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움받는 건 익숙해.”라는 대사는 닳고 닳아서 이제는 웃기기까지 한 대사지만, 나 자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법하다. 어느 사회의 어느 집단에 가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생각한다. 어디에나 나를 반기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는 것처럼 나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도 한 명쯤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어디에 가도 싫은 사람이 한 명쯤은 보이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미움을 받는 입장이 되면 미움 받는 것 말고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분이 께름칙하지만, ‘사랑’처럼 ‘미움’도 누구나 한 번쯤은 느끼는 감정이므로 분명 탐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나를 비롯해서 어떤 사람이든 한 번 ‘미움에 빠지면’ 흥미로운 행동 양상을 보인다.
증오와 사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도 있듯이, '미움’이 영위되는 모습은 정말 사랑이 영위되는 모습과 같다. 상대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미워한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상대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말하지 않아도 천천히 스미듯이 그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답답해지면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여 그 사람의 어디가 어떻게 싫은지를 하나하나 말하며 공감을 갈구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누군가 싫어하면 마음이 아프듯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누군가 좋아하면 역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쟁취해야 하는 사랑과 달리 미움은 경쟁해야 하는 것도, 쟁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이 감정은 집단성을 띤다. 요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 같이 사랑하면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누군가 같이 미워하면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움에 빠지면 함께 미워할 감정적 동반자를 찾는다. 어쩌면 그것은 ‘미움’이 부(負)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미움의 공유는 뭐든 고속으로 공유될 수 있는 현대에 와서는 놀랍게도 일종의 트렌드가 된 것처럼 보인다. 뭐가 좋다는 얘기보다는 뭐가 싫다는 얘기가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다들 누가 한심하고 경멸스럽고 개탄스럽고 증오스럽다는 얘기를 마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처럼 열띤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도 하나의 콘텐츠로써 생산되고 소비되고 공유되는 셈이다.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는 딱히 막을 필요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미움이 공유되는 현상, 다 같이 손잡고 미움에 빠지는 현상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구를 미워하는 게 자연스러울지는 몰라도 딱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누구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을 보지 않고도 호감이 가게 되듯이, 누구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을 보지 않고도 일단 거부감부터 느끼게 된다. 말 그대로 선입견이 생기는 것인데, 요즘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시대에는 이게 여간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 ‘순살 치킨은 몸에 해로운 약품으로 뼈를 녹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탄했다가, 제대로 된 정보를 검색해 보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은 적이 있는데, 정보가 아니라 감정의 경우는 추후에 수정하는 게 몹시 어려워서 더욱 큰일이다.
미움의 공유는 사실 미움이라는 감정의 목적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사랑의 목적은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되어 서로의 사랑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지만, 그 사람도 나를 미워하게 되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지속적으로 더 크게 미워하는데 목적을 두고 누구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미움은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지거나 개과천선해서 더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달성된다. 요컨대 미움은 자기 파괴적인 감정인 셈인데, 이것이 공유되기 시작하면 꺼질 불에 불쏘시개를 갖다놓는 격이 되어 좀처럼 사위지 않게 된다. 물론, 이 불도 탈 것을 다 태워버리면 꺼지겠지만, 요즘 세태는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태우는 듯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뭔가가, 혹은 누군가가 싫다는 얘기는 공개적으로 꺼내지 않고 일기장에만 적어두려 한다. 그것으로 그날 치의 미움은 그날 완결되는 셈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움도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토로와 공유를 통해 소진하려 하고, 미움이라는 것도 이제는 콘텐츠로 즐기는 지경에 왔으므로, 앞으로도 미움은 사회적으로, 네트워크를 따라 서비스될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그런 세태를 미워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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