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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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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보드게임 3종-캡틴리노, 버스, 모테네바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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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노 히어로 Rhino Hero


우노를 하면서 쓰는 카드를 쌓는다는 콘셉트로 만든 듯한 게임. 손에 든 카드를 다 쓴다는 승리 조건에 쌓던 카드가 무너진다는 패배 조건이 추가된 셈입니다. 카드는 지붕 카드와 벽 카드로 나뉘어있고 손에서 쓰는 카드는 모두 지붕 카드인데, 이 카드를 쓸 때마다 지붕에 그려진 모양대로 벽을 쌓은 뒤, 그 위에 지붕 카드를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우노 혹은 원카드로 익숙한 ‘리버스’, ‘점프’ 등 간단한 특수카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의 고유한 시스템을 활용한 것으로 ‘캡틴 리노’ 카드가 있는데, 이 아이콘이 그려진 카드를 쓰면 다음 플레이어는 아래쪽에 있던 캡틴 리노 마커를 가져다 아이콘 위에 올린 뒤에 벽과 지붕을 올려야 합니다. 게임에 쓰이는 벽은 모두 90도로 꺾여 있어서 제법 견고한 편이지만 이렇게 캡틴 리노를 옮기다보면 점점 건물이 위태로워지고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규칙도 간단하고 익숙하며 카드도 무척 예쁜데다 카드로 건물을 쌓는 건 그 자체만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라 가볍게 즐기기 좋은 게임입니다. 하지만 여름에 선풍기를 튼 상황이라면 상당히 어려운 게임이 되겠군요.  

-캡틴 리노는 일본 이름이고 원래 대만 게임이라 제목을 변경했습니다. 일본 게임 3종이 아니군요;

-코리아 보드게임즈에서 슈퍼 라이노로 발매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버스 Birth
주사위와 보드, 그리고 마커만으로 이루어진 3인용 추상전략 게임입니다. 같은 갯수의 주사위를 한번 굴려서 게임 내내 그 값 그대로 놓고 사용하며, 주사위를 사용하면 자신의 마커가 시계방향으로 그 값만큼 전진하는데, 이때 다른 마커가 있는 자리에 도착하면 사용한 주사위의 값만큼 추가 전진합니다. 그리고 도착한 구역에 사용한 주사위를 내려놓습니다. 
게임의 기본은 이게 전부로 모든 플레이어가 주사위를 다 사용하면 게임이 끝나고 점수를 계산하는데, 일단 구역별로 점수가 적혀있어서 자신이 내려놓은 주사위 한 개마다 그만큼의 점수를 받고, 구역별로 주사위 눈의 합이 가장 높은 플레이어는 그 합 만큼의 점수를 받습니다. 처음에 나온 주사위를 이동 포인트처럼 사용해서 점수가 높은 자리에 가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구역별 영향력 다툼도 해야 하는 셈이죠. 
이것만으로도 퍽 깔끔하고 재미있는 추상전략인 셈인데, 몇 가지 규칙이 더 있어서 게임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버스’라고 해서 도착한 곳에 주사위를 놓았을 때 눈이 같은 주사위는 모두 다시 굴려 다른 플레이어를 방해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영향력이 높아지기를 기대할 수도 있고, ‘브레이크’라고 해서 시작점에 되돌아오면 자기가 가진 주사위를 전부 다시 굴려 전략을 재정비할 수도 있습니다. 
3인이라는 인원 제약이 있긴 하지만 레오 콜로비니의 작품처럼 운이 작용하면서도 드라이한 규칙 속에서 머리를 쓰는 맛이 있는 게임입니다. 



모테네바 Moteneba

(커버 이미지 출처: 보드게임 긱)
서정적인 그림책 같은 일러스트가 무척 매력적입니다만, ‘인기를 끌어야 해’라는 제목처럼 고등학교 3년간 최대한 많은 여학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다소 퇴폐적인 목적을 가진 게임입니다. 
게임의 전반적인 진행은 카를로스 매그너스(샤를마뉴)와 제법 비슷해서, 일정 수의 여학생, 즉 공략대상을 테이블에 깔아놓고 자신의 영향력 마커를 놓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다섯가지 영향력 마커의 영향력 점수가 1부터 5까지 무작위로 정렬되어 놓입니다(색깔별로 성적, 외모, 운동 등 테마가 붙어있긴 한데 게임 상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각 라운드마다 선 플레이어가 주머니에서 무작위로 마커 여러개를 꺼냅니다. 그 뒤 선 플레이어부터 돌아가며 두 개씩을 가져갑니다. 그 뒤 다음 플레이어부터 또 마커를 꺼내 동일한 방법으로 나눠갖는 방식으로 반복하여 모두 동일한 갯수의 마커를 갖게 된 후에 라운드를 진행합니다. 
라운드가 시작되고 자신의 턴이 되면 마커 하나를 사용할 수 있는데, 카를로스 매그너스처럼 마커의 영향력 자체를 바꿀 수도 있고, 공략 대상에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영향력 순위 카드에 마커를 올리면 마커의 갯수에 따라 순위가 재정렬되는 것이죠. 그리고 플레이어가 각자의 색깔을 쓰는 게 아니라 공략대상에 마커를 놓을 때는 마커를 놓는 방향에 따라 누가 놓았는지를 구분합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마커를 모두 사용하면 라운드가 끝나고 영향력을 계산해서 각 공략대상에 대한 순위를 매기는데, 이때 공략 대상에 따라 순위별로 주는 메리트가 다릅니다. 어떤 여학생은 1등에게만 많은 점수를 주기도 하고, 어떤 여학생은 비교적 비슷하게 주기도 합니다. 특수 카드를 주는 경우도 있는데, 특수 카드에는 다른 플레이어와 마커를 바꾸거나 순위 카드에서 마커를 치우거나 자기의 마커를 새 것으로 교체하는 등 상당히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것들이 많더군요.
한 라운드가 1년이라 게임은 3 라운드 동안 진행되고 새 라운드가 시작되어도 이미 놓인 마커는 리셋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반영인데, 이에 따라 카드나 색깔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고착화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위로 나오는 마커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서 자기에게 많은 색깔의 영향력을 높이고 상대의 것은 낮추는 등 고군분투를 해야 하는데, 자기에게 많이 나온 마커의 순위를 높이자면 당연히 공략에 쓸 마커가 줄어든다는 딜레마가 있어 어느정도 다른 플레어와의 타협도 필요했습니다. 
무척 깔끔하고 테마도 재미난 게임인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 색깔의 영향력 점수가 시시각각 변하다보니 그때그때 누가 어디서 몇 등인지 간단한 계산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수에 약해서 이 점은 좀 귀찮고 피곤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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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카페 남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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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작업하고 있자니 두 남녀가 들어온다. 어림잡아 이십 대 후반, 높게 잡아도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다. 남자는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여자는 코트에 목이 넓게 파인 흰 스웨터, 그리고 치마를 입고 있다. 둘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여자가 벽 쪽, 남자가 바깥 쪽으로 자리잡는다.
곧 종업원이 메뉴를 가져온다. 두 사람은 정사각형의 메뉴판을 잠시 뒤적이고는 금방 메뉴를 정한다. 남자는 아메리카노, 여자는 녹차라떼에 브라우니를 추가한다.
딱히 안부 인사 같은 건 하지 않는 걸로 보아, 두 사람은 다른 곳에서 만나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모양이다.
주문한 것들을 기다리면서부터 시작된 얘기는 줄곧 끊기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이렇다 할 맥락이 없다.
"호호, 편하게 불러요"
"하하, 그렇다고 너라고 하기는 그렇잖아요."
"왜요, 전 오빠? 라고 부를게요."
두 사람은 쑥스럽게 웃는다. 나는 그들이 소개팅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 혹은 두 번째로 만난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남자는 호칭을 하지 않았고, 여자는 아주 가끔 오빠라고 부를 뿐, 호칭을 피했다.
“뭐하고 쉬셨어요?”
“그냥, 친구들도 보구, 영화도 보구…….”
“무슨 영화요?”
“레바논 감정이라고 있는데 모르시죠?”
“레바논 감정이요? 처음 듣는데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받았는데, 개봉을 잘 안 하더라구요. 시를 읽고 영감을 받아서? 만든 영화래요. 재밌어요.”
그녀는 쑥스러우면 말을 의문형으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아… 영화 잘 챙겨보시나 봐요?"
“네,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건 다 개봉하자마자 봐요.”
“영화 많이 좋아하시는구나……. 요즘은 어떤 영화 해요?"
두 사람은 핸드폰을 꺼내 각자 화면을 바라본다.
"노예 12년 봤어요?"
“아뇨, 보셨어요?"
"저도 안 봤어요. 오늘 아홉 시에 하는데 보실래요?”
“끝나는 시간 괜찮으세요?"
"네, 그럼 콜?"
"콜!"
그리고는 바로 예약한다. 카페에서 영화 얘기를 하다가 바로 영화를 예매하다니, 나는 그 즉흥성에 놀랐지만 어쩌면 요즘은 그런 게 보통인지도 모른다.
"운동은 혹시 좋아하세요?”
“아뇨, 호호, 테니스만 좀 했어요. 운동 좋아하시는 거 있어요?”
“축구도 좋아하고 농구도 좋아해요. 근데 전 그런 로망이 있어요.”
“어떤 로망이요?”
여자가 눈을 빛내며 묻자 남자는 약간 주저하면서 대답한다.
“그런 거 있잖아요. 여자 친구랑 같이 조깅하는 거.”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손뼉을 치며 웃는다.
“맞아요, 영화에서 그런 거 가끔 나오면 멋있는데.”
“그쵸? 같이 운동하는 거 좋잖아요. 가끔 그런 거 보면 부러워요.”
“호호, 그래도 그건 뛸 데가 없어서 좀 힘들고, 테니스는 내가 해 줄 수 있다.”
여자는 잘 웃었다. 나는 그것이 의도에 따라 조절되는 웃음인지, 소녀처럼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넌지시 호감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그 말을 건져 올릴 방법이 없었는지, 말은 그대로 흘러갔다.
“혹시 춥진 않으세요?”
“안 추운데요, 왜요?”
“여기가 추워 보여서요.”
남자는 자기의 목과 쇄골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어머, 계속 여기만 보고 있었던 거예요?”
여자는 짐짓 놀란 듯이 손을 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눈을 어디 둬야 할 지 모르겠어서요.”
“어떡해, 호호호, 그럼 제 눈을 보면 되죠."
대화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고들 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는 무르익는다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다만 하나의 주제로 얘기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여자는 첼로가 취미인 학생이었고, 남자는 취미는 알 수 없는 IT 회사 직원이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가까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하루키의 수필이라면 남자가 스파게티를 시켜서 아주 큰 소리를 내며 빨아먹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어디에 가자며 카페를 나섰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듣지 못했다.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긴 해도 남의 얘기를 엿듣고 그대로 적을 수는 없는 일이라 대부분 각색해서 적었지만, 얘기의 흐름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평범한 요즘 젊은이들이 서로의 감정을 어떻게 탐색하고 연애를 시작하는가 아무런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퍽 신선한 경험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서로 호감이 있었으니까 첫 만남 이후로 다시 만났을 거고 그 호감이 적어 보이진 않았으니, 누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관계는 지속되었으리라. 일이 잘되었다면 지금쯤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연애를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소개팅 등에서 남녀가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연애를 시작하는 과정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나는 두 사람이 대화할 동안, 정확히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 했던 과제에 대해 생각했다. 장난기가 있는 교수님이 즉석에서 남녀를 짝지어 서로를 인터뷰하고 그 이미지를 영상으로 만들어오라는 과제였다. 나는 나보다 몇 학번 어린 여학생과 한 조가 되어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 카페에서 만나 서로를 인터뷰했다. 앞에 노트북이 있었을 뿐 서로 나눈 대화는 그 남녀가 나눈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꿈, 목표, 취미, 좋아하는 운동, 재미있게 본 영화, 즐겨 먹는 음식 등등 시시콜콜한 것을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기록했다. 사무적인 분위기를 배제하고 옷차림 같은 걸 칭찬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면 꽤 그럴듯한 연애의 시작처럼 보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뭐든 그렇지만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행위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걸 몇 년에 걸쳐 실감했다. 만약 서로를 인터뷰한 우리든 서로를 탐색한 그들이든 어느 한쪽은 사무적인 목적을 갖고 다른 한 쪽은 호감을 발전시켜도 되는 것인지 판단할 근거를 마련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비극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겠지. 그런 점에서 과제처럼 목적을 상정해놓고 만나는 남녀의 만남이란 인공적이지만 분명 그 기능성에 있어서는 호감이 간다. 사람들끼리 만나는 건데 인공적이면 뭐 어떤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연애가 시스템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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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의 불편함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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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액션 롤플레잉 게임인 《디아블로》에는 ‘타운 포탈 스크롤’이라는 게 있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일회용 마법 아이템으로, 사용하면 바로 옆에 마을로 통하는 차원문이 열리는 것이다. 일회용이라 한 번 마을로 갔다가 돌아오면 닫히긴 하지만, 이것만 해도 퍽 감지덕지한 기능이다. 현실에 있으면 세계를 뒤바꿀 게 틀림없다. 전쟁의 양상이 뒤바뀌고 대기업에서는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포탈비를 지급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한 장에 30만 원 쯤 하면 어떨까? 일반적으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 동안 그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사람밖에 쓸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보급형이 나올지도 모른다. 훨씬 싸고 이동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식이다. 돈은 2만 원에서 4만 원쯤 들고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쯤 걸린다고 치자. 거기에 거리에 따른 비용, 시간에 따른 비용, 야간 할증까지 붙여보면 슬슬 메리트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동수단을 알고 있다. 바로 택시다. 

택시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을 거고 택시 이외에는 불편해서 타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택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택시를 비상시에 쓰는 타운 포탈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 되었든 비상수단을 쓴다면 그 계획은 실패한 셈이다. 

