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올해는 유난히 봄이 길다. 지구온난화로 여름과 겨울만 줄곧 길어지는가 싶더니, 올해만 이상할 정도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덕분에 매일같이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낮에는 따뜻하고 아침저녁에는 쌀쌀해서 뭔가를 걸쳐야 하는데, 뭔가를 걸치고 나서면 금방 땀이 나고 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안 입는 동안에는 대충 던져놔도 무방한 재킷이 제일인데, 봄 없는 해가 한참 동안 계속되다 보니 적당한 옷이 별로 없다. 그래서 몇 주간 가난한 폭주족처럼 가죽 재킷 하나만 줄창 입었다. 인조가죽 옷을 오래 입으면 목덜미나 소매처럼 마찰이 많은 곳은 코팅이 떨어져 나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버리고 새로 사야 할 때가 한참 지났지만, 돈도, 그 옷을 대체할 옷도 보이지 않아서 포기했다. 다행히 때마침 그 옷을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날씨가 따뜻해졌다.
옷차림에 곤란을 겪긴 하지만, 봄은 따뜻해서 좋은 계절이다. 잔디에 누워 잠을 처하거나 한가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시기는 일 년 중 며칠 되지 않는다. 겨울의 야외 독서는 말할 것도 없이 할 짓이 아니고, 여름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 어렵고, 가을은 온도는 괜찮지만 성가실 정도로 바람이 불어대서 쉽지 않다. 오로지 봄만이 태양 아래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기쁨을 선사한다.
얼마 전 예비군 훈련에 갔을 때는 PX에서 평소에는 절대 사 먹지 않는 군것질거리를 사다 점심을 해결하고, 잔디가 깔린 언덕에 누웠다.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는데, 언덕은 그늘이 져서 딱 좋았다. 다른 사람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언덕에 누워 쉬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 누운 사람은 대담하게 전화를 꺼내서 아내와 처가 얘기를 했다. 그 옆 사람은 친구를 만났는지 요즘 벌이가 어쩌니, 일이 힘드니, 4대 보험이 어쩌니 하는 얘기를 했다. 다들 일상에서 끌려 나와 전쟁터에 던져진 것 같기도 했고, 전쟁터에서 빠져나와 무인도에서 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주머니에 넣어간 책을 꺼내 읽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작은 미니북이었는데, 살 때는 이럴 때 보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내용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곧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누워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고등학교 2학년 체육 시간 이후로 잔디에 누워 쉬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때는 친구와 함께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봤다. 걱정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에 비하면 예비군이 되어서 보내는 휴식 시간은… 늙고 지치고 걱정거리가 태산에, 옆에 친구도 없고 심지어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지가 선명한 날이었다. 봄이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아주 오랜만에 했다.
그 뒤로 휴일이면 학교에 나가 잔디광장에서 책을 읽곤 한다. 양지바른 풀밭에 앉아 책을 읽자면 햇살이란 이렇게 멋진 것이구나 싶다. 휴일 아침의 학교에는 학생보다 인근 주민이 더 많아서, 광장에는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나 아이와 놀러 나온 애아빠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책을 읽다 말고 그런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곤 한다. 책은 읽다보면 지치지만, 그렇게 별 의미 없는 모습은 신기하게 아무리 봐도 지치지 않는다.
아무튼, 기온이 올라가서 그렇게 축복받은 환경에서 책을 읽거나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끝나고 말았다. 햇살이 뜨거워져 재킷을 입은 채 5분만 걸어도 땀이 난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반팔을 입기 시작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보다 사람들이 긴팔을 입느냐 반팔을 입느냐가 봄을 판단하는데 더 정확하다. 봄은 끝났다. 물론 내년이면 다시 봄이 오긴 하겠지만, 봄이 온 줄도 모르게 지나간 해가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겨울이 오면 봄도 곧 머지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내년에 봄이 오기나 할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매년은 바라지도 않으니 적어도 4년에 한 번쯤은 와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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