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Viewing all 544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하드보일드 치과 익스프레스

$
0
0
얼마 전부터 이가 시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데 아주 찬 물이나 신 것, 혹은 단것을 먹으면 이가 참기 힘들 정도로 이가 시려 왔다. 특히 초코바를 먹었을 때가 가장 심해서 가끔 끼니 대신 초코바를 먹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이를 잘 닦으면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신체 다른 곳의 이상은 관리에 신경을 쓰며 기다리다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기 마련이지만, 치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상태가 악화되어 막대한 치료비를 물게 되는 것이 바로 치아 문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십수 년 만에 치과를 찾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과에 간 것이 초등학교 때, 집 근처의 치과가 개점하면서 무료 진료를 해줬을 때니까 사실상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치과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그건 나름대로 자랑할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치료를 받지 않은 기록을 유지하자고 병을 키우면 그건 앞뒤가 잘못된 것이다. 슬슬 포기하자. 가족 모두 치아에 수백만 원씩 들여왔는데 나 혼자 지금껏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으니 열심히 했다. 나는 치과로 향하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찾아간 동네 치과는 간호사 둘과 원장 한 명이 운영하는, 작고 깔끔한 곳이었다. 병원 냄새가 나지 않았고 정수기 위에는 몇 종류의 차와 커피가 놓여 있었으며 소파 앞 유리 테이블에는 누구나 볼만한 잡지가 올려져 있었다. 커다란 TV에서는 뉴스가 나왔다. 와이파이는 없었다. 손님은 두어 명이었다. 간호사들은 경건해 보일 정도로 잡담을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노트북을 꺼내서 두드리는 것도 천박해 보일 것 같아서 잡지를 뒤적이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가니, 깔끔한 진료실에는 식수대와 테이블과 모니터와 조명이 연결되어 우주 전함의 조종석처럼 보이는 의자가 둘 있었다. 겉옷을 벗어서 걸어놓고 시키는 대로 앉아서 입을 헹궜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맛없는 물이었다. 물맛을 보고 나서 몸을 누이니 의자는 첨단 고문기구처럼 느껴졌다. 

마스크를 한 채로 나타난 의사는 50대 초반 정도의 남성으로 피부가 붉었으며 키가 작고 지혜로운 인디언 낚시꾼처럼 노련한 인상이었다. 그에게 증상을 설명하니 입을 벌리고 안쪽을 살펴보고는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했다. 엑스레이를 찍은 것도, 엑스레이 촬영실에 들어간 것도 한참 전 일이다. 촬영실은 진료실 옆에 마치 주사실처럼 딸려 있었는데, 서서 턱을 올리고 일회용 플라스틱 막대를 이로 문 뒤 찍는 방식이었다. 신체를 고정 당하고 원치 않는 물건을 입에 문 뒤 방사선이 나오는 기기로 촬영 당한다는 건 생각하기 따라선 굴욕적이었지만,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촬영은 순식간이었다. 엑스레이가 늘 그렇지만, 사진사들이 하듯이 ‘한 번 만 더 갈게요!’ 하고 두 방을 찍진 않았다. 촬영 결과는 그 자리에서 모니터에 떴다. 커다란 필름을 빛나는 벽면에 끼우고 어쩌고 하는 과정도 필요 없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잘 찍힌 내 이빨들을 보며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일지 생각했다. 개수도 세어봤다. 상하좌우로 나누면 한 사분면에 여덟 개의 이빨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이빨이 몇 개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군. 누가 하나쯤 빼가도 모를 판이다. 

아무튼, 검사 결과 네 어금니에 초기 충치가 있다고 했다. 사랑니는 하나를 빼고 다 났는데, 그 하나는 어금니에 막혀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충치는 치료하고 사랑니는 하나씩 뽑는 게 좋다고 했다. 최근에 별 의미 없이 사랑니들이 뽑히고 있다는 기사를 본 데다가, 사랑니를 뽑아서 어금니를 대체하는 경우를 봤고, 돈도 더 쓰고 싶지 않고, 무서웠으므로 사랑니는 뽑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랑니를 뽑고 택시를 타면 그대로 아무 데나 가자고 하다가 의식을 잃을 것 같단 말이다. 그런 소리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의사는 별로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충치 치료에는 아말감과 레진이 쓰인다고 했다. 아말감은 흔히 쓰이는 합금이고, 레진은 아마 플라스틱일 텐데 어쨌든 아말감은 원래 싼 데다 보험이 되어 5천 원이고 레진은 8만 원이라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아말감을 골랐다. 

나중에 아말감과 레진에 대해 조사해 보니 아말감은 수은이 들어가는 합금이라 유해성 논란이 있는 데다가 보기에 좋지 않아서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다 했다. 한편 레진은 치아 삭제가 적고 색이 치아와 같아서 감쪽같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연쇄 살인 사건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는 마이애미 형사처럼 착잡한 심정으로 아말감을 채워넣은 치아들의 사진을 봤다. 싸고 더러운 이빨이냐, 비싸고 깨끗한 이빨이냐. 사실 앞니가 아니고서야 이빨이 더럽든 깨끗하든 보일 일도 거의 없다. 나는 누굴 볼 일도 얼마 없는 데다가 별로 웃지도 않으니까. 입안에 금속성 물질이 있다고 불이익을 받을 일도 없다. “앨리 맥 빌”이라는 미드에는 변호사의 치아를 보고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나오긴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괴팍한 인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체의 일부로 사용해야 하는 물질을 단순히 돈 때문에 결정한다는 것은 사이버펑크스러운 기분이 들어 내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의 미관 때문에 기능은 같은 옵션에 열 배도 넘는 비용을 소모한다는 것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팬티를 사는 것처럼 사치스러운 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이 비유는 잘못되었다. 속옷은 남에게 보일 일이 있지만, 키스할 때조차 어금니는 보지 않으니까. 키스할 때 어금니의 합금을 보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십중팔구 치과 의사일 테니까 나는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고민 끝에 병원에 연락해서 다시 상담을 받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다음 주, 병원에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 의사는 치료할 부위에 대해 다시 알려주면서 안쪽이니까 아말감으로 해도 되겠다고 했다.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다. 후회해도 내 결정에 따라 후회하느니 비굴하게 권위에 기대어 결정을 떠넘기고, 후회하는 대신 원망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상담을 받은 뒤 바로 스케일링을 했다.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나는 30분 내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의사는 아마도 드릴일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 불명의 기기를 입안에 넣어 치아 곳곳을 긁어냈다. 그때마다 고대의 통신기기가 광기에 찬 신호를 외계로 송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편 간호사는 옆에 서서 조명을 조절하고 뭔가로 액체를 뿌리기도 했고 빨아들이기도 했다. 뿌리는 것은 열을 식히는 것이고, 빨아들이는 것은 치료에 방해되는 침 따위를 빨아들이는 것이리라. 그런데 간호사 실수로 입안 깊은 곳을 건드렸고, 나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의사는 깊은 곳을 건드리면 목젖 때문에 환자가 놀란다고 간호사를 타일렀다. 레옹이 마틸다에게 암살을 가르치는 것처럼 상냥하고 제삼자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의사들이란 그런 법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과하지 않는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한 구석에 사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과 대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는 스케일링을 처음 하는 것치고는 관리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감사하다고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입안에서 드릴이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편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앞니 쪽에 치석이 있고, 안쪽 치아가 깨끗하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양치할 때 앞니에 신경 써야겠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치아의 측면을 닦는 데 주력해온 탓이다. 

의사는 서류 작성을 하려고 간호사에게 펜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녀는 접수처에서 펜을 가져왔다. 그러자 의사는 바깥에서 ‘오염된' 펜을 가져오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그게 철저하고 믿음직한 것인지, 아니면 유난스러운 것인지, 치과가 처음인 나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사물의 밝은 면을 봐야지, 하고 나는 믿음직한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 의사가 긴장을 풀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환자는 웃통을 벗은 채 정열적인 플라멩코를 춰야 한다고 해도 마지못해 따랐을 것이다.

스케일링을 마친 뒤에 충치 치료는 다음 주에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의사는 다시 한 번 사랑니를 하나씩 뽑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닦기 힘들어 이물질이 낄 수 있고, 내 경우는 사랑니가 나오는 ‘포스’가 있기 때문에 치열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양반이 사랑니 수집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건 실례였다. 아마 그의 말대로 사랑니 따위 뽑아버리는 게 서로 좋을 것이다. 실제로 무척 닦기 곤란한 부위니까. 그러나 다시 한 번 거절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데다가 맹장염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고 맹장을 미리 뽑아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는 돈이 아깝고, 무서웠으니까. 

다음 진료 예약을 할 때, 접수처에서 간호사는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고, 의사는 멀리서 30분이면 된다고 대답했다. 마치 F1레이스에서 피트의 정비사들이 레이서에게 몇 초 만에 내보내 주겠다고 하는 듯한 투였다. AF요? 하고 묻자 AF, 하고 대답했다. 아말감이라는 뜻이겠지. 멋지다. 나도 30분 만에 알파벳으로 된 뭔가를 처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다음 주에 약속대로 충치 치료를 했다. 입이 크게 벌어지지 않아서 의사는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턱이 빠지기 직전까지 벌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크게 벌어지는 모양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턱관절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동안 인류를 너무 무시해 온 것 같다. 의사는 턱이 좌우로 발달한 사람은 잘 벌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도 턱이 좌우로 덜 발달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것 참 미안하고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안할 것도 없이, 의사는 왼쪽 위아래 어금니 사이에 뭔가를 끼워서 입이 닫히지 않게 했다. 겸자 같은 걸 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는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칭찬 받았는데, 아무래도 나는 치과 치료에 적합한 체질은 아닌 모양이었다. 

치료하는 동안 간호사가 조명을 조절했는데, 이번에는 뭐가 문제였는지, 의사는 그쪽에서 하는 게 가장 좋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되니 그 옆에서 비춰야 한다며, 뭐든 100점이 최고지만 그게 안 될 경우에는 80점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두 번째로 좋은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거기서 배워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고, 간호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레진이 100점이라면 차선인 아말감은 20점 정도라는 게 문제였지만.

초기 충치라 마취는 필요 없었다. 입안에 주사를 놓는다는 게 상당히 걱정스러웠는데, 그 점은 다행이었다. 아무튼 의사는 미스터 드릴러처럼 위아래 어금니를 드릴로 경쾌하게 파버린 다음, 틀로 예상되는 부정형의 물질을 채워 넣고, 그 사이에 뭔가를 꾹꾹 눌러넣었다. 그게 바로 신비의 합금, 아말감이리라. 위아래를 그렇게 반복하고 채워넣었던 뭔가를 뽑아냈다. 그걸로 오른쪽 치료가 끝났다. 이를 딱딱 해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기계 팔을 이식한 남자가 주먹을 쥐어보듯이. '이게 내 새 이빨인가, 후후' 하고 중얼거리고 의사가 ‘써보시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라고 대답했으면 그럴듯 했겠지만, 나는 아무에게나 헛소리를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고 의사는 내가 말하지도 않은 헛소리를 짐작할 정도로 재치있지 않았다. 

진료비는 만 얼마가 나왔다.

다음 예약을 잡고 치과를 나설 때, 의사는 다음에 왼쪽을 하고, 그다음에 다듬으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결국 한 달 내내 치과에 다니게 된 셈이다. 간호사는 두 시간 동안은 고체를 먹지 말고, 24시간 동안은 왼쪽으로 씹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원래 어느 쪽으로 많이 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는 입안을 살펴보았다. 그냥 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좋은 위안거리였다. 핸드폰 플래쉬를 동원해서야 나는 어금니에 아주 약간의 금속성 물질이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알루미늄 포일을 씹어먹고 양치하는 걸 깜빡 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지금은 갓 꺼낸 맥북처럼 깔끔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축 현장의 비계처럼 더러워지리라. 변색을 막을 방법을 검색해 봤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말감이 더러워지는 것은 깨끗하던 목련이 질 때가 되면 더러워지는 것처럼 막을 길이 없는 순리인듯 싶었다. 나는 가끔씩 플래쉬를 들고 더러워지는 이를 확인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이나 내가 선택해야 했을 최선에 대해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내 몸에 박힌 합금이 무겁게 느껴졌다. 



tag :

레트로 슈팅 게임의 성공적인 보드게임화 - 켐블 폭포의 전투

$
0
0


*켐블 폭포
Kemble’s Cascade는 북쪽 하늘의 기린 자리 옆에 위치한 성군으로, 20개 이상의 별이 보름달 너비의 약 5배 길이에 걸쳐서 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레트로풍 음악과 함께 즐기시면 좋습니다. 다음은 스팀에서 유명한 레트로풍 액션 게임 They bleed pixels 사운드트랙입니다)



*레트로 슈팅 게임의 컨버전
켐블 폭포의 전투는 스웨덴의 형제 디자이너 Anders Tyrland, Olle Tyrland의 2014년작으로, 커버 이미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먼 옛날의 8비트 레트로 슈팅 게임을 보드게임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실시간으로 순발력과 암기력을 발휘해서 즐기는 슈팅 게임을 턴제 보드게임으로 만든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집니다만, 해 보니 아주 훌륭하게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스크롤에 사용되는 다섯 줄의 보드. 적기와 장애물이 끝없이 쏟아진다)

*화면 스크롤의 구현
일단 이 게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보드가 다섯 개의 플라스틱 판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겁니다. 슈팅게임 하면 한 방향으로(주로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되며 적들이 나타나는 스크린이 떠오르는데, 바로 이걸 구현하는 인터페이스입니다. 카드로 랜덤하게 나타나는 적들을 보드에 배치하고,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맨 아랫줄을 버리고 맨 위로 옮겨서 새 카드를 배치하는 것이죠. 이 아이디어 자체보다는 이 귀찮은 인터페이스가 그렇게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감탄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각자의 우주선을 갖고 랜덤으로 구성된 이 보드를 누비며 적들을 공격하고 돈이나 승점을 모으게 되는데, 최종 목표는 물론 카드가 다 떨어져서 보스가 나온 이후 스크린까지 줄어들어 한 줄만 남았을 때 가장 많은 승점을 모으는 것입니다. 

*라운드 
게임은 여러 라운드로 이루어지는데, 매 라운드 플레이어는 두 장씩 갖고 있는 센서 카드 중 한 장을 동시에 내서 거기 적힌 숫자 순서대로 턴을 진행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높은 숫자를 내서 무조건 먼저 움직이면 그만이 아닌가 싶은데, 적이나 다른 플레이어 때문에 길이 막히기도 해서 그때그때 적당한 숫자를 내야 하더군요.

*전투
자신의 턴에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전투를 하거나 정비를 하면 되는데, 전투를 선택하면 우선 이동과 공격 기회가 주어집니다. 순서는 상관없고 기본 공격은 피해가 1, 기본 이동은 8방향으로 1칸입니다. 만약 행동을 더 하고 싶다면 오버차지라고 해서 에너지(체력) 1을 지불하고 이동이나 공격을 한 번 더 할 수 있습니다. 행동을 추가로 한 번 더 하고 싶으면 에너지 2를 지불하고 두 번째 오버차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격해서 카드에 표시된 적에게 그 에너지만큼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하면 적을 파괴하고 돈이나 승점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괴한 적은 센서카드 덱에서 카드를 가져다 뒷면으로 덮어둡니다. 뒷면이 우주 배경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러면 깔끔하게 적이 사라집니다. 적에게 피해를 누적해서 토큰으로 표시하는 방법이나, 적 토큰을 올려뒀다 치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텐데, 한 턴만에 잡고 카드로 가리는 방식을 택해서 굉장히 깔끔하고 저렴하게 구현한 셈입니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매 턴 어디로 움직여서 누구를 무엇으로 공격하는 것이 가장 덜 위험하고 가장 높은 승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혹은 다른 플레이어의 앞길을 막아버릴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테마는 슈팅게임이지만 실제로는 떨어지는 블록을 격파하는 퍼즐 게임이나, 여러 기물의 사선 속을 누비는 추상 전략을 즐기는 듯한 느낌도 들더군요. 그리고 이런 게임들의 특성상 장고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플레이어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정비
정비를 택하면 에너지 2를 회복하고 상점에서 업그레이드 카드나 파워업 카드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무기의 방향을 정하는 포탑이나 엔진, 쉴드, 관통형 무기, 폭발형 무기등을 사고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장비를 갖춰가는 것만 해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파워업 카드는 카탄의 개발카드처럼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효과가 적힌 카드들인데, 꼭 사야 한다기 보다는 게임을 다채롭게 하는 양념인 셈입니다. 

(업그레이드로 엔진과 무기를 강화한다)


*탄막 액션의 구현
그리고 어떤 행동을 택하든 플레이어는 “위협”이라는 것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건 말하자면 우주선에 날아오고 있는 총알을 표현한 시스템입니다. 매 턴 위협만큼 에너지를 잃고, 매 턴 주변의 적이나 장거리 공격 아이콘 하나마다 위협도가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동을 할 때마다 1씩 낮출 수 있죠. 즉, 매턴 총알이 날아오고 이것을 피해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슈팅게임을 기막히게 구현해 놨죠. 

이런 식으로 라운드를 진행하면 나오는 적들은 점점 강해지고, 마침내 맵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 보스가 나오는 것, 그리고 죽으면 잠깐 무적 상태가 되는 것까지 슈팅게임의 왕도를 철저히 고증해 둬서 슈팅 게임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감탄할 수밖에 없더군요.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거대 보스의 등장)


*최신 보드게임으로서의 시스템
이 정도만 해도 수작인데, 켐블 폭포의 전투는 최신 보드게임으로서도 제법 충실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단 게임 중 달성해야 할 개인 미션을 하나씩 받고 시작하고, 항상 업적 카드 넷이 공개되어 있어, 일부러 적기에 부딪치거나 맨 윗줄에서 위협을 받는 등 단순 이동과 공격을 벗어나 다양한 점수 획득 방법을 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당연히 플레이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우나 건전하게 겨룰 것 같은데 실제로는 여차하면 서로를 쏴댈 수 있다는 겁니다. 예, 이 게임에서는 PVP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하면 무기의 공격력만큼 위협도를 올리고, 자신의 PVP마커를 하나 줍니다. 이후에 어떤 플레이어가 죽으면 다른 플레이어는 모두 기본으로 2점을 받고, 자신이 줬던 PVP마커 하나당 1점을 더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가 비실거린다 싶으면 몰려가서 두들겨 패는 흉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이 덕분에 공격할 적이나 갈 곳이 없다고 따분해할 틈이 없습니다. 언제나 공격할 대상이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공격이 직접적인 사망 요인이 되진 않는데다가 죽는다 해도 게임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 무적 상태로 쇼핑을 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치명적인 방해가 되지는 않고, 또 정비 액션을 하면 PVP마커는 다 반환하게 되어 있어 견제가 적을 무시하고 서로 치고 박을 정도로 강조되지는 않았습니다. 