요즘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한창 술을 마셔대던 시기에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제때 내리지 못해 종점까지 가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애초에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 괜찮은데 곤드레만드레 취한 채로 세상의 끝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까지 찾아가는 게 문제였다. 앉기만 하면 곯아떨어져 공항이나 차고지에 도착해 버리는데, 당연히 그때쯤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택시 말고는 남은 교통수단이 없다. 한 번은 불굴의 의지로 종점까지 가기 전에 내려서 반대편 열차를 잡아탔는데, 또 잠들어버려 반대편으로 한참 지나친 뒤에 깨어난 적도 있다. 이쯤 되면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택시는 비싸다. 미터기의 요금이 착착 올라가는 것을 보자면 생명이 빠져나가는 기분마저 들곤 한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 요금이 껑충 뛰는데, 그럴 때면 말없이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피곤한 것은 택시 기사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말없고 솜씨 좋은 미용사를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말 없고 운전 잘 하는 택시 기사를 만나기란 어려운 법이다. 하기야 미용사와 달리 쉴 때 TV나 신문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동료와 잡담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사람을 만나면 한 두 마디 하고 싶어지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어쩌면 미용사들이 그러듯이 손님이 심심할까 봐 그러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꺼내는 말들은 대체로 맞장구 치기 어렵거나 영 듣기 싫은 말들 뿐이다. 예를 들면
“저런~ 개새끼.”
“부모님 돈으로 놀러 다니고 대학생처럼 편한 게 어딨겠어요?”
“거기는 가면 나올 때 사람이 없는데…….”
이런 것들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적당히 지나가는 투로 하는 얘기들은 잠자코 있거나 ‘아, 네, 그렇죠’하고 받아넘기면 되는데, 아예 직설적으로 어딜 뭐하러 가느냐, 학생이냐,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해오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말하는 게 듣기 싫다고 내리기에는 너무 바쁜 상황이고, 조용히 좀 가자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소심하다. 영화관이라면 관객에게 조용히 영화를 볼 권리가 있으니 옆에서 떠드는 사람에게 떳떳하게 닥치라고 할 수 있지만, 택시의 승객이 방해받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명백한 권리가 맞는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게 권리가 맞다 해도 기사는 입 다물고 라디오나 듣고 운전이나 하라는 것도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효율적으로 정해진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로봇이 아니니까 심심해서 한 두 마디 말을 꺼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가 하면서도 막말을 듣거나 성희롱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자면 분통이 터진다. 인간이란 남보다 우위에 서면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차량은 쉽게 빠져나갈 수도 없고 운전대를 쥔 사람이 지배하는 공간이라 1대1상황에서 운전자가 기묘한 우위에 서게 된다(그렇게 착각한다). 게다가 상대가 자기보다 약자인 여성이고(역시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가 되면 자기가 절대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택시 기사가 그런 사람들인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택시 기사가 되었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택시라는 조건이 그런 특성을 강화하긴 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택시에서 내린다고 갑자기 친절한 신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예전에 파리에서는 주말에 택시 기사가 조수석에 승객이 아닌 사람을 태울 수 있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아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젊은 남자 택시 기사는 여자친구를 태운 채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단다. 요즘도 그런 제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택시를 타면 꽤 안심이 될 것 같다. 물론 쉴 틈 없이 밀어를 속삭이거나 드라마처럼 차를 세우라고 소리치며 싸워대면 곤란하겠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승객에게 괜한 말을 걸거나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 어쩌면 정반대로 그런 사람 둘이 나란히 타서 몇 배는 끔찍한 상황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결국, 약자를 막 대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사라지거나 그걸 막아줄 수 있는 시스템이 등장해야 택시도 마음편히 이용할수 있는 이동수단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이루어질까? 내 생각에는 어느쪽도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아마 구글이 개발한 무인 자동차가 상용화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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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겨울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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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겨울왕국》은 플롯이 좀 아쉽기도 했고 이게 대체 왜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지만, 나는 재미있어서 원어판과 더빙판으로 두 번을 봤다. 결론적으로는 성공적인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할로윈을 맞이하여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엘사 드레스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엘사는 확실히 멋진 캐릭터다. 제어할 수 없는 마법이라는 비운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운명을 거부하고 ‘나는 나대로 살 거야!’ 하고 궁전을 뛰쳐나가는 것도 멋지고, 기막힌 노래를 부르면서 얼음성을 만들고 하늘하늘한 드레스로 갈아입으며(얼음일까?) 머리를 풀어버리는 장면은 최고였다. 나라도 열 살 남짓한 여자애였다면 그녀를 롤모델로 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안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엘사에 열광하며 코스프레를 하고 그림을 그려 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엘사에 비해 안나의 인기는 너무나 낮다. 간혹 올라프만도 못하지 않나 싶을 때도 있다. 이럴 수가 있나. 주인공인데다, 언니를 찾아 설산을 헤매고, 늑대에 쫓기고, 언니의 마법을 두 번이나 맞고,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며, 생전 처음 사랑에 빠졌다가 뒤통수를 맞고, 언니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사실상 죽음마저 겪었는데 어째서 그녀를 좋아하는 이는 이토록 적단 말인가? 그 고생을 했는데도 사람들이 언니를 훨씬 좋아하니 안나로서는 적잖이 억울할 것 같다. 착하니까 내색은 못 하고 속으로만 앓으며 혼자 정원 같은 데서 ‘나도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 좋겠어, 올라프만큼이라도, 어쩌면 좋을까, 멋진 드레스를 입어볼까, 마법을 배워볼까~’ 같은 노래를 부를 게 틀림없다. 가엽게도. 

(엘사의 변신에 열광하는 미군들)

물론 엘사라고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안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제어할 수 없는 마법 때문에 몇 년이나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고 방에서 혼자 지냈으며, 부모님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고, 동생의 실수 때문에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대관식 날 마법을 써버려 가출하고 말았고,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얼음성을 혼자 짓고, 거기서 한동안 불도 쓰지 못하고 차갑고 딱딱한 아이스크림 따위나 먹고 있었으리라. 게다가 동생을 또다시 내쳐야 했고, 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했으며, 정권을 찬탈당할 위기와, 동생이 눈앞에서 죽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안나는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나름대로 사랑을 찾았지만 그녀는 늘 사회적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상태였으므로 그런 청춘을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 스펙타클하지 않아서 그렇지 기간으로 보나 정도로 보나 그녀가 겪은 고통은 안나 이상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엘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예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런 이유로 좋아할 수도 없는 게, 엘사는 역경을 극복했다고 보기에는 뭐한 플롯 위에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 말을 듣고 마법이 제어되길 기다리며 방안에서 몇 년을 보냈고, 그러다 대관식 날 일이 터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나는 나대로 살겠다고 노래하며 변신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자기만의 성을 짓고 사는 게 장기적으로 볼 때 전에 비해 특별히 나은 삶 같지는 않았다. 그 뒤로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마법을 제어할 수 있게 되어 여왕으로 복귀하긴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쟁취하여 깨달은 답이라기보다는 안나가 준 것에 가까웠다. 고생한 것에 비해 야박한 평가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에 비해서 안나는 말 그대로 죽도록 노력했다. 언니가 집을 나가자마자 당장 찾아 나섰고, 자기 혼자만으로는 어려울 거라고 판단되자 새 장비를 구입하고 전문가를 고용했다. 언니를 만났을 때는 먼저 멋져보인다고 칭찬을 하며 언니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대책은 없지만 끈기있게 설득했다. 그 뒤로 심장에 치명적인 마법을 맞고도 언니를 원망하지 않고 전문가의 진단에 따랐으며, 마지막에는 언니를 위해 목숨을 거리낌 없이 내던졌다. 사랑과 희생이야말로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는 마법이라는 답은 안나의 그런 역경을 거쳐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나에 더 정이 가는 편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사랑에 홀딱 빠져 실컷 노래하고 당장 결혼을 하겠다고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가 끔찍하게 배신당하기도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가 더 현실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나가 처음부터 야무지게 ‘결혼? 어떡하지? 멋진 그를 나도 사랑해, 하지만 결혼은 달라, 함께 인생을 꾸려갈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없어. 생각할 시간을 줘요~’ 같은 노래를 부르며 신중하게 고민했다면 독립해서 자기의 일은 모두 자기가 스스로 하게 된 딸을 보는 아버지처럼 씁쓸한 기분이었으리라.

아무튼 언니만큼 예쁘지는 않지만,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법을 푸는 해답도 찾고 자신을 정말 아끼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천천히 다가가는 방법도 배우는 안나는 참으로 멋지다. 사실 주근깨가 좀 있지만 언니에 비해 그렇게 못난 것도 아니고 옷도 예쁘게 잘 차려입는다. 나는 그런 고전적인 복장을 퍽 좋아하는 편이다. 성격도 작품에서 나왔듯이 같이 있을 때 지루하지 않고 투닥거리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엘사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역시 파괴적으로 예쁘게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안나의 매력이 기관총 소사 정도라면 엘사의 매력은 플라스틱 폭탄을 터뜨리는 수준이었다. 엘사의 변신은 그런 블록버스터스러운 장면이었다. 디즈니에서 혼자 마법소녀물을 찍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반칙스러운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규정된 틀을 넘어서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을 그렇게 멋지게 보여주니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주인공이 멋진 남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는 기존의 공식을 뒤집어 엎은 플롯이 기념비적인 겨울왕국에서, 멋지게 변신해서 빙계 마법을 다루는 '마법 여왕’이 압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약간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예쁜 여자가 한 순간에 훨씬 더 예쁜 여자가 된다'는 공식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엘사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안나도 기막힌 변신을 했어야 균형이 맞았을 거라는 생각을 혼자서 한다. 그녀도 배반당한 순간에 ‘더 이상 사랑 따윈 필요 없어, 혼자도 괜찮잖아, 분노는 나의 힘~’ 같은 노래를 하며 모닥불의 힘을 빨아들이고, 올라프는 ‘그래, 네 이름을 말해 봐!’ 같은 질문을 해서 ‘나는, 나는 분노와 불꽃의 왕녀 안나!’라는 대답과 함께 얼어붙은 도시를 녹여버릴 정도의 강력한 변신과 각성을 끌어냈어야 했다. 그러면 올라프는 ‘그래, 마음의 불꽃이야말로 세상을 녹이는 힘. 그 깨달음, 잊지 말거라…’하고 녹아 없어지고, 안나는 언니를 만나서 ‘안나 너의 그 힘, 확실히 보았다.’ ‘우리 자매가 힘을 합치면 천하 통일도 문제없지.’ 라며 껄껄 웃고 얼음과 불의 노래를 불렀으리라……. 아니, 이건 장르가 아예 바뀌는 얘기가 되어 버렸군. 하지만 안나가 더 예쁘게 나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것은 사실이다. 여러분, 부디 안나도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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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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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목욕을 싫어했다. 어린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나도 숙성될 때까지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시간을 죽이는 게 지겹고 고역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라면 물 속에서 가지고 놀 장난감도 있었고 장난도 얼마든지 칠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나았던 것 같은데, 그보다 조금 자란 뒤로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도, 장난을 칠 수도 없게 되어 전보다 더 지루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목욕을 하고 나면 종일 정신이 몽롱해서 긴 목욕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목욕이 좋다. 어릴 때는 인내의 어트랙션에 불과했던 사우나는 더 좋아한다. 그걸 결정적으로 깨달은 곳은 엉뚱하게도 헬스클럽이었는데, 당시 입대를 앞두고 운동이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다니던 헬스클럽에는 사우나가 딸려있었던 것이다. 있으니까 한번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어 들어가 보았는데, 이게 웬걸, 운동으로 노곤해진 상태에서 들어간 사우나는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잘 반죽 된 뒤에 오븐에서 익어가는 빵처럼 멋진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운동을 하는 시간보다 사우나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 지경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우나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아줌마들이 나타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목욕이 좋다는 걸 실감한 것은 또다시 엉뚱하게도 ‘캐리비안 베이’였다.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알다시피 캐리비안 베이는 퍽 즐겁지만 입장하는 것까지가 몹시 고역스럽다. 머나먼 길을 거쳐 그곳까지 간 다음, 신기루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뙤약볕 아래 서서 의욕을 잃은 좀비 떼처럼 끝없는 줄에 끼어 느릿느릿 전진해서 표를 사고, 입장 시간까지 에버랜드에서 시간을 죽이고 오면 물놀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싶은 상태가 된다. 물론 물에 들어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이 나지만,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해가 질 때쯤이 되면 녹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쯤 되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물을 찾아 몸을 담그게 되었다. 다행히도 스파 같은 시설이 있어서 몸을 담근 채 공기 마사지를 받자니 영영 이것만 하고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당연히 그러진 못하고 끔찍스러운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돌아온 뒤,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쉬지 않았으면 자전거를 타고 또 몇 킬로를 달릴 생각은 절대 못 했을 것이다.

아무튼 죽도록 피곤할 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그나마 정신이 든다. 반대로 몸이 노곤해져서 졸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샤워나 목욕을 하고 나면 두어 시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체력과 정신력이 회복된다. 그래서 여행할 때도 숙소에 돌아오면 뜨거운 물에 오래도록 몸을 담근 뒤,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 욕조가 없는 숙소는 가지 못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몸을 담근 채 시간 죽이기가 꽤 수월해졌다. 스마트폰과 팟캐스트라는 문명의 이기가 생긴 덕에 좋아하는 방송을 들으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예전에도 라디오가 있긴 했지만 라디오는 원할 때 원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수시로 채널을 바꿔줘야 하니까 쓸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라디오를 듣지 않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방송은 음악을 별로 틀지 않고 진행자가 사연을 읽거나 게스트를 초빙해서 영화, 여행 얘기를 나누는 것들인데, 그런 방송을 듣고 있자면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시간은 퍽 귀중한 시간이다. 다음날까지 그렇게 잠들고 싶기도 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렇게 잘 수 있는 침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근 채 자면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온몸의 피로도 사라지고 매일 아침 다시 태어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드래곤 볼》을 보면 손오공이 그런 회복시설 안에서 산소호흡기를 단 채 ‘크리링의 기가 사라졌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볼 때마다 부럽다. 나라면 누구의 기가 없어져도 느끼지 못한 채 쿨쿨 잠들어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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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에티켓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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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영화관 관객들의 에티켓이 엉망일 확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다. 영화를 자주 보진 못하지만 만족스럽게 조용히 영화를 보고 나오는 경우가 정말 드물다. 가장 최근에 정말 조용히 만족스럽게 보고 나온 영화가 독립영화관에서 봤던 “레바논 감정”이었다. 독립영화는 그런 점이 멋지다. 관객 모두가 상영관을 악착같이 찾아서 온 것이라 한마음이 되어 조용히 놀라운 집중력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다른 영화는 별로 집중하지 않고 보는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파괴적인 관람 에티켓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단연코 핸드폰에 관한 것들이다. 상영 중인데도 핸드폰을 꺼내 보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쯤은 있다. 한때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처럼 통화를 한 것도 아니고 메신저 좀 쓰는 게 뭐가 그리 잘못이냐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만, 사실 영화를 집중해서 보려는 사람에게 스크린 이외의 광원이란 꽤나 성가시다. 나는 계단에 켜진 비상등도 신경 쓰여서 손이나 발로 빛을 가리고 볼 정도라, 바로 옆이나 앞에서 반딧불이처럼 불을 밝히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멀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가깝든 멀든 어디선가 보이지 않던 뭔가가 나타나면 시선이 자동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경을 끄면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집중해서 작업 중인데 모니터 구석에서 팝업이 계속 뜨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불빛보다 심각한 문제는 역시 벨소리다. 상영 중에 벨소리가 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로 나이가 많은 분들이 이런 실수(본인이 실수라고 인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를 저지르곤 하는데, 이런 분들 중에는 벨소리를 진동으로 전환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뒷자리에서 벨소리가 한 번 울리는가 싶더니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울려서 결국 관객들이 호통을 칠 지경에 이르렀다. 영화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이런 노이즈가 끼면 아무래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관객들의 대화도 상당히 문제다. 같이 온 사람과 재미있는 장면에서 한두 마디 하는 게 퍽 재미있다는 건 나도 알지만, 이걸 귓속말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다 들리게 얘기하고 있으면 당연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외국 영화는 청해가 잘 되지 않다 보니 주인공이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옆에서 들리는 모국어가 더 귀에 잘 들어오고 마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무서운 장면도 없고 무섭지도 않은 공포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퍽 조용한 편이라 복도 건너에 앉은 커플이 하는 얘기,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이 하는 얘기가 다 들렸다. 여학생들이 하는 얘기는 "엄마야, 완전 깜짝 놀랐어!" 정도라 그럭저럭 시트콤에 배경으로 깔리는 웃음소리처럼 들을 수 있었지만, 커플의 대화는 도무지 끝나질 않아서 결국은 “조용히 좀 봅시다.” 하고 말해야 했다. 다행히 그 뒤로는 조용해졌지만 나처럼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상한다. 덕분에 내내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심지어 영화도 재미없었다. 그런 영화를 보느니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떼는 게 더 스릴있고 재미있다. 

