친구들과 동해에 놀러갔다가 안경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해에서 서울까지 안경 없이 돌아왔는데... 빛무리만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정말 잘도 살아남았군요. 지금 생각해도 오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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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나를 뜯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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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의 버릇이 영 잘못 들었다. 틈만 나면 나를 뜯어먹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러브크래프트나 모파상의 공포 단편 소설 같지만, 이것은 내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문제다.

어찌된 일이지 엄지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가만 놔두질 못해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작업할 때면 반드시 앞니로 물어뜯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버릇을 꼭 이빨의 문제로 떠넘길 수만도 없는 것이, 거스러미를 뜯어먹는 사태의 발단은 이빨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자연적으로 손톱 옆에 미세한 거스러미가 생긴다. 이것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사태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보든, 검지손가락으로 만지든 한 번 인식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검지로 긁어서 거스러미를 뜯어내기 시작하고, 당연하게도 이렇게 뜯어낸 거스러미 때문에 피부에 골이 생기면 두 배, 세 배의 거스러미가 발생한다. 하이드라처럼 하나를 잘라내면 둘이 돋아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슬슬 검지손가락으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 쭉 찢다 보면 외피가 아니라 내피까지 찢어져 상당한 고통이 찾아온다. 이때 나서는 것이 바로 절단에 특화된 앞니다. 그러나 앞니가 손톱깎이나 니퍼처럼 날카로울 리가 없으니 앞니로 뜯어먹고도 검지손톱에 걸리는 부분이 남고, 이것을 손톱으로 뜯거나 이빨로 자르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자기 파괴적인 청소 작업은 정말 손톱 옆이 엉망이 되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생길 때쯤에야 중단되는데, 오랜 인내 끝에 치유가 끝나면 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책상 앞에서 손가락을 뜯어먹히고, 치유되면 다시 뜯어먹히는 형벌이 이어진다

심장을 뜯어먹히는 프로메테우스도 아니고, 이쯤되면 대체 뭐가 문제라 이런 짓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하는 거지, 하고 나 스스로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을 나름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해봤는데, 나는 주로 손과 입이 바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내 살을 뜯어먹는다.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은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뭔가 영 풀리지 않을 때고, 누군가에게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장시간 들어야 할 때도 빼놓지 않는다. 즉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것을 쓰는 데는 내 살점이 지불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모님 잔소리를 들을 때도 회의를 할 때도 책상 밑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내 살점을 후비며 자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무튼 혼자 있을 때야 내 살 좀 뜯어먹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일은 없지만, 잔소리를 들을 때 그런 짓을 했다간 상대의 화를 돋우기 마련이고, 회의처럼 중요한 순간에 몰래 손가락을 뜯고 있다는 걸 들키면 영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다 싶어서 대책을 강구했다.

일단 가장 단순한 것은 입술 각질을 뜯어먹는 것.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대책이 아니라 또다른 습관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입술을 뜯는 동안에는 확실히 손가락을 뜯지 않는다. 입술 각질을 뜯다가 진짜 살점까지 찢어지는 일은 거의 없는데다 요즘은 매운 음식도 먹지 않으니 피해도 적다. 하지만 이것도 권장할 만한 짓은 아닌 데다가 입술을 뜯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뜯는 경우도 생기니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강구한 두 번째 대책은 엄지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인데,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면서도 은근히 불편하다. 아무리 편안한 반창고라도 피부에 뭔가를 붙이고 다닌다는 건 성가신 일이라, 반창고를 붙이고 있으면 이물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검지로 그것을 긁어 떼기 시작한다. 반창고가 붙어 있는 이상 내 피부야 멀쩡하겠지만 성가신 것을 긁어대는 버릇은 더 악화될 우려도 있다.

그래서 반창고보다 나은 대안으로 나온 것이 엄지 첫째 마디에 반지를 끼우는 것이다. 이렇게 해두면 스페이스 바를 누르기가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엄지에 검지를 가져갔다가도 반지만 만지작거리고 그만둘 수 있다. 반지야 어차피 엄지용으로 산 게 이미 하나 있는 데다가 그게 없더라도 외출할 때마다 끼는 게 있으니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고, 긁는다고 닳거나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물감도 반창고와는 성질이 달라 만지는 빈도도 적으며, 성가시다 싶으면 빼면 그만이다. 참으로 환경 친화적인 방법이고, 실제로 이 방법을 써서 각질처럼 변할 지경이었던 엄지를 위기에서 구해낸 적도 있다. 같은 습관이 있는 분들은 한 번 시도해 보시길. 설마하니 반지를 이빨로 물어뜯는 분은 없겠지.