(편대 비행을 하며 멋지게 보스를 쓰러뜨리는 모습 같지만, 실제로는 잔혹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정리
레트로 슈팅 게임의 구현이라는 점을 떠나서라도 조립형 보드에, 적은 매번 무작위로 나오고, 돈을 모아서 장비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으며, 미션과 업적, 특수 카드가 있고, 플레이어간 직접 견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당장 솔깃한 조합입니다. 그리고 켐블 폭포의 전투는 이런 시스템을 테마에 맞게 아주 잘, 더할 나위가 없이 멋지게 버무려 두었죠. 여기에 장비 구입 순서, 조합을 바꿔보는 재미나, 매번 달라지는 맵을 공략하는 재미, 그리고 플레이어끼리 서로를 견제하는 재미가 상당한 리플레이성을 보장해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아마 협력 게임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진 않았겠죠. 그리고 엄청나게 달라지는 게 없더라도 일정한 규칙 안에서 구현되는 무작위 결과를 처리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퍼즐적인 재미도 이 게임을 두고두고 할만한 게임으로 만들어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8비트, 레트로, 슈팅, 퍼즐, 업그레이드, PVP, 우주, 이런 키워드들이 마음에 든다면 해보실만한 게임입니다. 

*아쉬움
각 오브젝트가 사선을 막느냐 막지 않느냐, 일부러 부딪칠 수 있느냐 없느냐 등 잔룰이 좀 있습니다. 레퍼런스를 따로 넣어준 이유가 있더군요.
보스가 4종 뿐인데, 카드만 추가하면 보스 확장은 간단할 것 같습니다. 확장팩을 기대합니다. 
Z맨 게임즈에서 종종 저지르는 짓인데, 마커를 제외한 컴포넌트 질이 상당히 나쁩니다. 막말로 졸리 게임보다 조금 나은 정도입니다. 특히 작은 카드 사이즈가 규격 사이즈보다 조금씩 커서 맞는 프로텍터를 구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한편 프로텍터가 맞는 큰 카드들은 프로텍터를 씌워두면 빛을 반사하는 통에 차라리 프로테터를 쓰지 않는 게 낫지 않나 고민중입니다. 




tag :

때로는 펜을 쓰고 싶다

$
0
0
고등학생 때의 나 자신에게 찾아가서 “넌 어른이 되면 펜을 하도 안 써서 펜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라고 하면 어린 나는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라면서 개뿔만큼도 믿지 않겠지만, 그건 사실이다. 요즘은 뭐든 키보드나 터치패널로 기록하니까 도통 펜을 쥘 일이 없는 것이다. 펜을 쥐는 것보다 카드를 쓰고 서명한다고 스타일러스를 쥘 때가 더 많다. 

2005년만 해도 다이어리도 일기도 손으로 써서 연말이 되면 새 다이어리와  일기장을 사는 게 굉장한 보람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언제까지고 그런 생활을 계속 할 줄 알았다. 나는 아날로그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2006년에 전자사전으로 쓸 수 있으면서 장문의 텍스트를 입력할 수 있는 모바일 기기를 찾다 PDA를 사면서부터 이런 아날로그 기록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이어리도 일기도 디지털로 처리하게 된 것이다. PDA라는 게 대중적인 기기는 아니었으니까 일상적 기록의 디지털화를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체험한 편이다. 

아무튼, 그 뒤로 아이폰이 등장하고,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이건 나에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이후로 아이패드까지 영입하면서 나는 수업 필기까지 디지털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메일의 등장으로 편지를 손으로 쓸 일이 거의 없게 된 것처럼, 펜도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이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2006년에 산 펜을 아직 반도 쓰지 못했다. 교과서에 부연 설명을 적을 때 쓰는 녹색 펜이라 특히 쓸 일이 없긴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앞으로도 이 펜을 쓸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내가 갖다 버리거나 누구에게 주지 않는 이상 이 펜은 반도 쓰지 않은 채로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필통에서 그 펜을 꺼내 서랍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필통 자체가 쓸모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내 필통에 남아 있는 것은 검은 펜 둘, 파란 펜 하나, 샤프 하나, 지우개 하나, 면도칼 하나, USB 메모리와 아이폰 케이블뿐이다. 단출한 구성이지만 줄이려면 더 줄일 수 있다. 부연 설명을 적을 일이 없으니 파란 펜도 필요 없고, 지울 수 있는 기록을 할 일도 없으니 샤프와 지우개도 필요 없다. USB 메모리와 아이폰 케이블은 요긴한 물건이니 버릴 수 없고, 면도칼도 옷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제거하는 데 유용하니까 놔두자. 어쨌든 필기구는 결국 검은 펜 하나만 있으면 불편할 게 없는 셈이다. 

정말, 고등학생 때라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이상할 정도로 필기구에 열광하는 애들이 많아서, 다들 해외여행을 처음 하는 부모님이 가방을 싸듯이 필통에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 넣고 다녔다. 파이롯트 사의 하이테크 C를 기본으로 네 가지 정도 장비했고, 통칭 사쿠라라고 불린, 젤리롤인가 하는 펜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대부분 허리를 잘라 짧게 만들고 책갈피에 꽂는 부분을 세 번 접어 방아쇠처럼 당기고 다녔다). 연필도 진한 것, 옅은 것을 따로 마련했고, 연필이 있으니 칼이나 연필깎이와 지우개가 따라왔고, 거기에 샤프심, 수정테이프, 형광펜, 색연필까지 거의 기본 장비였다. 그리고 그것들로 수업 시간에 필기한 내용과, 선생님이 말해준 내용과, 자기가 생각한 내용 등등을 모조리 다른 색으로 기록하곤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무슨 짓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다들 그런 아기자기한 재미를 좋아했고, 또 즐겨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보면, 그때 그 호화로운 필기구 생활의 흔적들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다. 형광펜도 색깔별로 굴러다니고, 색연필도 꽂혀있고, 네임펜도 몇 개나 있다. 연필도 그걸 때서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많다. 멀쩡한 것을 버릴 순 없으니 써서 없애야 할 텐데, 요즘 페이스 대로 이걸 다 쓰자면 이것들을 써서 없애기 전에 컴퓨터와 기계가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의 정신은 전뇌공간에 가두고 육체는 배터리로 쓰는 시대가 먼저 올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필기구를 쓸 일은 확실히 없겠군.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필기구라는 것이 어쩐지 어디선가 하나둘 생겨나기 마련이라 쓰는 속도보다 생성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어쩌다 판촉물을 받아오고 설문조사 사은품 따위를 받아오다 보니 프링글스 통이 필기구로 가득 찼다. 최근에 이케아 광명점에서 사람들이 연필을 무더기로 집어와 화제가 되었는데, 나는 오히려 연필을 놓고 오고 싶을 지경이다. 쓰지도 못할 물건을 갖고 있어서 뭐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한편, 아날로그 필기구로 뭘 쓰고 싶다는 욕구도 분명히 있다. 필기구로 직접 글을 적는 행위에는 생각이 지면으로 옮겨지는 동안 그 글이 다시 자신의 생각에 입력되는 여유와 되새김질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쓴 글에서는 내용 이외의 감정이나 감성을 짙게 느끼는 것이다. 

만년필로 쓰면 더 좋다. 만년필이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라 내용에 상관없이 쓰는 것만으로 쾌감을 준다. 펜촉과 종이가 마찰하여 사각거리는 만년필 특유의 느낌은 다른 필기구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다. 기도를 자극하는 담배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재작년 겨울에는 별로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에게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이버 포스트 초대작가가 되면서 그보다 더 좋은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 받았다. 덕분에 틀림없이 기뻐야할 선물이 묘하게 씁쓸한 선물이 되고 말았는데, 아무튼 내가 예상한 대로 두 만년필 다 놀려두고 있다. 이따금 손이 근질근질하면 메모지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 따위를 아무 의미도 없이 끄적일 따름이다. 람보르기니를 타고 아파트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만족하는 수준이다.

언젠가는 아무리 악필이라도 패턴을 분석해서 텍스트 파일로 저장하는 기술이 발달하리라. 그때가 되면 좀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tag :

스큐어모피즘의 추억

$
0
0
나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첨단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감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메모를 하려고 화면을 켜면 수첩이 있어서, 원하는 곳을 펼치고 거기에 펜이나 타자기로 메모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 현실의 소소한 모사를 보면 감탄스럽고 정이 간다. 내가 아이폰을 좋아했던 것도 그런 ‘스큐어모피즘’ 때문이었다. 메모장은 가죽 케이스 안에 들어 있었고, 음악이나 팟캐스트 등 많은 앱이 실제로 존재해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버튼을 달고 있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아이패드 앱 중에는 “beatblaster”라는 것이 있는데, 이 앱은 오디오데크 자체를 모사해서 같은 음악을 CD로 재생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을 볼 수도 있고, 턴테이블로 재생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을 볼 수도 있다. 음악 목록을 열면 장에 빼곡히 꽂아놓은 CD 케이스의 옆면이 나타난다. 게다가 모사한 게 디자인 뿐만이 아니라 음악을 턴테이블로 재생하면 음악 중간중간 바늘에 먼지가 스치는 잡음도 들을 수 있어서, 이걸로 음악을 틀어놓으면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잡음이 더 들려오지 않을까 이제나저제나 멍하니 기다리게 된다(사실 이건 약과고, 이보다 더 턴테이블 구현이 잘 된 앱도 많다고). 나는 이런 디자인으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실감을 하는 게 좋고, 거역할 수 없는 디지털화로 인해 잃어버려야 했던 질감을 재치있는 고증으로 디지털 기기 속에 되살리는 것이 기술이 줄 수 있는 감동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beatblaster의 모습. 오디오 데크를 만져봤다면 어딜 어떻게 조작해야 할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iOS 7에서부터 ‘플랫 디자인’이 적용되면서 아이폰은 더 이상 예전의 아이폰이 아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아주 납작하고 심플해졌다. 기능상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날아간 것 같다. 예전의 디자인이 뼈대 위에 살을 입혀놓은 것이었다면, 플랫 디자인은 살을 없애고 뼈대를 예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심플함의 정수고, 현실 모사만을 반복해온 스큐어모피즘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술, 모더니즘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이폰을 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게 그렇게 예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바로크 가구를 아주 잘 쓰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와서 멋대로 이케아 가구로 바꿔놓고 이거야말로 현대 예술이고 앞으로 가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는 꼴을 보는 기분이다. 

예를 들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음악’ 앱을 보면, 이제 흰 평면에 앨범 재킷이 덩그러니 떠 있고 그 아래 탐색바가 있다. 그 아래는 아티스트와 제목이 떠 있고, 그 아래에는 이전 곡, 재생, 다음 곡 아이콘이 아무 테두리 없이 역시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다. 그 아래에는 볼륨 조절 바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이 재생목록 반복”, “생성”, “전체 임의 재생” 따위가 글자로, 기껏해야 핫핑크색 배경을 두른 모양으로 둥둥 떠 있다. 예전에 비하면 이건 그야말로 개념을 실체 없이 그대로 배치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애플이 디자인한 만큼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레이아웃이고, 누구나 극찬할 심플함의 미학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과 내 의견은 완전히 별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아이콘을 넣는 대신 핫핑크 글씨로 “이 재생목록 반복”, “생성”, “전체 임의 재생”을 넣은 부분은 도저히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설정을 바꾸려고 이 글씨를 누르면 아주 친절하게도 “반복 끔”, “이 노래 반복”, “이 재생목록 반복” 따위 선택창이 떠서 화면의 3분의 1을 가려 버리는데, 이쯤 되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나머지 아이콘도 다 빼고 “이전 곡”, “재생”, “다음 곡” 따위 글자로 바꾸어 놨으면 재미있어 보이기나 했을지도 모르겠다. 


(깔끔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최신 iOS 음악 앱 디자인.)


(예전의 음악앱 디자인. 나는 이 형체 있는 버튼들이 그립다)


타이머 같은 앱에서 시간을 설정하는 방법도 아주 심플하게 변했다. 예전에는 정말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계수기처럼 생긴 원통을 차라락 회전시켜서 시간을 맞췄는데, 이제는 그 디테일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회전시키는 방법 자체는 여전해서,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숫자들을 빙글빙글 돌려 원하는 숫자를 가운데 맞춰야 한다. 완전한 아날로그도 디지털도 아닌 체계의 형체 없는 원통은 꿈속을 떠도는 로또 번호처럼 실체가 희미하다. 

(진짜 기계를 조작하는 느낌이 드는 디자인)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요컨대 플랫 디자인이라는 대세가 시작되면서 시스템은 현실을 박차고 아무것도 모사하지 않는 개념적 세계로 들어선 셈인데, 이게 정말 바람직한 움직임이었는지, 비전문가인 나로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플랫’, ‘심플’, ‘모던’함이 지향하는 바가 아름답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희한하게도 정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들, 이를테면 계산기나 책상 따위가 이런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다면 나는 그걸 꽤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왜 디지털에서는 이걸 좋아할 수 없는가? 사실 명백한 이유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실체를 가진 물건은 실체를 버리려 하는 게  멋져 보이고, 실체가 없는 프로그램은 실체를 가지려 하는 게 멋져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나마 확실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심플함이 사용의 직관성, 편의성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디자인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글자를 누르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인데, 예전에는 대체로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아이콘이나 레버,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었으므로, 나는 이게 사라져버린 뒤 처음으로 음악 앱을 실행했을 때, 화면 맨 아래 뜬 “전체 임의 재생” 따위의 글자들을 보고 ‘설마 임의 재생 모드를 바꾸려면 이 글자를 누르라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계기판’과 ‘버튼’의 구분이 희미해진 것이다. 어쨌든, 그 글자를 누르는 게 맞았다. 맙소사. 한 버튼에 기능이 하나씩 붙은 구형 리모콘만 쓰다가 스마트 TV리모콘을 만지게 된 기분이었다. 

물론, 이것은 오로지 옛날부터 실체가 있는 기기를 만져오고, 그것을 모사한 시스템에 익숙해진 사람이기에 하게 되는 불평일 따름이고, 그런 기기와 별 인연 없이 첨단 디지털 기기부터 만지고 살아온 세대는 이런 개념적 세계가 그저 멋지고 익숙하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할 때, '실물 키보드를 채용했다가 나중에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어떡할 거냐’고 지적했듯이, 실체를 모사한 디자인은 당장 지금부터 등장하고 있는 ‘실체로 존재한 적이 없는 시스템’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실체에 묶여 있기에는 시스템의 가능성은 분명히 너무나 거대하다. 그러니 이 디자인이 실체를 떠나 개념으로 향하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있는 거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런 거창한 의의가 있든 없든 내 취향까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iOS 7이후에 도입된  디자인을 라면에 푼 계란의 테두리처럼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같은 기능의 앱이 있다면 허공에 글자와 그림과 아이콘을 뿌려놓은 앱이 아니라 당장 차가운 버튼과 레버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앱을 쓸 것이다. 레이저총과 리볼버가 있으면 리볼버를 집는 것처럼. 나는 아날로그를 사랑하니까. 



tag :

늙은이로서의 인사와 화제의 빈곤함

$
0
0
오랜만에 어른을 만나면 항상 무슨 관등성명을 대듯이 학교, 전공, 학년, 이성교제 유무 따위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왔고, 그건 명절만 되면 모든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어째서 그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겠다. 물론 어른들 입장에서 나 따위는 새파란 꼬맹이로 보일 거고 나 역시 자신을 그렇게 느끼는데, 이것도 학교에 가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한참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이제 신입생에게는 어마어마한 대선배가 되어 있다. 그 친구들이 나 때 기준으로 생각하면 만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로 대화를 해야 할 정도로 구름 위의 학번이니, 신입생이 보기에 나는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대신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자의와 무관하게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어른이 되어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을만큼 나이 어린 후배들을 만나면 인사를 하긴 하는데, 이건 아주 이상한 관계가 된다. 인사를 안 할 수도 없는 건 당연하고, 인사만 하고 대화를 끝내버리자니 너무 박정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때문에 이름도 제대로 기억할까 말까면서, 혹은 이름을 외울 의지도 별로 없으면서 억지로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에 대해 자랑할 것도 없고, 나의 신상을 묻게 만들고 싶지도 않으니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데, 그리하여 꺼내는 말이라고는 기껏해야 이름, 과, 학년을 다시 묻는 것 뿐이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무슨 색이야?"
“혈액형이 뭐야?"
“피망 좋아해?"

이런 질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기껏 한 질문도 딱히 마음에 없던 것이라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순간 대답이 뭐였는지 머릿속에서 날아가고 만다. 특히 나이나 학년은 해마다 바뀌기 마련이라 제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할 재간이 없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이럴 땐 무슨 띠였는지 입력해두면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띠가 있는 국가에서는 노인들의 연령 조사가 꽤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있다. 십이간지 시스템은 그야말로 동양의 신비다. 

각설하고, 이렇게 별로 친하지 않은데다 시간 문제로 그렇게 친해질 의도도 가질 수 없는 사람 둘이 모였는데 대화는 해야 하는 때 겪는 화제의 빈곤함이란 재난이 따로 없다. 서양인들은 그럴 때도 곧잘 아무 얘기나 하는 것 같지만, 동양인인데다 소심한 나로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그럴 때 나누는 말이 상식이나 규범으로 보급되어 아무도 곤란을 겪거나 의문을 품지 않으면 좋겠다. 가령 이런 식으로.

1.서로의 이름을 묻고 답할 것, 이때 이름을 말한 뒤 성을 붙여서 다시 말한다.
“안녕하세요. 철수, 김철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영수, 김영수입니다."

2.요즘 무얼 하느냐는 질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례가 되므로 절대 하지 않는다. 

3.날씨에 대해 말한다. 
“요즘 황사가 정말 심하더라구요."
“그러게요, 어제는 목이 컬컬해서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4.가장 최근에 본 영화에 대해 말한다. 
“어제 킹스슬레이브를 봤는데, 아주 재미있더군요."
“그래요? 아직 안 봤는데 꼭 봐야겠군요."

대화를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한다는 건 우스꽝스럽고 감정이 사라진 디스토피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예의범절 중에는 이것보다 훨씬 불합리한 이유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으니까 이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화제’ 앱을 만들어서 그 안에 언제 얘기해도 될만한 키워드 카드들을 넣어두는 것이다. 이 기본 키워드 카드 세트는 무작위로 구성되어 각 사용자가 다른 화제를 갖게 되며, 필요하면 추가로 화제를 구입해 자신만의 화제 덱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각 화제는 개별적으로 다른 희귀도를 갖고 있어 트레이드와 수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이야기 걱정은 안녕, 당신도 입담의 제왕!

써놓고 보니 재미는 있는데, 과학의 발전으로 너도나도 이런 커뮤니케이션 보조 프로그램을 쓰게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참 큰일이다. 운전을 하면서 내비게이션 없이는 마트도 가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조 프로그램 없이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때쯤 되면 어른들은 ‘요즘 젊은 놈들은 프로그램 없이는 말도 못하는군. 나때는…’ 하고 개탄하리라. 하지만 그런 개탄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어 보인다. 소통 능력이 점점 퇴화하는 것은 길든 짧든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간혹 그리 친하지 않거나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이야깃 거리가 영 없다 싶으면 나는 신세 한탄이나 정부 욕을 하는 대신 상대가 좋아하는 것에 파고드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게임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애니메이션이든 최근 접한 콘텐츠로 시작해서 점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둘 쏟아지기 마련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도 욕하는 재미는 있지만, 기왕이면 긍정적인 얘기를 하는 쪽이 좋은 정보도 얻을 수 있고 뒷맛도 개운하다. 뭐, 이런 방법도 명절에 만난 친척 동생에게 적용할 수는 없으니, 결국 나는 싫어할 걸 알면서도 학년 따위를 물을 게 뻔하지만. 



tag :

그레이와 50가지 체벌

$
0
0
요즘 에로티시즘을 노골적으로 다룬 소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영화화되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성인용품 판매량까지 급증했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역시 영화의 힘은 무섭구나 싶다. 하지만 너도나도 인터넷에서 안대나 채찍, 결박 도구를 산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3류적인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 같아 오싹하다. 