애니메이션을 보면 꼭 애들이 시끄러울 거라고 걱정을 하게 되는데, 경험에 따르면 애들이 신경 쓰일 정도로 시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감탄사나 한 두 마디 질문이 전부다. 오히려 시끄러운 것은 에티켓에 대해 충분히 학습했을 성인들이다. 예전에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봤을 때는 뒤에서 “존 스미스, 존 스미스” 하고 주인공이 대사를 먼저 말하며 낄낄거려서 몹시 고역스러웠다. “겨울왕국”을 봤을 때는 옆에서 “어머, 너무 예쁘다,얘.” 하고 딸에게 감상을 일일이 말하는 어머님 때문에 피곤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쩌면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상영관은 불이 꺼지고 나면 우주처럼 어둡고 고요해져 옆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영화라는 단 한 가지의 세계만이 펼쳐지는데, 이 사람들은 현실을 떠나서 혼자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 현실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끊임없는 소통의 욕구는 항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보다 간편하게 해소할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요즘 들어 유독 주변을 괴롭게 하는 관객이 많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화가 나기보다는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말인데, 소통이 자유로운 상영관을 따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어떨까? 영화와 함께 노래하는 ‘싱얼롱’ 상영이 따로 있는 것처럼, 핸드폰을 쓰든 노트북을 켜든 옆 사람과 떠들든 아무 상관 없는 ‘프리 토킹’ 상영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친구와 실컷 떠들면서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면서 중요 포인트를 메모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환영받는 상영관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전에 일반 상영관의 노매너 관객을 몰아내는 강력한 규정이 만들어져야겠지만. 아니면 완벽한 관람 환경을 보장받는(이를테면 통신 방해 시설 등으로) “파워 에티켓 존” 같은 프리미엄 상영관이 만들어져도 좋겠다. 환경만 확실하다면 돈을 더 내고라도 갈 용의가 있다. 


아무튼 좋은 영화를 고르는 것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영화를 좋은 상황에서 본다는 건 꽤나 운이 필요한 일이다. 이 추세라면 좋은 영화를 좋은 상황에서 본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헤드 업 디스플레이로 시야에 꽉 차는 화면을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날이 오면 영화관 따위 가지 말아야지. 

아니, 그래도 가겠지만.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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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취향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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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제작 “인터스텔라”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초반에는 좀 지지부진하고 지루한 감이 있긴 하지만 중반부터 그야말로 쉴 틈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서 대미를 장식하고, 그러고도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결말까지 치달아 영화가 끝났을 때는 “끝이야? 벌써 세 시간 끝?”이라고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래픽은 물론이고 스토리도 훌륭해서, 중반까지는 “크리스토퍼 놀란도 결국은 ‘유년기의 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군.” 싶다가 결국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큰 뜻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그래서 나처럼 우주와 SF를 좋아하는 사람, ‘웜홀’, ‘블랙홀’ 따위 단어에 가슴이 뛰는 사람은 물론이고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이 영화에는 열광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재미없었다는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전개는 지루하고, 과학적 고증은 엉망이며, 휴머니즘은 싸구려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긴 했다. 분명 기똥찬 액션이나 서스펜스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 행성 저 행성을 돌아다니는 한편으로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도 보여주는 전개는 보기에 따라서는 맥이 끊기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엄밀히 생각해보면 과학적으로 그럴 리가 있나 싶은 부분도 있었다. 늙어가는 속도가 서로 달라져 슬퍼하는 모습도 꽤 지겹도록 보아온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늙었는데 자기만 젊은 상태 그대로라는 얘기는 용궁 얘기 때부터 이어진 셈이니까. 그러고 보면 식상한 휴머니즘에는 짠 점수를 주는 나도 이게 SF가 되고 보면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자식이 조로증으로 부모보다 먼저 늙어가는 가운데 펼쳐지는…’ 어쩌고 하는 영화라면 절대 보지 않겠지만, 같은 소재라도 ‘상대성 이론에 의해 시간의 속도가 영향을 받아…’ 라면 ‘이야, 이것 참 좋은 이야기구나’ 하며 눈물을 훔치는 것이다. 요컨대 뭐든 취향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영화가 취향에 따라 평이 갈리기 마련이지만 인터스텔라 같은 SF, 또는 공포물 같은 ‘장르’ 영화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에 보이는 건 다 때려 부수고 정의 사도가 악당을 두드려 잡는 액션 블록버스터라면 다들 별생각 없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따라가게 되는 데 비해, 이런 장르물은 각자의 주관이 뚜렷하게 잡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드래그 미 투 헬”이 그랬다. 모 영화 평론가가 보기 드물게 멋진 공포 영화라고 썼기에 믿고 봤더니, 이건 공포 영화의 탈을 쓴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싹한 기분을 느낄만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만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어이쿠, 하고 넘어져서 여주인공의 가슴을 만지는 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시체와 엉겨서 썩은 물이 입에 들어가고 비명을 지르는 영화를 공포라고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볼 때처럼 처음부터 이건 여차하면 웃으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면 재미있을 영화였다. 그런데 나는 정반대로 무서워할 준비를 하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공포영화인데 어째서 좀 웃기지? 참아야 하나?’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 대부분이 그런 애매한 분위기로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그 평론가의 영화 평은 전혀 믿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유 아 넥스트”라는 공포 영화를 봤다. 가족 모임이 한창인 와중에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들고 괴한들이 습격하는 가운데 여주인공이 전사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내용이라 처음부터 이건 괴작이겠거니 하고 봤는데, 아니나다를까 요상한 작품이었다. 주성치의 킬빌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주성치가 만들었다면 훨씬 직설적으로 웃겼겠지만. 어쨌든 특수효과와 액션은 괜찮았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을 애매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근에 모 유명 트위터리안이 “유 아 넥스트”가 참 재미있으니 한 번 보라고 트윗한 걸 봤다. 처음에는 나만 당할 순 없지, 싶은 생각으로 하는 낚시인 줄 알았는데, 문맥을 보니 진지하게 추천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취향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 써놓은 감상도 내 취향을 거친 것들이라 전혀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영화를 고를 때는, 특히 공포 영화를 고를 때는 평론가의 말보다는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게 나은 것 같다. 추천을 해줄 때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재미있게 봤다면 ‘인터스텔라’도 재미있을 거야.”처럼 필터를 하나 거치는 게 좋다(사실 예는 너무 당연한 소리다). 자신의 평점을 기반으로 새 영화를 추천해주는 서비스인 “왓챠”도 이와 비슷한 방식이라 그럭저럭 믿을만하다. 적어도 왓챠에서 끔찍하게 재미없을 거라고 경고하는 영화는 확실히 재미가 없다.  “애나벨”이 개봉했을 때 재미없을 거라는 경고를 받고도 봤는데,  정말이지 재미없다는 점이 재미있을 지경인 영화였다. 그 뒤로 왓챠에 대한 신뢰도가 좀 더 높아졌다. 

다시 얘기를 돌려서, 이것저것 만들면서도 이런 취향들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뭔가를 만들어도 세상 누군가는 이따위 것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개탄하겠구나 싶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네모를 좋아하는 사람과 세모를 좋아하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네모난 세모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은 내 취향대로 만들고 내 취향대로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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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는 말을 하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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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이능배틀은 일상계 속에서”에서 퍽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다. 이 작품은 평범한 학생들이 우연히 초능력을 얻었지만 그걸로 지구를 정복하거나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대신 적당히 일상을 보내면서 겪는 소소한 사건들을 다룬 것인데, 주인공 쥬고는 소위 말하는 ‘중2병’을 겪고 있어 독특한 설정에 집착하고 있다. 이 ‘중2병’이라는 것도 설명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냥 사춘기 남자애가 멋있다고 생각할만한 것들, 가령 ‘선홍색 율법의 구현자’처럼 멋들어진 별명이나 ‘피보다 더 붉은 자여…’처럼 복잡무쌍한 주문, 혹은 ‘자신은 천상계의 왕자였으나 금기를 어겨 능력과 기억을 봉인당하고 인간계에 환생하게 된 것’처럼 신비로운 서브컬처적 설정에 집착하는 정도로 그려지고 있다. 아무튼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흔히 그렇듯이 그에게는 마음씨 착한 소꿉친구, 하토코가 있는데, 주인공이 다른 여자애와 그쪽 이야기로 시시덕거리고 ‘넌 어차피 들어도 모를걸’이라며 그녀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자 결국 하토코도 대폭발하고 만다. 

몰라, 그래 몰라! 쥬 군이 하는 말은 하나도 모르겠어. 쥬 군이 좋다는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몰라, 나는 몰라! (중략) 어둠은 또 뭐야? 어두우면 돼? 정의와 악 중에 왜 악이 좋아? 왜 나쁜 게 좋아? 나쁘니까 악이잖아. 오른팔이 꿈틀대면 뭐가 멋있어?  평소에는 힘을 숨기는 게 뭐가 대단해? 그냥 회피하는 거잖아! 숨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멋있어! 왜 별명이니 이명이니 자꾸 붙여? 이름이 많으면 헷갈리기만 하잖아. 뭐든지 외래어로 쓰지 마. 못 외워! (중략) 그리스 신화, 성서, 북유럽 신화, 일본 신화, 좀 찾아본 정도로 그런 얘기 하지 마! 내용도 알려줘야 뭔지 알지. 알려주려면 제대로 알려줘! 신화에 나오는 무기를 설명해도 재미없어. (중략) 뭐가 멋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원죄니 십계니 창세기니 묵시록이니 아마게돈이니 이름이 멋있다니 대체 뭐가? 분위기로 이해하라 해도 무리야! 상대성 이론이니 슈뢰딩거의 고양이니 만유인력이니, 인터넷으로 좀 찾아보고 아는척 하지 마. 어정쩡한 설명으론 하나도 이해 못 해! 니체나 괴테의 말을 인용하지 마.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을 써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몰라! 네가 쓰는 말로 말해. 부탁이니까 내가 아는 걸 말해줘. (중략) 모르겠어. 모르겠어. 쥬 군이 하는 말은 옛날부터 하나도, 손톱만큼도 모르겠어!
(이능배틀은 일상계 속에서 7화 애니플러스 방영분 중 인용) 

장대한 대사를 실감 나는 연기로 리테이크 없이 끝낸 걸로 유명해진 이 장면의 대사를 간단히 요약하면 ‘네가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을 할 거면 제발 나도 알아듣게 말해달라’는 것인데,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찔리는 부분도 있어서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굳이 중2병이나 서브컬처-흔히 말하는 ‘덕’ 얘기가 아니더라도 도통 이해할 수 없거나 아무 관심도 없는 얘기를 줄창 들어야 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가령 나의 경우는 연예계에도 스포츠에도 관심이 없으니 누가 이에 대한 얘기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통 공감할 수가 없다. 누가 누구랑 사귀든 판을 냈든 사이클링 히트를 했든 해트트릭을 했든 완벽히 나와 무관한 얘기다. 하지만 상대가 얘기를 하면 들어주는 게 예의이기도 하고, 새로운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을 받아들이면 상대를 이해하고 더 나은 관계를 쌓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참고 듣는 것이다. 실제로 서로 다른 사람이 친해지는 것이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나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가 얘기하는 분야가 쉽게 발을 들이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지식을 요구하거나, 상대가 듣는 이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얘기한다면 조금이나마 있던 관심마저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제 에센 신작 파티를 했는데 굉장하더라고. 슈테판 펠트의 신작 메카닉이 너무 마음에 들더라. 근데 요즘 픽업 앤 딜리버 류는 약세를 보이는 것 같아. 풀 빌딩 류도 위즈키즈 사 신작 말고는 시들한 감이 있고. 드래프트도 지겨워. 슬슬 혁신적인 메카닉이 또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어지간히 보드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따라잡을 길이 없는 얘기다. 이 정도로 깊이 들어간 얘기를 아무에게나 하는 인간은 거의 없겠지만, 문제는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상대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종종 이렇게 상대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는 정보를 쏟아내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그걸 좋아하긴커녕 싫어하게 된다. 이것도 ‘빠가 까를 만드는’ 과정의 하나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좋아할 수 없는 걸 나 빼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면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관심을 갖지 않을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면 만사 해결이 아닌가 싶지만, 늘 그렇게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관계가 깊을수록 그런 얘기를 안 할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된다. “이능배틀은 일상계 속에서”에 나온 것처럼 말해봐야 넌 모른다는 식으로 선을 그어버리면 듣는 쪽에서 섭섭하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나 애인이 수석 수집계에서 알아주는 대가인데 "네가 돌을 알겠어?"하고 그에 대해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으리라. 자신이 정말 좋아해서 일상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뭔가가 있다면 어느 정도는 얘기해 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결국 얘기를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인 셈이니,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공감하고 따라올 수 있게 얘기하되, 상대가 그렇게까지 재미있어하지 않는다 싶으면 적당히 그만두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말이 쉽지 실제로 감을 잡기는 어려워서, 여차하면 자기를 빼놔서 화를 내는 하토코, 자기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경청하는 데 지친 하토코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모범 답안이 저것뿐이라면 어려워도 노력해서 따라보는 수밖에 없다. 글, 만화, 소설, 영화, 음악 같은 예술 작품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지라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여러 번 고민했다. 실컷 떠들고 있으면서도 결국 나도 극소수만 알아볼 수 있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지 않나 싶어서 ‘연쇄 살인마 연쇄 살인’, ‘정의의 도둑’ 같은 예시는 삭제해버렸다. 다른 글을 쓸 때도 취향이 비슷한 몇몇 사람만 알아볼 비유나 패러디를 넣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결국은 여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예’로 넣고 말았으니… 남이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사람의 본성인 모양인데, 그런 특별함이 상대를 괴롭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쓸쓸하게 만들지도 않는 거리를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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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캡을 대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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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캡이라고 ‘숙면을 위해 자기 전에 마시는 술’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나도 그 비슷하게 술을 마시곤 한다. 뭐,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심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누웠다 하면 금방 잠드는 인간이라 나이트캡을 빙자한 단순 음주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하루 일과를 만족스럽게 마쳤거나 불만족스럽게 마친 날에는 종종 하루를 마무리하는 종교적, 혹은 보상적 의미에서 술을 한 잔 정도 마시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마시는 술은 집에서 담근 술일 때도 있고, 양주일 때도 있고, 와인일 때도 있고, 스크류 드라이버처럼 간단한 칵테일일 때도 있고, 캡틴큐처럼 저렴한 술일 때도 있다. 요는 기분따라, 상황따라 다른 셈인데, 그렇게 조금씩 마시는 술도 쌓이다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어느날 보면 술 한 병이 작살나 있다. 이게 민망하기도 하고 재정적으로 부담되기도 해서 얼마 전부터 술 대신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의 좋은 점은 일단 아무리 많이 마셔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몸에 좋다고도 하는데, 정말 좋은지는 체감하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다만 최소한 정신이 혼미해지지는 않으니까 술보다야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리고 찻잎을 넣고 수돗물로 끓여내는 것이니까 술에 비해 압도적으로 싸다. 잭 다니엘 같은 것과 비교하면 공짜나 다름없으니, 일 파인트씩 마셔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과연 술 대신 차를 마시는 게 나이트캡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있다. 하기야 깊이 자려고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에 알코올이 들어있어 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카페인이 들어있는 녹차 따위로 바꾼다는 건 잘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나이트캡을 창안한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술병으로 때릴법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야 원래 잠드는 데 술기운이 필요없는 사람이라 순전히 정신적인 이유로 나이트캡을 즐기고 있으니 애초에 뭐든 별로 상관없었던 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에 쭉 들이켤 수 없는 액체'면 나이트캡 해결이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밤에 차를 마시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차가 좋긴 하지만 방에서 나가서 소리를 내며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것도 귀찮고, 무슨 차를 마실까 고민하는 것도 영 번거로운 참에 뭐든 별로 상관없다는 걸 깨달으니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찾아낸 것이 마시는 식초다. 흔히 ‘감식초’로 대표되는 과일 식초들인데, 나는 그중에서 ‘석류초’를 골랐다. 다른 것보다 특별히 좋아해서는 아니고 단순히 값이 쌌기 때문인데, 사서 마셔보니 썩 마음에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식초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신 탓에 그대로 마시기 힘들기로는 도수 높은 술 못지 않다. ‘한 번에 쭉 들이켤 수 없는 액체’라는 단 하나뿐인 조건에서는 만점인 셈이다. 게다가 신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맛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마시기 힘들기도 하고 그대로 마셔대면 차에 비해 비용이 높아진다는 게 문제였는데, 물에 타서 먹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애초에 병에 물에 타서 먹으라고 적혀있기도 했고. 