하지만 이 방법도 손버릇을 완전히 없애기에는 역부족이라 언제부턴가는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한 발을 의자 위에 올리고 새끼발가락 옆의 각질을 피가 배어날 때까지 뜯어내기 시작했다. 딱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아닌데도 가만히 영화를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손발이 피에 젖어 있다. 이런 짓을 하고 나면 한동안 걸을 때 아프기 때문에 반드시 그만둬야겠다고 몇 번이고 결심했지만, 새끼발가락에 반지를 할 수는 노릇이고 반창고는 간지러워서 붙이기 싫다.

그래서 최근에는 쓰지도 않을 펜을 가까이 두고 심심할 때마다 만지작거리거나 돌리기 시작했고, 아예 '피짓 토이'라는 물건까지 주문해버렸다. Fidget toy라는 이 물건은 말그대로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얼마 전에 정육면체의 각 면에 스위치, 번호식 자물쇠의 다이얼 따위를 붙인 물건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나와 대단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내가 주문한 것은 그게 아니라 그냥 빙빙 돌리기만 하는 물건이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없진 않을 거라고 기대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손발 대신 그걸 만지작거리겠지.

6종의 유희를 제공하는 혁신적인 피짓 토이. 이쯤 되면 손버릇과 상관 없이 갖고 싶다.


그런데 내 습관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아주 안타까운 사실은, 아무리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도 뭔가를 먹거나 하다못해 전자담배라도 피울 수 있다면 내가 내 몸을 쥐어뜯는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릴 때 프로이트의 발달 단계 중 하나인 구강기에 이상이 있어서 구강적 욕구 분출이 손가락으로 발현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다. 하기야 인생의 3분의 1 이상 엄마젖이나 담배를 빨면서 살았으니 아무 습관도 남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아무튼 습관이란 참으로 무섭고 때로는 피를 부르는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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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반지는 얻기도 끼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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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보유한 반지의 평균 개수가 몇 개쯤 되는지 통계 같은 게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니 대강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돌반지를 빼면 남자가 0.2개, 여자가 3.5개 정도 아닐까? 여자는 친구들끼리 우정 반지를 맞추기도 하고 아이돌 팬끼리 기념 반지를 맞추기도 하고 그냥 자신이 갖고 싶어서 반지를 사기도 하는 반면, 남자들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라면 대체로 반지에 별 관심도 없을 뿐더러 귀하고 멋진 반지를 선물받든 커플링을 맞추든 그다지 끼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반지를 몸살나게 좋아하는 남자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껏해야 반지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보로미르와 골룸, 그리고 적들을 마구 쏴죽여대면서도 ‘럭키 링’이라고 껄껄대며 좋아하던 “익스펜더블”의 실베스타 스탤론 정도다.

따지고 보면 신체에 금속 고리를 끼우고 생활한다는 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이해할만도 하다. 인간이 아마 손을 잘 쓰지 못하는 동물이었다면 간지러워서 반지를 낀 손가락을 연신 핥아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어찌된 일인지 반지를 제법 좋아해서 세 개나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가 일반 스테인레스 반지, 두 번째가 은반지, 세 번째가 서지컬 스틸 반지다.

첫 번째 반지는 선물 받은 것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선물받았다기보다는 강탈했다는 게 더 맞겠다. 당시 반지의 제왕이나 니벨룽겐의 반지를 테마로 한 카드 게임을 만들고 있던 나는 소품이 필요했고, 많은 액세서리를 보유한 후배에게서 하나를 빌렸다가 아예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게임 개발은 지지부진하다 결국 중단되었고(역시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결국은 반지만 덩그러니 남았다. 문양을 굽혀놓은 것 같아 악의 소굴에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악당이 끼면 어울릴 법하지만, 아무래도 끼고 다니기에는 마감이 좋지 않아서 이 반지는 서랍 속에 봉인되었다. 대악당이 되면 다시 꺼내보지 않을까?