아무튼, 아무리 사회 현상의 중심에 있고 고급스럽게 포장해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에로 영화라는 데는 변함이 없는데, 그러한 에로 영화가 대중문화의 중심점에 가까운 극장에 대대적으로 걸렸다면 이건 한번 봐둘 가치가 있지 않은가 싶어 나는 개봉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봉하자마자 들리는 소식은 ‘돈과 인생을 소중히 하라’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관람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망작을 즐겨보는 사람이라지만 재미없는 에로 영화를 극장까지 쫓아가서 볼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별수 없이 도서관에서 원작을 빌려 보았다. 운 없게도 예약한 1권과 2권 중 2권이 먼저 도착해서 2권만 읽었는데, 도입부야 대강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으므로 보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적어도 전반부에 복선이 깔려 있어서 뒤를 읽다가 옳거니, 하고 앞을 뒤적여볼 만한 소설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용을 아주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이 젊고 그리스 신처럼 잘생긴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어떻게 눈이 맞는다(전반부라 확실치 않다). 그런데 그레이에게는 이런 계통의 작품에 나오는 남주인공들이 흔히 그렇듯이 마음의 어둠을 갖고 있고, 그것은 BDSM이라는 성적 취향으로 드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레이의 서브미시브가 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면서 시도때도없이 섹스한다. 

사실 여주인공이 정말 보잘것없는 여성이라는 점도, 그리고 남주인공이 기막힌 미남에 억만장자라는 점도 그야말로 판에 박힌 이야기였다. 남주인공은 ‘무슨 마법을 부렸지? 난 완전히 너에게 사로잡혔어.’ 같은 말을 뇌까리고 맥북이나 블랙베리 따위 갖가지 선물을 하며, 여주인공은 그런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마음 깊은 곳 어둠까지 보고 싶어하는 한편 자신이 그의 진정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울며, 그러면 남주인공이 전용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짠 하고 나타나 달래주고 함께 잠들었다가 늦잠에서 깨어나 ‘제길, 지각이군. 이런 적이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여기까지야 정말 뻔하디뻔한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단연코 남주인공의 남다른 성적 취향이었다. 묶고, 규칙대로, 때리고, 맞는다. 예전이라면 그냥 기분 나쁜 변태성욕으로 다루어질 ‘플레이’가 어쩐지 깊은 사연을 가진 행위가 되어 아나스타샤는 주저하면서도 점점 여기에 익숙해지고 마는 것이다. 

작가 E.L. 제임스 자신도 이 부분이 자신의 소설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라고 생각했는지 2권에서는 몇 페이지 건너서 한 번씩 섹스씬이 나오는데, 여성의 시점에서 쓰여진 탓인지, 아니면 내게 익숙한 일본 문화와는 동떨어진 영역에서 쓰인 탓인지 이런 장면들은 아주 정성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아주 깔끔해서 에로물 특유의 ‘질척거림’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TV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하우스처럼 말끔하고 이상적인 섹스였다. 도통 야하지 않다는 평을 여기저기서 들었는데,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의 일어선 부분이 닿았다.’, ‘그가 나를 가득 채웠다.’, ‘나는 오르가즘의 소용돌이로 떨어져 내렸고, 그는 곧 섹시한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방출했다.’ 같은 묘사에 마른침을 삼키며 흥분하기에 내 마음속의 어둠은 너무나 깊은 것이다!

무려 여섯 권이나 되니까 뒤로 가면 얼마나 굉장한 플레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BDSM의 수위도 어째 그렇게 굉장하고 변태적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벌’이랍시고 아나스타샤가 엉덩이를 몇 대 맞기도 하고 별로 아프지 않은 채찍으로 맞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평생 처음 맞은 것이었다느니, 너무나 충격이었다느니 푸념을 하는 게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적인 의미는 없을지라도 나는 그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체벌을 보고 듣고 겪어온 것이다. 

과거의 선생님들 중에는 이상할 정도로 독특한 체벌 방식을 개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야구배트나 방금 막 부러뜨린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당연한 영역이고, 맞을 때마다 자기 이름을 외치게 하기, 칠판 앞에 세운 뒤에 벨트를 풀어 등을 채찍질하기, 동전으로 머리를 때리기,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힘껏 조이기, 창틀에 널어놓기, 웃통을 벗기고 팔굽혀펴기를 시키며 등에 물을 뿌리기, 양팔을 벌리고 손끝으로 작은 원을 그리게 하기, 두 손을 모아 장작 패는 시늉을 시키기,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되 바닥의 격자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문틀에서 엎드려 뻗치게 하기, 야구 배트로 가랑이를 올려치기, 집게로 입이나 가슴을 집어놓기, 체육 시간에 체육복과 속옷이 아닌 옷은 모두 벗고 수업을 듣게 하기… 등등 오랜 전통부터 순간의 기지까지 별의별 체벌이 존재했던 것이다. 작중에서 그레이는 ‘고통의 방’에서 본격적인 플레이를 즐기는데, 그것처럼 방송실로 불러다 남들 몰래 손발을 써서 체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고 지금이고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혹독한 환경이었다. 서양권 작품에선 어릴 때 이런 일을 겪으면 당연한 수순으로 연쇄살인마나 이상 성욕자가 되기 마련인데,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선 동창들 모두 꿋꿋하게 올바른 성인이 되었다. 나 역시 주기적인 살인 충동을 느끼거나 크리스천 그레이 같은 취미를 갖게 되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취미와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레이 같은 취미 생활을 영위하려면 비용이 이만저만 많이 드는 게 아닐 것이다. 취미도 형편에 따라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어떻게 포장되었든 에로물이 주류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건 꽤 재미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크리스천 그레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블랙이든 화이트든 더 대단한 녀석이 나타나지 않을까? 


tag :

매지컬 스퀘어 스마트폰 배경화면 (744*1392)

$
0
0
퍼즐 보드게임 매지컬 스퀘어 일러스트로 제작한 스마트폰 월페이퍼입니다. 아이폰 5 이후 기종, 시점이동 모드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잠금화면과 홈화면에 같은 캐릭터의 두 버전을 각각 설정해 두시면 좋습니다(어떻게 될지 아실 분은 아시겠죠?). 



매지컬 스퀘어는 한국독립게임마당 스토어팜에서 무료배송으로 위탁판매 중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게임 소개는 아래를 참조해주세요!



tag :

햄버거가 아니라 근사한 뚜껑이 좋았던 킹스맨

$
0
0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서 이렇게 훌륭한 영화도 사람에 따라서는 형편없는 영화라고 느낄 수 있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킹스맨”을 보고 모두가 재미있다고 야단일 때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쉬웠다. 인터스텔라 때는 SF가 무슨 사랑 타랑이냐고 별로라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던 반면에, 킹스맨이 별로라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에는 내가 극심한 마이너측에 선 셈이다. 

모두가 뭔가를 칭송할 때 혼자 투덜대는 것은, 마치 반에서 가장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자아이가 만들어온 쿠키를 나눠 먹고 다들 맛있다고 야단일 때 혼자 맛없다고 하는 것처럼 어렵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짓이 틀림없겠지만, 이런 감상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 같은 게 아니라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 좀 아쉽다는 소리를 한다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지는 않겠지. 

(먼저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신 많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B급을 B급 그대로 즐기지 못해서 죄송힙니다.)


줄거리

아무튼, 킹스맨의 내용은 이렇다(이후 전문 스포일러 포함).

비밀 첩보조직 킹스맨의 채용 과정에서 주인공 에그시의 아버지가 동료들을 구하고 전사한다. 이에 요원 해리는 에그시를 찾아가 메달과 암호를 전하고 나중에 메달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하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한다. 에그시는 학교도 퇴학당하고 해병대도 때려치운 놈팽이로 자라나 동네 양아치를 골려준다고 차를 훔쳤다가 경찰에 잡히는데, 마침내 메달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서 해리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마침 과학자 실종 사건을 추적하다 살해당한 란슬롯의 후임을 찾아야 했던 해리는 에그시의 성적, 신체 능력, 그리고 신의가 뛰어나다는 걸 알고 그를 추천하고, 에그시는 온갖 험난한 훈련과 도련님들의 조롱을 견디고 최종 후보가 되지만, 훈련을 시작하면서 받은 개를 죽이는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한다. 한편 란슬롯이 조사하던 사건을 추적하던 해리는 그 뒤에 천재 과학자 발렌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뒤를 캐는데, 발렌타인의 음모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료 유심카드를 배포하고 이를 이용해서 핸드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어 세계 인구를 청소하는 한편으로 자신에게 동조하는 중요 인사들에게는 칩을 심어 직접적인 생사여탈권을 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다 알아내기 전에 함정에 빠진 해리는 교회에서 학살극을 벌인 끝에 발렌타인에게 살해당하고,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회유당해 자신을 죽이려는 킹스맨의 수장 아서를 슬기롭게 처치한 뒤 정식 요원이 된 동기 록시, 교관 멀린과 함께 발렌타인의 기지로 쳐들어가 음모를 분쇄하고 인류를 구하며 당당한 킹스맨으로 다시 태어난다. 

줄거리 자체는 대단히 평이해서 평이하다는 점말고는 특별히 아쉬울 것도 없는데, 각 부분을 뜯어보면 이건 좀 이상하다고 느껴지거나 아쉬웠던 부분이 적지 않았다. 


몰입할 수 없는 에그시

(미안하지만 주인공 보려고 이 영화 보지 않았다. 애초에 이 꼬마가 정말 주인공일 줄도 몰랐고)

일단 에그시를 비롯하여 젊은 층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주인공 에그시가 동네 꼬마에서 비밀 첩보조직의 요원으로 성장하는 구조니까 이건 너무한 소리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댄디하고 멋들어진 영국 신사 요원 해리를 보고 싶었지, 에그시와 그의 철없는 친구들의 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건 “익스펜더블 3”를 보면서도 느낀 아쉬움인데, 여기서도 간판스타들의 노익장은 그리 오래 나오지 않고 첨단 기술로 으스대는 젊은이들이 오래 나와 영 맥이 빠졌던 것이다. 뭐랄까, "바람의 검심"에서 켄신이 빨간기와 손님들을 학살하다 총맞아 죽은 뒤 야히꼬만 줄창 나온다면 느낄 법한, 혹은 “콘스탄틴”에서 콘스탄틴이 민간인에게 총질하다 죽고 채즈가 활약할 때 느낄 법한 기분이었다. 

특히 이 별 재미없는 ‘훈련’ 과정이 귀중한 플레이 타임을 잡아먹은 것은 이만저만 아쉬운 게 아니었다. 헐리웃 영화들을 보다보면 이쪽 사람들이 ‘훈련’에 무슨 로망을 갖고 있거나 새로운 집단에서 반드시 이런 일을 겪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바로 이런 것들 말이다. 
1. 동기 남자들은 대개 껄렁껄렁하고 순식간에 파벌을 만들어 주인공을 조롱하고 괴롭힌다. 
2. 주인공은 혈통이나 신분 또는 널리 알려진 운명 따위로 괴롭힘 당한다.
3. 그런 와중에 악수를 청하고 친해지는 여자가 꼭 한 명은 있다. 
4. 주인공은 남다른 지혜와 슬기, 신념을 발휘하고 친해진 여자의 도움으로 부당해 보이는 훈련의 역경을 이겨낸다. 
5. 교관은 악랄하고 악독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큰 조력자가 된다. 
킹스맨의 훈련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데다가 제시된 역경들도 어째 어디서 들어봤을법한 것들이라 나는 한 명만 낙하산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고, 개를 줄 때부터 그걸 죽이는 게 최종 관문이 될 거라는 것을 짐작했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겠지만.
게다가 이 훈련들은 아무리 봐도 그냥 군사훈련이라 ‘첩보’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나마 흥미로운 첩보적 훈련이 최종 직전 훈련으로 파티장에서 여성을 꼬셔 밤을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건 한창 재미있어지려는 때 충성심 테스트로 바뀌고 말았다. 대체 거기서 정말 열차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긴장하는 관객이 얼마나 있겠는가?

주인공 에그시를 둘러싼 드라마가 희박해서 그에 몰입하기 힘들다는 것도 대단히 아쉬웠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도 멋진 오비완이 죽고 아나킨이 성장하긴 하지만, 킹스맨의 주인공인 에그시가 자신의 운명이나 능력, 가족, 사랑 같은 문제로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에그시의 인생을 관통하는 문제로 ‘어머니와 가족을 지키는 것’이 제시되긴 했으나, 그가 정말 그 문제로 고민하는게 맞나 싶기도 했고(정말 고민했다면 훈련하러 간 사이 어머니 걱정을 한 번쯤은 했어야지) 관련된 장면들도 너무 가볍게 지나갔다. 개를 죽이지 못한 장면에서 ‘약자를 희생해서 얻는 힘 따윈 필요 없어’ 같은 에그시의 신념이 드러나고, '약자를 지킨다는 신념을 위해 죽어간 해리의 유지를 이어 요원이 아니더라도 싸우겠다’ 는 식으로 전개 되었다면 나도 에그시의 신념이 킹스맨의 힘을 얻고 정의로 구현되는구나 싶어 그를 역시 주인공이라고 인정했겠지만, “와호장룡"의 소룡이 청명검을 들고 객잔에서 깽판을 친 것처럼 에그시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폼나는 정장을 빼입고 신명나게 분풀이 한 번 해보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고, 심지어 이 영화의 팔할로 느껴지던 해리는 심신미약 상태이긴 했지만 전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별 후회하는 기색도 없이 사살 당했다. 


해리의 황당한 죽음

(난 이게 되게 좋은 장면일 줄 알았지)


그래, 해리가 죽었다! 콜린 퍼스가 출연하는 작품과 인연이 없던 나조차 정장을 빼입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영국 신사 해리가 요원으로 활약하는 모습은 반하기 충분했고 이건 선전하던 대로 본드에 필적하는 캐릭터가 나왔구나 싶었는데,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렸다. 심지어 민간인을 아주 멋들어지게 학살하고 살해당했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집단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학살해서, 나는 이들이 사실은 발렌타인의 악랄한 하수인들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다이하드 3"에서 맥클레인이 경찰로 위장한 악당들과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우연히 동료 뱃지의 번호를 기억해내고 난투극을 벌여 간신히 살아남았던, 그런 장면인가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처구니 없이 살해당하는 장면도 멀리서 잡혔길래 시시오 마코토처럼 ‘사실은 킹스맨의 비밀 방어구를 써서 치명상을 피했지’ 하고 등장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크레딧이 끝나고도 해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액션과 동떨어진 필모를 밟아온 콜린 퍼스는(캐스팅된 이유도 액션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라던가) 킹스맨을 위해 6개월동안 훈련을 했고, 스턴트의 80%를 직접 소화했으며, 그 결과 교회 학살 씬은 원테이크에 끝냈다고 한다. 이건 정말 칭송해 마땅한 업적이고, 교회 학살 씬도 기가 막히게 멋들어지고 신나게 잘 뽑힌 액션 씬이긴 했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이 영화의 내용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데다가 상식적으로 정의라고 할만한 영역의 정 반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벤저스”에서 호크아이 최고의 활약이 '아군 항공모함 대파’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해리는 그것보다 더했다. 게다가 스타일리쉬한 학살 이후로 명예 회복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주인공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고, 사실상 아버지에 가깝게 설정된 인물에 대한 취급 치고는 너무한 게 아닌가? 학살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가면서 에그시에게 “미안하다 에그시, 킹스맨에 가면 양복이 다 됐을 거다” 같은 말 한 마디라도 남겼으면 그나마 수습이 되지 않았을까. 속편에서 다시 나올 예정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도 안 되게 한심하고 황당한 비명횡사였다. 


맥락없는 악당

솔직히 말해서 해리가 죽은 뒤로는 어찌되든 상관 없다 싶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는데, 악당 발렌타인의 악행이 너무 재미없었던 탓도 있었다. 유심칩을 배포해서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것까지는 참신한 생각이었지만, 그런 짓을 하는 이유라는 게 고작 지구의 바이러스적인 존재인 인류를 청소한다는 것이라 자신의 신념이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주요 인사의 생사 여탈권을 쥔다는 엄청난 이득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은 전혀 조명되지 않았고, 킹스맨 수장 아서의 배신이라는 사건으로 지구 청소만이 부각된 것이다. 인류의 몇 퍼센트가 죽고 그 부를 우리끼리 나눠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인류의 수뇌부를 모두 내가 조종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아니, 왜 이렇게 욕심이 없는 거야? 첨단 IT스러운 느낌을 살리려면 전세계 사람들의 사생활 데이터를 수집해서 다른 음모를 꾸밀 수도 있었을 거고, 뻔한 포맷으로 갈 작정이었으면 그냥 '미치광이 과학자 발렌타인이 지구를 정복하려 해, 도와줘 킹스맨!’ 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다. 요는 발렌타인이 악행을 해야만 했던 맥락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정말 지구 청소를 목적으로 설정한 거라면 발렌타인이 어릴 때 가난했는데 인구가 많아서 배식을 받지 못해 가족이 모두 죽었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천재 사이코패스라든가 하는, 빌런으로서의 배경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동안 여러 대작에서 지혜로운 인물로 등장한 데다 하필 첩보물 주인공이었던 아서(마이클 케인)는 어쩌다 그렇게 간단히 넘어간 건지 알기 쉬운 복선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소품에서는 전반 배치 후반 회수를 잘 지키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부분은 그냥 넘어간 걸까(혹은 편집한 걸까)?


