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은 전화 울렁증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것도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과연 틀린 말은 아니다. 나 역시 아직은 간신히 젊은이의 범주에 머물러 있어서 할 수 있는 얘기지만, 어쩐지 전화는 최후의 연락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아는 사람과의 연락은 가능하면 문자 메시지로 해결하고 싶고, 어떤 집단에 접촉할 때도 게시판을 먼저 검색해보고, 그런 뒤에 문의 글을 올려보고, 그래도 안 될 경우에만 전화를 건다. 가령 뭔가 고장났다면 우선 매뉴얼을 살펴보고, 그런 뒤에 자주 묻는 질문을 찾아보고, 질문을 남겼는데도 시원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에만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서면으로는 진행이 지지부진해서 처리에 몇 주나 걸리는 일도, 막상 전화를 해보면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아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화라는 것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전화를 피하려는 것인가? 사실 누가 이렇게 묻는대도 바로 "그건 말이죠, 바로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깔끔하게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그것은 마치 고소공포증 환자에게 "높은 곳이 왜 무섭죠?"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체질적으로 꺼려지는 데 별수 있나.
그래도 굳이, 정말 굳이 이유가 뭘까 추측해보자면, 일단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 고장 나서 서비스 센터에 전화한다고 치자. 상담원은 아마 증상을 물을 것이다. 그건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상담원이 제품을 언제 어디서 샀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마 당황할 것이다. 직접 샀다면 어디서 샀는지 정도는 기억하겠지만, 그저께 먹은 저녁 메뉴도 기억나지 않는 판에 텔레비전을 언제 샀는지 기억날 턱이 없다.
아니면 여자친구가 갑자기 전화해서 오늘 조별 과제를 하는데 조원이 모이질 않아서 너무 짜증 난다고 푸념을 한다고 가정하자. 한편 나는 중단할 수 없는 게임을 하느라 한창 바쁘다. 게임을 하면서도 얘기를 들어줄 수는 있지만, 십중팔구 대답은 건성이 되고, 그러면 그녀는 지금 뭐해? 하고 물을 것이다. 여러모로 나에게 일어날 상황은 아니지만, 전화가 탐탁지 않은 예로는 모자람이 없다. 많은 남자가 전화를, 많은 여자가 게임을 증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반면 의사소통이 메일이나 문자 같은 텍스트로 이루어지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니까 마음이 훨씬 편하다. 필요한 자료를 찾아볼 수도 있고, 핸드폰을 집어던져 놓고 한참 놀다가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놔서 몰랐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런 조원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고 맞장구를 쳐 줄 수도 있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편리한가?
물론, 이것도 단지 전화를 싫어하는 이유라기보다는 한 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정말 텍스트에 익숙해진 나머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낮아진 탓일 수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전화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 보면 자연히 이런 능력도 나아지고, 전화라는 빠른 소통 수단에 어느 정도 호감을 갖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문의를 할 때 텍스트를 먼저 찾는 것을 보면 전화가 아닌 수단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데는 일종의 오기도 작용하고, 게다가 이건 영영 사라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외지에서 절대로 행인에게 길을 묻지 않고 지도를 뒤적이는 것이나, 과자 봉지가 뜯어지지 않을 때 아래쪽을 뜯을지언정 도구는 쓰지 않으려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오기다. 이런 오기를 모두 버리고 거기 쓰일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올바른 곳에 쓴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쉽게 버릴 수 있으면 오기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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