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544

듣는 노래만 듣는다

$
0
0
##
고3 때 좋았던 걸 한 가지만 뽑아보라면 나는 많은 음반을 들었다는 걸 뽑겠다. 그때는 아직 CDP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라 너도나도 CDP를 들고 다니며 자율학습 시간마다 온갖 음반을 들었다. 한 장만 계속 들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아예 CD 몇 장을 골라서 케이스에 넣어 다녔다. 집을 나서기 전에 그날의 음반을 고르는 게 하나의 낙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아예 수십장은 되는 앨범을 들고 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당연히 서로 음반을 교환해서 들으며 ‘오, 이 노래 좋은데?’ 하고 평을 나누기도 했고, 좋은 노래가 있으면 쉬는 시간에도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듣기도 했다. 남고생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란 시도때도 없이 복도와 교실에서 공을 차고 유리를 깨먹으며 서로 치고 박고 쫓고 쫓기는 것들이 일반적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정적인 문화생활도 즐기고 있었다. 

아무튼 ‘음반’이란 참 좋은 것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음원은 플레이어에 넣을 때마다 그 음반을 즐긴다는 실감이 든다. 특히 책꽂이에서 케이스를 꺼내 재킷을 보고 음반을 꺼내어 데크를 열고 음반을 집어넣은 뒤, 오디오가 윙, 하고 음반을 재생할 때까지의 짧은 기다림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이 있다. 나는 음악회에서 연주자들이 모여 앉은 뒤 각자 악기의 소리를 점검하는 순간을 무척 좋아하는데, 음반이 재생되기 직전의 시간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MP3P라는 혁신적인 물건이 등장하면서 나도 음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좋은 것도 편한 것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이다. 덕분에 가끔 음반점에 가서 재킷만 보고 ‘이건 어쩐지 좋을 것 같은데?’ 하고 막연히 음반을 사는 낙도 없어지고 말았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로 검색해보고 노래를 30초쯤 들어본 뒤에 다운로드 받는 게 훨씬 편리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뒤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MP3P조차 쓰지 않게 되었다. 손바닥 안에 집안의 모든 음반을 넣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고, 심지어 스트리밍으로 내게 없는 음악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음악 듣기에는 엄청나게 편한 환경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듣는 양이 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나서 지금쯤이면 세상의 모든 음악을 뒤적이고 살아도 모자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나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게 되었다. 

이건 90퍼센트 이상 팟캐스트 때문이다. 뭔가를 듣기 딱 좋은 시간은 바로 이동하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음악을 듣는 대신 팟캐스트 방송을 듣다 보니 도통 음악을 들을 짬이 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배경음을 골라 틀긴 하지만 그걸 빼고 ‘노래’는 정말 들을 기회가 없다. 가끔 정말 노래를 듣고 싶어질 때면 팟캐스트 대신 노래를 듣는데, 그렇게 정말 가끔씩만 노래를 들으니 매번 새로워 새 노래에 대한 갈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기지 않는다. 

물론, 간혹 주변에서 기막히게 좋은 노래가 들리면 음원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버스커 버스커’가 그런 경우인데, 이 버스커 버스커를 빼고 나면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노래라고는 대부분 6년 이상 된 것들이고 한 10년 전부터 들어온 것들도 부지기수다. 덕분에 노래방에 가도 얼음 속에서 10년쯤 자고 있다가 막 깨어난 인간처럼 오래된 노래만 부르게 되는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새 노래를 듣지 않으니 새 레퍼토리도 생기지 않아서 매년 낡은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한때는 요즘 친구들이 듣는 노래를 찾아서 좀 들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유행에 발맞추려는 시도 자체부터 이미 비참한 기분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듣던 노래만 계속 듣고 있고, 이 생활 방식은 앞으로도 거의 바뀔 것 같지 않다. 지금은 10년 전 노래나 듣는 청년이니까 20년 뒤에는 30년 전 노래만 듣는 늙은이가 되어 있겠지. 나이를 먹으면서 새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향은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내 음악 생활에서는 그 시기가 좀 빨리 온 셈이다. 



*
문득 든 생각인데, 영화는 그럭저럭 유행을 따라가면서도 노래는 도통 그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만히 노래만 듣는 시간을 만들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악인들에게는 죄송스럽게도 저는 귀만 쓰는 시간에 무척 인색합니다. 영화는 영화관에 일단 들어가면 꼼짝 못하고 집중해서 보게 되지만, 음악은 그럴 기회를 남이 주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영화관에서 라이브 실황을 상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라이브는 관객과 호흡하는 거니까 라이브로서의 의미는 퇴색하겠지만, 음악인이 관객과 호흡하는 모습을 보는 관객이 되는 것도 나름대로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음악을 감상한 뒤에 나오면서 음반을 즉석에서 구입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영화가 당연한 문화생활이 된 것처럼 음악 공연도 친근한 문화생활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명 제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으니까 활성화되지 않는 거겠죠.


tag :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544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