긴장감의 부재와 맥락없는 서비스

그리고 전체적으로 영화 내에 위기라고 할만한 부분이 거의 없어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웠다. 나는 해리가 신분을 위조하고 직접 발렌타인의 파티에 찾아간다기에 첩보물의 꽃이라 할 만한 파티장 첩보, 심리전을 기대했다. 세계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해리가 멋지게 인사하고 파티를 즐기는 척 하면서 집안 곳곳을 뒤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러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나타난 발렌타인에게 시치미 뚝 떼며 ‘집이 참 멋지군요’ 하고 인사한 뒤에 서로의 정체를 드러낼 듯 드러내지 않으며 ‘벌레는 모두 죽이는 게 인지상정이죠’ ‘하하, 하지만 무엇이 벌레인지 규정하는 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같은 대사를 주고받은 뒤 유유히 빠져 나오는, 그런 장면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배반 당했고, 발렌타인은 이것이 이 영화의 본질이라는 것처럼 손님 없는 식당에서 햄버거를 대접하고 관객조차 그 정체를 알면 안 된다는 듯이 형체없는 도청기를 먹인다. 해리는 돌아가면서 해피밀 고맙다고 재치있는 대사를 날리지만 이건 기대한 바가 아니었고, 이후로 해리는 멋진 일을 죽은 란슬롯만큼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인 기지 내 전투와 록시의 대작전도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것처럼 보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록시가 풍선을 타고 성층권 위까지 올라가서 위성을 파괴하고 에그시가 정보를 탈취한다는 당초 목적에서 발렌타인까지 잡아 죽인다는 것으로 목적이 바뀌는 전개는 좋았지만, 록시의 활약은 어째 외부의 방해도 없는데 혼자 비명 지르며 위성을 간신히 쏘아 맞추는 것으로 그려져 별로 멋지다고 할 수 없었고, 정식 요원인데 그 취급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편 에그시의 활약에는 나름대로 작은 첩보와 전투가 끼어 볼만했으나, 공주의 감옥 앞에서 포위되는 위기 상황이 문제였다. 나는 거기서 해리가 돌아와 ‘뭘 꾸물거리고 있나, 에그시. 내가 그렇게 가르쳤나?’라고 하거나, 위성 파괴 임무를 마친 록시가 돌아와 에그시가 ‘록시!’하고 부르면 ‘록시가 아니라 란슬롯이야’라고 핀잔을 준 뒤에 손을 잡고 넘어진 에그시를 일으켜 줄 줄 알았다. 적어도 나는 그게 앞뒤가 잘 맞고 신나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에그시는 뜬금없이 뒷목의 칩을 폭파할 수 있다는 걸 떠올리고, 그렇게 한다. 이건 상당히 황당한 전개였고, 때문에 거기서 이어지는 레밍즈식 불꽃놀이 씬은 마냥 즐겁게 볼수 없었다. 흔히 말하듯 ‘약빤’ 센스고 재미있는 장면이기도 했지만, 충분한 맥락이 구성되지 않은 서비스는 반갑기는 커녕 ‘이런 장면을 집어 넣으면 어찌되었든 좋아하겠지’ 하는 노림수로 보여 기분이 묘했다. 심지어 그 장면 후에 공주는 참사를 보고 미쳐버린 건지 에그시에게 임무 완수 후의 보상으로 애널 섹스를 제안하는데, 공주 이외의 어떤 캐릭터가 제안해도 이것보다는 말이 될 것 같다.

잠깐 딴 얘기로 넘어가서, 의도된 것도 아니고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여성에 대한 취급이 너무 끔찍하다. 발렌타인의 부하 가젤은 알수 없는 이유로 발렌타인을 따르며 아름답고 날렵하게 사람들을 죽여대는 장애인이고, 록시는 자기가 키운 개를 쏘아 죽이는 냉혈한에 왜 나왔나 싶을 정도로 뚜렷한 활약을 하지 않으며, 남편을 잃고 건달과 결혼하여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자식들만을 바라보고 사는 에그시의 어머니는 조종당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처럼 열성적으로 문을 부숴 애를 죽이려고 하고, 발렌타인의 제안을 거절한 상식인인줄 알았던 공주는 처음보는 남자와 애널섹스를 한다. 가젤은 원작에서 남자였으니까 이건 우연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너무 비참한 우연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벌어진 가젤과의 최종 결전도 앞서 나왔던 킹스맨의 비밀 무기를 활용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기대만큼 화려하거나 통쾌하진 못했다. 특히 에그시의 발차기가 어디서 어떻게 신묘하게 들어간 건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발렌타인의 최후 역시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비밀병기로 반격하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심복이 죽든 말든 컴퓨터만 보고 있다가 공격 당해 자기 피를 보고 토하면서 죽다니, 자기는 피만 보면 토한다는 말을 회수했다는 점은 재미나지만 악당의 최후 치고는 좀 심심하다. 가젤의 의족을 평소에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젤도 그를 따랐고, 최후에는 가젤의 의족에 찔려 죽는 운명이었다고 치면 꽤 씁쓸한 분위기가 나서 좋겠지만, 이미 이 영화는 애초에 앞뒤없이 웃고 즐기는 물건이 었으니 그런 건 끼어들 겨를이 없다. 죽어가는 발렌타인과 에그시는 이건 영화가 아니라는 소리를 하는데, 그건 마치 이건 네가 기대한 그런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껍데기만 보고 별걸 다 기대한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이템은 좋았지

요는 킹스맨이 '멋들어진 첩보물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실상은 약빤 액션물’이라 기대와 달라서 실망스러웠다는 것인데, 사실 그렇게 실망만 하기에는 꽤 재미가 있었다. 정장을 맞춰 입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고전적 영국 중년 신사가 사실은 비밀 첩보조직의 요원이라 기똥차게 잘 싸우며 최첨단 비밀병기들을 사용한다니, 이 설정만으로 얼마나 가슴이 뛰는가! 매너를 외치며 싸우는 정장의 중년 신사란, 멘토도 웃음거리가 되고 노인, 아줌마, 아저씨, 복학생, 권력자 모두 노매너와 부도덕의 아이콘이 된 이 사회에서 존경하고 친근하게 여길만한 캐릭터임이 틀림없는데, 나로서는 그런 캐릭터였던 해리가 죽어버린 것을 비롯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마음에 드는 부분에 비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신사 요원 란슬롯이 몇 년산 술 타령을 하며 활약하던 '댄디 중년 스타일리쉬 액션 첩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길 바랐던 것이다. 캐릭터와 아이템이 워낙 좋으니, 갤러해드(해리)와 란슬롯이 활약하는 스핀오프작이 나와주지 않으려나? 




tag :

20세기에는 화상 전화가 이렇게 쓸모없을 줄 몰랐지

$
0
0

80~90년대에 예측한 근미래의 생활상을 지금 다시 보면 꽤 재미있다. 그때 터무니없다고까지 느껴진 미래 기술이 지금 와서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개인용 초소형 통신 기기는 이미 한참 유행이 지나서 초소형을 집어치우고 대형화되고 있고, 노트북도 1킬로그램 밑으로 내려가 노트북 하나 가져간다고 커다란 노트북 가방을 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1995년작인 영화 “코드명 J”는 뇌에 삽입한 칩에 160기가를 저장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텍스트만 저장한다고 치면 160기가는 어마어마한 용량이 틀림없지만, 요즘 데이터를 저장하자고 뇌를 개조한다면 기왕 하는 거 몇 테라 옵션을 고를 것이다. 1968년 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한 태블릿 기기는 아이패드가 대중화시켜 이제 보기 드물지도 않다. 자동차를 부를 수 있는 전자시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스마트워치는 이미 나온 데다가 무인 자동차도 한창 개발 중이니 기술적으로는 이미 가능한 일일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한 무시무시한 미래 예측들)


그런데 과거에 예측된 미래 기술 중에서 꽤 일찍 보급되었으면서도 별로 각광받지 않는 게 있으니, 바로 화상 전화다. 나 역시 어릴 때에는 ‘미래에는 전화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멋져!’ 하고 생각했지만, 이게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된 지금에는 어째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굉장히 멀리 떨어진 가족이나 연인이 "가니메데 날씨는 어때? 토마스가 벌써 걸어다니는 것 좀 봐! 사랑해,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 따위 감동적인 말을 주고 받을 때 쓰는, 일종의 클리닉 같은 것이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전화라기보다는 ‘실시간 영상 메시지’ 라고 하는 게 더 실감이 난다. 친하면 친한 대로 그런 걸 보낼 이유가 없고, 친하지 않으면 친하지 않은 대로 당연히 그런 걸 보낼 이유가 없다. "에일리언 2”를 보면 주인공 리플리의 상관격인 인물이 화상 전화를 걸어오는데, 솔직히 시도때도 없이 화상 전화를 걸어오는 상관 밑에서는 일하기가 몹시 고역스러울 것 같다. 이건 갑자기 방에 쳐들어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3시쯤에 화상전화로 잠깐 미팅 할 수 있어?" 처럼 약속을 잡으면 몰라도, 뜬금없이 화상전화를 걸어대면 그때마다 얼굴과 주변 상황을 볼만한 꼬락서니로 정리하느라 여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화상전화가 달갑지 않은 이유에는 계속 서로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도 있다. 상대의 시선을 내가 직접 조절해야 되니까 내 얼굴이 아닌 곳에 비출 수도 없고 상대도 마찬가지니까 서로 얼굴만 볼 수밖에 없는데, 누구 멱살을 자주 잡아본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게 어색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누군가와 대화할 때 어지간해서는 얼굴만 보지 않는다. 상대가 어지간히 매력적이라 얼굴을 뜯어먹고 싶을 지경이 아니라면 대체로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이나, 서류, 노트, 혹은 화젯거리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봐 가면서 얘기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상대와 단둘이 마주 앉아서 정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할 일이 일상 속에 그리 많지도 않다. 매일 누군가 얘기할 때마다 칼같이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만 보고 얘기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상대방 얼굴을 계속 보는 것도 겸연쩍은데, 상대가 내 얼굴을 계속 보는 건 더 끔찍하다. 차라리 서로 손만 보여주는 편이 마음 편하겠다. 손만 보여주는 화상전화라니, 써놓고 보니 이쪽이 훨씬 민폐스럽지 않으면서 섹시한 느낌이 든다. 이 기술이 보급되면 반지나 네일아트가 대유행하겠군.

그런 한편 꽤 재미나고 저런 거라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화상 전화 장면이 영화 속에서 나온 적 있다. “땡스 포 쉐어링”이라는 2012년 작인데, 여기서 꽤 괜찮은 분위기가 된 아담(마크 러팔로)과 피비(기네스 펠트로)가 노트북으로 화상 전화를 하면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음식을 각자 준비해서 따로따로 먹는 거라 서로 나눠 먹을 수는 없지만, 이거라면 서로 얼굴만 들여다볼 필요없이 시선을 꽤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밥도 먹고 대화도 할 수 있다. 나름대로 건배하는 기분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엉덩이가 가려워진대도 화면 뒤로 돌아가서 긁으면 되고 방귀가 마려워도 마이크를 끄고 새침한 표정으로 뀌면 된다는, 현실 이상의 장점도 있다. 원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들이라면 시도해보면 어떨지? 너도나도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보고 웃고 떠들며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같아서 재미있다. 

뜻밖에도 공포영화인 “파라노말 액티비티 4”에서도 화상 전화가 매력적으로 나왔다.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인 알렉스(캐서린 뉴튼)는 노트북을 사용해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남자친구와 화상 전화를 밥 먹듯이 하는데, 아예 잘 때도 자기가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통신을 연결해 둔다. 그 때문에 이상 현상이 기록된다는 내용인데... 공포스러운 내용은 떠나서 자다가 잠깐 깨었을 때 연인이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퍽 낭만적이다. 만질 순 없어도 그럭저럭 한 공간에서 잔다는 기분도 날 것 같다. 화상 전화로 원거리 식사를 한 다음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끌어안고 침대로 가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애정전선 문제없음이다. 여기에 애플워치까지 차고 있으면 상대의 심장박동까지 원격으로 느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기술의 승리가 아닌가!

(물론 자다가 깨서 본 영상이 이런 거라면 좀 곤란하다)


요는 화상 전화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할 수 있다는데 얽매이지 말고, 일상적인 대화가 그렇듯이 두 손과 시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화 말고 따로 할 거리를 놓으면 딱히 화상 전화라는 부담 없이 상대가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페이스타임을 강력한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애플도 화상 전화를 이렇게 쓰라는 설명이나 마케팅을 하진 않는 것 같다. 마케팅으로 하기에는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얼굴보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게 나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광고 속의 사람들은 대개 서로 얼굴을 본다고 좋아 어쩔 줄 모른다)

아무튼, 부담스럽지 않게 화상 전화하는 법을 생각해냈으니 얼마든지 화상 전화를 하면 되겠군! 하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화상 전화 할 상대가 없다. 기술은 있는데 거기 사람은 없으니 이거야말로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는 인생이군. 



tag :

요리하는 저녁 풍경

$
0
0
드물게 요리를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나는 그럴 기회가 정말 아주 드무니까, 들뜨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이색적인 체험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하루도 빠짐없이 요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요리를 하게 되었다고 마음이 들뜨지는 않을 것이다. 밥을 사 먹을 때만 해도 뭘 먹을지 고민하기 마련인데 스스로 요리까지 해야 한다면 얼마나 선택하기가 귀찮고 괴로울까. 그런 점에서 요리를 한다고 마음이 들뜨는 나는 아직 진정한 요리의 길에 오르진 못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즐기는 게 죄악은 아니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야지. 

아무튼, 혼자 요리를 해서 나 한 명에게 먹이는 상황은 부담이 없어서 좋다. 누구에게 메뉴를 묻거나 강요할 필요도 없고 맛이 없을까 봐 마음졸일 일도 없다. 아무리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모독적인 요리가 만들어져도 나 자신만 희생하면 그만이니 레시피를 벗어나 대충 마음 가는 대로 만들 수도 있고, 요리하는 내내 옆에다 뭐든 틀어놓을 수도 있다. 

정말 남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없는 수준이지만, 요즘은 오므라이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오므라이스는 썩 좋은 요리다. 준비물이나 요리법도 간단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실패할 확률도 낮은 데다가 케첩이라는, 뭐 어찌 되었든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소스를 많이 쓰니까 결국은 그럭저럭 먹을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요리를 하기로 작정했으면 일단 조리대 한켠에 맥북이나 아이패드를 놓는다. 부엌에 이토록 잘 어울리는 IT기기도 드물 것이다. 그것만으로 요리가 반쯤은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뒤에 레시피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뭐든 틀어놓는다. 실제로 쳐다볼 시간은 거의 없지만 그렇게 해 두면 떠들썩해져서 좋고, 떠들썩해야 ‘어차피 혼자 먹는 거 대충 라면이나 끓여 먹고 말지’ 하는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부엌이 시끄러워졌으면 재료를 꺼낸다. 재료를 새로 살 생각은 안 하고 비축분을 쓰기만 하니까 재료라곤 당근과 양파가 고작이다. 이제 도마와 칼을 꺼내고, 당근을 씻어서 반 개를 잘게 썬다. 그리고 기름을 두른 팬에 익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양파 껍질을 벗기고, 역시 잘게 썬다. 당근이 먼저 완전히 익어버리면 안 되니까 빨리해야 하는데, 그때서야 미리 썰어뒀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매번 이런 식이다. 아무튼 양파를 썰어서 팬에 올리고, 다음으로 계란 세 알을 풀기 시작한다. 역시 미리 해뒀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늦었으니 야채를 뒤적이는 틈틈이 계란을 푼다. 그러다 찬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다시 계란을 푸는 한편으로 야채를 볶는다. 밥이 데워지면 팬에 올리고, 케첩을 적당히 뿌려가면서 볶기 시작한다. 그러다 역시 야채만 들어간 오므라이스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 참치 반 캔을 넣는다. 혼자 먹는 요리의 장점이란 이런 것이다. 요리를 하다 말고 뜬금없이 뭘 집어넣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밥을 볶다가 부정확한 시점에 팬 하나를 더 꺼내서 풀어놓은 계란을 올린다. 그때마다 늘 생각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계란을 꼭 풀어야만 하는가고, 또 하나는 계란을 먼저 익혀서 따로 빼놓은 다음 밥을 볶고 그 위에 올리면 팬을 하나만 써도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리에서 일견 귀찮아 보이는 짓도 다 의미가 있을 테니 가급적 따르는 게 신상에 좋으리라. 요리는 무척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활동이라 ‘계란이 다 익었으면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세요’ 따위 감상적인 허례허식은 좀처럼 레시피에 기록되지 않는다. 

아무튼, 밥과 계란이 충분히 익었다 싶으면 밥을 계란에 올리고 반 접으면 되는데… 계란을 익히는 팬은 꼭 작은 걸 쓰기 때문에 둥근 후라이를 밥 위에 올리는 걸로 대신한다. 모양은 덜 나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나 혼자 먹을 거. 그리고 후라이 위에 케첩으로 아무 단어나 적으면 오므라이스 완성이다. 혹시나 해서 한 입 먹어보면 역시나 먹을만하다. 이게 바로 내가 만든 오므라이스라고 유레카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온 가족을 불러다 배불리 먹일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비참할 정도로 불행한 것도 아니다. 이 ‘그럭저럭 만족’이라는 지점은 인생을 헐떡이며 살거나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꼭 찾아야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영화 “위플래쉬"에서는 “굿 잡”이라는 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말이라는 대사도 나온다지만, 나는 딱히 오므라이스에 인생을 건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저녁 한 끼를 걸었을 뿐이니까 굿 잡 정도로도 괜찮겠지.

오므라이스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다. 식탁을 닦기도 귀찮고 텅 빈 식탁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도 영 흥이 나지 않고 쓸쓸하니 조리대 앞에 선 채로 먹는다. 틀어놓은 영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 싶으면 뒤로 돌리고, 맥주가 있으면 꺼내다 마신다. 사냥에서 성공한 것마냥 오늘 한 끼도 무사히 넘겼음을 자축하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그렇게 직접 만든 요리와 함께 마시는 맥주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마시는 맥주만큼이나 맛있다. 부엌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것이지만 이것도 축제라면 축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식사를 마친다고 모든 축제가 끝나고 아, 즐거웠다 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설거지가 남은 것이다. 여드름을 짜는 것처럼 설거지도 나름의 재미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어깨가 절로 들썩일 정도로 즐거운 일은 아니다. 고작 오므라이스를 한 것만으로 닦아낼 것이 적지 않다. 은근히 취기가 올라오니 누워서 배를 두드리고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도 도망쳐선 안 된다. 설거지까지가 진짜 요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애니든 미드든 내셔널지오그래픽이든 뭐든 곁눈질로 봐가면서 설거지를 끝내고 결코 작동할 일이 없는 식기세척기 문을 턱 닫고 나서 시계를 보면, 밥을 먹기로 작정한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은 족히 지났다. 요리가 반이고 나머지 반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먹는 시간, 나머지가 설거지한 시간인 것 같다. 만약 재료를 시장에서 사오는 시간까지 더하면 요리에 걸린 시간은 훨씬 늘어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만사가 허망하기도 하고, 매일 밥 해주시는 어머니나, 매일 밥 해 먹는 자취생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축제가 끝난 운동장을 바라보는 듯한 적적함까지가 바로 혼자 해 먹는 요리의 궤적인 모양이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오며 맥주를 좀 남겨뒀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한다. 늘 이런 식이다. 



tag :

웨어러블 기기와 스마트한 다이어트를 기다리며

$
0
0
팔팔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건강’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대학교에 가면 술과 밤샘 때문에 컨디션이라는 걸 신경 쓰게 되고,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슬슬 술을 퍼마시거나 밤을 샌 다음 날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건강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잃어갈 때가 되어서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일 년에 병원 한 번 안 갈 정도로 건강한 편이지만, 요즘 들어서 건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그건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아이폰을 4S에서 5로 바꾸는 과정에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아이폰에 기본 탑재된 ‘건강(헬스킷)’앱이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마트 기기를 통한 건강 관리 칼럼을 읽었기 때문이지만.

