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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래도 덜 한 편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상한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도를 믿으십니까?”,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어요.” 류인데, 나도 한때는 여기서 쉽게 도망치지 못했다. 그렇게 특정 목적을 갖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경험이 쌓여 온갖 그럴듯한 방법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깊어 보이세요.”
이런 말은 그나마 낫다. 길 가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말을 걸어올 이유가 정말 어떻게 생각해도 없으니까,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영혼’, ‘도’, ‘깨달음’ 같은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쓰는 사람은 깔끔하게 무시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서 진화한 방식들이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는 ‘길 묻기’가 있다. 길이라면 누구나 물어볼 수 있으니까 일단 대답하는데, 어째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말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어쩐지 대화 혹은 대화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상황이 되면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다.
‘설문 조사’라는 방법도 그런 부류에게 제법 애용되는 것 같다. 설문 조사라는 건 일단 남을 돕는 일인 데다가 어느 정도 재미도 있는 법이라 누가 부탁하면 쉽게 받아들이곤 하는데, 하다 보면 어째 내용이 이상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장소로 데려가기도 한다. 들은 얘기에 따르자면 대학교 내에서 과제를 위해 만든 PPT나 동영상을 보고 답변을 해달라고 접근해서 종교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단다.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이건 정말 사람의 선의를 이용한 악독한 술수다 .
하지만 나도 아무 발전 없이 제자리에서 속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라, 몇 번 경험을 쌓고 나니 어지간해서는 이런 부류의 얼굴만 보고도 못 들은 척 지나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때 느끼기 마련인 망설임, 미안함, 부끄러움이 없다. 길을 묻거나 과제 때문에 설문 조사를 하면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게 보통인데, 이런 사람들은 웃고 있더라도 가면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마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점점 익숙해지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런 표정까지 생생히 꾸며내면 나도 꼼짝 못 하고 속아 넘어가겠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의 인원 구성도 꽤 참고가 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여성 둘, 혹은 여성 한 명으로 이루어진다. 드물게는 남녀 2인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내 경험에 따르면 얼마 없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친화력이 높고 경계심을 덜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셋이나 넷이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면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시도가 내게는 거꾸로 경계할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몇 년째 여성 한 명, 여성 두 명, 남녀 두 명이 거리에서 말을 걸어오면 들은 척도 않고 도망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가끔 저 사람들이 정말 길을 묻거나 건전한 목적에서 설문 조사를 부탁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별 관심도 없는 종교 얘기를 몇 분이고 계속 듣기는 싫으니까 어쩔 수 없다. 이건 전적으로 사람의 선의를 역이용하는 사람들 탓으로 돌리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눈썰미를 발휘해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찾아오는 경우’다. 예전에는 날이 좋을 때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먹이를 찾은 하이에나들처럼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 말을 걸곤 했다. 그럴 때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도망치질 못해서 꼼짝없이 설교를 들어야 했고, 오래지 않아서 나는 실외에서 책 읽기를 포기해버렸다.
사실, 이럴 때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쫓아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는데, 너무나 화가 치밀어 ‘그런 데 아무 관심도 없으니 좀 가 달라’고, 마치 알렉산더를 쫓아내는 디오게네스처럼 단호하게 말했더니 군소리 없이 사라졌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안심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대화의 맥락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 그리고 ‘미안해하지 말 것’이다. 대화를 온건하게 종료할 생각을 하거나 거부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틀렸다. 이런 수상한 조우로부터 도망치려면 채팅방을 꺼버리듯이 아무 때나 말을 끊고 도망쳐야 하고, 미안함 대신 분노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치밀하고 첨단화된 수법을 들고 나타나더라도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뭐, 그럴수록 자신이 각박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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