두 번째 반지는 내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다. 선물을 사려고 쇼핑몰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각인을 해주는 저렴한 반지를 발견해서 원래 사려던 선물보다 더 비싼 돈을 주고 사고 만 것이다. 전부터 반지를 하나쯤 맞추고 싶긴 했는데 내가 사지 않으면 아무도 사줄 일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산 반지는 원통을 잘라 만든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4밀리 정도의 고리로, 각인은 뭘로 할까 고민하다 솔로몬의 옛 이야기를 따랐다. "기쁠 때 보면 자제하게 되고 슬플 때 보면 위안이 되는 경구를 생각해주게"라는 왕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듣고 솔로몬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카피를 떠올렸다는 그 이야기다. 이에 따라 나도 "This too shall pass"라고 주문해서 그 뒤로 집을 나설 때마다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에 처참할 정도로 되는 일이 없었던 나는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위안 삼을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반지가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었는가 하면, 처음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두어 달 지나면서 반지를 끼는 게 일상이 되자 아침에 낄 때 한 번밖에 보지 않게 되었고, 그 뒤로 경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원망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반지를 맞추고 몇 년동안 나를 둘러싼 상황은 한없이 나빠지기만 했고, 그 사이사이에 있던 즐거움은 찰나의 순간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그런 끔찍한 꼴을 실감할 때마다 나는 솔로몬을 원망하곤 했던 것이다. 차라리 "I Seoul U"라고 새기는 게 나았던 게 아닐까?

아무튼 세 번째 반지는 또 쇼핑몰을 뒤적이다가 충동적으로 주문한 것인데, 은색 바탕 가운데 검은색 라인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재질은 서지컬 스틸이다. ‘서지컬 스틸’이란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의료용 스테인레스 스틸을 썼다는 말인데, 단어를 퍽 잘 만들었다. 공업쪽에서 부르는 SS316이라고 불렀으면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서지컬 스틸"이라고 하니 마치 "매지컬 스틸"처럼 신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어쨌든 이 물건은 검지에 맞춰서 주문했는데, 막상 끼고 보니 나에게 맞지 않을 정도로 외형적으로 화려했다. 모양 자체는 수수한데 엄지에 반지를 낀 것 자체가 락 밴드나 마술사처럼 강한 비주얼을 내세우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엄지에 큼지막한 금속 고리를 끼고 있자니 손을 쓸 때 상당히 걸리적거렸다. 역시 반지를 끼기 좋은 손가락은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친구의 커플링과 디자인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적당히 케이스에 쑤셔넣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솔로몬의 경구가 새겨진 은반지를 끼고 사는 생활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다. 손이 심심할 때 만지작거릴 수도 있고, 손가락을 뜯어먹지 않게 엄지에 잠깐 방어용으로 끼워둘 수도 있다. 사이즈가 약간 남아서 손가락을 붙이면 살짝 옆으로 눕기 때문에 악수하다 반지가 다른 손가락을 찍어눌러 비명을 지를 일도 없다.

다만 사소하게 불편한 점을 찾자면, 일단 비누를 만지면 비누가 반지 사이에 낀다는 것. 이 때문에 고체 비누를 만질 때는 반드시 왼손을 쓰고 있다. 그리고 반지 없이 집을 나서면 속옷을 안 입기라도 한 것처럼 허전하고 불안하다는 것. 절대반지를 운반하는 프로도처럼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게 습관이라 반지를 끼지 않고 집을 나서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눈치채기 마련이지만, 어쩌다 깜빡했을 때는 역 앞까지 갔다가도 집까지 반지를 가지러 돌아온다. 반지 없이 집 밖에서 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반지가 없다고 일상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 그렇다. 사람의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집에서는 반지를 끼고 있으면 영 집에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집에 오면 일단 외투를 벗고 반지와 시계를 빼서 '네르프' 문양의 패드 위에 놓인 '이카리 겐도'의 머리에 씌워 놓는다. 어쩌다가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면 집에서도 반지를 다시 끼곤 하지만, 금방 이건 불편하다 싶어 빼 놓는다. 밖에서 잘 때도 가급적이면 빼서 안전한 곳에 놓는다. 슬슬 반지를 끼는 걸 나는 일종의 '전투 태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제멋대로지만 습관이 이러니 어쩌 수 없지.