아이폰의 iOS8부터 탑재되기 시작한 건강앱은 척 봐서는 대체 이걸 가지고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싶은 물건으로, 사실상 건강에 관한 디지털 장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금 찾아보니 5S부터 저전력으로 가동되는 센서를 통해 걸음 수와 수면패턴을 자동 분석/기록해 준다고 한다. 주변에서 아이폰 5S 상위 기종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로 자랑을 하진 않았으므로 처음 듣는 정보였고, 꽤 흥미로웠다. 나는 “메모선장”이라는 닉네임대로 기록에 상당히 집착하는 성격이라 그동안 “Lumen Trail”이라는 앱으로 매일같이 운동 기록을 해왔던 것이다.

아무튼 이 정보를 알았더라면 무리해서라도 5S를 구입했겠지만 이미 5를 사버린 뒤라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기능을 대체할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한편으로 건강 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론만 뽑아내자면, 아이폰의 건강 앱은 그냥 장부가 아니라 각종 건강앱들을 연동시키는 데이터 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주소록이라는 데이터가 있고, 이것을 여러 앱에서 읽고 편집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을 활용하는 앱 중에서는 “MyfitnessPal”(이하 MFP)이 가장 훌륭했다. 식사, 운동, 체중 등을 기록할 수 있는 앱인데 일단 무료에, 한국어를 지원하고, 식사에 관해 방대한 정보를 기록하는 데다, MFP와 연동되는 앱이 상당히 많아서 이것들을 테스트하다 보니 필요한 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이폰 하위 기종으로 걸음 수를 트랙킹하는 방법으로는 “Pedometer”가 가장 나았다. 다른 것들은 대체로 GPS까지 써서 전력 소모가 극심했는데 페도미터는 GPS 없이 아이폰의 흔들림만을 추적할 수 있었다. 수면 패턴 분석은 여러 앱이 있는데, 그중 계정을 이미 만들어둔 Runtastic에서 만든 것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두 기능을 연동해서 쓰는 한편으로 MFP로 식사와 칼로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썩 나쁘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연한 기회로 샤오미의 “미밴드”까지 입수하게 되었다. 한 번 충전하면 한 달 가까이 가면서(수치상) 13 달러 정도밖에 하지 않는, 웨어러블 기기의 미스터리 같은 존재다. 디스플레이도 없고 기능이라곤 만보기와 수면 패턴 분석, 진동 알림뿐인 녀석이지만 이것도 아이폰 건강앱과 연동은 되므로 모자라진 않다. 


그리하여 나는 미래인처럼 웨어러블 기기를 장착하고 건강 정보를 적극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다. 부정확하고 계측되지 않던 생활상을 수치로 본다는 건 묘한 쾌감이 있는 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나는 하루 평균 8000걸음을 걷는데, 시간으로는 한 시간 반가량이고 칼로리로는 300kcal도 되지 않는다. 잠은 6시간에서 7시간 정도인데, 깊은 잠은 3시간 남짓이고 반드시 한 번 깨어난다. 일주일에 0.5킬로그램씩 감량하기 위해서 나는 하루에 1720kcal만 섭취해야 하는데, 아침 식사만으로 600에서 700을 섭취하고 있다. 

여기서 저주받을 칼로리 얘기로 넘어가 보자.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진지하게 다이어트를 할 생각이라면 칼로리는 반드시 기록할 필요가 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마음만 먹고 칼로리를 계산하지 않는 것은 돈을 모을 생각이면서 가계부는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전의 나 자신이 듣는대도 마음 상할 얘기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과식만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기에는 음식으로 섭취하는 칼로리가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제육볶음과 빈대떡, 밥을 먹고 나서 기록해보니 1000kcal를 넘겨버려 경악한 적이 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세 끼 다 배불리 잘 먹어서는 하루하루가 끔찍한 적자다. 그리하여 아무리 귀찮아도 하루의 적자를 메꿔보기 위해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로리를 섭취하는 건 너무나 간단하고, 소비하는 건 끔찍하게 어렵다. 한 시간 반을 걸어야 밥 한 공기분의 칼로리가 소모된다. 푸쉬업을 백 개쯤 하고 ‘오늘은 정말 운동을 열심히 했군’ 하고 뿌듯해 해봤자 40kcal도 쓰지 못했다. 돈이 이렇게 아무리 열심히 써도 착착 쌓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이건 정반대다. 한번은 해산물 뷔페에 다녀와서 먹은 것들을 작정하고 계측해봤는데, 놀랍게도 1621kcal에 달했다. 이래선 제아무리 흉악한 운동을 한대도 소모할 길이 없다. 그날 하루는 철저히 파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써놓고 보니, 이래서야 도통 재미없게 들릴 것 같다. 정말,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일단 먹은 것을 기록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포장 판매하는 제품이라면 바코드를 찍는 것만으로 입력할 수 있지만, 이 반찬도 조금, 저 반찬도 조금 먹는 한국식 식사는 내가 대체 뭘 얼마나 먹었는지 감이 오지 않아 계측이 난해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가계부를 쓰는 한편으로 매일같이 칼로리까지 계산하면서 적자인지 아닌지 신경 쓰다 보면 말 그대로 이중고에 시달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만큼 하루를 흑자로 마쳤을 때의 기분은 각별하다. 운동도 막연히 할 때에 비해 명백한 수치가 기록되니 보람이 생긴다. 훈련보상비 만 원이라도 받는 훈련과 아무것도 없는 훈련의 차이 정도로 큰 차이다.

다시 얘기를 스마트 기기로 돌려보자. 처음으로 웨어러블 기기인 미밴드를 써본 감상은 ‘썩 괜찮지만 없다고 딱히 아쉽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자겠다고 설정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수면을 분석해주는 기능은 분명 멋지지만, 수면 분석 설정을 깜빡하고 잤다고 당장 수면의 질이 떨어져 다크서클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걸음 수와 칼로리 정도는 스마트폰으로도 분석할 수 있다. 애플워치를 비롯한 스마트워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스마트폰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몸에 장착하는 기기까지 써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웨어러블 기기를 써보니 가격보다 ‘몸에 장착’한다는 부분이 특히 심각한 비용이었는데, 손목시계를 차지 않는 사람은 차지 않는대로 매일같이 손목에 뭘 감고 다니는 게 불편할 것이고, 나처럼 손목시계를 차는 사람은 새로운 기기를 장착할 부위 때문에 고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은 길고 둘이나 있지만, 사회 통념상 시계를 장착할 인벤토리는 하나뿐이다. 타임머신을 만든 에미트 브라운 박사처럼 한 팔에 시계를 여럿 차는 사람은 좀처럼 만날 수 없다. 미밴드 같은 스마트 밴드는 액세서리 같으니까 그나마 낫지만, 나는 평소에 팔찌를 하지 않는 터라 결국 오른팔에 찼던 미밴드를 왼팔의 시계 위쪽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스마트 밴드가 아니라 스마트 워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손목시계는 하나만 차야 하고, 스마트 워치를 사면 그동안 쓰던 시계를 쓰지 못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손목시계를 쓰지 않는 사람은 스마트 워치를 쓸 이유를 느끼기 힘들고, 손목시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동안 쓰던 시계 때문에 스마트 워치를 들이기 힘들다. 나만 해도 끝내주는 최첨단 손목시계를 산다는 건 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시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싼 시계라도 그 나름대로 용도와 애착이 있다. “다른 여자 따위는 모두 잊게 해 줄게.”라는 말은 퍽 멋지고 유혹적이라 한 번쯤 듣고 싶은 말임이 분명하나 진심이면 상당히 곤란한 것인데, 스마트 워치가 노리는 궁극적인 위치가 바로 그런 것이라 오히려 손목시계 애호가들에게 목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웨어러블 기기라는 개념 자체는 꽤 빠른 속도로 보급될 듯하다. 미밴드를 쓰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진동’이었는데, 손목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은 스마트폰의 그 어떤 알림보다 명확해서 놓칠래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걸 이용해서 미밴드는 아이폰에서는 전화 알림과 알람을, 안드로이드에서는 각종 앱 알림까지 연동할 수 있는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대화면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은 상태에서도 알림을 받을 수 있어 무척 유용하다고 한다(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지 않아서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 게다가 샤오미 폰을 쓴다면 미밴드를 차고 있는 것만으로 잠금을 자동해제할 수 있다. 아이폰과 맥도 이와 비슷한 연동으로 잠금을 해제할 수 있는데, 웨어러블 기기가 조금만 더 보급되면 본인 인증부터 결제까지 모두 수행할 수 있으리라. 요는 웨어러블 기기는 인체와 늘 접촉해있기 때문에 두뇌를 개조하고 칩을 박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편의는 막대한 것이라 지금이야 웨어러블 기기를 장비한 사람이 단순한 얼리어답터, 긱으로 보일 뿐이겠지만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웨어러블 기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지금까지 피처폰을 쓰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때쯤 되면 조모임을 하는데 누구 한 명이 웨어러블 기기를 쓰지 않아서 귀찮아 죽겠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고.

아무튼, 웨어러블 기기를 동원한 다이어트를 체험해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수면과 걸음을 제외한 대부분의 데이터를 수동으로 입력하고 있어서 아주 스마트하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조만간 이것들도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입력되고 운동 종류나 강도, 요령 따위도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지도될 게 틀림없다. 닌텐도 Wii만 해도 그에 비근한 시스템을 구축했으니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때쯤 되면 다이어트도 아주 강력한 일상 밀착형 게임이 될 것이다. 인류는 이미 사생활 공개를 통한 쾌락과 단순히 예쁘고 야한 그림 수집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지 충분하고도 남는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웨어러블 기기의 기술과 SNS, 게임의 노하우가 접목되면 사람들의 살과 돈과 영혼을 빼놓기란 아주 간단할 것이다. 물론 제아무리 대단한 기기가 보급되어도 그걸 쓰는 것은 사람이라 별 효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기록이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육체와 생활에 밀착해서 심리를 자극하는 동기부여는 더욱 강력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다이어트는 좀 대충해도 되지 않을까?







tag :

때로는 자전거로 달리고 싶다

$
0
0
어릴 때 인도가 잘 닦인 아파트 단지 근처, 게다가 공원이 가까운 곳에서 살아서 나는 자전거를 무척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생활 속의 당연한 이동수단으로 여겨왔다. 어릴 때는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고 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원을 몇 바퀴나 빙빙 돌고 놀았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애들이란 정말 에너지가 끓어 넘치는 생물이다. 중학생만 되어도 뚜렷한 목적 없이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몇 시간이나 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학교에 다니면서 자전거는 거의 잊혀지고 앞으로도 탈 일이 없지 않을까 싶게 되었는데, 이게 웬걸, 공익 근무를 하는 동안 자전거를 숨 쉬듯이 타게 되었다. 버스 편이 엉망이라 자전거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히 날씨가 안 좋은 날만 빼고는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했고, 그러다 보니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날개가 퇴화하여 별 수 없이 걸어다니는 새가 된 것처럼 한심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거의 자전거 의존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그게 어찌나 심했는지 하루는 앞바퀴가 펑크 난 자전거를 그대로 타고 나간 적도 있다. 흔히 자동차 앞바퀴가 펑크 나면 방향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고들 하는데, 자전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면의 충격이 그대로 전해지는 데다가 휠이 좌우로 퍽퍽 움직여서 타는 내내 식은땀이 흐른다. 무슨 기관의 요원들이 날 잡으러 오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2년 지나 소집해제한 뒤로 자전거는 일상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말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곳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소집해제하고 한동안은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까지 나가곤 했지만, 그것도 점점 바빠지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가깝고 안전하고 볼거리가 많아 타는 재미가 있는 자전거 코스란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다. 서울 전체적으로 제대로 된 자전거 도로가 깔리는 날이 오긴 올지 모르겠다. 하기야 인도도 시원찮으니 될 턱이 있나. 



일상적으로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생활 속에서 자전거를 타서 아주 좋았다 싶었던 때가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강촌으로 간 대학교 1학년 MT 때였다. 딱 이틀짜리 MT에서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놀다 자고 일어난 우리는 어쩐지 단체로 자전거를 빌려 북한강을 따라 몇 시간을 달렸다. 무지막지하게 개발되어 묘한 관광도시가 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강촌은 꽤 조용한 시골이었고 차도 얼마 다니지 않아서 자전거 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살짝 따가운 햇살을 느끼며 시원한 강가를 원 없이 달리고, 그러면서 흐르는 강과 아직 지지 않은 꽃들을 바라보며 농담을 하고 낄낄거리는 기분이란 달리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멋진 것이었다. 



(핸드폰 사진 화질이 이 모양인 시절이었다...)

또 한 번은 일본 기후 현 다카야마 시에 혼자 여행갔을 때였다. 조사할 때 가이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투어링하는 메뉴가 있기에 갈 때부터 작정을 했는데, 막상 가 보니 그런 센터 같은 걸 찾을 수 없어서 그냥 혼자 자전거를 빌려다 무작정 타고 다녔다. 여행을 걸어서 하면 너무 느리고 차를 타면 너무 빨라서 자전거가 딱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전거를 타면 꽤 빨리 다니면서도 볼 건 다 볼 수 있고, 원할 때 멈춰 설 수도 있다. 한국에 도통 알려져있지 않은 시골의 소도시를 기어도 없는 자전거로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기분은 강촌을 달릴 때와 또 다르게 훌륭했다. 특히 그곳은 대도시와 달리 고층 빌딩도 없고 도시를 조금만 빠져나가면 드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그 끝에는 커다란 산맥이 있어서, 산맥으로 난 도로를 따라 곧게 난 도로를 따라 달리자면 내 인생 같은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 그대로 길 위에서 사라지고 싶은, 신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짜릿하고 복잡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어쩐지 택시 영업소에서 빌려주는 자전거)

 (다카야마 시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후루카와 시. 사진에 나오지 않은 집 옆 부분은 벌판이나 경작지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다 지나간 추억에 불과하고, 그렇게 자전거와 함께 하는 일상의 기쁨도 여행의 기쁨도 영영 다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인데… 얼마 전에 집 앞에 있던 치킨집이 없어지는 바람에 이제 그 브랜드의 치킨을 먹으려면 전화로 주문하고 자전거를 타고 찾으러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 참, 이거야말로 복잡한 기분이다. 


tag :

죽어라, 소주

$
0
0
누군가 소주는 좋은 술인가 묻는다면, 나는 아주 번민할 것이다. 술의 품질만 두고 생각하면 소주는 술비린내 풀풀나는, 끔찍스런 물건이 틀림없다. 그건 술이 아니라 물에 알코올을 탄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고 깨끗해서 아주 잘 넘어가네 부드럽네 어쩌네 하는 광고를 보고 있자면 소송이라도 걸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주는 가격대 성능비가 훌륭하고 나름대로 고유한 맛을 갖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 중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누군가 소주를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이건 좀 생각해볼 일이다. 만약 소주가 아니라 맥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매일 저녁 맥주 한 캔을 마실 수 있는 삶은 꿈만 같을 것이다. 언제나 맥주를 원하는만큼 마실 수 있다면 나는 맥주에 빠져 죽을 게 틀림없다. 

여기에 견주어보면 나는 아무래도 소주를 싫어하는 것 같다. 매일 소주 한 병을 마실 수 있는 삶 따위는 피하고 싶다. 소주가 한없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더라도 나는 결코 거기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소주에 대한 내 느낌이다. ‘독’을 흔히 녹색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소주의 초록색 병은 위험신호다. 녹색병이 출몰하는 자리에 오래 붙어있지 않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 

그렇다면 나는 소주를 싫어하고, 그따위 것은 절대 입에 대고 싶지 않고,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져야 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가?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소주는 가급적 피하고 싶지만, 가끔씩 참기 힘들 정도로 마시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기를 구워 먹을 때가 그렇다. 치킨에 맥주가 최고의 조합인 것처럼, 고기에는 소주가 가장 잘 맞는다. 지글지글 잘 구워진 고기를 상추에 싸서 먹은 뒤 들이키는 소주는 쓰고 차갑다가 식도를 넘어가면서 달고 뜨거운 것으로 변해 몸을 천천히 데우는데,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그 맛의 변화란 다른 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신비로운 것이다. 고기에 맥주도 괜찮긴 하지만, 적당히 취하면서 고기도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역시 소주가 제격이다. 취해선 안 될 이유가 있지 않은 한 고기 구워 먹을 때 소주를 마시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오뎅탕이나 순대국밥처럼 뜨거운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소주를 마시지 않으면 여름에 바닷가까지 가서 바다 구경만 하고 나오는 것 같은 허전함이 들어 견디기 힘들다. 국물과 소주의 길항작용은 항상 절묘한 균형으로 어울려 국물이 소주를 부르고 소주가 국물을 다시 부르는데, 국물의 맵고 짜고 뜨거움을 소주의 달고 쓰고 차가움이 달래는 것인지, 소주의 달고 쓰고 차가움을 국물의 맵고 짜고 뜨거움이 잠재우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두 액체가 서로 마중물이 되어 퍼올리는 힘이란 무서운 것이라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즐기다 보면 절묘한 균형은 순 헛소리고 사람은 알코올에 떡이 된다는 것뿐이다. 

사람이 술을 마셔야지 술이 사람을 마시면 안 되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처럼 아주 상식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소주의 무서운 점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음식들과 함께 먹기 시작하면 대중을 잡을 수 없어서 항상 조금쯤은 더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배를 채우고 만복감을 느끼기까지 20분이 걸린다는데, 소주를 마셔서 취하고 그 취함이 슬슬 그만둬야 할 때라는 걸 인식하기까지는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다. 한 시간이면 술이 사람을 떡으로 만들고도 남을 시간이다. 취했다는 걸 알아도 조금만 더 취하면 더 기분 좋지 않을까? 하는, 앞뒤 없는 쾌락주의에 몸을 맡기게 된다. 악마가 따로 없다. 

술자리에서 주변 상황도 이런 비극을 부추기기 마련이다. 맥주로 시작한 술자리가 맥주로 끝나질 않고 소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내가 경험한 바, 이건 두 가지 패턴을 갖는다.
-주변의 소주파가 소주를 시킨다.
-또는 내가 얼큰한 것을 먹고 싶어진다. 