아무튼 이제 술 대신 식초를 마시는 생활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이게 마음에 들기도 했다. 술처럼 장에서 꺼내는 것부터 어딘지 흡족한 구석이 있고, 찬물에 붉은 식초가 퍼져가는 걸 보는 것도 마음에 든다. 신기하게도 아래쪽으로 갈수록 농도가 진해지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같은 한 잔이지만 그날그날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종일 놀아 재꼈으니 조금만 타 주지.” “아앗, 제발, 조금만 더 줘요!” “크큭, 정말 욕심쟁이로군. 어쩔 수 없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농도를 조절하고 있노라면 세상의 욕망이 이 한 잔에도 있구나 하고 깨닫는 바도 있다. 

부처가 아기를 잡아먹는 귀신이던 귀자모신에게 아기를 먹고 싶을 땐 이걸 대신 먹으렴, 하고 석류를 줬다는 얘기도 있는데, 귀자모신이 그 뒤로 석류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는 얘기는 보이지 않으니 나는 신이 되지는 못했지만 한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성공한 셈이다. 그나저나 석류초를 마시는 덕에 '식초는 몸을 유연하게 한다', '석류는 여성에게 좋다’ 두 가지 속설을 한 번에 체험하게 되었는데, 딱히 유연해진 것 같지도 않고 별로 여성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않는 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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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천국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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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주식은 과자’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소녀가 과자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아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소녀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과자를 먹으며 사이좋게 얘기하는 장면을 비유한 문장이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적어도 과자를 본질적으로, 바퀴벌레 튀김이라도 보듯이 싫어하고 경멸하는 소녀는 없으리라. 내가 생활 양식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 본 소녀라고는 한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되니까 이것도 결국 거의 상상에 불과하지만.

소녀는 아니지만 나도 과자는 퍽 좋아하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 과자를 사다 먹으라고 돈을 주면 당장 슈퍼까지 뛰어가서 사 먹을 정도로 좋아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잘 생각해보니 요즘은 날씨 때문에 싫을 것 같지만, 과자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양만 찬다면 밥 대신 과자를 먹어도 좋을 정도다. 그러나 요즘 들어 마음껏 과자를 먹는다는 건 예전보다 훨씬 호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어릴 때는 분명 과자가 300원이었다. 천원이면 무려 세 봉지를 골라서 살 수가 있었다. 그런데 IMF가 터진 뒤로 500원이 되었다. 300원에서 500원이면 두 배에 가까운 상승이지만 어쨌든 500원짜리로 해결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500원 선을 넘어버렸다. 동전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예전의 과자가 애들이 주스와 함께 먹는 까까였다면 500원을 넘어가 버린 과자는 벨기에 왕실에서 먹는 수제 쿠키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좀처럼 과자를 먹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등을 돌린 뒤로 과자 가격은 점점 뛰어 이제 1000원으로 간신히 한 봉지 사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잘난 느낌을 주는 과자는 1000원으로는 살 수도 없다.

절대적인 가격으로 생각하면 300원에서 1300원이 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푼돈으로 살 수 있는 군것질거리일 뿐이지만, 밥값과 비교해보면 이 가격 상승은 이상할 정도다. 옛날 1000원 하던 김밥 한 줄이 1500원이 되는 사이 과자는 300원에서 김밥 값에 가까운 가격대까지 뛰어오른 게 아닌가! 놀이터에서 흙장난하던 꼬맹이가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된 수준의 충격적인 대격변이다.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과자값이 300원이던 시절은 삐삐로 ‘8282’ 같은 숫자 메시지를 받아서 공중전화로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걸어봐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시티폰이 나오고, 핸드폰이 보급되고, 컬러 액정이 나오고, 16화음이 나오고, 스테레오로 진화하고,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가고… 그런 오랜 변혁을 거쳐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손안에 옛날 내비게이션 뺨치게 크고 멀티터치를 지원하는 화면과 어지간한 디지털 카메라보다 쓸만한 카메라, 멀티코어 CPU에 GPS까지 탑재해서 24시간 인터넷에 연결되는 기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나오던 태블릿 PC와 화상전화도 널리 보급되었고, 애들 상상화에나 나오던 우주여행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로봇이 청소하고 배달하는 데다 전기 자동차와 날으는 자동차까지 나왔으며 수중호텔도 건설된다고 한다. 심지어 심장과 두개골을 프린터로 뽑아서 이식하기까지 한다. 면도기는 2중에서 7중 날로 진화했다. 사람들은 이제 여럿이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할 때 남에게 부탁하는 대신 셀카봉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런 믿을 수 없는 기적이 하나 둘 실현되는 와중에 과자는 300원에서 1000원을 넘겼다. 단순히 생각하면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과자 생산이 완전 자동화되고 300원이던 과자값이 100원으로 떨어져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과자값만 보고 있으면 내후년쯤에는 인류가 과자난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천체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행히 이런 과자난이 일어나는 것은 한국뿐인 모양으로, 이런 끔찍한 상황을 노리고 다양한 수입 과자를 염가로 판매하는 가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과자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다. 우리 집 앞에도 두 군데가 생겼는데, 생각보다 정리가 잘 되어있고 깔끔해서 가끔 들어가 보면 곡식이 가득한 곳간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렇지만 몇 번 다녀 보니 여기서도 문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에 쏙 드는 과자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과자 하면 짠 것만 골라서 먹는, 고혈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타입인데, 이런 수입 과자점에는 짠 과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포장에 적힌 걸 보면 없는 건 아니지만 무턱대고 사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싸다고 해도 한국의 기존 과자보다 싼 것이지 정말 ‘잔돈이 남는데 과자나 먹을까’ 하고 집어 들 수 있을 정도로 싼 수준도 아니라서, 결과적으로 나의 과자 생활이 눈에 띄게 풍요로워지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슬프지만 그럭저럭 과자 없이 사는 생활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가끔씩, 보름달이 뜨면 흡혈귀가 피를 찾아 헤매게 되듯이 나도 간혹 과자를 먹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곤 한다. 흡혈귀가 아니라 이가 가려운 쥐에 비유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할 정도로 딱딱한 밀가루 튀김을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대체로 생라면을 뜯어먹는다. 맵고 짜고 딱딱해서 맛있고 가성비도 그 어떤 과자보다 훌륭하다. 대신 진짜 과자를 먹는 건 과자를 먹고 싶을 때가 아니라, 느긋하게 맥주를 마실 수 있을 때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여유를 즐기는 방편 같은 게 된 셈이다. 최근에 트위터에서 “할 수도 없는 게임을 사두는 것은 여유에 대한 환상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봤는데, 과자도 가격이 오르고 또 오른 끝에 결국에는 여유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뜯어보면 그 속에 있는 거라고는 반 이상이 질소라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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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수레, 맥주, 땅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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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썼지만,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여기서 말하는 건 수사적인 표현의 ‘비행기 태우기’가 아니라 정말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 얘기다. 물론 마구 칭찬 받는것도 무척 좋아하지만.

비행기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비좁은 자리에 앉아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몇 시간이고 버텨야 한다는 것에 있다. 열차처럼 식당칸 따위가 있어서 ‘뻐근한데 맥주나 한잔 마시고 마사지나 받다 올까’ 하고 갔다올 수 있으면 그것도 꽤 좋겠지만, 비행기에서 갈만한 곳이라고는 결국 화장실 밖에 없다. 일등석에서 누가 패악질이라도 부리고 있지 않은지 구경하러 갈 수도 없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특기 중 하나라 비행기만 타면 즐겁다. 인생의 반 정도는 비행기에서 살고 싶을 지경이다. 특히 요즘 비행기는 옛날보다 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USB포트로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을뿐더러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게임도 할 수 있고 영화까지 골라 볼 수 있으니 천국이나 다름없다. 책을 읽다가 일기를 써도 되고, 일행이 옆에 있다면 간단한 카드게임도 할 수 있다. 고양이 이마만큼 좁은 테이블에서도 할 수 있는 게임으로는 역시 짧고 빠르게 끝나는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 가장 적당한데, 이런 교통수단 안에서 즐기는 보드게임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재미가 각별하다.

각설하고 비행기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바람의 검심”과 “익스펜더블 2”였고, 가장 재미있게 한 기내 전용 게임은 “마작”이었다. 익스펜더블은 이정구 님이 혼자 전담 배우 셋, 실베스터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 브루스 윌리스를 모두 더빙했는데, 비행기에서밖에 볼 수 없는 버전이었다. 마작은 아무래도 리모콘을 쓰는 조작감이 신통치 않지만 역시 비행기에서밖에 할 수 없는 방식이라 나름대로 정취가 있었다. 

그렇게 놀다 보면 곧 식사시간이 되어 밥이 나온다. 가만히 앉아서 밥을 받아먹는 건 대부분의 식당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니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배경이 비행기가 되면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제복을 입은 직원의 감정노동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과장된 감정노동의 아이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메이드 카페에 갔을 때도 서비스가 그렇게까지 반갑고 즐겁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비밀은 바로 손수레에 있는 게 아닐까? 열차에서 점원이 수레를 끌고 다니던 시절도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므로 이 가설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수레에 실려 나오면 컵라면도 귀족적인 음식으로 느껴진다. 수레는 마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신묘한 수레에 실려 나온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양이 살짝 모자란 감은 있지만 항상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수준이고, 주변에서도 ‘기내식이 맛이 없어 한 숟갈 먹고 손도 대지 않았지 뭐야’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기내식은 최대 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평균치로 만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물론 기내에서 나오는 음식이 모두 맛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예전에 꼭 한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네덜란드 항공사였는데,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가는 짧은 여행이라 밥 대신 간식으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아주 따끈따끈하게 데워 놓은 것이라 안쪽에 든 오이가 흐물흐물해져 냄새로 그 존재를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오이는 좋아하지만 뜨거운 오이는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간신히 먹어 치우고 나니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눈물 나게 반가웠다. 게다가 옆 자리의 할머니가 영어로 말을 걸어 자기 것도 먹지 않겠느냐기에 냉큼 받았는데, 열어보니 이게 웬걸,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생크림이었다. 다른 것도 없이 생크림을 떠먹으라고 준 것이었다! 내 것만 있었다면 맛만 보고 버릴 수 있었겠지만 할머니 것까지 받아놓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이 느글거리는 걸 참으며 꾸역꾸역 생크림을 떠먹었다. 할머니가 잠든 사이에 간신히 버릴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정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얼마 안 있어 음료가 서비스되는데, 이것도 비행의 커다란 낙이다. 술이야 아무데서나 사 먹을 수 있지만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이 가져다주는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경험은 어디서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때 나는 대체로 맥주를 마시는데, 지금까지 안주로 볼 수 있었던 건 조그만 견과류 한 봉지뿐이다. 비행기마저 돌렸다고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있는 “마카다미아”는 아니지만 나는 가공되지 않은 천연 안주는 뭐든 고급으로 치니까 반가울 따름이다. 

그렇게 머리에 적당한 알콜을 부어 들뜬 기분으로 영화를 보고, 자고, 다시 일어나서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그저 그런 시간의 반복은 자극적이진 않지만 꽤나 중독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누울 수도 씻을 수도 없으니까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생활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열두 시간 정도를 느긋하게 보내는 방법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흔히 가만히 앉아서 손만 뻗는 것으로 뭐든 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곤 하는데, 비행기야말로 바로 그런 곳이 아닌가. 심지어 가만히 있어도 승무원이 수레를 끌고 알아서 찾아와주니 가히 천국이 따로 없는데… 이런 것도 일상이 되면 불편할 따름이고 닭장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기에 별 차이 없는 서비스 방식까지 굉장히 눈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행패를 부리고 가던 비행기를 돌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이 만족하는 선이라는 건 불합리할 정도로 가지각색인 것이다. 요즘은 마카다미아를 먹으며 자신이 비행기와 수레와 맥주와 땅콩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다는 데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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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행복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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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만 되면 예수가 "내 생일인데 왜 니들끼리만 기뻐하고 난리야?” 라고 분통을 터뜨릴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만일 내 생일에 전 세계 사람들이 온 천지에 별의별 장식을 달고 선물을 주고받고 온갖 상품(특히 콘돔)의 매상이 크게 뛴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무래도 그리 즐거울 것 같지는 않다. 생일 파티를 해준다기에 갔더니 나만 혼자 케이크를 우물거리고 친구들은 폭죽만 한 번 터뜨린 뒤 끼리끼리 피씨방으로 놀러 가버린 기분이 아닐까.

그런데 심지어 12월 25일은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토막 상식처럼 된 이야기인데, 로마 시절에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당시 인기 있던 축일인 바빌론 태양신의 생일, 태양절을 적당히 생일로 정했고, 실제로 예수의 생일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요컨대 “네 생일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원래 축제하는 날이면 기억하기도 쉽고 축하하기도 쉬울 테니까 그 날로 정할게. 남의 생일이지만.” 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예수도 태양신도 나란히 화를 내서 나팔을 불고 육지의 3분의 1쯤은 불덩이로 뒤덮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딱히 나쁜 뜻이 있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많은 매체에서도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글쎄, 모르겠는데?"
“오늘은 네 생일이야."
“난 고아라서 생일이 없는데…."
“그래,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네 생일로 정하기로 했어."
“…흑, 모두들, 기뻐!" 
이런 장면이 나오고 얼렁뚱땅 생일이 확정되곤 하니까 생일을 알 수 없는 자의 생일을 결정하고 축하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크리스마스 따위 기만적인 자본주의의 허례허식이라는 불만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써놓았지만, 사실 크리스마스 자체에 별 불만은 없다. 일단 빨간 날이고, 모두가 떠들썩하게 즐기는 날은 많을수록 좋다. 종교적으로 믿지 않아도 서기로 햇수를 세는 이상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
 
오로지 문제가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이미지가 있고, 여기에 압도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혹은 애인과 함께 보내는 것이야말로 최고라는 인식 때문에 같이 나갈 사람이 있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불행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과 고독에 대해 생각하느라 불행해진다. 이건 “크리스마스는 모두 행복하다."라는 환상이 유발한 거대 불행일지도 모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가 있음에도 새해에 불행한 사람이 그 탓에 특별히 괴로워하지 않는 것과 달리, 크리스마스에만 유독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역시 크리스마스가 정확히 어느 날이라고 정해져 있고, 그 날은 모두 행복해진다는 이미지가 각종 매체로 끝도 없이 재생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의 비극을 주제로 한 영화가 “로미오와 줄리엣” 급으로 대히트를 치면 이런 불행은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가령 '두 연인이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야음을 틈타 도망치지만 두 가문에서 합심해서 보낸 킬러에 의해 한 명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남은 한 명이 분노에 눈이 먼 나머지 두 가문 모두를 참살하지만 불타는 앨범을 뒤적여 보니 애인과 함께 찍었을 사진에는 자기 혼자 뿐이라, 그때서야 자신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건 망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고 자살한다는 액션 블록버스터' 같은 것 말이다. 써놓고 보니 어처구니 없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하면 이런 내용도 꽤 성공하지 않을까. 

