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호 필름이 없으면 확실히 액정에 흠집이 나면 어쩌나 불안하긴 하다. 요즘 스마트 폰 액정은 유리, 터치 패널, 액정이 일체화되어 나오기 때문에 까딱 잘못해서 금이라도 가면 8만 원에서 12만 원 정도는 우습게 나간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인데, 이걸 만원에서 2만 원 정도로 방지해 주는 것이 바로 보호 필름이다. 보호 필름을 붙여두면 언젠가 일어날 대재난을 막는 부적이라도 붙인 것처럼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유리가 사춘기 소년의 마음처럼 섬세하고 깨지기 쉬운 것은 아니다. 제조사는 당연히 스마트폰이 보호장비 없이 사용되는 걸 전제로 제작하니까, 사실 그냥 써도 충분히 튼튼하다. 특히 유리는 칼로 긁어도 말짱할 정도라, 열쇠나 철제 보디를 가진 이어폰처럼 흉악한 물건과 같이 주머니에 넣어두지 않는 한 일상적 충격으로부터는 안전한 것이다. 나는 그런 제조사의 자존심을 믿고 필름을 포기한 셈인데, 이게 필름 없이 써보니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매끄럽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기포나 먼지가 들어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나 싶을 지경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케이스까지 벗겨봤는데, 케이스를 벗기니 전보다 훨씬 얇고 가벼워서 새 기기를 산 것처럼 쾌적하고 좋았다. 아마 제조사에서는 이 상태를 최적의 사용 조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튼튼한 케이스를 씌운 스마트폰을 보더니 스마트폰 제조사에 다니는 친척이, 자기가 이걸 얇고 가볍게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렇게 쓰고 있느냐고 한탄하더라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러나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책상 위에 둔 스마트폰을 떨어뜨려서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수리한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어서 불안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뛰어가던 도중에 스마트폰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적도 있다. 스마트폰을 처음으로 박살 냈을 때 왜 더 튼튼한 케이스를 씌우지 않았나 끝없이 한탄하고 전면 테두리까지 감싸는 케이스로 바꾼 덕에 두 번째는 기적적으로 무사히 넘어갔는데, 이때 나는 케이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못을 박을 때 망치 대신 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가끔 불편해 보일만큼 거대한 케이스를 쓰는 사람을 봐도 이해할 수 있다. 케이스가 튼튼할수록 기기는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편할 것이다. 결국 누구나 고가의 기기를 쓸 때는 편리함과 마음의 안정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셈이다.
여담으로 내가 한 선택은 필름 없이 케이스를 쓰는 것인데, 케이스는 상당히 얇고 가벼운 ‘젤리 케이스’이다. 인조 가죽 재질도 써봤지만 이건 케이스가 액정 테두리를 감싸지 않아서 스마트폰이 낙하했을 때 액정을 보호하지 못했다(그리고 스마트폰은 떨어졌다 하면 신기할 정도로 앞을 보고 떨어진다). 범퍼라고 테두리만 감싸는 형태는 가벼워서 좋긴 한데 쓰다 보니 고무 부분이 쉽게 더러워지고 찢어져서 포기했다. 지금으로서는 젤리 케이스가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뛰어나면서 가볍고 튼튼한 것 같다.
한편으로 태블릿은 필름과 다이어리형 케이스를 쓰는데, 필름은 케이스를 샀을 때 붙인 것이고, 케이스는 좀 무겁더라도 거치가 가능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표지를 뒤로 접었을 때 접힌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잡으면 어지간한 조작은 한 손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므로, 앞으로도 이 모양을 계속 쓸 것 같다.
하지만 맥북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완벽한 노가드 상태로 쓰고 있어서 가끔씩 심각한 모순을 느낀다. 어째서 나는 막상 사고가 났을 때 가장 피해가 클 기기를 안전 장비도 없이 잘만 쓰고 있나? 여기에 대한 답은 보호 장비의 가격에 있다. 맥북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비해 커서 자연히 케이스도 가격이 호되게 높다. 6~8만 원은 되는데, 그러다보니 도무지 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 투자를 하느니 그냥 조심해서 쓰지 뭐 하고 다짐하게 된다. 당장 찾아오는 돈 문제 앞에서는 마음의 안정이고 뭐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돈 앞에서는 이토록 간사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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