그 자리에 소주파가 많든 적든 있다는 것만으로 문제다. 나 같은 하이브리드파는 소주파가 많으면 많은 대로 휩쓸려 마시기 시작하고 적으면 적은 대로 참전하고 만다. 여러 명이 옆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으면 짜장을 먹고 있을 때 옆에서 먹는 짬뽕 국물 한 숟가락이라도 얻어먹고 싶어지듯이 한 잔만 달라고 해서 끼게 되고, 한두 명이 소주를 마시고 있으면 ‘도와줘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특히 이 의무감이라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인데, 혼자 마셔도 상관없으니까 시키는 것일 텐데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쓸쓸해 보이고,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알량한 보신을 위해 외면하는 소인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옆에서 뭘 먹든 마시든 상관하지 않고 당당히 소주를 시켜 마시는 사람이란 대체로 소주 한 병쯤은 혼자서 너끈히 해치우고도 남는 사람이라, 이런 사람을 걱정한다는 건 거지가 재벌 걱정하는 꼬락서니나 다름없음을 아는데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도 소주를 마시고 있지 않아도 안전한 게 아니다. 시원한 맥주와 튀김류 안주를 한참 동안 먹다가 메뉴를 보면 뭐에 홀린 것처럼 오뎅탕처럼 얼큰한 국물을 마시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의향을 물으면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들이 쏟아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주를 마시게 된다. 게다가 이런 호기로운 사람들 중에는 술이 떨어지기만 하면 재깍재깍 한 병을 추가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라 술은 국물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마르지 않고, 나는 도중에 ‘아 난 취해서 안 되겠어’라고 절대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객기를 부리고 만다.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소주를 마시고 간신히 막차에 올랐다가 정신을 잃고 잠들어 멀고 먼 종점까지 가거나, 내릴 곳을 지나쳐 반대 방향 열차로 갈아타고 또다시 내릴 곳을 지나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나면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한심스럽고, 간신히 집에 도착해 겨우 씻고 시체처럼 잠들었다가 맞이하는 아침에 겪는 숙취도 설사도 끔찍스럽다. 소주를 마신 다음 날은 그래서 하루 종일 컨디션이 엉망이라 뭘 집중해서 할 수가 없다. 일상 속의 재난이 아닐 수 없다. 정말이지 증오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소주 따위는 지구 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역시 소주를 영원히 마실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주는 해악과 함께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다져놓고 있어서 그게 없어지면 삶의 한 부분이 텅 비어버릴 것 같다. 달리 대체할만한 술이 없나 싶어도 그런 건 놀라울 정도로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끔찍하게도.

소주처럼 단점은 있지만 누군가의 삶의 몇몇 장면에서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결국 절 다시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따위 대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런 악역보다는 당연히 그냥 바르고 곱고 깔끔한 사람이 낫겠지?  




(이미지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C%A3%BC#/media/File:Soju_jinro_gfdl.jpg)


tag :

지하철과 어색함과 스마트폰

$
0
0

얼마 전에 지하철에 탔다가 상당히 놀라운 광경을 봤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지하철에 탔는데, 두 아이를 자리에 앉힌 후 자신은 서서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얌전히 앉아 있었던 반면, 남자아이는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주변을 돌아다니고 창밖을 보고 노선도를 구경하고 지루함을 어쩌질 못하며 그 여성을 ‘엄마’라고 불렀다. 굉장히 젊어 보였는데 엄마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아이는 엄마에게 얼마나 가야 하느냐고 물었고, 엄마는 40분이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그럼 그동안 뭐해? 하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자’라고 대답했다.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인 대답이었는데, 아이는 지하철에선 못 잔다고 했고, 엄마는 그냥 자라고만 했다.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결국 여자아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기 시작했고, 남자아이는 자기 손가락을 구경하다가 다시 돌아앉고 일어나고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기다린다고 딱히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그 아이 엄마를 매정한 엄마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엄마라고 무조건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계속 같이 놀아줄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당장 처리해야 하는 심각한 업무가 있어서 핸드폰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고, 애들이 지하철에 타기 전에 마트에서 매대를 뒤집어엎는다든가 십만 원은 하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면서 바닥을 뒹군다든가 하는 통에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지쳐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뒷사정을 모르는 나로서는 좀 치사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나잇대의 애들을, 심심함의 극한이나 다름없는 공간인 지하철에 태워놓고 자기 혼자 뭔가에 열중한다는 것은 육아 이전에 일행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굳이 애들이 아니더라도 할 것도 볼 것도 아무것도 없는 일행과 함께 지하철에 타 놓고 혼자만 쏙 빠져나간다는 건 너무한 처사다. 특히나 자기를 뺀 일행들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황에선.

애들을 돌볼 일은 없지만 가끔 그런 상황에 처하곤 한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달리 할 건 없고, 그렇다고 핸드폰을 보면 무례하지 않은가 싶은 그런 상황 말이다. 가령 어떤 집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나 내가 속한 집단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 혹은 우연히 지인의 지인과 동석하게 되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그럴 때면 정말 곤란하기 짝이 없다.  ‘ABC’나 ‘제로’ 혹은 ‘끝말잇기’ 따위를 하면서 시간을 죽이자고 제안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뭐든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말이라는 것도 날씨처럼 뻔한 화제는 진부하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신상이나 상대의 신상을 화제로 다루다 보면 무례할 수도 있을뿐더러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친구A(여성)와 지하철에 탔다가 그 친구의 친구B(여성)를 만나서 셋이 그럭저럭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A가 먼저 내리는 통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A가 없으니 당신과 얘기할 일도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다물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대학 생활이 적응하기 어렵다느니, 그래도 재미는 있다느니, 과도 같으니 서로 연락처나 알아두자느니 하는 얘기를 늘어놓았고 그럭저럭 그 어색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연락처를 교환한 게 화근이었다. 의욕 넘치는 새내기였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일단 연락처는 교환하자는 신조로 행동했을 뿐인데, B는 그걸 적극적인 구애의 제스처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런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해서 오해는 별 해프닝 없이 끝나버리긴 했지만, 나중에 상황을 파악한 뒤에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좀더 영악하게 행동했으면 내 인생도 어느 정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럴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서 그걸 화젯거리로 삼아야 하는데,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은 스마트폰에 관련된 얘기를 하면 대체로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스마트폰 앱, 게임들은 누구나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써볼 수 있어서 다른 얘기에 비해 관심도가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무슨 앱을 쓰는 걸 보여준다고 상대가 ‘이 사람 지금 대쉬하는 건가?’라고 오해할 일도, ‘이상한 걸 자랑하네, 별꼴이야 정말!’ 하고 기분 상할 일도 없다. 관심이 없더라도 그냥저냥 신기하다고 넘어가는 정도다. 그리고 그렇게 스마트폰을 화제로 삼고 나면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별로 매너없는 일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안심이다. 스마트폰이란 정말 대단한 물건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역시 한 번 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남과 얘기하거나 뭘 하는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장시간 들여다보는 게 무례하다는 얘기가 아주 많고 나도 그건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실외에서는 모자를 쓰고 실내에서는 벗는 게 당연한 예의였는데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몇 년 뒤에는 아이들과
‘옛날에는 남과 얘기하다 말고 스마트폰을 보는 게 무례한 일이라고 여겨졌단다.’
‘우와, 조선 시대도 아니고 미친 거 아니에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아이들과 뭔가 다른 걸 하고 놀지 않고 스마트폰을 던져주거나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는 것도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적어도 나는 지하철처럼 딱히 놀만한 건덕지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부모가 되었다고 갑자기 언제 어디서 뭘 할지 알 수 없는 지성체의 관심을 사로잡으면서 교육적이기까지 한 놀이나 말을  쉴 새 없이 생각해낼 수 있는 능력과 에너지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 열 살쯤 어린 애들과 공놀이를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 나는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런 짓을 매일 하다 보면 정체모를 광기에 사로잡히겠군, 하고 생각했다. 뽀로로가 괜히 뽀통령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어쨌든, 몇 분간 자기에게 주어진 광대한 시간을 어쩔 줄 모르는 꼬마를 보면서 나는 나라도 태블릿을 꺼내서 뭔가 재미나고 신기한 게임을 구경하게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금방 내가 내릴 역에 도착해서 그대로 책을 읽다 내렸다. 그래서 그 뒤로 심심한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성화에 지쳤거나 자기 일이 끝난 엄마가 뭔가를 보여주거나 같이 놀아줬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대로 밤의 여왕처럼 잠이나 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딱히 내가 진지하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tag :

의외로 택배는 수령이 더 어렵다

$
0
0
농담처럼 한민족이 배달의 민족이기 때문인지 요즘은 매장에 가서 사는 것보다 인터넷을 통해 택배로 사는 게 훨씬 많은 것 같다. 먹을 것도 배달시키는 게 편하고, 전자기기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편이 훨씬 싸게 살 수 있고, 책도 대강 읽어볼 필요도 없이 반드시 사야 할 거라면 굳이 서점에 갈 필요가 없다(도서정가제 변경 이후로는 서점에서 직접 보고 사는 게 낫지만). 심지어 도시락을 매일 집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있고, 꽃을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서비스도 있다. 개인적으로 옷과 신발만은 매장에서 사고 있었지만, 이것도 노하우가 생기니까 인터넷으로도 꽤 살만하게 되었다. 당연히 대리점에서 처리해야 했던 핸드폰마저 인터넷으로 사고 개통처리까지 할 수 있다. 이대로라면 택배로는 절대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 예를 들어 안경 같은 것도 집에 앉아서 시력을 맞추고 옵션을 선택해서 주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이 택배라는 게, 왜 아직까지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문제가 많다. 일단 너무 반가운 나머지 택배라고 하기만 하면 문을 열어주는 상황부터 심각하다. 그 어떤 신분 증명 없이 택배요, 하면 받을 게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누구나 문을 열어버리는데,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건 미친 짓이다. 유니폼은 물론이고 정당한 신분 증명서와, 발신인, 수신인, 그리고 내용물이 뭔지까지 확인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도 연쇄 살인마 장경철이 “열려라 참깨”처럼 “택배 왔어요”하고 유유히 가정집에 침입하여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누구나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깨어날 지경이다. 

수취인이 없다고 박스를 문 앞에 대충 놓거나 양수기함에 놓고 가버리는 것도 문제다. 양수기함에 넣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양수기함에서 택배를 꺼낼 때마다 이 아파트의 양수기함 몇 군데에 이런 식으로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택배 박스들이 잠들어 있고, 그걸 누군가 털어가도 대책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최근에 모 사이트에서 급전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양수기함을 털면 된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것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혀 고쳐지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택배 기사들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업무량에 시달리는 데다가 이것을 안전하게 정상적으로 소화될 인프라가 없는 상황에서 택배량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은 없는데 차만 늘어나는 형국이다. 잘 생각해보면 택배가 오는 시간은 거의 받을 사람이 없는 시간인데, 이쯤 되면 당연히 상품이 안전히 보관되고 수취인이 나중에 찾아가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택배 무인 수거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 게 꼭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미 적었듯이 안전 문제도 심각하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취생 팁 같은 걸 볼 때도 있는데, 여자 혼자 살 때는 창가에 남자 속옷을 걸어놓고 현관에도 남자 신발을 놓는 게 좋다거나, 택배를 받을 때 마치 집안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오빠가 좀 받아!" 같은 소리를 한 뒤에 나가라는 얘기가 적지 않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뭔가 단단히 잘못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실질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여자들의 곤란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도 택배 받기가 영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제법 있다. 일단 중고로 뭘 사는데 조건이 착불이면 아예 포기해 버린다. 착불 택배는 경비실로 가기 마련인데, 얼마가 나올지 모르는 택배비를 미리 전달하기도 번거로울뿐더러, 귀찮은 일을 부탁해놓고 나중에 잔돈을 달라고 챙겨 나오는 게 영 무례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착불이 아니더라도 가족들에게 자랑하기 뭣한 물건은 택배로 사기가 힘들다. 가령 표지에 살색이 대담하게 사용된 책이나 피규어 등을 사자면(어디까지나 예일 뿐입니다) 내가 직접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시간을 계산해야 하는데, 택배라는 게 배송 시간이 정확히 뜨지 않는 데다가 뜬다고 해도 그게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걸 집에서 편안히 받아볼 생각은 아예 집어치우고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학교 동아리방으로 시켜야 한다. 이래서야 택배로 사는 의미가 별로 없지 않은가?

정말이지, 기술과 제도의 발전 속도가 맞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라지만 이 불편은 정말 실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택배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서 고객이 주문할법한 상품을 미리 가까운 곳에 준비해두고 무인기로 배송할 수 있을 정도라 공상과학소설 못지 않은데, 그것을 수령하는 시스템은 무슨 2차대전 수준에서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물론 발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주민센터에서는 여성택배수령함을 운영하고 있지만 나와는 인연이 없고 실효성도 의문스러운 데다가, 몇몇 쇼핑몰에서 운영하는 편의점 수령 서비스는 무척 마음에 들긴 하지만 적용 쇼핑몰이 너무 적다. 고객의 차 트렁크로 배송해준다는 신기한 서비스도 개발되고 있다곤 하지만 이건 접근 권한을 스마트폰으로 제어할 수 있는 차가 필요하다. 당장은 모든 택배에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배송 대행 서비스가 하듯이 사서함을 운영하고 이걸 2차 배송하는 업체가 생겨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택배를 일단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찾아온 고객에게 건네주거나, 전화하면 그때 음식 배달처럼 30분 만에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 참 기막힌 아이디어 아닌가-해서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시도가 이미 실패한 모양이다. 그런 것 없이도 당장 택배 시스템이 돌아가긴 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정말이지 택배 시스템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누가 제발 배송 로봇 말고 수령 로봇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된 수령함이라도.


tag :

중립적인 문자 메시지 보내기의 어려움

$
0
0
워낙 말할 일이 없다 보니 말하는 것도 가끔  어색하지만 말 대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더 어색하다. 어쩐지 이 문자 메시지 문화의 발달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건지, 말을 정말 그대로 문자로 옮겨버리면 사람이 너무 매정하고 화난 것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 선배가 다음에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가정해보자.

-감사합니다

말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이걸 문자로 그냥 옮겨 버리면 굉장히 무뚝뚝하고 성의가 없어 보인다. 마침표마저 없어서 이건 상대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혐오스럽기까지 해서 두들겨 패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처럼 보일 것 같다. 그러면 마침표를 붙여보자. 

-감사합니다. 

이러면 그나마 낫긴 하지만, 정장을 칼같이 다려입은 것처럼 매너 있지만 딱딱해 보인다. 혹은 단체에게 보내는 정중한 메시지로 보이기도 하고, 이 뒤에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방을 나가버린 듯한 뉘앙스도 느껴진다. 좋아, 그렇다면 웃는 얼굴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해보자.

-감사합니다^^

이건 분명 웃는 얼굴이긴 한데, 인터넷상에서 어쩐지 상대를 도발하는 용도로 자주 쓰여서 비웃는 얼굴로 보이기도 한다는 게 문제다. 뭐랄까, 고작 그거나 사주면서 생색낼 생각 하지 마세요^^ 처럼 깔보는 뉘앙스로 해석할까 불안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감사합니다:)

를 즐겨 쓰는 편이다. 이쪽은 나름대로 정중함이 있으면서도 약간 격의를 무너뜨린 듯한 느낌이다. 적어도 비웃음의 뉘앙스로 오염되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이 쓰는 웃음은 

-감사합니다ㅎㅎ
-감사합니다ㅋㅋ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이 ㅎㅎ과 ㅋㅋ에도 차이가 있어서, ㅎㅎ보다는 ㅋㅋ이 더 허물없는 사이로 느껴진다. ㅎㅎ이 두세 번 만나서 친해질까 말까 하는 정도라면 ㅋㅋ은 반 년 이상 같이 지내면서 수업도 같이 듣고 술도 여러 번 같이 마셔서 서로 장난을 쳐도 될 법한 사이 같다. 그런데 이것들도 개수에 따라 뉘앙스가 또 달라진다.

-감사합니다ㅎ
-감사합니다ㅋ

이건 어쩐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가 친해지려고 하는데 싫은 티를 내기는 뭐하니 별수 없이 구색이라도 맞춰 준다는 느낌이다. 한편

-감사합니닿ㅎㅎ
-감사합니닼ㅋㅋ

이렇게 웃음이 받침에 뭉개져 들어가면 정말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서 정말 자신이 횡재라도 했다는 듯이 웃고 있음을 어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뉘앙스들이 정립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다.

다만 문제는 이 웃음이 너무나 당연시 되다 보니, 남녀간의 대화에서, 특히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껍데기를 벗어던져선 안 되는 사이라면(가식적인 사이라는 게 아니라, 상호 호의적이지만 서로 막말을 하고 놀 정도는 아닌 사이) 이게 마침표 대신 쓰는 수준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여성끼리의 대화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래, 이따 보자
-그래, 이따 보자ㅎㅎ

이 두 표현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웃음이 없는 쪽은 정말 정색하고 말하는 것 같다. 딱히 웃음을 붙이는 게 언어와 에너지의 낭비고 무용한 가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말끝마다 웃음을 자동으로 붙이는 기능이 있어도 되지 않을지? 아니면 정반대로 정말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서 정색해서 하는 말에만 뭔가를 붙이면 모두가 편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역시 화난 사람이 말끝에 -_-이나 #, ^ 따위를 붙이는 건 별로 화난 걸로 보이지 않아서 문제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포로 교환 협상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빈손을 들고 다가가는 것처럼 위협 의지가 없음을 웃음으로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말투도 조절하기가 어째 쉽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반말을 할 때가 그런데, ‘니/어/야/냐'로 끝내면 너무 격의 없어 보이고, ‘다/나/까/는가’로 끝내면 지나치게 딱딱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밥은 먹었어?
-밥은 먹었니?

는 너무 친하고 따뜻해 보인다. 특히 ‘니?’는 수많은 방언사용자들이 놀라워하는 '느끼한 서울말'이라 더욱 그렇다. 정말 그렇게 대해도 좋은 사람에게 한다면야 아무 문제 없어도, 나름대로 거리감을 설정해야 하는 상대라면 뭐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밥은 먹었냐?

이건 어째 좀 밉살스럽다. 그렇다고

-밥은 먹었나?

는 어째 먹지 않았으면 신속하게 취식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 이어질 것 같다. 

-밥은 먹었는가?

이건 그냥 사위나 며느리에게 하는 말투고,

-밥은 먹었을까?

는 너무 억지다. 이런 문자를 보내는 인간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을 거다. 
그리하여 타협점으로, 역시 언제부턴가 유행하기 시작한 ‘음슴체’를 쓰고 마는 것이다. 

-밥은 먹었음?

이거라면 안심이다. 따지고 보면 분명 매우 딱딱한 어조인데, 유행이라는 장난성이 섞여 딱 중립적인 느낌이 든다. 

-밥은 먹었음?
-라면 먹음
-피방 안 감?
-안 감. 돈 없음
-지랄, 지금 널 죽이러 갈 거임
-콜

음, 써놓고 보니 이것도 드라이하고 경제적이라 좋긴 하지만 역시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선 쓸 수 없는 방식이다. 10여년 전에 유행하던 ‘삼’체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리하여 나는 ‘누’라는 이상한 어미를 채택하곤 하는데...

-밥은 먹었누?

이런 식으로 쓰는 인간은 나 말고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한국어의 뉘앙스는 너무나 어렵다.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신어'라고 해서 복잡한 뉘앙스나 불규칙 동사 따위를 싸그리 잘라내서 아주 간단해진(그리고 체제 순응적인) 단어체계를 선보인 적이 있는데, 가끔 그렇게 완전히 중립적인 말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런 말투는 어떨까? 이쯤되면 어미가 뭐든 웃음이 붙었든 도저히 신경쓸 기력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제 정신인지 의심부터 하겠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말과 글의 간극을 건너가기란 이 얼마나 어려운가!



tag :

1보다는 아쉬웠던 어벤저스 2 감상

$
0
0






인기있는 대작을 보고 실망스러웠다고 하는 것은 분명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입니다만, 어벤저스 2는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요. 재미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1에서도 그랬듯이 2에서도 수많은 캐릭터들의 비중을 잘 조절해서 재미있는 활극을 뽑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1에 비하면 제 취향이 아니었고, 의문스럽거나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이번엔 힘을 빼고 어벤저스 2 감상을 좀 적어보겠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고, 아쉬운 점 중심으로 얘기하게 될 겁니다. 