각설하고,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는 방법은 역시 그냥 빨간 날로서 여유롭게 다른 휴일과 똑같이 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 신경 쓰인다면 자기 생일처럼 맛난 것이나 사다 먹는 정도가 적당하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따라서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쳐서 정말 행복해지기란 쉽지 않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면 그만이다. 요컨대 “넌 너인 그대로 괜찮아.”인 셈이다. 아, 이것도 남들이 만든 흔해빠진 행복이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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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배든 짧은 배든 만들어 보자 - 노티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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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티커스 Nauticus 


노티커스는 볼프강 크라머와 미하엘 키슬링 콤비의 2013년작으로, 배를 만들고 상품을 선적해서 납품하는 과정을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각 플레이어는 개인보드 창고와 돈, 일꾼을 가지고 시작하며, 선 플레이어는 자신의 턴이 되면 중앙 보드에서 원형으로 놓인 액션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수행합니다. 이후 돌아가면서 선 플레이어가 선택한 액션을 수행할 수도 있고 수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시스템은 푸에르토 리코, 산후앙, 레이스 포 더 갤럭시에서 톰 레만이 선보인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특히 액션을 선택한 선 플레이어는 추가적인 이득을 얻는다는 것까지 같죠. 
하지만 물론 다른 점도 적지 않은데, 일단 이 액션이 놓이는 칸에는 액션의 비용과 선택시의 이득이 적혀있고, 액션 타일 안 쪽의 휠 타일에는 액션의 횟수가 적혀 있으며, 이것들이 라운드마다 각각의 규칙에 따라 무작위에 가깝게 세팅되기 때문에 같은 액션도 굉장히 이득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영 신통치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 액션을 하지 않으면 라운드마다 앞면으로 놓이는 -1~-3까지의 감점 타일 중 하나를 뒤집어 감점을 피할 수 있게 되어 있어, 플레이어가 액션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적절히 패스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플레이어가 액션을 하나씩 선택하고 라운드가 끝나는 게 아니라 8가지의 액션 중 7가지를 수행하면 끝납니다. 전체적으로 푸에르토 리코에 비해 각 액션에 대한 옵션이 많이 붙어있어 뭘 얼마나 해야 할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액션의 종류는 다음과 같고, 구매 액션의 공짜 수행 횟수는 액션 타일 안쪽의 휠 타일에 파란 일꾼 모양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보다 많은 횟수를 수행하려면 추가로 일꾼 마커를 사용해야 합니다. 

선체 구매, 돛대 구매, 돛 구매
배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물로는 선체, 돛대, 돛 세 가지가 있고, 당연히 어느 한 가지도 생략할 수 없으며, 선체는 1칸에서 4칸으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배를 이루는 타일은 최소 3장에서 12장입니다. 타일을 사오면 자기 앞의 빈 공간에 내려놓는데, 몇 개의 배를 동시에 건조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한 번 놓은 타일을 움직일 수는 없고, 한 배의 돛대와 돛은 모두 동일한 마크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완성한 배는 크기에 따라 게임 종료 후 점수가 되는데, 이 점수는 2, 8, 20, 35로 크기에 따른 차가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배를 완성하면 즉시 보너스를 받습니다. 크라운 돛대, 크라운 돛, 승점 3점, 7원, 일꾼 3, 상품 2종 중에서 완성한 배의 돛대마다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상품을 팔아서 돈을 받는 방식도 아니고 일반 액션으로 받을 수 있는 자원의 양도 상당히 박한 편이라 이 보너스는 자원을 수급하는 주요한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점수용 거대 선박을 만들어나가는 한편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소규모 배도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하더군요. 

상품 구매
상품은 4종이 있는데, 구매하면 완성되었든 완성되지 않았든 배의 선체 한 칸 아래 한 장을 실어놓을 수 있고, 이후 배가 완성된 상태라면 판매 액션으로 팔 수 있습니다. 

구매 액션은 이렇게 네 가지인데, 액션 타일이 무작위로 배치되면서 각 타일의 가치도 변하는데다가 한 종류를 여럿 사려면 추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뭘 얼마나 살 것인지, 배를 확장할 것인지 새 배를 만들 것인지 여러가지 적절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상품 판매
상품 판매라면 당연히 상품을 팔아서 돈을 받을 것 같지만 노티커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품 판매라기보다는 하선에 가깝고, 원하는 만큼의 배에 실린 상품을 뽑아서 점수 계산에 포함시키는 액션입니다. 상품 하나를 하선하기 위해서는 일꾼 하나가 필요한데, 어느 배에서 뭐 하나만 내리는 방법은 불가능하고 한 배에 실린 상품을 모조리 내려야 하기 때문에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닙니다. 게임이 끝나고 계산하는 상품 점수는 한 종류를 많이 모을 수록 점수가 높으므로, 한 종류를 빠르게 모으는 데는 작은 배가 오히려 나을 것 같더군요. 

수송
창고에서 타일을 꺼내는 액션입니다. 게임 내내 공짜로 받은 타일은 무조건 창고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이것을 꺼내려면 수송 액션에서 타일 하나 당 일꾼 하나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공짜라고 신나서 받아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돈 받기
자신이 가진 일꾼 하나 당 2원을 받는 액션인데, 푸에르토 리코에서 광부가 떠오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돈은 주로 배 완성 보너스로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리 푸코의 광부처럼 그리 인기 있는 액션은 아니었습니다. 

크라운 평가
다른 액션들과 달리 승점으로 직결되는, 상당히 차별적인 액션입니다. 게임 중 배 완성 보너스로 왕관이 그려진 크라운 돛, 크라운 돛대를 받을 수 있는데, 이것들은 아무 배에나 사용할 수 있는데다 크라운 평가 액션에서 승점을 줍니다. 이 왕관 문장은 각 플레이어가 가진 세 장의 감점 타일 뒷면에도 나와 있는데, 크라운 평가 액션을 통해 일꾼 마커 하나를 사용하면 자신이 소유한 모든 왕관 문장 하나당 1점을 즉시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액션으로 얻을 수 있는 점수는 15점으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작정하고 왕관을 모으는 플레이를 하면 상당히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더군요.


이렇게 여덟 가지 중 일곱 가지의 액션을 하고 나면 라운드가 끝나고 액션 타일을 새로이 세팅하여 다음 라운드를 진행합니다. 2인 플레이의 경우 4라운드, 그 외의 경우 5라운드를 진행하고 게임은 끝납니다. 게임이 끝나면 완성한 배, 판매한 상품에 대해 점수를 계산하고, 각자가 가진 나머지 타일, 일꾼은 하나당 1원으로 환산하여 3원 당 1점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계산한 총점이 가장 높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승리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잔 룰도 거의 없고 쉽고 깔끔하며 진행도 빠르고 게임 시간도 1시간 반 정도로 짧은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꾼 마커와 상품이 등장하긴 하지만 일꾼 배치도 상품 수송 게임도 아니라 누가 먼저 뭘 하느냐 고민할 일도 없고 뭘 어디에 얼마에 팔아서 얼마를 벌겠다는 계획을 세우거나 특별한 건물을 세워서 기능을 활용하고 이득을 보는, 최신 전략 게임 풍도 아닌 편안한 게임이었습니다. 요는 같은 종류의 타일을 모으기 힘든 상황을 잘 극복하고 최대한 많은 세트를 구성하는 셋 컬렉션 방식인데 그 테마와 시스템이 대단히 세련된 게임입니다. 볼프강 크라머와 미하엘 키스링 콤비는 많은 작품에서 액션 포인트를 사용하는 시스템을 채용해왔는데, 노티커스에서는 ‘일꾼’이라는 형태로 채용되긴 했으나 사실상 단순한 자원에 가까워 다른 작품에 비해 압박감은 덜했습니다. 다른 액션 포인트 게임에서 흔히 그러듯이 여기서 이걸 하고 저기서 저걸 한다는 식으로 계획을 딱 세워놨다가 삐끗해서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각 플레이어는 게임 중 한 번 추가 액션 타일을 사용해서 추가 일꾼을 받고 원하는 액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를 못해서 통탄할 일도 없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안전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게임이 재미가 없거나 머리를 쓸 일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니라, 매번 뭘 얼마나 수행하고 무엇을 사서 몇 칸짜리 배를 만들지 고민해야 했고, 또 만들어놓은 배가 그걸로 끝이 아니라 상품 선적과 판매에 쓰여 '전반의 선택이 후반의 플레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전략 게임의 명제도 어느정도 달성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요즘 들어 해 본 게임들 중에서는 드물게 깔끔하고 압박감이나 상호 견제를 작정하고 유발하지 않으며, 덱빌딩이나 일꾼 배치, 스케줄 등 특출나게 재미난 시스템 없이 오래된 시스템을 멋지게 다듬어 편안하고 재미나게 만들었구나 싶은 게임이었습니다. 온갖 신비한 특수 능력과 절묘한 테크트리, 깜짝 놀랄만한 시스템도 좋지만 전략 게임의 근본적인 재미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는 걸, 노티커스를 해보고 다시 한 번 떠올려 봅니다.  


(*예전에 간략하게 써둔 걸 정리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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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를 믿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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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를 몇 살 때까지 믿었느니 믿지 않았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흔히 있지만, 나로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딱히 없다. 안타깝게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산타의 존재에 대해 믿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아침에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장난감이었고, 어머니는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가셨다고 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샀다고 굳게 믿었다. 아니, 어머니가 순순히 “아니, 아빠가 샀어.”하고 인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유치원 때는 원장 선생님이 산타 분장을 하고 원생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서 사진을 찍고 선물을 줬지만, 그때도 나는 그게 원장 선생님이라는 걸 뻔히 알았다. “선생님도 참 힘드시겠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서 억지로 장단을 맞춰드렸던 것 같기도 하다. 

유아원 때는 동사무소 앞마당에 원생들을 불러모아 이름을 부르고 선물을 주고 사진을 찍었다. 유치원에 비해 규모가 제법 큰 곳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고마운 이벤트였지만, 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추위 속에 떨며 대중 앞에 노출되어 선물을 받는 게 그때는 그리 즐겁지 않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선생님이 아니라 외부 인력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때도 나는 그런 구별을 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참으로 재수 없는 꼬맹이였다. 그때 받은 선물은 커다란 도미노 세트였고, 나름대로 재미있게 가지고 놀다 몇 년 후 어딘가에 줘 버렸다. 

그 뒤로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진짜든 가짜든 산타와 조우할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산타를 믿어본 적이 없는, 혹은 산타를 믿은 기억이 없는, 꿈도 희망도 없는 소년으로 자라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산타”가 아니라 “산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일종의 환상으로 남아있다. 마치 “남녀공학에 다니는 건 어떤 기분일까?”라는 의문처럼 “산타를 믿는 건 어떤 기분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 셈인데, ‘대학'이나 ‘학원'으로 어떻게든 대체가 가능한 남녀공학 환상에 비해 산타 환상은 의사체험을 할 도리가 없다. 인간이란 상황만 좋으면 굳이 이유를 파헤치지 않는 법이라 지금부터라도 ‘산타’를 자처하는 누군가가 아무 조건 없이 매년 익명으로 보드게임을 보내준다면 눈물을 흘리며 산타를 믿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고 산타클로스의 유래는 모두가 알다시피 270년경의 성인 니콜라우스 주교의 선행이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온 그의 선행이 ‘서로 몰래 선물을 주자’는 재미난 이벤트로 변형된 셈이다. 아마도 가까운 누군가가 몰래 준 선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산타클로스의 선물이구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이렇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때만 해도 자기가 준 선물을 정말 산타가 준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선물에 무슨 조건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애들이 산타의 존재를 믿고 있는 모양이고,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착한 아이, 울지 않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조건은 참으로 약아빠지고 비겁한 조건인데, 어른들은 순진한 어린아이의 선물에 대한 믿음을 인질 삼아 아이들이 착한 아이가 되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착한 아이란 바로 순종적으로 말을 잘 듣고 울지 않는 아이고, 이 자본에 의한 가치관의 강요는 실권을 쥐고 있는 부모가 아니라 ‘산타’라는 가상의 절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책임이 전가된다. 종교가 저질러온 횡포의 구조가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이에 대해 니콜라우스는 “약자를 도우랬지 조건을 붙이랬냐?”라고 할지도 모르고,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크리스마스가 일년 열두 달 있는 것도 아닌데 한 달만 편하면 안 되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어릴 때도 산타를 믿지 않는 재수 없는 꼬맹이였겠지.

“34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에는 산타가 여차저차한 끝에 재판장에 앉아서 그 존재에 대해 판결을 받는 명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재판장은 미국 지폐에 적힌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보고 “미 정부는 신에 대한 믿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고 따라서 산타도 믿는다!”라는 판결을 내리는데, 참으로 가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정말 산타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고개를 저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 조건 없이 뭔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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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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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라는 단어가 있다. 카우치, 즉 소파에서 감자칩을 먹고 TV를 보며 시간을 죽이는 사람, 혹은 소파에서 주로 정크푸드를 먹으며 감자처럼 뒹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에 딱 맞는 번역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파라는 건 거실에 있으니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도 아니고, 소파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 집에서 나오지 않는 ‘방안퉁수’도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만 먹어서 살이 찌고, 살이 찐 만큼 더더욱 소파에서 떠나지 못하게 되어 리모컨만 쥐고 사는 삶은 그리 바람직한 삶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사람은 늘 생산적으로 살면서 자기가 소비할 콘텐츠를 진취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는, 꽤나 건방진 모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짧은 기간이지만 스스로 이 카우치 포테이토 생활을 체험해보니 이게 웬걸, 이렇게 멋진 생활이 없었다. 일단 소파라는 게 참으로 멋진 물건이다. 편하기로 따지면 당연히 침대가 더 편하겠지만, 소파는 사람을 무턱대고 잠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힘이 덜하다. 침대에 앉으면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음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윽고 몸이 정직하게 이불을 덮고 누워 잠들어버리고 마는데, 소파는 그렇지 않아서 퍽 산뜻한 것이다. 침대가 ‘사실은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육체파라면 소파는 ‘표가 생겼는데 영화 안 볼래?’라고 말하는… 아니, 이런 비유는 그만두자. 아무튼, 침대에 몸을 기댄다는 것은 밤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정말 자고 싶은 게 아니라면 피하는 게 낫다. 그런 한편 소파에 앉는 것은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설령 그것이 밤이라도 낮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그래서 소파에 앉으면 무얼 하면 좋은가? 웹서핑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 진정한 카우치 포테이토라고 할 수 없다. 당연히 TV를 켜야 한다. 사실 내가 카우치 포테이토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데는 스마트 TV와 IPTV가 도입된 탓이 크다. 보던 방송이 끝나면 무작정 채널을 돌려대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수많은 채널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고를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VOD를 구입해서 볼 수도 있게 됐기 때문이다. 거기에 USB를 연결할 수도 있고 심지어 웹서핑까지 할 수 있다. 이쯤이면 충분히 진취적인 소비 방식이다.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바보상자라면 똑똑한 바보상자다. 

그리하여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서 보고 싶은 영화를 연달아 틀며 아이패드로 게임을 한 감상은, 부끄럽지만 ‘평생 이러고 살면 좋겠다’는 것이다. 공익광고조차 PC모니터가 아니라 대화면으로 틀면 재미있으니 영화라면 말할 것도 없다. 보지 않고 대충 들으며 게임같은 딴 짓을 해도 재미있다. 과자와 맥주를 곁들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건 현대의 극락이다. 그런데 방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짓인데 어째서 소파에서 하면 더 재미있는 것일까? 

방과 거실을 전전하며 탐구를 거듭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소파와 거실에는 거기 딸린 공간만큼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는 짓도 똑같고 엉덩이도 항상 소파에 붙어있더라도 소파에는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되고 엎드려도 된다는 자유가 있고, TV와 소파 사이의 공간은 딱히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내포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더 넓은 야외나 카페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장악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방안에 있을 때에 비해 자신의 영역이 압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니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거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장악된 공간이고, 다음이 넓고 편하지만 사람을 빨아들이지 않는 소파고, 그 다음이 TV인데, 거기에 정크푸드와 느긋한 시간까지 덧붙여야 비로소 카우치 포테이토가 탄생한다. 일종의 멸칭처럼 쓰는 단어지만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여기서 정크푸드 말고는 자신이 원할 때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TV까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순 있지만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만큼 큰 TV는 적잖이 비싸다. 좋은 소파는 TV 이상으로 구하기 힘들고, 지속되는 공간적 시간적 여유를 구하자면 끔찍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 카우치 포테이토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지속만 가능하다면 카우치 포테이토는 현대 인류의 꿈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아무튼, 카우치 포테이토 생활은 퍽 좋은 경험이었다.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대충 만든 밥을 먹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으며, 심지어 맥주와 찐 감자를 먹으며 “토토로"를 보기도 했다. 이거야말로 카우치 포테이토 그 자체다. 그리하여 카우치 포테이토란 참으로 멋지구나 하고 동경하게 되었지만, 가족과 함께 살면 가족과 함께 사는 대로,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도 적었지만, 몇 년 전에 여럿이 리조트에 놀러간 적이 있다. 아침에 남보다 먼저 일어난 나는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고 아침 햇살에 위스키를 비추어 보며 소파에 길게 누워 로마 귀족처럼 사치스럽고 바보 같은 시간을 즐겼는데, 그 순간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또다시 그런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고 싶다. 새해에 갖기에는 참으로 나태한 소망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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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착한 집정관 나쁜 집정관 - 프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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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터: 로마집정관 Praetor

프리터는 Andrei Novac의 2014년 작으로, 제목인 프리터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취직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먹고 사는 사람 Freeter”이 아니라 국내출시명에 표시된 대로 “고대 로마의 집정관Praetor”를 의미합니다. 후자가 아니라 전자였어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제목이 아니었겠는가 싶긴 합니다만.

