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여러 번 한 얘기지만,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사춘기에 삐딱선을 타기보다는 환상의 세계에서 온갖 몬스터를 소환하고 마법을 사용해서 전쟁을 벌이거나, 던전을 탐험하고 잡다한 퀘스트를 수행하며 방황했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변 친구들에게 퀘스트를 의뢰하고 던전의 함정에 빠뜨렸다). 소설이든 음악이든 게임이든 이 시기에 경험한 것은 온몸에 스며들어 남은 인생 전체의 취향을 좌우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판타지를 갈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다.
아무튼, 요즘 들어 잡다한 소셜 게임들을 몇 개씩 집적거리다 보니, 다시 제대로 된 던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카드를 모아서 덱을 짜는 것도 좋고, 비경이나 동굴이나 도서관 따위를 조사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카드를 다른 카드에 먹여대거나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괴이쩍은 탐험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디아블로 1’과 비슷한 게임이 하나쯤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인기 롤 플레잉 게임을 이것저것 깔아봤는데, 아무리 뒤져도 마음에 드는 게임이 없었다. 메신저와 연동되어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로 게임의 내용 자체가 너무 가벼웠다. 별 이유는 없지만 어쨌든 던전에 쳐들어가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때려죽이고 아이템을 약탈하여 나오는 게 전부인 것이다.
"그게 바로 최신 롤 플레잉 게임이고, 던전이지.”라면, 최신이라는데, 게다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데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사람들이 간단하게 자동조종으로 캐릭터가 알아서 움직이게 해 놓고 아이템이나 카드를 얻어서 장착하는 걸 좋아한다는 건 게임의 흥행이 증명하고 있다. 하기야 새로운 아이템이나 기술을 얻어서 자신의 캐릭터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롤 플레잉 게임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매력 포인트만을 뽑아서 농축한 것이 잠깐잠깐 즐기는 모바일 게임으로 잘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롤 플레잉의 원전인 “던전즈 앤 드래곤즈”를 비교적 어릴 때 접한 나는, 던전의 매력이란 자고로 ‘미지 영역의 침범’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미지’는 대체로 ‘문’이라는 선택에 응집되어 있다.
이에 대한 예시로 간단한 던전을 하나 만들어 보았다.
0.동굴 통로
애꿎은 고블린 경비병을 죽이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니 좌우에 문이 하나씩 있다. 어느 쪽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고 동굴을 따라 계속 앞으로 전진할 것인가?
1. 오른쪽 문을 연다.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순간, 방 안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순간 서 있다면 화살에 맞고, 파란만장한 모험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환생했다 치고 동굴 통로로 되돌아간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화살을 멋지게 피해내고, 지저분한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방 안에서 15000골드와 망토, 그리고 녹이 슨 열쇠를 찾는다.
동굴 통로로 되돌아간다.
2.왼쪽 문을 연다.
왼쪽 문은 잠겨있다. 문을 조사하니 열쇠 구멍이 있다. 당신이 일주일 안에 운동을 한 적이 있다면 열쇠 없이도 문을 몸통 박치기로 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열쇠도 없다면 동굴 통로로 되돌아간다.
당신이 일주일 안에 운동을 한 적이 있거나, 열쇠가 있다면 다음을 읽는다.
열쇠로 문을 여니, 안에서 고블린 경비병 하나가 자다가 일어나는 게 보인다. 자다 깬 고블린 따위는 당신의 상대가 아니다. 당신은 습관 대로 고블린의 목을 쳐서 살해하고, 고블린이 덮고 자던 담요로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오늘 죽인 고블린 둘이 저승에서는 지금보다 유능하고 행복하길 빌어준다.
고블린의 방에는 더러운 침구와 신통치 않은 무기밖에 없다. 문의 안쪽에 아주 읽기 힘든 글씨로, “창고의 문을 열 때는 자세를 낮출 것.”이라고 적혀있다.
동굴 통로로 되돌아간다.
3.동굴 통로를 따라 전진한다.
동굴 통로는 상당히 길다. 길고 긴 통로를 따라 조심스레 전진하다 보니, 멀리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빛을 따라 나가니 동굴 밖이다.
동굴을 빠져나오니 그곳은 설국이었다. 당신은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여 경험치 2000점을 받는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이 반팔 옷만을 입고 있으며, 달리 걸칠 게 없다면(망토라든가) 당신은 설국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 죽는다. 다음 생에는 좀 더 따뜻한, 이를테면 적도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길 바란다.
당신이 설국에서 살아남는다면 당신은 동굴 통로로 되돌아가거나, 설국 모험을 계속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 이후의 모험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런 터무니 없는 얘기는 얼마든지 더 적을 수 있지만, 독자에게 모험을 시키려고 적는 글이 아니니까.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직접 잃을 게 없는 선택을 통해 미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호기심 많은 종족이고, ‘던전’이라는 공간은 이런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응축적인 공간이다. 이를테면 모험의 포르노,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 모음집인 셈이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던전 게임은 액션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런 모험심은 도통 자극하지 않는 것 같다. 길이 어떻게 나 있든 가다 보면 몬스터가 나올 게 뻔하니까 궁금하지도 않다. ‘자동 진행’이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편이 만드는 쪽도 하는 쪽도 편할 것은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아쉬운 노릇이다. 분명 이런 ‘핵 앤 슬래쉬’ 게임의 원조 격인 디아블로에서는 문을 열면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무서웠던 것 같은데, 어쩌다 그 영향을 받은 게임들은 이렇게 발전한 걸까?
그래서 얼마 전에는 디아블로 제작진의 일부가 만들었다는 “토치 라이트”의 데모 버전을 받아서 해봤는데, 확실히 모바일 게임들보다는 광산을 탐험하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추억의 “디아블로 2”를 설치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렇게 재미있게 했던 디아블로 2도 이런저런 퀘스트를 수행하고 여기저기 탐험하긴 하지만, 결국은 어딜 가나 몬스터만 쏟아져나올 뿐이라 딱히 어느 쪽으로 가볼까 고민할 필요도, 미지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길이야 많지만 어느 쪽으로 먼저 간다고 딱히 뒤에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굳이 던전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이나 지나면서 추억이 미화된 모양이다. 내가 찾는 재미는 차라리 둠1, 2에서 찾는 게 빠를 것 같다. 물론 그런 재미가 희박하더라도 디아블로는 무지막지하게 재미있는 액션 게임이지만.
그나저나 슬슬 공포의 계절이고 여기저기서 ‘귀신의 집’ 같은 체험형 이벤트도 열릴 텐데, ‘던전 탐험’ 같은 체험형 이벤트는 어디서 안 열리나 싶다. 간단하게 꾸며놓은 던전의 각 방에서 몬스터들을 쓰러뜨리고 아이템을 얻어서, 그 뒤에 열리지 않던 문을 열고 더 강력한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며 함정을 해체한 끝에, 보스를 쓰러뜨리고 촌장의 아름다운 딸을 구출해 나오는 것이다! 이건 제법 컬트적인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은데, 잘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마을 처녀’를 구출하는 시나리오라면 데이트 코스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멋진 마을 청년과 아름다운 마을 처녀를 모두 구출하는 시나리오라면, 어딜 가든 알아서들 잘 살겠지 싶어 구출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고. 역시 아무리 그럴듯한 아이디어라도 구현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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