1. 바튼과 나타샤와 배너 

예,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이 세 캐릭터의 관계였습니다. 시작하는 전투에서 바튼이 퀵실버 때문에 부상당하고 이걸 나타샤가 꼼꼼히 챙겨주죠. 그걸 보면서 역시 이 두 캐릭터 케미는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1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이건 분명 동료애고, 이걸 보고 좋아하는 건 두뇌가 너무 핑크빛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도 동기사랑이 나라사랑이니 어쩌니 하면서 신입들이 서로 챙겨주게 만들고 그걸 보고 흐뭇해하잖아요? 두 캐릭터의 ‘케미’에 관한 감정은 딱 그 정도였습니다. 

(훈훈한 동지애를 보여줬던 1)

그런데 전투가 끝날 때 쯤 되니 팀이 헐크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라느니 어쩌느니 해서 나타샤가 아바타 비스무리한 느낌으로 헐크를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여기서부터 의문이 생겼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연구 끝에 드디어 헐크를 컨트롤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나? 싶었죠. 그리고 묘하게 껄끄럽게도 했습니다. 나타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긴 해도 슈퍼 히어로라고 하긴 능력이 약합니다. 수틀려서 헐크가 한대 치기라도 하면 피떡이 될 겁니다. 그런데 튼튼한 히어로들이 헐크 담당으로 나타샤를 배정했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2015년에 와서 킹콩이나 미녀와 야수 구도를 재현하는 걸로 보여 식상했습니다. 토르가 와서 형제여! 어쩌고 하면서 진정시키는 편이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죠. 뭐, 결국은 아이언맨이 헐크버스터로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뒤이어 나온 파티 장면은 무척 좋았습니다. 히어로들이 임무 끝난 뒤 놀면서 스트레스 해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죠. 묠니르 들기 대회도 소소하지만 여러가지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타샤가 입이 벌어지도록 아름답게 나왔죠. 제가 본 것 중에서, 마블 시리즈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화까지 통틀어 스칼렛 요한슨이 가장 예쁘게 나온 장면입니다. “언더 더 스킨”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나신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1억배는 아름다웠습니다. 아이언맨2도 좋았지만 그걸 권총이라고 치면 이건 핵폭발 수준이었어요. 어벤저스 2에서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과 헐크버스터 둘입니다. 

(이때도 참 좋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매력적인 나타샤가 배너를 꼬시더군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배너와 비슷한 심정이었죠. 장난치는 거겠지. 아니면 닉 퓨리가 또 무슨 이상한 명령을 내린 걸 거야. 하지만 스티브가 와서 못을 박더군요. ‘쟤 장난칠 때는 안 그래, 잘 해봐’ 라구요. 캡틴 아메리카 2에서 나타샤와 키스하고 키스를 잘 하니 어쩌니 했던 스티브가 그렇게 말하니 이건 확실히 믿을만한 얘깁니다. 그래도 전 믿으려 하지 않았죠. 믿을만한 근거가 없었으니까요. 앞에서 자장가 어쩌고 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거기선 애틋함 같은 걸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려보기로 했구요.

그런데, 좀 지나니까 이번에는 놀랍게도 행복한 바튼 가족들이 등장했습니다. 이건… 사기라고 생각했죠. 심각한 배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야, 너 엠티때 걔랑 괜찮아 보이던데 요즘 어때?
-걔요? 걔랑 그냥 친군데요. 그리고 걔 유부남이래요. 애들 귀엽던데요.
… 이런 느낌이었죠. 물론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멋대로 지레짐작한 쪽이 나쁜 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이어서 나타샤와 배너가 진지하게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합니다. 충격은 둘째치고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전 뭔가 아주 중요한 영화 하나를 놓친 줄 알았습니다. 인크레더블 헐크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나 싶었죠. 그런데 듣고보니 그것도 별 관련은 없다더군요. 즉, 이 케미는 어벤저스 2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긴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역시 무리가 느껴졌습니다. 코믹스를 보면 충분한 설명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나타샤가 배너의 갈무리된 슬픔이나 강인한 다정함 같은 면모를 보고 끌리는 장면을 10초라도 넣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파티할 때 꼬시지 말고 편하게 술 마시면서, 캡틴 아메리카 2에서 차타고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잡담이라도 했으면 수긍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나타샤와 배너의 관계는 어벤저스 2에서 드라마를 담당하는 주축이었는데, 여기서 일단 실망해 버리니 개인적으로 영화의 반쯤은 몰입할 수 없었던 셈입니다. 외국에서 ‘마블은 최초의 여성 히어로를 만들어놓고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칼럼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도 이해가 가더군요. 전 나타샤=블랙위도우의 매력은 바로 엄청난 요염함, 다른 히어로들이 갖지 못한 스파이로서의 능력, 그리고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선의 편에서 일한다는 점, 자신의 매력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걸 주무기로 삼지 않는데다 누구에게 끌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멘탈의 강인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멘탈의 강인함이 우수수 무너졌죠. 물론 강인한 캐릭터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드라마고 캐릭터의 매력이 되는 법입니다만, 어벤저스 2에서 이런 나타샤에게 닥쳐온 질풍노도의 시기는 굉장히 뜬금없는 것으로 느껴져서 매력적일 수도 있었던 얘기가 좀 요상하게 다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2. 울트론

(약해 너)

솔직히 말해서 울트론이 무서웠던 것은 그가 파티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뿐이었습니다. 폭주한 인공지능이 불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창조주를 찾아간 장면이니까요. 프랑켄슈타인 이후로 이 소재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익숙한 소재인만큼 더 참신하거나 다이나믹하게 그려졌어야 하는데, 어벤저스 2는 별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진화를 위해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건 사람들 말마따나 중학생도 할 수 있는 생각이죠. 따라서 그 결론을 얻기까지의 과정이나 논리라도 잘 나오길 바랐습니다. 요즘 무인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생각할 거리가 된 ‘고장으로 인해 자동차가 누군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때 어른 두 명과 아이 한 명 중 어딜 받을 것인가?’ 같은 류의 기계적 사고의 한계점 같은 걸 다루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창조주에 대한 초월 의지나 무한한 증오심, 혹은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힘이라도 나올 줄 알았죠. 그런데 어느쪽도 심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강조된 것이 '무한히 복제되고 인터넷으로 전송되어 절대 잡을 수 없는 생명력’ 인 듯 했으나, 그것도 애매했습니다. 디자인이나 유머 센스는 괜찮은 반면 본체(로 보이는 개체)는 아이언맨이 두들겨 패고 로켓 쏘면 터질 정도로 약하고, 그밖의 복제개체들은 존재감이라는 게 없다시피 했죠.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것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어벤저스 멤버들이 베란다에서 이불 터는 게 더 박진감 넘치고 스릴 있었을 겁니다. 어벤저스 1에서 등장한 치타우리족들도 약하긴 했지만 얘네들은 민간인을 위협하기도 하고 리바이어던을 불러오기도 하고 광선총 일점사로 헐크마저 주춤하게 만들어 약한 떼거리임에도 성공적으로 위기감을 조성했습니다. 그런 반면 꼬마 울트론들은… 그냥 숫자만 많은 알루미늄 호일 인형 같았죠. 같은 숫자의 개나 고양이가 훨씬 위협적일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를 어째’ 싶었던 적이 없어요.

아차, 그러고 보니 울트론은 인터넷으로 도망다닐 수 있었군요! 그런데 이 막강한 장점은 어떻게 되었죠? 비전이 날아와서 머리 잡으니까 ‘연결을 끊었구나, 비전!’ 하고 거세되었습니다. 누가 시간을 끌 때 토르가 번개로 지진 것도 아니고, 아이언맨이 EMP 충격파를 날려서 5분 간의 접속 제한 시간을 벌어 간신히 물리친 것도 아니죠. 그냥 피씨방 두꺼비집 내리는 것보다 더 쉽게 해결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비전 얘기로 빠지자면, 대한의 건아들 비전의 탄생은 꽤 흥미롭고 재미난 지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통제를 통해서라도 자기 같은 슈퍼 히어로 없이 평화가 유지되길 바라는 토니 스타크와, 인간의 근본적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스티브 로저스 및 동료들의 의견이 가시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었죠. 토니의 독단과 스티브의 팀웍이 부딪치기도 했구요. 시빌워로 이어지는 발판인 만큼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언쟁과 육탄전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는데… 목욕하고 온 토르가 계시 받았다고 깨워버리는 걸로 끝나죠. 사실 전 토르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이런 나쁜 것은 사라져야 해!’ 하고 때려 부수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산파였더군요. 그리고 그 난리 끝에 태어난 비전은 토니보다 토르를 더 잘 따르고 있으니… 토니는 자식복이 영 없는 것 같아서 짠합니다.

아무튼 울트론은 공감할 만한 신념도 없는 놈이 세지도 않고 숫자만 많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인류보완계획…이 아니라 반중력장치로 띄운 도시 하나를 추락시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인데, 이건 꽤 흥미로웠죠. 도시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지구의 인류도 구해야 한다는 문제가 설정되어 긴박감이 있었고, "백투더 퓨처 2"의 드로리안마냥 구세주 헬리캐리어가 등장하는 장면도 짜릿한 쾌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 해결은 그에 비해 통쾌한 맛이나 긴박한 맛이 좀 모자란 듯 했습니다. '아이언맨이 다 해주실 거야’라고 생각했더니 정말 그렇게 되었죠. ‘성공할 확률은 1%도 안 돼!’나 ‘빨간 줄? 파란 줄?’ 같은 뻔한 말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게 이 시리즈의 매력이고,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 문제가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역시 이게 다 빌런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더군요. 울트론이 변신 합체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3.스칼렛 위치와 퀵실버

이 남매의 역할이나 비중에는 크게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퀵실버의 최후는 석연치 않지만 이것저것 사정이 있었을 거고, 껄렁껄렁한 사고뭉치가 결국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얘기, 그리고 소심한 아이가 단짝을 잃고 각성한다는 전개도 왕도에 가까우니까요. 겁먹은 스칼렛 위치가 바튼의 말을 듣고 문을 나서서 성장하는 부분도 팀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어른으로 느껴지는 바튼의 역할을 멋지게 강조해줘서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묘하게 바튼이 돋보이는 영화였죠. 스칼렛 위치의 강대함은 어째 의문스럽긴 했으나 원래 매그니토 딸이라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합니다. 다만, 이 둘의 등장으로 빌런쪽의 무게 중심이 묘하게 흐트러지지 않았나 싶긴 합니다. 

그런데 영화 내용과는 별개로 스칼렛 위치의 복장은 좀더 화사하고 예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테레즈 라캥”에서  나온 엘리자베스 올슨을 제가 무척 매력적으로 본 탓일 겁니다. 아마도. 

그리고 스칼렛 위치가 손을 요리조리 놀리며 염력을 사용하는 부분을 보는 내내 그녀가 그린 스크린 앞에서 혼자 묵묵히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손을 놀리는 모습이 상상되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영화 메이킹 필름 같은 걸 뒤적이다 보면 이런 부작용이 있군요.


4.서울

서울은 정말 안 예쁜 도시군요.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만든 필름에서도 이 지경이라니, 말 다했죠. 보는 내내 합성물을 보는 듯한 위화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벤저스 2를 보고 나서 바로 1을 다시 봤는데, 그렇게 보니 1은 정말 잘 만들었더군요. 무엇보다 로키의 매력은 울트론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 강해보이진 않지만 헐크가 걸레짝처럼 두드려도 죽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남을 잘 속이고, 꾸준히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순간순간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캐릭터였습니다. 관객이 쉽게 이입해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목록까지 상상해서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실체가 있는 캐릭터였죠. 물론 울트론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 매력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맹목성과 천진함, 그로 인한 공포감이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HAL처럼 아예 대사가 없었으면 그것도 꽤 재미있지 않았을지?

(소소한 기쁨을 잘 찾는 빌런)


그건 그렇고 1에서 진짜 볼거리가 내분이었던 것처럼 2의 하이라이트도 아이언맨과 헐크의 싸움이었다고 생각하니, 이 시리즈는 정말 내분의 이야기군요. 과연 타노스가 나오면 어떨지 기다려봅니다. 




tag :

친절하지 않은 정도는 괜찮다

$
0
0
다양한 서비스업이 등장하고 이것을 이용하는 빈도도 높아지면서 ‘친절함’에 대한 기대치도 그 선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웨이트리스가 서빙하면서 미소 짓지 않았다고 화를 낼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혹은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화를 낼 수도 있고, 드물지만 비행기에서 땅콩의 포장을 뜯어주지 않았다고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사회가 각박해져 너도나도 위에서 받은 억압을 어딘가에 풀고 싶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대우를 받고 싶어져서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강도 높은 친절의 요구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고역스러운 것이다. 나는 공익근무를 하면서 꽤 오랜 기간 주차요금 정산도 담당했는데, 당장 뭘 주는 건 없으면서 돈만 달라고 하는 서비스란 당연히 좋은 말을 듣기가 힘들다. 그래서 “2000원 나오셨습니다.” 가 괴이한 표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써야 했고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당해도 뒤에는 그럭저럭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서비스가 아니라 자기방어에 가까웠다. '내가 공손한 노예처럼 굴지 않으면 누군가는 날 공격할 수 있고 난 거기 대항할 힘이 전혀 없으니 일단 기자’하는 생각이 서비스의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건 무슨 귀족이 행차할 때 죽기 싫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지 않은가? 내가 만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살기 위해 웃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빈민가에 행차한 폭군이 된 듯한 기분이라 씁쓸하다.

이게 악순환을 낳은 것인지, 자기가 서비스를 이용해주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자기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서비스에 있어서 누가 누구의 위나 아래가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서비스업이 반드시 친절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고객님, 주문하신 방망이는 현재 제작이 어렵습니다.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여 무척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라고 말하는 사람도 어디엔가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비스업에서 친절함이란 무얼까? 나는 '거래하는 상품 이외의 수단으로 이용자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맥도날드에서 미소를 주문한 고객에게 웃어주면 그건 친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판매자에게는 제공하기로 한 적도 없는 것을 제공할 의무가 없고 구매자에게는 구매하기로 한 것 이외의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친절하지 않은 것까지 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친절하지 않은 것’과 ‘불친절한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꽤 다르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음식을 주문했을 때,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웃으면서) 맛있게 드세요."
이렇게 서빙한다면 이건 명백히 친절한 것이다. 한편

“(무표정으로)주문하신 라면입니다."
이렇게 서빙하면 이건 친절하지 않은 것이다. 

“라면 시킨 거 누구요?"
이건 명백히 불친절한 것이다. 

“어떤 놈이 라면이야?"
이건 물론 무례다. 

즉, 의도를 갖고 구매자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시점에서 불친절이 시작되고, 이게 아주 맹렬하고 적극적이면 무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구매자의 기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기계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태도라면 그냥 친절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서비스업이라도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다른 곳에 비해 친절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거나 다른 곳을 이용하겠다고 발걸음을 돌릴 수는 있지만 천하에 빌어먹고 저주받을 곳이라고 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로봇이 아니고 인간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오늘 아침 급히 집을 나오다가 새끼발가락을 모서리에 심하게 박는 통에 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고, 어제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다녀와 심란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라고 딱히 그걸 헤아려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심리 상태가 내 권리나 심리 상태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면 그 나름의 사정이 존재해도 괜찮다. “유리가면"의 츠키카게 선생이 연기 중에 우는 마야를 보고 윽박지르듯이 ‘가게에 들어서서 제복을 입은 이상 넌 인간이 아니라 웨이트리스야! 가면을 깨뜨려선 안 돼!’라는 논리는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지만, 서비스업은 딱히 사상과 진영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넌 친절하지 않으니까 불친절하기 짝이 없군!” 하고 매도할 수는 없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중립지역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상종 못할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은 다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는데 넌 왜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주지 않는 거야!”라고 요구하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 경우가 줄어들고 서로 좀 무뎌져야 모두 덜 피곤해지지 않을까?



tag :

발암의 노래를 들어라

$
0
0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몹시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 “암 걸리겠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이 표현은 고통의 무게에 대한 표현으로 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지, “발암물질” “발암주의” 등의 표현으로도 활용되며 언어 생활 속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듯하다. 앙골모아 대왕의 강림 예정 시기를 전후하여 나타난 “좆나”가 그러했듯이. 

언어야 사회성만 획득하면, 그러니까 말했을 때 알아듣는 사람만 충분히 많다면 딱히 무슨 심사를 거치지도 않고 통용되는 것이니까 이 ‘발암’ 표현이 부조리하다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느낀다. 암 걸릴 것 같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듣느니 그냥 상욕을 섞어 불평하는 것을 듣고 말겠다. 

‘암’이라는 건 희화화해서 즐겁게 쓸만한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미 섹스, 동물, 동성애, 인종, 성별, 외모 등등 별의별 소재가 희화화되고 욕이나 표현으로 활용되는데 왜 ‘암’만은 아니냐? 그것은 바로 암이 너무나 뚜렷하고 실체적인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비교해보자. 

“개새끼!"

이 욕은 어지간히 뜻밖의 상대에게서 듣지 않는 한, 아무리 들어도 영혼에 상처를 입을 정도로 모욕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부모를 욕하는 것이긴 하지만 딱히 사실에 근거한 모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무리 나를 개새끼라고 불러도 엄연히 우리 가족은 호모사피엔스고 이건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만약 판타지 세계에서 개 머리를 한 종족인 코볼드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개가 이 말을 듣는다면 대단히 모욕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들에게 ‘개새끼'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특질을 조롱하는 차별적 언사다. 그러니까 공장지대에 코볼드가 이주하여 임금도 제때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세계관이라면 이런 욕은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니거”라는 단어가 갖는 위상과 비슷하리라.

그럼 다음은 어떤가?

“교통사고 나서 뒈질 놈."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운전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종종 들을 수 있는 저주다. 이건 대상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소름 끼친다. 이 저주는 뚜렷한 현실과 상황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에 대해 우리는 아주 상세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을 실제로 교통사고를 겪었거나 교통사고로 가족이나 친지가 죽은 사람이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 경우에 이 저주는 명백히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럼 다시 

“암 걸리겠다."