그건 그렇고 흥미롭게도 남자가 반지를 끼고 다니면 반드시 듣는 소리가 있다. 누구나 짐작할법 하지만, "그거 커플링이에요?" 아니면 "여자친구 있으신가 봐요"다. 반지를 왼손에 끼고 있으면 당연히 커플링일거라고 생각하겠는데 오른손에 끼고 있으니 확인이 필요한 모양이다. 남자가 폼으로 반지를 끼고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가벼운 짜증을 느끼는 것도 이미 한참 예전의 일이 되어서 이제는 어디 나가면 또 누가 물어보려나 맞춰보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인식 개선이 있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아무 계기도 없이 남자가 반지끼고 있는 걸 신기해하지 않는 사회가 이룩될 리는 없으니, '캡틴 플래닛'처럼 반지를 다루는 콘텐츠가 엄청난 인기를 얻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길게 푸념하든지.

당연하지만 이런 분은 커플링이냐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어쩌면 반지의 디자인 문제일지도.

어쨌든 이런 묘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반지 공방'에 가는 것이다. 최근에 도서관 앞의 작은 카페에서 문화 교실 비슷한 것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중에는 반지 제작도 있었다. 내가 낄 반지를 내 손으로 만들다니, 만드는 것도 반지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상 홀로 찾아가면 어떤 대화가 시작될지는 뻔한 일이다.
"아,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왔습니다."
"아...... 선물 하시려구요?"
"아니오, 제가 낄 겁니다."
......그 뒤에 이어질 시선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판타지 세계의 드워프라면 뭐 반지를 만들어보고 싶겠거니 하고 이해하겠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으니. 그렇다고 뜻이 맞는 친구와 함께 가기도 마땅치 않다. 친구가 남자든 여자든 둘이 나타나면 오해할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래서 고민한 끝에 "우리 가문에서는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자신의 반지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생각해봤지만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에 드는 반지를 얻는 것도 힘들지만 끼는 것도 쉽지는 않다.


후기

어제는 우연히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절대반지를 싸게 판다는 소식을 접해서 3달러도 안 되는 값에 두 개를 주문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개봉하던 시절에는 롯데리아에서 주는 절대반지를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하지만 그 세트를 먹진 않았죠),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거의 껌값에 구할 수 있군요. 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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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 집단 거부운동과 잔반 없는 급식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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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부터 입이 짧아서 고생이 많았다. 편식이 심한 편이었다. 풀과 생선은 대체로 싫어했고,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으려 했다.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성격은 어릴 때부터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뭔가 싫어할 만한 계기가 있었나 생각해봐도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던 것, 그리고 미역을 먹다 토한 것을 빼면 별 계기가 없는 걸로 봐서 식성은 대체로 타고나는 듯하다.

그런데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도시락이라면 사정이 좀 낫지만 급식은 병원도 아니고 학생 한 명의 사정따위 봐줄 리가 없으니까. 당연히 스트레스가 심했다. 먹기 싫은 것은 많았는데 먹기 싫다고 떼를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급식이 시작된 후로는 먹기 싫은 게 나오면 꾸역꾸역 먹느라 애들 다 놀러 나간 뒤에도 교실에 남아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음식을 입에 쑤셔넣을 때가 많았다. 심하면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날 때까지 식판을 놓고 밥을 우물거릴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되새김질 하냐?’라고 황당해하곤 했는데, 나라고 싫은 음식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목으로 넘어가질 않는데 어쩌라고.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고도 용케 왕따를 당하지 않았구나 싶기도 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에게 돈을 주고 잔반 처리를 청탁하거나 잔반을 우유팩에 넣어서 버리거나 입에 몰아넣고 화장실에서 뱉는 등 꾀를 낸 덕분인지도 모르고.


검색끝에 일본 급식 사진을 구했습니다. 이렇게만 나왔다면 저도 고생은 덜 했겠네요.

