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544

덕질과 쌓여가는 책들

$
0
0
덕질, 즉 오타쿠질은 무엇인가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단 어떤 취미가 능동적 정보 수집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덕질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점이 높거나 주변에서 재미있다고 해서 영화를 보는 것은 평범한 감상이다. 하지만 그 영화의 감독과 배우를 외우고 그 감독이 만든 작품이나 배우가 등장한 작품을 찾아서 본다면 그것은 훌륭한 덕질의 시작이다. 아니, 그러면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작이나 좋아하는 가수의 신보를 구입하는 것도 덕질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이 비교적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라 그렇지 덕질이 아닐 이유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데 최근에는 개인적으로 덕질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 기준에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구입과 소비 속도에 큰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 클리어하지 않은 게임이 몇 개나 남아있는데도 새 게임이 나오자마자 산다면 이것은 덕질이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읽을 책이 몇 권이나 남아있는데도 새 책을 착착 산다면 이것 역시 덕질이 아닐까. 요는 앞뒤 가리지 않고 대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알고 싶고, 뭐든 소유하고 싶은 것이 덕질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쓰고 보면 마치 사랑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행위 같지만, 독점욕이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성애적 사랑과는 다르다. 정신이 멀쩡하다면 타인이 자신의 연인을 사랑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덕질이라는 게 사랑보다 숭고한 행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랑은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할애하는 것만으로 성립할 수 있지만, 덕질은 대상에게 돈과 공간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꽤나 가혹한 대가다. 이 중에서 돈은 벌면 되니까 비교적 쉽게 해결된다. 시간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지만 덕질 중에서는 시간을 별로 요구하지 않는 것도 간혹 있으니까 넘어가자. 그래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공간 문제다. 다시 말해서, 책을 꽂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바빠져서 도통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진득하게 책을 읽을 시간이라는 게 화장실에 있을 때와 지하철을 탔을 때뿐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독서에 대한 욕구를 "책을 사는 것"으로 풀기 시작한 것이다. 훌륭한 책 덕질이다.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언제 읽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버린다. 물론, 마음에 드는 걸 다 사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까 보통 한두 권을 사면 나머지는 리스트에 올려두지만, 서점에 갈 때마다 한두 권씩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앞으로 읽을 책이라고 쌓아둔 책의 탑이 거의 30센티미터에 달하고 만 것이다. 어제는 아무래도 이건 너무하다 싶어서 읽지 않은 책들도 책장에 꽂기 시작했지만, 책장이 포화상태가 된 지는 오래다. 게다가 책을 국적별로 나누다 보니 손을 댈 공간도 여러 곳이다. 버릴 책을 골라보려고 했지만 어째 시원하게 내다 버릴 책도 보이지 않는다. 책을 버린다는 건 지식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늘 내키지 않는다. 결국은 잘 보지 않는 책 몇 권을 골라서 보드게임을 팔아치워 겨우 자리가 생긴 책장 위에 올렸다. 이것으로 쌓여있던 책들을 처리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지만, 이것도 사실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책을 더 사서 책장 위까지 완벽히 점령당하고 나면 어쩌겠는가? 지속 가능한 서고 조절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인가? 
그래서 생각한 첫 번째 방법은 잘 보지 않는 책을 창고에 넣는 것인데, 이건 창고가 없으니까, 아니, 창고라고 할만한 공간도 이미 꽉 찼으니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생각한 두 번째 방법은 책을 스캔해서 데이터화하고 실물은 폐기처분하는 것이다. 실제로 태블릿 기기가 보급되면서 이 방법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듣자니 페이지당 비용이 20원이란다. 300페이지를 스캔하면 6000원이 든다.  가지고 다닐 책 한 두 권이면 괜찮겠지만 책장이 모자라서 정리할 책에 쓰기는 쉽지 않은 비용이다. 
결국,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애초에 전자책으로 사는 것 말고는 당장 손 쓸 방법이 없는 셈이니, 앞으로도 공간을 징발하듯이 보드게임을 팔아치우고 그 자리를 쓰며 근근히 버텨야 할 모양이다. 
언젠가 집안에 이단 책장을 두거나 잘 보지 않는 책들을 모아놓은 "장서고"를 만들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그런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역시 가장 빠른 것은 도서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것뿐일까?



tag :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544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