아무튼 프리터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문명, 도시 건설 게임으로, 각 플레이어는 자원을 모으고 건물을 짓고 이것을 이용하여 승점을 벌고 시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게임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카드 한 장 없이 타일과 일꾼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꾼은 일반 마커가 아닌 주사위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주사위라면 당연히 굴려서 무작위의 값을 구하는데 사용하기 마련입니다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일꾼의 경험치를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험치 1로 시작해서 건설이나 자원 수집을 하면 할 수록 경험치가 늘고, 이 경험치에 따라 그 효율이 느는 것이죠. 그리고 경험치가 6이 되면 은퇴까지 합니다. '일꾼이 일하다 늙어 죽는' 게임인 “빌리지”에 이어 드디어 '일꾼이 성장하고 은퇴하는' 게임까지 등장한 것이죠. 

아무튼 이 새로운 일꾼 시스템은 그것만으로도 꽤 흥미롭고 적응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경험치가 높은 일꾼을 써야 한 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러다보면 일꾼이 은퇴해버려 액션 기회가 줄어들죠. 따라서 새 일꾼을 고용해야 하는데, 일을 잘 하는 일꾼을 굳이 아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또 일꾼을 빨리 은퇴시키면 그만큼 승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재미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일꾼을 지속적으로 고용하는 한편으로 능숙한 일꾼을 부려먹고 자르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현역 일꾼은 물론 은퇴한 일꾼도 급여를 받거든요. 요는 ‘가르쳐서 일 좀 잘 한다 싶으면 나가서 연금만 받아먹는’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급여를 주지 못하면 시민의 행복도가 떨어지고, 행복도가 바닥이 되면 점수가 뭉텅이로 깎이기 시작하죠. 여기서 행복도는 점수와 직결되는 데다가 한 칸을 진행할 수록 그 점수 차가 커져, 플레이어는 도시 건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일꾼들에게 급여를 챙겨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인지, 즉, 복지까지 신경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도시 건설과 전반적인 게임 진행은 굉장한 특징 없이 무난한 편입니다. 매 라운드 플레이어보다 한 장 더 많은 건물 타일, 그리고 성벽 타일 하나가 공급되며, 플레이어는 자기 턴에 자원을 내고 일꾼을 보내 이것을 건설하거나 일꾼을 보내 이용합니다. 건설한 타일은 기존 타일에 붙여서 놓는데, 이때 기본 건설 점수에 덧붙여 각 타일 귀퉁이의 색깔과 인접 타일의 귀퉁이 색깔이 맞는 만큼 추가 점수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타일을 어디에 붙일지 약간 생각해서 건설하게 되는데, 그 결과 구성되는 보드는 너무 길어지지 않고 적당한 직사각형을 구성합니다. 특출나게 재미나거나 전략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건설된 타일을 이용할 때는 건설한 플레이어에게 일정량의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케일러스”나 “로즈 오브 워터딥”에서 대체로 자원을 주는데 비해 여기선 돈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더군요. 건물주가 다양한 자원을 받게 될 경우에는 자신이 어떤 건물을 건설해서 이후로도 큰 힘 들이지 않고 두고두고 이득을 얻는 기분이 들기 마련인데, 이것이 돈으로 일원화되니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건물, 개발한 능력의 일종이라는 보람은 약한 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기분일 뿐이고 실제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의 돈이 상대에게 넘어가는 것이라 실제 금전 차이는 적혀 있는 것의 두배가 되고, 또 자원 구입, 임금 지불 등 다양한 면에 돈이 사용되므로 이 금전 지불은 일종의 액션 포인트의 양도로도 간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본 규칙은 이렇게 간단한데, 각 타일의 기능과 일꾼, 행복도 시스템이 맞물려 몇가지 전략을 짜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꾼을 최대한 늘리고 일꾼의 수에 따라 점수나 돈을 받는 방법, 자원을 긁어모아서 닥치는 대로 건설하고 건물의 수에 따라 이득을 얻거나 보유 자원에 따라 승점을 받는 방법, 건설할 때마다 승점 증가폭이 누적되는 성벽을 독점하는 방법, 행복도를 최대한 올리고 행복도로 점수를 받는 방법, 선 발전 후 분배, 균형 성장 등등, 방향을 설정하고 그때그때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다른 일꾼 놓기 게임들에 비하면 상당히 드라이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손에 카드를 감추고 있다가 남을 골탕 먹이거나, 자기만의 특별한 능력을 활용해서 이득을 짜내거나, 퀘스트를 달성하거나, 어떤 트랙에서 남과 경쟁해서 특권을 얻거나, 리스크를 무릅쓰고 주사위를 굴려 큰 이득을 따내거나, 다른 플레이어들의 의식의 틈새를 파고들어 신의 한 수를 두는 등의 재미는 없고 모든 정보를 공개한 채로 도시를 관리하는, 무척 적응하기 쉽지만 이리저리 뒤집히는 의외의 요소 없이 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이라 요행으로 이기기는 어려운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점을 좋아할 사람은 퍽 좋아하겠지만, 심심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심심하다고 여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원을 지불하지 않고 점수를 몇 점이든 얻을 수 있는 플루투스의 신전, 머큐리의 신전 때문에 모든 플레이어가 자원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고 쓰지 않는 기현상이 일어났을 때는 요상하다 싶었고 기본 타일에 프로모션 타일까지 추가하니 게임이 3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만, 공식 패치에서 이 신전들로 얻을 수 있는 승점은 22점으로 제한되었고, 짧은 게임 규칙을 적용해서 성벽 타일을 몇 개 제거하고 세팅하니 세 명 한 시간 반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플레이어 보드를 뒷면으로 해서 각각 다른 수치로 시작하니 그 수치에 맞는 운영 방향을 찾아내는 재미도 훌륭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복지는 무슨 복지! 국가가 먼저 일어서면 국민도 저절로 행복해지게 되어 있어!”, “월급 없어! 월급 안 주면 너희가 뭘 어쩔 거야?"나 “우리는 유럽 복지국가야,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최고지.”, “기껏 키워 놓은 놈들은 다 나가서 연금이나 받아먹고, 새로 뽑은 놈들은 일은 못 하면서 월급이나 받아먹고….” 등 시류에 맞는 헛소리를 하며 경영자로서 몰입하는 재미는 다른 게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리터는 분명 딱 한 번 해보고 이건 기막힌 걸작이라는 말이 나올만한 게임은 아닙니다. 일꾼 놓기 게임이긴 하지만 그동안 각광 받아온 게임들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죠. 카드도, 종교 트랙도, 퀘스트도, 선적도, 거래도, 이벤트도, 텍스트도, 주사위 굴림도 없습니다. 이건 요즘 전략 게임으로서는 차,포,상,마 다 떼었다고 봐도 좋을 텐데, 그럼에도 프리터가 매력적인 게임인 이유는 게임의 중심에 놓인 '숙련되고 은퇴하는 일꾼 시스템'이 그 자체만으로 독특한 게임성을 갖추고 있고, 이를 통한 개인 보드의 경영이 한 국가로서의 기본적인 내러티브를 형성하기 때문일 겁니다. 

결론적으로 양념이 심심한 감이 있고 건설로 얻는 이득이 좀 적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기본룰이 매우 간단하면서 이기기는 어렵고 경영의 재미가 있다는 점에서 전략 게임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와 익숙한 플레이어가 동등한 선에서 즐길 수 있는 전략-건설-경영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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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보드게임 후기: 발키리 스트라이크, 루이나스, 해저탐험, 삼천세계, 그녀의 카레라RS, 범인은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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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키리 스트라이크 Valkyrie Strike


페어리테일 초판을 제작한 유호도의 2013년작으로, 미소녀 발키리들이 드래곤 요르문간드를 두드려 잡는다는 내용의 덱빌딩 게임입니다.

카드의 자원은 돈과 전투력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것들을 사용해서 궁극적인 승점이 되는 요르문간드 덱 맨 윗장을 전투력으로 잡아야 하는데, 카드 공급처가 정확히 돈을 주는 카드들, 전투력을 주는 카드들로 나뉘어 관리되고, 요르문간드 덱의 진행 상황에 따라 각 플레이어가 턴에 할 수 있는 추가 액션이 생긴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1단계에서는 1원을 더 받고, 2단계에서는 손에서 카드 한 장을 제거할 수 있고, 3단계에서는 카드 두 장을 뽑고 두 장을 버릴 수 있다는 식이죠.

그리고 자기 턴에 요르문간드에게 피해를 주는 데 실패하면, 즉 승점 카드를 사지 못하면 전투력만큼의 추가 승점카드를 따로 받을 수 있다는 게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카드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효율 좋은 승점 카드를 사지 못해도 나름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노력한만큼 보상받는 게임인 셈입니다. 

또 매 턴이 끝날 때마다 요르문간드가 공격해서 공급처 맨 앞 카드가 사라지고 다른 카드가 공급된다는 점도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매번 카드를 채우는 게 귀찮긴 했지만 이것으로 그다지 사고 싶지 않은 카드가 쌓이는 현상이 해소되기도 했고, 또 이로 인해서 두 종류의 카드가 한 번씩 다 떨어지면 게임이 종료된다는 종료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추후에 일종의 시나리오처럼 요르문간드 이외에도 다른 몬스터가 추가될 것 같은데, 그런 몬스터 팩에 따라서 게임 양상이 여러가지로 변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저가 몬스터를 자작하는 것도 쉬울 것 같구요. 아주 특별할 건 없지만 그런 변화 가능성이 특히 마음에 들더군요.



2. 삼천세계의 새를 죽여 그대와 늦잠을 자고 싶어 三千世界の烏を殺し、主と朝寝がしてみたい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여 그대 곁에서 자고 싶어”는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라는 유언으로 유명한 일본의 유신지사 다카스기 신사쿠가 남긴 시입니다. 일본 시에는 원래 흥미가 있어서 이에 대해 검색을 좀 해봤는데,  여기서 삼천세계란 1000의 3승 개의 세계, 즉 온 우주를 뜻하는 불교 용어라는군요. 그리고 어째서 닭이 아니라 까마귀인가 조사해 보니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녀들이 단골을 만들기 위해 '유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하고 맹세하는 증서를 쓰곤  했는데, 이 서약서를 주로 부적 뒤에 썼답니다. 그리고 이때 영험하게 여겨진 부적이 기슈지방의 구마노 신사 것이었고, 여기서 모시는 신의 사자가 바로 까마귀였던 것이죠. 그래서 서약을 어기면 까마귀가 죽는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 시는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새가 지저귀는 아침이 오면 떠나야 하는 게 안타까우니 온 세상의 까마귀를 죽이겠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약조를 모두 어겨 온 세상의 까마귀가 죽더라도 그대 곁에서 자고 싶어."라는 뜻이라는군요. (참조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룬 라쿠고(일종의 1인 만담)도 있습니다. 산마이키쇼(서약 세 장)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참조)

밤놀이에 빠져 지내는 B에게 A가 그만 정신 좀 차리라고 하고, B는 나는 이런 약조도 받았다고 서약서를 보여줍니다. 그러자 A도 똑같은 서약서를 보여주며 그건 진심이 아니라고 현실을 알려줍니다. 그 자리에 C가 나타나 또 서약서를 자랑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진 셋은 A의 주도로 그 유녀를 놀려주기로 합니다. B와 C가 숨은 방에 A가 유녀를 부르는 것이죠. 불러서 B의 서약서에 대해 따지니, 유녀는 그런 놈에게 서약서를 써줄리가 있느냐며 B를 흉봅니다. 그러자 숨어있던 B가 나타나 C의 서약서에 대해 따집니다. 이번에도 유녀는 시치미를 떼며 C를 욕합니다. 이번에는 C가 나타납니다. 그러자 유녀는 '유녀는 손님을 속이는 게 일이고 속는 게 바보'라고 오히려 세게 나옵니다. 
-예로부터 서약서에 거짓말을 쓰면 구마노의 까마귀 세 마리가 죽는다고 했어.
-오호호, 저는요, 온 세상의 까마귀를 죽이고 싶은 걸요.
-까마귀는 죽여서 어쩌게?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싶어요.

여기선 다카스기 신사쿠의 로맨틱한 원작을 거꾸로 뒤집어 시끄러운 까마귀를 모두 죽이고 혼자 느긋하게 쉬겠다는 유녀의 재치를 드러내고 있군요. '까마귀를 죽인다'는 표현의 뜻은 옛날에도 오해하기 쉬웠던 모양입니다. 물론 까마귀를 모두 죽이고 그대와 아침까지 오붓하게 쉬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낭만이 깨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이 시를 모티브로 한 이 게임은 komakiss 또는 roy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부부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졌고, 2014년 일본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캠프파이어를 통해 모금 및 제작되었습니다(http://camp-fire.jp/projects/view/1126). 펀딩 페이지에 가 보니 아내분께서 직접 분장하고 보드에 들어갈 게이샤의 사진을 찍은 모습도 나와있어 멋지더군요.

배경 이야기가 장황했습니다만 게임 자체는 굉장히 단순했습니다. 샤미센 카드, 새 카드 두 종류의 카드가 사용되며, 일정 장수의 새 카드를 받아서 자기 앞에 깔아두고, 샤미센 카드를 받아 손에 들고 시작합니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메인보드라고 해서 단계별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새의 장수를 나타낸 목제 보드와 이것을 가리는 보드가 놓입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어제 가장 늦게 잔 사람이 선이 됩니다. 

자기 턴이 되면 새 세 장을 뽑아서 앞에 깔고, 샤미센 두 장을 뽑아서 손에 든 뒤 샤미센 카드를 원하는 만큼 사용해서 자기 앞의 새를 처리하게 됩니다. 새를 죽이기도 하고, 다른 플레이어에게 보내기도 하고, 새 카드 덱 맨 윗장을 뽑아서 같은 것들을 한 번에 모두 죽이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새를 처리한 뒤, 턴을 끝낼 때 자기가 가진 새가 메인 보드에 나와 있는 제한보다 적으면 살아남습니다. 같거나 많으면 게임에서 탈락하죠.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게 목적입니다. 

그런데 게임을 진행하다 새 카드 덱에서 ‘종’이 나오면 메인보드의 단계가 진행돼서 갖고 있을 수 있는 새의 제한이 점점 빡빡해집니다. 처음에는 까마귀만 제한하는데, 뒤로 가면 휘파람새, 닭 등도 제한에 걸리죠. 게다가 새 중에서 박쥐는 카드로 없앨 때 대체로 우선적으로 없애야 해서 게임을 더 골치 아프게 만듭니다. 

사실 여기서 더 설명할 게 없을 정도로 간단한 게임입니다. 플레이어에게 ‘새’라는 난관이 주어지고 이것을 해결할 수단으로 ‘카드’들이 주어집니다만 각각의 난관은 플레이어의 플레이를 제한하거나 지속적인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계속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절대적인 문제일 뿐이고, 수단 역시 특별한 상황에서 응용하는 재미는 적은 편이라 전반적으로 ‘내가 이걸 이렇게 잘 해서 이겼구나’라기 보다는 ‘운 좋게 내 턴을 넘기고 나니 남들이 알아서 죽었다’는 식이었습니다. 