그러고보니 유아원에 다닐 때도 급식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 날은 전에 없이 호박죽이 나왔는데, 너무나도 맛이 없고 불쾌하기까지 해서 나를 비롯해 해바라기반의 많은 아이들이 고역스럽게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버려도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나의 기억이 만들어낸 거짓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는 쾌재를 부르며 호박죽을 내다버렸고, 놀라워하는 아이들에게도 버려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호박죽이 폐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앉혀놓고 화를 내며 유언비어의 최초 유포자를 색출했다. 그래서 색출된 게 나였는데, 평소에 말을 잘 들어선지 별다른 처분은 없었다. 다시는 급식을 버리지 말라는 훈계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신나는 일이었다. 내친 김에 해바라기반 반 호박죽 결사를 조직해서 먹기 싫은 음식을 먹지 않을 권리를 요구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급식 때문에 딱히 고생을 한 적도 없고, 먹기 싫은 반찬 때문에 지독한 꼴을 당한 적도 없다. 일단 잔반을 남기면 안 된다는 미친 독재국가 같은 규정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급식실로 가서 같이 먹고 같이 나가 노는 게 일상이었으므로 먼저 먹어봤자 딱히 좋을 것도 없는 친구들이 남는 반찬 먹어 주는 데 대단히 협조적이었고, 무엇보다 먹기 싫은 반찬이 제법 줄기도 했다. 식성이 천성이긴 하지만 나이 들면서 식성이 조금씩 변하는 것도 사실인지, 그때부터는 생선이 나와도 그럭저럭 발라 먹었고, 나물도 적당히 손은 댔으며, 미역조차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요즘 들어서는 식당에서 시켜 나온 음식은 가지만 아니라면 대체로 손은 댄다. 얼마 전에는 엠티에 갔다가 아침으로 '미역국과 밥’이라는, 단출하고 건강하지만 예전의 나였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식단도 맛나게 잘 먹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인데, 역시 아동들에게 먹기 싫은 반찬을 억지로 먹어서 ‘치우라는’ 명령은 일종의 학대가 아닐까? 내가 아는 한 아이들은 매콤하고 달콤하고 바삭하고 양념이 맛난 고기류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고, 시큼하고 물컹하고 숙성된 나물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것들 중에서도 선천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싫어하는 것 한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시 맛보며 ‘다시 먹어보니 그리 나쁘진 않네’ 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다. 싫어하던 식재료인데 다른 방법으로 조리한 것을 먹어보니 맛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상당한 수준의 가지 혐오자였는데 그것은 물컹한 가지나물만을 먹어봤기 때문이었고, 가지 구이를 먹어보니 너무나 맛있어서 가지 자체가 맛이 없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시금치도 ‘이따위 음식을 먹고 힘이 세지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신기하게도 남의 집에서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타협할 수 있는 음식은 천천히 먹으면 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음식은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물 두어 종류를 먹지 않는다고 당장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성인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가지처럼 다른 방법으로 섭취할 수도 있다.

오히려 영양을 고려하고 버릇을 고쳐놓는다고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쪽이 장기적으로 그 음식을 먹지 않게 만들 확률이 높지 않을까?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좋아하는 음식보다 자신에게 해가 되었던 음식을 철저히 기억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생각해보면 어릴 때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나중에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적어도 억지로 쑤셔넣는 것보다는 한 입 먹고 먹지 않는 편이 근시일 내에 다시 먹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왜 아동들에게 음식을 먹어치우게 만드는 것일까? 일단 당연하게도 균형잡힌 식사를 시키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건 좋은 일이다. 어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하니까. 하지만 지독하게 먹기 싫어하는 음식까지 악착같이 모조리 먹게 만들고 선호도가 높은 요리로 대안을 만들지는 않는다면 그것은 예산과 잔반처리 비용 등 ‘어른의 사정’을 핑계로 한 학대다. 친구 중에 오이를 먹으면 반드시 토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 상관이 왜 오이를 먹지 않느냐며 먹을 것을 강요해서 먹고 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단다. 무척 가혹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어릴 때 경험한 일과 그리 다르지도 않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모두가 같은 음식을 같은 시간에 모두 먹어치우는 급식 문화란 집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개인의 의지는 무시하는 병영 문화의 일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지금 기억을 더듬어보니 훈련소에 있을 때도 정말 먹기 싫은 음식은 버렸던 것 같다. 초등학교가 군대보다 심했다는 소리다.

정말이지 잔반 없는 급식의 끔찍한 시간을 잘도 버텼군. 그런 시간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을 버티며 성장해서 그럭저럭 이것저것 먹게 된 나를 위해 건배를 하는 한편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먹기 싫은 음식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묵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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