라는 표현으로 돌아오자. “암 걸려 죽어라.” 라는 게 아니니까 이건 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격한 표현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듣는 이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면 암이라는 단어는 얼마만큼의 현실감을 지니고 있는지? 이건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누구나 한두 다리 건너면 누군가는 암으로 사망했거나 암을 치료했거나 암으로 의심되어 조직검사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친척 두 명, 지인의 부모 중 두 명이 타계했고, 친구 한 명, 지인의 부모 한 명, 어머니 친구 두 명이 겨우 치료에 성공했으며, 친구가 진료를 받은 적이 있고, 아버지가 조직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암 걸리겠다는 표현은 욕이 아니니까 ‘누가 암 걸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린데 유난 떨고 난리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럼 누군가의 아픈 기억을 건드릴지도 모르니까 암이라는 단어도 쓰면 안 되겠네’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딱히 남을 욕하는 게 아니니까 이건 표현의 자유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외래어 대신 순우리말을 쓰자는 식으로 이런 표현을 뿌리 뽑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보고 있자면, 암이라는 공포를 사람들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괜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신이 재미없는 인간 같아 바보 같기도 하고, 암의 공포를 엿본 게 무슨 훈장이나 벼슬도 아닌데 남에게 뭐라고 하고 싶은 자신이 꼰대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뭔가 결재하며 공인인증서 따위와 씨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암 걸리겠네’ 하고 생각하는 때도 있어 자신의 언어중추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암 걸리겠네’를 처음으로 유행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그 능력으로 더 강렬하고 재미난 표현을 생각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리고 1990년대에 배운 ‘좆나’를 2010년대까지 쓰고 있는 것처럼 2010년대에 배운 ‘암 걸리겠네’를 우리는 2030년대까지 쓰게 되는 걸까? 만약 쓰게 된다면, 그때에는 누구나 암을 웃어넘길 수 있을만큼 의학이 발달했으면 좋겠다. 





tag :

온갖 함정을 피해간 매드 맥스 감상

$
0
0
매드 맥스가 나온다 나온다 할 때는 사실 별로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배경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황량한 사막에서 모두 허덕이는 가운데 힘쎈놈이 지배한다는 구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전지구적인 재앙을 다루었다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워낙 명작이라는 얘길 많이 듣다 보니 안 보고 넘어갈 수는 없겠더군요. 그래서 봤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무조건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요는 취향을 바꿔놓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었다는 뜻이죠.


(이하 스포일러 포함)

줄거리

매드맥스에 줄거리 따윈 필요없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스토리 자체는 간단했습니다. 임모탄 조가 통치하는 도시인 시타델에서 퓨리오사가 거래용 워리그를 타고 옆 도시로 출발하지만, 사실은 잡혀있던 브리더들을 탈출시키는 게 목적이었고, 이것을 뒤늦게 알아챈 임모탄과 정예부대가 추격하는데, 그 와중에 생포되어 피주머니로 쓰이던 맥스가 살려고 하다 보니 별 수 없이 퓨리오사와 함께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워보이 눅스도 합류하죠. 그래서 고생 끝에 퓨리오사의 고향인 동쪽 땅에 도착해 부발리니 동족들을 만나지만, 안타깝게도 녹지는 이미 황폐화된 뒤였습니다. 부발리니 동족들도 거의 다 죽었죠. 퓨리오사는 절망하지만 다음날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낙원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혼자 떠나려던 맥스가 퓨리오사를 설득하죠. 아무것도 없을 게 뻔한 곳으로 가기보다는 빈집이 된 시타델을 탈환하자는 겁니다. 그리하여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고, 대추격전 끝에 임모탄을 처치하는데 성공하고 시타델에 입성하고야 맙니다.

써놓고 보니 파랑새 같은 얘기군요. 그런데 이렇게 스토리가 단순한데도 매드맥스가 굉장했던 것은 판에 박힌 헐리웃 액션 영화 공식들을 여러가지 내다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영화 평론가는 아니니까 이걸 사조까지 따져가며 쓸 재주는 없고, 그냥 좋았던 부분 얘기나 해보죠.


플롯이 이상해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미친듯이 달리는 이 영화의 플롯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평범한 헐리웃 영화처럼 생각해 보죠.

일단 임모탄의 압제와 착취, 그리고 브리더의 수난이 꽤 길게 나와야 할 겁니다. 그걸 보고 퓨리오사는 임모탄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그러면서도 혁혁한 공을 세워 사령관까지 오릅니다. 그러다 탈출의 때가 되죠. 패권 다툼으로 동쪽으로 가는 길의 세력이 약화되었든지 최악의 건기가 찾아와 길이 열렸다든지 하겠죠. 잡혀온 맥스가 그런 정보를 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철저한 탈출 계획을 세운 뒤에 아슬아슬하게 탈출합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반이 지나고, 여기서부터 추격전이 시작되겠죠.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평범한 기승전결은 내다버리고 그냥 시작부터 클라이막스로 내달립니다. 일단 시선을 사로잡고 템포를 늦추는 것도 아니라 거의 그 템포 그대로 가죠. 그래서 압축도가 어마어마한데도 그 안에서 전후 내용은 다 알만합니다. 전반적인 구조 자체가 미친 것 같아요.


설명따윈 필요없어

플롯에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던져버렸듯이 이 영화는 서정적인 감동을 추구하려는 대화 장면이나 설명도 최소화 되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평범한 부분이 눅스와 케이퍼블이 나누는 대화 정도였죠. 무성영화에 가깝다고들 하는데, 정말 대사를 아예 빼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상상도 안 될 지경이에요. 매드맥스의 세계관과 캐릭터들에는 상당히 치밀하고 많은 설정이 붙어 있는 만큼 대사를 넣자면 끝이 없었을 겁니다. 길게 분위기를 잡을만한 장면도 꽤 있었구요. 몇 가지만 상상해 보죠.

일단 퓨리오사가 이방인인 맥스에게 친절하게 설정을 설명할 수 있었죠.

“어머니의 우유? 그게 뭐지? 모유 말인가?"
“그래, 가축처럼 인간의 젖을 짜서 모은 거야. 꼭 필요하지만 역겨운 음료지. 저주받을 임모탄 같으니!"
“먹을 수만 있으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누가 잡혀있든 내 알 바 아니지."

“궁금한 게 있는데, 저 미친놈들이 왜 자꾸 입에다 스프레이를 뿌리는 거지?"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을 숭배하니까 그런 거야. 저걸 쓰고 영웅적으로 죽으면 발할라에 갈 수 있다고 믿지. 임모탄이 그렇게 가르쳤어."
“당신도 그렇게 믿나?"
“내가 죽을 때 알게 될 거야."

“그게 뭐지?"
“니트로 옥시사이드야. 이걸 흡기구에 뿌리면 폭발적으로 가속하지. 까딱하면 정말 폭발하지만."
“죽는 것보단 터지는 게 낫겠군."

이런 대사들을 넣으려면 수도 없이 넣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설정이 흥미로울 부분도 보여주기만 하고 넘어갑니다. 

게다가 다시 떠나기를 결심하는 밤에 퓨리오사가 맥스에게 얘기 좀 하자고 했을 때, 전 좀 더 얘기가 길 줄 알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할 얘기가 얼마나 많겠어요?

“미안하지만, 그 팔은 어떻게 된 거지?"
“이거? 별 거 아냐. 예전에 록 라이더 세력이 더 컸을 때, 전쟁이 일어났지. 거기서 임모탄을 쏘려는 샷건을 대신 맞았어. 임모탄은 팔을 자르고 비참하게 살지 그대로 편하게 죽을지 선택하라고 했지. 그리고…"
“팔을 잘랐군."
“그래, 임모탄이 직접 잘랐어."

“정말 갈 거야?"
“그래."
“혼자선 오래 못 버틸 텐데."
“그럼 더 좋지."

이런 얘기도 하자면 끝이 없죠. 하지만 전혀 없습니다. 아주 간단히 용건만 얘기하죠. 잔재미가 필요 없기도 하고, 그들이 할만한 얘기들이 대부분 대사 없이도 설명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말 감탄스럽죠.


로맨스가 없어

혹독한 상황에서 거친 싸움을 함께 하는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봐도 좋을 일인데, 퓨리오사와 맥스 사이에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성별이 중요하지도 않고, 그딴 싹이 틀 것 같다는 생각 자체가 들질 않아요. 보통 헐리웃 영화라면 아주 당연하게 의심으로 시작한 두 사람이 신뢰를 넘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잘 되는가 싶다가 오밤중에 뭔가를 계기로 서로의 약점을 맹비난해서 헤어졌겠죠.

“당신이 스플렌디드를 버렸어!"
“그러지 않았으면 모두 죽었겠지! 어쩔 수 없었어! 그게 내 방식이야!"
“그것 참 대단한 방식이군,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동료를 한 명씩 버려가면서 살아왔겠지."
“난 동료 같은 거 없어. 그럼 동료 없이는 못 사는 사령관님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꿈속의 낙원을 찾아서 재미난 여행 떠나시라구."

뭐 이런 식으로요. 그랬다가 떠나던 맥스가 짐꾸러미에서 퓨리오사의 메시지 같은 걸 발견하고 “이런 멍청이!” 하고 되돌아가 악당들 몇을 잡고 화해하고, 시타델에 돌아온 마지막에는 타오르는 사막의 석양을 배경으로 마지막 키스를 하고 떠나고… 이런 게 정석이죠. 하지만 매드맥스에서는 그런 식으로 뻔한 구도를 끼워 넣는 대신 제 갈길만 열심히 갑니다. 정말 한결같고 올곧은 영화예요. 


페미니즘

매드맥스가 의도하지 않은 페미니즘이 잘 구현된 영화라는 이야기가 많고, 저도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 구조로부터 여성 전사 퓨리오사가 출산 도구로 여겨지는 브리더들을 데리고 탈출해서, 모계 사회로 보이는 부발리니의 땅을 향해 갔다가 그런 낙원이 이미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존 사회의 권력 구조를 파괴한다는 내용이 별 의도 없이 그냥 ‘그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만들어졌다면 정말 기적같은 일이겠죠. 전 이 구조가 치밀하게 계획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착유기를 부착하고 가축처럼 젖을 짜는 여성들, 정조대를 버리고 신체의 자유를 얻는 여성들, 죽은 산모의 아기를 꺼내서 아들이냐고 묻고 안타까워 하는 남성들, 이런 것들 모두 그냥 넣어볼만 해서 넣은 것은 아니겠죠. 전부 물론 정말 별 의도 없이 만들어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히 멋집니다만.

아무튼 여성이 이만큼 터프하게 성별적 특성이나 약점에 대한 언급 없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액션영화는 전 에일리언 2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퓨리오사를 보는 시선에는 ‘여자인데 저걸 어쩜 좋아…’ 나 ‘여자치곤 대단하군’ 하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그녀를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부발리니 할머니들 뿐입니다. 심지어 그녀들도 퓨리오사를 성별로 구분한다기보다는 그냥 동족으로 알아볼 뿐이죠. 이걸 보면 영화에서 여성에게 성별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최약자로 등장하는 브리더들이 그나마 고전적인 ‘보호의 대상인 여성’의 역할로 나오는데, 그녀들도 잘 보면 각자 성장해서 자기 할 일을 멋지게 수행합니다. 퓨리오사를 자기 몸으로 막아주기도 하고, 무기 보유 현황도 체크하고, 심지어 전반에 탈출을 포기하고 도망가려 했어도 후반에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차에 올라올 수 있게 도와주죠. 정말이지 철저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만약에 퓨리오사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퓨리오 같은 이름으로)이고, 아주 마초적인 배우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전성기의 실베스타 스탤론이 나왔다면 어떨까요? 아니면 한창 잘 나가는 크리스 햄스워스가 나왔다면? 퓨리오와 스플렌디드가 금단의 사랑에 빠져 스플렌디드가 임신하고, 그 때문에 탈출하고, 임모탄은 불륜과 배반에 분노하여 추격하고… 뭐 그런 내용이 됐을 법하군요. 보기는 더 멋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그냥 흔하고 잘 만든 액션 영화로 끝났을 거고, 약자의 대반격과 체제 전복을 통한 자유 획득이라는 짜릿함은 별로 없었겠죠.


부발리니 할머니들

거대 개조차량이 황폐한 사막을 내달리는 금속과 불꽃의 향연에 할머니들을 출연시킬 생각을 하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막스 밀러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살아가며 백발백중의 저격 실력을 갖춘 전투 할머니들이 나오죠.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판 유목민족으로 보이는 이 부발리니 할머니들은 할머니지만 브리더들을 만났을 때 빼고는 늙은 척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영화에서 자주 그렇듯이 비뚤어진 괴팍함을 캐릭터로 내세우지도 않고 신비로운 동양적 지혜를 설파하지도 않아요. 

“먼 곳에서 이방인이 불의 전차를 타고 빛나는 여인들과 함께 찾아오면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야 하리라. 어머니께서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

이런 소리나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의 시타델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워리그를 몰고가서…"

이런 소리를 했다면 부발리니 할머니들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들은 할머니임을 별로 주장하지 않아요. 퓨리오사가 여성임을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노쇠한 만큼 전사들과 육탄전으로 싸울 때는 분명 밀리긴 하지만 이들은 각자 한 몫을 합니다. 장전할 탄환을 입에 물고 거칠게 총질을 하고 개머리판으로 전사들을 두들겨 팹니다. 배우들도 평소에는 죽어가거나 치매에 걸린 역할만 하다가 이런 기회가 와서 붙잡았다고 하던데, 촬영하면서 참 신났을 것 같아요. 보는 쪽도 신났구요.

사실 제가 부발리니 할머니들에게 반해버린 건 그 오토바이 때문입니다. 유목민족처럼 무늬가 촘촘한 담요 같은 걸 잔뜩 둘러놓았는데, 그런 섬세한 디테일로 초월적인 현실성을 부여했다는 게 너무 멋지더군요. 사막에서 오토바이 타고 저격하는 할머니가 있다면 정말 그럴 것 같잖아요.
 

맥스

맥스의 멋짐은 그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압제자 임모탄이 나쁜놈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정의감이나 사랑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워리그를 빼앗아서 도망칠 생각만 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였죠. 오프닝에서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허공의 갈고리에 뛰어오르는 것도 그렇고, 퓨리오사가 자기들을 태워달라고 설득할 때 고민하다가도 입마개를 떼고 싶지 않으냐고 묻자 바로 승낙하는 걸 봐도 그가 원하는 건 자유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 의식이 점점 그를 괴롭히고, 결국은 동쪽으로 떠나는 퓨리오사 일행에게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하고 설득해서 시타델을 탈환하죠. 그런 다음 또다시 떠납니다. 그는 잃어버린 집을 그리워하고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방황자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올곧은 신념과 정의감으로 뭉친 나그네 캐릭터들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주더군요.

게다가 맥스가 딱히 강력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도 멋집니다. 조무래기를 한 방에 쓰러뜨릴만큼 강력한 근력이나 무공을 지닌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검술을 지녔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는 왕년의 칼잡이도 아니죠. 흔한 요즘 액션 영화들처럼 편한 마음으로 앉아서 팝콘을 먹으며 주인공의 강함을 감상하게 하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약간 날래고 판단이 정확하고 의지가 좀 강할 뿐이죠. 물론 무기농장 보스를 처치한 과정이 보이지 않아서 맥스가 제법 센 게 아닌가 의심이 남긴 합니다만, 그가 돌아올 때 무기와 눅스 신발과 아마도 지긋지긋할 수혈용 튜브를 챙겨오는 장면 덕에 그런 판단력 쪽이 더 강조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맥스의 멋짐은 스플렌디드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일 때도, 마지막에 인사 없이 떠날 때도 아니라 바로 퓨리오사에게 저격총을 넘겨줄 때 극에 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딱 세 발에서 두 발 실패하고 한 발 남은 걸 퓨리오사에게 양보하죠. 과자 봉지 뜯을 때도 절대 남에게 안 넘기는 남자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위대한 양보고, 깔끔한 역할 분할이죠. 


구조의 역전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악한 자들은 대개 약자라 그걸 보완하는 기구를 부착하고 있고, 선한 자들은 강자인데 구속하는 기구를 부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임모탄은 병에 찌든 몸을 갑옷으로 가리고 호흡기를 장착하고, 같이 출정한 아들 역시 호흡기와 튜브를 달고 있죠. 악의 세력에 있었던 퓨리오사는 한 팔에 의수를 달고 있었습니다. 한편 건강한 브리더들은 정조대를 차고 있었고, 맥스는 입마개를 하고 수혈 튜브가 꽂힌 채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실 약한 강자들이 건강한 약자들을 억압한다는 기묘하게 역전된 구조는 퍽 흥미로웠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작가 아라키 히로히코는 ‘악함은 약함에서 나온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도 떠오르더군요. 물론 아라키 선생님의 말은 마음의 약함에 대한 이야기라 딱 맞지 않긴 합니다만. 

아무튼, 이 구조는 임모탄이 죽는 역전의 순간에 가장 돋보이는데, 퓨리오사는 임모탄을 처치할 때 두 사람의 부착물을 한꺼번에 떼어내는 방법을 쓰죠. 심지어 임모탄이 세뇌시킨 임모탄 숭배 종교에서 마지막 순간에 쓰는 대사 ‘날 기억해’ 까지 들려줍니다. 그리고 임모탄은 죽고 퓨리오사는 살죠. 한쪽은 의수고 한쪽은 호흡기 마스크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한다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긴 합니다만, 보강물을 가졌던 캐릭터들이 다 죽어나갈 때 퓨리오사만 죽다 살아나는 것을 보면 의수가 보강물인 동시에 구속구이기도 했던 게 아닌가, 칼을 놓고 쟁기를 든다는 의미가 아닌가하고 멋대로 끼워맞추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맥스가 초반에 자신을 착취하는 도구로 등장했던 수혈 튜브를 써서 퓨리오사를 살리는 장면도 도구의 성격이 역전되는 순간을 지켜보는 쾌감이 있었죠. 그리고 이후로는 압제자의 강력한 힘을 상징했던 차량이 자유의 선봉이 되었고, 임모탄은 자신의 권력뿐만 아니라 시체마저 해체되었고, 모유를 생산하던 여성들은 권력의 근원이었던 물을 나눠주었고, 기계의 부품처럼 일하던 꼬마 워보이는 레버를 움직여 자의로 퓨리오사 일행을 끌어올립니다. 정말 이렇게 촘촘하게 역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는 영화도 드물어요. 


기타맨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에 음악이 지대한 공헌을 한 만큼 마음에 드는 것으로 드푸 워리어- 불꽃의 기타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씬스틸러 씬스틸러 하는데 정말 이만한 씬스틸러가 또 있을까요. 진격중이면 그야말로 전혀 쉬지 않고 불꽃을 쏘아대며 기타를 치는 모습은 정말 혼을 빼놓더군요. 게다가 매달려서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자마자 연주를 시작하는 모습, 그리고 맥스에게 빼앗긴 기타를 되찾자마자 보복도 하지 않고 기타를 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광기의 결정체였습니다. 이 영화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그가 죽을 때는 무척 안타깝더군요. 시대를 잘못 타고난 크레이지 아티스트였죠. 후속작에는 또 어떤 아티스트가 등장할지 기대됩니다.



길게 썼습니다만, 매드맥스는 생각을 하고 보든 안 하고 보든 무서울 정도로 재미있다는 점이 가장 멋지죠. ‘이야기 하지 말고 보여줘라’ 라는 격언을 잘 따른 명작입니다. 세기의 걸작으로 불려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보관 가능한 매체가 나오면 뭘로든 사놓고 두고두고 볼 작정입니다. 




*
맥스가 입마개를 떼어내려고 야스리로 긁어대는 장면에서 날아라 슈퍼보드의 손오공이 생각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날아라 슈퍼보드도 상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작품이었군요. 몬스터 트럭으로 사막을 질주하는 승려, 고문기구를 착용하고 호버보드를 타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원숭이, 바주카포를 쏘는 선글라스 돼지, 폭발 해머를 쓰고 독나방을 뿜어내는 괴물, 철을 장악한 지배자...


tag :
Viewing all 544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