요는 플레이어가 선택할 게 거의 없고 카드 운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꼭 뭘 건설하고 전략적인 선택을 하고 추리를 해야만 좋은 게임인 것은 아니죠. 독특한 테마의 가벼운 재난 서바이벌 게임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배경이 되는 얘기가 더 재미있긴 합니다만.



3. 루이나스 Ruinous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중에는 등장인물이 정체 불명의 미궁에 갇힌 상태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 루이나스도 비슷한 설정입니다. 플레이어들은 랜덤으로 조합된 맵에서 게임을 진행하며 모노폴리처럼 이 맵을 순회해서 운명 토큰을 모으는 것이 목적입니다. 플레이어의 말은 커스텀 다이스로 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갖고 시작하는 카드 능력으로 턴을 시작할 때 주사위 눈을 바꿀 수 있고 이동시에는 딱 이 주사위 눈만큼 전진합니다. 전진 도중에 다른 말을 지나칠 때 전투력이 상대보다 높다면 운명과 의지 토큰을 빼앗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동력이 높으면 전투력이 약하고, 전투를 회피하는 눈이나 반격하는 눈도 있어서 이 주사위 눈 변환이 굉장히 중요하더군요. 게임을 시작할 때 각 칸 마다 카드를 깔아두는데, 이동이 끝나면 그곳의 카드를 얻거나 의지 토큰을 둘 얻을 수 있습니다. 카드를 얻어도 보유하려면 의지토큰 둘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카드의 포기 시점을 잘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깥 쪽과 안쪽으로 나뉜 보드 중 안쪽에는 ‘영맥’을 만들 수 있는 칸이 있는데, 의지 토큰을 지불해서 자신의 영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영맥에 따라 승점도 오르고, 카드의 효과도 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보드를 돌면서 싸우기도 하고, 카드를 사서 장비하기도 하고, 영맥을 만들기도 하는, 익숙한 모노폴리식 전개에 전투와 아이템을 덧붙인 게임이었습니다. 


일단 그림도 멋지고 구성품 수준도 굉장히 훌륭해서 감탄했습니다. 게임을 할 때마다 보드와 사용 아이템이 달라지는 방식도 제작비 때문에 자주 제작으로는 쉽게 구현하기 힘든 것이라 놀라웠구요. 주사위를 굴리지 않고 계획적으로 이동력을 설정해서 움직이고 전투를 한다는 것도 신선했고, 아이템 조합에 따라서 빨리 돌아 승점을 모으느냐 전투하고 의지를 모아 영맥을 사느냐 하는 방향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게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나서 이렇다할 전략을 써먹어볼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전투라는 것도 말이 전투지 보통 센 쪽이 별다른 판정도 없이 깔끔하게 빼앗아 가는 방식이라 좀 심심한 감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석연치 않은 구석은 있지만 한 번만에 평가하기에는 흥미로운 요소도 많고 공을 들인 흔적도 많아서 몇 번 더 해보며 연구해 볼만한 게임이었습니다.



4. 해저탐험 Deep Sea Adventure

마스크멘, 맨덤의 던전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 오잉크 게임즈, 사사키 준의 최근작입니다. 
구성품은 주사위와 타일, 마커가 전부로 무척 깔끔한데, 플레이어들은 잠수부가 되어 해저에서 보물을 건져와야 합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보물 토큰을 레벨별로 이어서 깔아두고, 플레이어는 잠수함에서 시작해서 자기 턴에 내려갈지 올라갈지 결정한 뒤 주사위를 굴립니다. 도착한 곳 보물 토큰이 남아 있다면 이것을 가질 수 있고, 가진 자리에는 빈칸 토큰을 놓습니다. 도착한 곳이 빈칸이라면 갖고 있는 보물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보물을 모으는 게 목적인데 보물을 왜 내려놓느냐구요? 그 이유는 꽤나 현실적입니다. 보물을 들고 잠수함으로 돌아와야 자기 점수가 되는데,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이동력이 줄어들고, 턴을 시작할 때 산소를 소모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특히 무서운 것이, 이 산소는 잠수함의 공용 산소라서 누가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모두가 촉박해지고 조금이라도 욕심을 부렸다간 잠수함에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건 좀 아닌데 싶으면 기껏 먹은 보물도 버리고 올라와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보물의 레벨별로 점수 차이가 상당해서 큰 보물 하나만 먹으면 게임에서 거의 이겼다고 봐도 좋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깊이 깊이 잠수하게 되더군요...

구성품도 간단하고 디자인도 깔끔하며 플레이 인원도 3~6으로 폭이 넓은데다 게임 시간도 짧고 룰도 대단히 직관적이라 그야말로 누구나 재미나게 할 수 있는 게임이었습니다. 산소 소모량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어서 어느 시점에서 절대 돌아올 수 없다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게 좀 아쉽기도 하고 비슷한 계통으로 “잉카의 황금”이 이미 있기도 합니다만, 보물을 끌어안은채 주사위를 굴려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사투를 벌이는 스릴이 각별하고, 산소를 까먹으면서 남들을 괴롭힐 수 있는데 그게 그리 밉지 않고 재미있다는 점이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견줄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휴대성은 말할 것도 없겠죠.



5. 그녀의 카레라 RS 彼女のカレラRS

"그녀의 카레라"는 일본의 만화가, 애니메이터인 아사미야 키아의 동명 원작을 배경으로 한 Product Arts, 사카우에 다카시의 2014년작입니다. 예전에 흥미롭게 했던 Birth도 이 분의 작품이더군요. 그리고 카레라 RS는 포르쉐의 모델명입니다.

원작의 내용처럼 '레이싱’을 다루고 있는 이 게임은 놀랍게도 트릭테이킹으로 진행되는데, 게임을 해 보니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메카닉이 뜻밖에 테마와 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게임은 1에서 5까지의 카드(4는 두 종류입니다)와 스피드 칩, 연료 칩, 승점 칩으로 구성되어 있고,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하면 카드 6장과 연료칩 5개를 받습니다. 그리고 선부터 카드를 한 장씩 냅니다. 이때 카드에 적힌 숫자가 자신의 속도가 되는데, 여기에 연료칩을 추가하면 속도를 그만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이 낸 색깔을 따라가야 하는 트릭테이킹과 달리 여기선 이미 앞에서 나온 카드를 낼 수 없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가장 높은 수인 5를 내버리면 그보다 낮은 4를 내고 연료를 사용해야만 하는데, 4와 5라고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1이 나오면 모든 4와 5의 값이 0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그럼 1이 다 사용된 시점에서 4와 5를 쓰면 안심이겠군요? 그런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도저히 낼 카드가 없을 때, 혹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 카드를 뒤집어 낼 수도 있어서 어떤 카드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요는 절대적으로 강한 카드가 없어서 매번 긴장해야 하는 것이죠. 믿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칩’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칩은 매 라운드 똑같이 공급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연료 칩은 사용하면 공급처로 돌아가는데, 저절로 채워지는 법이 없고, 딱 두 가지 방법으로만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나는 카드 2를 사용하는 것. 그러면 공급처의 연료 하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카드를 뒤집어서 내는 것, 그러면 트릭이 끝났을 때 카드를 뒤집어 낸 사람끼리 공급처에 모인(이전 트릭에 사용된) 연료칩을 나눠 갖습니다.

그리고 속도를 높여주는 칩으로 '스피드 칩’이 또 있는데, 이것은 트릭에서 승리할 때마다 가져옵니다. 즉, 이길 수록 점점 유리해진다는 것이죠. 그렇게 게임을 진행해서 한 라운드의 마지막 트릭인 여섯 번째 트릭에서 승리하면 승점 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으로만 봤을 때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수많은 트릭테이킹 게임 중 하나로 보이긴 합니다만, 실제로 해보면 이게 퍽 긴장감있는 카드관리와 자원 관리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뒤에서 무슨 카드를 낼 지 모르는 상황에서 카드를 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보충하기 어려운 연료까지 써야 합니다. 그런데 연료를 몇 개나 써서 얻는 스피드 칩이 과연 그 연료들보다 값진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스피드 칩 하나에 연료 두 개 쯤 남은 상황보다는 스피드 칩이 없어도 연료가 네다섯 개 있는 상황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적당한 타이밍에 쉬어서 카드도 관리하고 연료도 잘 채워야 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연료의 상한선이 고작 다섯 개인데다가 넘치면 나머지 칩은 게임에서 제거해버리고, 나눠 가지고 남은 것도 게임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결국 게임 후반이 될 수록 전체 연료가 줄어들어 게임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것이죠. 

처음에는 테마만 레이싱일 뿐이고 어쨌든 트릭테이킹이겠지 싶었는데, 게임을 하면서 갈수록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상대가 체크 포인트를 하나씩 클리어하면서 우위를 점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풀스로틀로 역전하는 레이싱 게임의 재미가 살아있더군요. 이니셜 디 사운드트랙까지 틀어놓고 하니 장고하면서도 박진감이 넘쳤습니다. 지금까지 해본 트릭테이킹 게임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게임으로 뽑고 싶군요.



6.범인은 춤춘다 犯人は踊る
일본의 유명 드라마/영화 “춤추는 대수사선”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게임은 나베노기카쿠, 나베노페스의 2013년작으로, 카드로 이루어진 간단한 추리 게임입니다. 

인원에 따라 기본 카드 조합에 나머지 카드 몇 장을 무작위로 섞어서 4장씩 나눠주고 시작하며, 자기 턴에 할 일은 카드 한 장을 쓰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만, 모두가 카드 한 장을 왼쪽으로 돌리거나 다른 플레이어와 교환하거나 다른 플레이어의 카드를 보는 등 여러 효과를 쓰다가 전체 카드가 줄어들면 누군가 탐정 카드를 사용해서 범인 카드를 가진 사람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범인 카드를 마지막 카드로 사용하는 사람이 나오면 범인이 승리하고, 탐정이 범인을 맞추면 탐정이 승리하는 것이죠. 기본은 이렇게 간단한데 그밖에 알리바이 카드로 탐정이 지목했을 때 거짓말을 하거나 공범 카드로 범인과 같이 승리하는 등 재미난 요소가 많아서 범인 카드가 어디로 갔나 추적하는 것 외에도 궁리할 게 적지 않습니다. 자기 손에서 범인 카드를 주고 ‘범인은 당신이야, 왜냐하면 내가 범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지!’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것도 재미있고, 또 추리에 실패한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만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 가볍게 부담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낙서같은 느낌의 일러스트도 무척 귀엽고 좋더군요.



7.디씨코믹스 덱빌딩 게임 DC Comics Deck-Building Game(이건 물론 일본 게임이 아닙니다)
크립토조익 엔터테인먼트의 2012년작인데 이제야 해봤습니다. 각 플레이어는 디씨코믹스의 슈퍼히어로가 되어 게임을 진행하며, 자기 턴이 되면 공급처의 카드를 사거나 슈퍼빌런 덱 맨 윗장을 두들겨 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긴 했지만 이 게임에서는 돈과 공격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결국은 다 구매더군요. 덱빌딩 게임의 효시인 도미니언에서는 액션 기회, 구매 기회를 나눠놓고 승점을 사면 살 수록 덱의 효율이 낮아진다는 제약을 걸어뒀지만 여기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카드가 있으면 무조건 다 쓸 수 있고, 파워가 있으면 뭐든 때려잡고 살 수 있습니다. 빌런을 가져와서 덱에 넣어도 나름대로 그럴듯한 능력이 있어서 빌런을 잡는 게 딱히 손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요는 강한 카드를 사서 파워를 높이고, 높은 파워로 슈퍼 빌런을 때려잡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도미니언의 등장 이후로 수많은 게임이 공격력이나 액션 등을 따로 분리하고 직접 상호작용의 밸런스를 어떻게 잡을까 고민해왔는데 어센션부터 그런 고민은 집어치우고 마음대로 하는 쪽이 대세가 된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미니언처럼 그때그때 정해진 카드를 사서 덱을 정확히 원하는 방향으로 꾸리는 걸 더 좋아하지만, 이런 방식도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그러나 물론 시원시원하다고 아주 생각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테마에 맞게 시스템도 궁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일단 슈퍼히어로마다 고유 능력이 있어서 여기에 맞는 덱을 만들어가야 하고, 카드마다 다른 플레이어를 조금씩 방해하는 것들도 있으며, 슈퍼빌런은 등장할 때마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카드를 버리게 하거나 약점 카드를 먹게 하거나, 슈퍼 히어로 능력을 봉인하는 등 재미난 이벤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어차피 슈퍼히어로에게 두드려 맞는 신세라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만.


(한국어 제목은 임의로 번역한 것으로 타 사이트, 블로그, 혹은 추후 발매될 정식 제목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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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과 은닉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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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를 보면 청소년인 남자 주인공의 침대 밑에서는 반드시 성인 잡지가 튀어나오고, 미국 하이틴 영화에서도 플레이보이 따위가 적잖이 발견되는데,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성인 잡지가 그렇게 꼭 봐야만 할 정도로 재미있느냐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어째서 그렇게 발견되기 쉬운 곳에 숨기는가 하는 것이다. 성인 잡지야 그 나름대로 읽는 재미가 있을 테니 그렇다 쳐도, 그걸 침대 밑에 숨기는 것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침대 밑이란 언젠가 청소를 하기 마련이라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실상은 방바닥에 놓은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침대 밑은 귀신이 흔히 등장하는 심령스팟에 가깝다. 그런데도 굳이 거기에 성인 잡지를 두는 것은 귀신이 그걸 보고 ‘이런, 민망해서 도저히 여기 있을 수가 없군’ 하고 물러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기야 침대 밑에서 성인 잡지도 나오고 귀신도 나오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영적으로 불안정한 공간에 야한 무언가를 놓는것은 부적만큼이나 영적 기운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 남이 봐선 안 될 물건을 정말 지능적으로 악착같이 숨기는 작품도 있었다. 바로 만화 “데스노트”의 주인공 라이토였는데, 이 녀석은 머리도 비상한 데다 손재주까지 좋아서 이중 서랍을 만들고 특정한 방법으로 열지 않으면 설치해 둔 가솔린이 데스노트를 태워 버리는 장치까지 만들었다. 물론 성인 잡지를 그렇게 보관한다면 그건 편집증이라고 해도 좋을 거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모독적인 잡지가 아니고서야 남에게 보여주느니 책상 서랍과 함께 태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튼  데스노트는 남의 손에 넘어가면 심각하게 곤란한 물건이니까 나름대로 영리한 조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기세등등하게 만들긴 했는데 나중에는 매번 볼펜심을 뽑아서 구멍에 꽂아 발화장치를 해제하는 게 귀찮아진 게 아닐까?

현실적으로 미끼를 던져두는 타입도 있었다. “현시연”의 “마다라메”가 그랬다. 정말 숨겨야 할 물건은 책장 뒤에 숨겨두고, 성인 SM 비디오를 엉성하게 숨겨서 일부러 발각된 것이다. 찾는 쪽에서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고, 진짜 비밀은 모른 채 탐색은 끝났다. 나름대로 피해가 발생하긴 하지만 이것 참 현실적인 방법이다. 시체를 암매장하고 그 위에 짐승의 시체를 묻어두면 냄새로 추적하고 파보더라도 시체는 발견하지 못한다는 트릭이 있는데, 그것과도 비슷하다. 미드 “덱스터”의 덱스터도 연쇄 살인마로서 가정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아버지의 총을 핑계로 살인 연장을 숨긴다. 그러면서 덱스터는 자기 도구를 놓는 헛간까지 지으니, 비밀을 숨기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타입이 아닌가 싶다. 

성인 잡지나 살인 연장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뻔히 드러내기는 뭣한 물건들이 있다. 어릴 때는 장난감 총이나 만화가 그랬는데, 그런 것들은 대체로 책상 아래쪽 책장에 보관했다. 절대 발각되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쑤셔박는 것만으로 해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몰래 산 게임기 박스, 몰래 피우기 시작한 담배나 지포라이터 기름 따위는 단순히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두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책상 밑이야 침대 밑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는데, 일단은 책상 서랍 뒤가 쓰였다. 책상 서랍과 그 서랍을 둘러싼 박스 뒤쪽 사이에 10센티미터 정도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라면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존재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공간이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라이토나 마다라메, 덱스터도 무릎을 치고 애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랍을 끝까지 빼낸 다음 팔을 깊숙히 집어넣어 잘 보이지도 않는 뭘 꺼낸다는 건, 볼펜 심으로 발화장치를 해제하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여간 귀찮은 짓이 아니라 꺼낼 일이 없는 소장품이나 박스를 보관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 방법은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보드게임 박스에 넣어두는 것이다. 보드게임 박스 따위는 방안에 널리고 널린 데다 제법 크고, 안에서 뭘 꺼내기도 간편하며, 무엇보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열어볼 일이 없다. 그리고 박스가 하나 뿐이라면 의심스럽게 보일 법도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박스를 하나하나 열어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비슷한 박스가 많이 있으니까 이걸 딱히 숨길 필요도 없다. ‘나무는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나무 옹이에 보석을 숨겨둔 셈이다. 이제 와서는 숨길 것도 얼마 남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소리지만.

예전에 친구들과 물건 숨기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친구는 아예 자기 방에 개인 금고가 있다고 했다. 가족이라도 남들이 봐선 안 되는 물건은 모두 거기 보관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처럼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법이 없겠구나 싶었다. 비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것처럼 살면서 이리저리 물건을 숨기고 찾아내고 모른척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남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게 훨씬 깔끔하고 심지어 안전하지 않은가 말이다. 위에 소개한 캐릭터들에게도 하나씩 사주고 싶을 정도다. 그들에게도 안전을 보장받은 공간이 있었더라면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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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은 잔혹한 밥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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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식을 퍽 좋아한다. 매콤하고 쫄깃한 떡볶이도 좋고, 바삭바삭한 튀김도 좋고, 고소하고 탱탱한 순대도, 따끈따끈한 오뎅도 좋다. 게다가 나는 식사로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밥 원리주의자도 아니라 삼시세끼 모두를 분식으로 해결하게 되어도 딱히 어쩔 수 없다고까지 생각한다. 뭐, 그렇게 극단적인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무튼, 분식에서 메인 디쉬면서 밥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떡볶이다. 가장 가성비가 좋기도 하고, 쌀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까 든든하기도 하다. 분식을 먹을 때 떡볶이를 시키지 않는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는 반찬으로만 배를 채우는 것 같은 죄책감과 허전함을 느끼고 만다. 게다가 튀김이나 순대를 찍어먹는 재미도 즐길 수 없다. 한편 떡볶이만 있으면 다른 건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라 분식에 있어서는 나도 떡볶이 원리주의자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떡볶이 하면 쌀떡파와 밀떡파가 있는데, 양쪽에 미안하게도 나는 양쪽 다 좋다는 파다. 떡의 원류인 쌀떡의 쫄깃하고 든든한 식감이 일품인 것은 사실이지만, 밀떡도 그 연한 고유의 식감이 마음 편하고 ‘시장통에서 사 먹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따지고 보면 어릴 때부터 시장의 분식집에서 먹어온 떡이 밀떡이라 그런 것뿐이고 쌀떡만을 먹어왔다면 ‘밀떡 따위 천하에 몹쓸 사파’라고 매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추억을 빼놓더라도 그 식감은 나름의 맛이 있다. 

어른들이 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된장찌개를 시키는 것처럼 분식을 시킬 때면 당연한 수순으로 튀김을 곁들이게 된다. 아니, 써놓고 보니 분식에 있어서 튀김이란 된장찌개라기보다는 짜장면을 먹을 때 시킨 탕수육 소짜에 가까울 것 같다. 떡볶이로 배를 채우다 중간중간 부리는 사치 같은 것이다. 탕수육만큼 비싸지 않으면서도 튀김이 사치에 들어가는 이유는 이것이 개수로 값을 따지며, 얼마치를 먹어야 배가 차는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튀김이라도 감자튀김은 1인분을 시켜서 먹으면 배가 꽤 찰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분식의 튀김은 1인분을 시켜 본 적도 없을뿐더러 뭘 얼마나 먹어야 배가 부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언제 로또라도 당첨되면 어떤 튀김 몇 개를 먹어야 배가 차는지 시험해 봐야겠다. 

분식 튀김에는 김말이, 야채, 고추, 계란, 고구마, 오징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김말이다. 씹으면 바깥의 튀김옷과 김이 바삭바삭한데 안쪽은 당면이 탱글탱글한 것이 여간 훌륭한 게 아니다. 뭘 먹었다는 만복감도 높다. 개인적으로는 분식 튀김의 제왕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가성비가 낮은 편이고, 퍽 기름져서 계속 먹다 보면 속이 느끼해진다. 그래서 추가되는 것이 가성비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징어다. 오징어 튀김은 단순히 오징어에 튀김옷을 입혀 튀긴 것에 불과한데, 일단 오징어 자체의 식감이 쫄깃하고 훌륭한 데다 가끔 이상할 정도로 긴 것이 있어서 주인장이 인심을 쓴다고 큰 것을 집어주면 무척 이득 본 기분이다. 같은 가격으로 튀김의 양을 늘리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다만 먹다 보면 반드시 속은 도망가고 튀김옷만 남은 것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라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나야 튀김옷만 있어도 잘 먹지만, 튀김옷만 남은 오징어 튀김을 몇 개나 연속으로 발견하면 깔 때마다 속이 텅 빈 귤을 마주하는 조조 같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한편 야채와 고추는 따로 먹으면 맛있지만 떡볶이 국물에 적시면 어쩐지 개성을 잃어버려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고구마는 퍽퍽하고, 계란은 너무 친근한 재료라 꺼리게 된다. 그리하여 튀김은 김말이 4대 오징어 6 정도의 비율이 되곤 하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먹을 작정이라면 여기에 순대까지 추가하는데, 나는 순대 자체보다 허파를 더 좋아한다. 허파의 말랑말랑한 식감은 육류보다는 해산물에 가깝게 느껴진다. 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구마처럼 퍽퍽하기 때문이다. 간은 단 한 조각도 넣지 말라고 주문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간보다는 허파가 많은 게 좋다. 그건 그렇고  순대를 시킬 때 부속을 많이 넣어달라고 하면 주인장은 대체로 반가워하면서 꾹꾹 눌러 담아 주는 것 같다. 순수하게 순대만을 좋아해서 부속은 빼달라고 주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까?

순대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무엇에 찍어 먹느냐’ 하는 논쟁인데, 나야 서울 토박이에 가까우니까 당연스럽게 고춧가루가 섞인 소금에 찍어먹는다. 애초에 다른 걸 주지 않기도 하고. 이 얘기를 들으면 다른 지방 사람들은 순대를 어떻게 그렇게 맛없게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들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퍽 억울해진다. 나라고 소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철학이 있어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소금을 끼워주니까 그렇게 먹어왔을 뿐이다. 치킨을 시킬 때 주는 소스처럼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도 ‘소금이야말로 순대 고유의 맛을 살려주는 진정한 양념이지’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었겠지만, 순대의 세계는 이상하게도 각 지방이 몇 세기 동안 단절된 것처럼 문화가 섞이지 않아서 그런 선택은 불가능했다. 아무튼, 새우젓은 순댓국밥을 먹을 때 시도해 보니 퍽 훌륭했고, 초장은 회와 함께 먹을 때 시도해 보니 어째 순대를 먹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막장은 여태 본 적도 없다. 사실 아무리 맛있는 양념을 먹어보더라도 따로 구비하기가 귀찮아서 결국 주는 대로 먹지 않을까 싶지만.

떡볶이, 튀김, 순대, 여기에 오뎅을 추가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집이나 가게에서 먹는 게 아니라면  오뎅은 좀처럼 시키지 못한다. 국물이 따라오기 마련이라 그릇과 숟가락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게 퍽 귀찮기 때문이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긴 하지만 분식은 역시 특별한 준비 없이 가게에서 챙겨준 이쑤시개 따위로 대충 찍어 먹는 게 제일이다. 김밥이 돗자리를 깔고 먹을 때 가장 맛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래서 오뎅은 내게 분식과는 다른 카테고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뎅은 분식과 함께 먹을 때보다는 오뎅만 단독으로, 추운 겨울날 가게 앞에 서서 먹을 때 가장 맛있다. 그리고 오뎅을 먹고 나서 종이컵에 한 국자 떠다가, 간장과 고추 한 조각을 넣어 먹는 오뎅 국물은 오뎅보다 더 맛있다. 중학교가 시장통에 있어서 하교길에 그렇게 오뎅을 먹곤 했다. 오백 원이면 작은 오뎅을 다섯 개 먹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붕어빵도 한 개 백 원이고 짜장면은 천오백 원인 시장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은 분식 먹기도 쉽지 않다. 물가가 불지옥의 악마처럼 뛰어오른 데다, 프랜차이즈 분식 전문점이 몇 개나 등장하면서 분식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 된 것 같다. 이제 '출출한데 분식이나 먹을까’ 하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다. 물론 그런 분식의 고급화를 전면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깔끔하고 예쁜 가게에서 쌀떡과 허브와 찹쌀 같은 걸 써서 만든 분식도 참 믿음직하고 맛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그런 고급 분식을 한 사람당 5천원에서 6천원 쯤 내고 먹자면 늘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웹서핑용 컴퓨터를 사러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최신 게임이 쌩쌩하게 돌아가는 컴퓨터를 사 들고 나오는 기분이다.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와 마주쳤는데 친구는 아주 그럴듯한 차림으로 멋을 내고 있고, 나는 츄리닝에 삼선 슬리퍼를 끌고 있을 때 같은 기분도 든다. 분식이 부단한 노력 끝에 고급한 음식이 될 동안 나도 열심히 살아서 오백 원어치 오뎅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중학생에서 오천 원어치 분식을 먹으며 즐거워할 수 있는, 의젓한 어른이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고작 오륙천 원 갖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참으로 바보 같지만.

그렇지만 사실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은 분식집도 아직 곳곳에 남아있어서 떡볶이 정도는 그런 곳을 이용한다. 포장마차, 아니면 인테리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떡볶이를 시키면 멜라민 접시에 나오는 곳 말이다. 그런 곳이 음식점으로서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식은 뭐니뭐니해도 밥보다 싼 가격에 자극적인 음식을 대충대충 먹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분식이 고급화되고 끊임없이 개발되어 치킨처럼 온갖 메뉴가 등장하는 한편으로 옛날 그대로 대충 먹는 분식도 늘 공존했으면 좋겠다. 이건 오직 나만의 비루한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진: EunHo Sung https://www.flickr.com/photos/digital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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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플레잉을 하지 못하는 내 게임 취향이 마이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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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못지 않게 게임을 좋아하는 나지만 유독 정통 롤플레잉 게임만은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한때는 TRPG를 즐기던 사람이니까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숭고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막상 훌륭한 대작 롤플레잉 게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어도 전혀 끌리지 않는 것이다. 

이 현상은 제법 오래된 것이라 2011년에도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다. 4년이 지나도록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셈인데, 요즘 이 게임 저 게임 집적거리다 보니 이유가 꽤 명확해졌다.

일단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게 고작 몇 시간 해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적으로 문제가 있다. 할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그 시간에 영화나 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이야기를 즐기는 방식으로는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주 치밀하고 웅대한 세계관을 따라가는 것도 이제는 벅차다. 예전에도 적은 내용이지만, 게임이 시작되면서

‘머나먼 옛날, 빛과 어둠이 싸운 끝에 빛은 어둠을 잠재웠으나 그 자신도 큰 상처를 입어 이 대륙에 깃들어(중략) 그러나 평화로운 시절도 다 흘러가고 이제 그 어둠은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같은 얘기를 늘어놓거나 등장인물들이 

“으... 여긴 어디지?"
“깨어나서 다행이야. 여긴 슈트라파클라 마을이야. 레인츠하르투가 왕국의 변경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이지. 난 케이니, 약초상이야. 다친 덴 괜찮아?"
“밖이 시끄럽네, 창밖의 저 군대는 뭐야?"
“너 요즘 소식을 전혀 모르는구나? 이웃 나라인 파리크라투스 제국에서 국제협약을 어기고 대륙간 순양 비공정을 무제한 생산하기 시작해서 이를 제재하기 위한 국제연합군이 결성됐어. 저건 내일 도착할 연합군 본대에 합류할 인원들이야."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건가."
“그래, 안타깝지만 타리우힐 대제의 서거 이후로 중앙의 장악력이 약해지는 바람에 권력 다툼이 심해졌으니까. 제국이 외부에 적을 만들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건 그렇고 내 손목의 문신이 빛나고 있어!"
“그건 유리센느 여신의 탈리스만? 인간 주제에 내 영혼석에 반응한 거야?!"

-같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숨이 벅찰 지경이다. 옛날 같으면 새로운 개념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자세히 알아보려고 안달을 했겠지만, 이제는 좀 천천히 가자고 빌고 싶어진다. 재미난 세계관이나 새로운 개념들을 익히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어도 일단은 익숙한 것에 발을 붙인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도때도없는 전투에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다. 애시당초 게임이 맵 이동 없이 전투의 반복으로 이루어지거나, 이동과 전투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라면 괜찮다. 아니면 전투 후에 짧더라도 나름대로 재미난 얘기가 이어지거나, 하다못해 전투를 피할 수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무작위 전투를 즐기는 사람이 더 많은 모양인지, 마을을 나서서 걷다 보면 별안간 화면이 아찔해지더니 고블린이나 슬라임 따위와 싸워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기치 못한 적의 습격이야 물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디로 좀 갈라치면 전투로 돌입해서 맥을 끊어먹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적을 가로막는 뚜렷한 난관이라면 모를까, 보이지도 않고 피할 수도 없고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전투를 반복하면서 적을 공격하고 체력이 떨어졌다고 회복할 뿐이라면 적어도 나는 도통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옛날에 했던 “용과 같이”는 퍽 잘 만든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파티를 짜서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은 아니어도 캐릭터를 성장시키면서 그 캐릭터를 둘러싼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니까 롤플레잉으로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 게임은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까 복잡한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거리를 다니자면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일도 있지만 현실에서 그럴 수 있듯이 뛰어서 도망쳐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의 길이도 질려버릴 정도로 길지 않은 데다 짧고 재미난 이벤트가 곳곳에 숨어있어 ‘아가씨가 잃어버린 고양이만 찾아주고 끝내야지’ 하며 짧은 호흡으로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시리즈는 기회만 된다면 다 해보고 싶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전투 양상이 롤플레잉 게임에만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바하무트 이후로 목적도 없이 제자리를 행군하는 군인처럼 맵을 클릭해서 걷고 또 걷다가 전투가 발생하면 덱이 알아서 작동해서 싸우고 결과를 보여주는 게임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많이 나왔다. 이 게임들 역시 만족할 수 없었다. 카드를 모으는 게 가장 중요한 재밋거리라는 건 알겠지만 내가 버튼 하나를 클릭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게임들도 세상에서 잘만 팔리고 있고, 그럴 볼 때면 내 게임 취향이란 점점 유행에서 동떨어져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고 복잡한 설정과 반복적인 전투와 카드 수집 등을 즐기고 있는데 나 혼자 진짜 게임이란 그런 게 아니지, 하고 억지를 부린 끝에 보편적인 게이머의 정서를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때면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을 설치해서 해 보곤 하는데, 그렇게 해봤자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노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국은 지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 참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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