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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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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같던 종로 나들이와 2 데이즈 인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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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투 마더스를 볼 생각이었지만, 아침부터 일하다 보니 상영 시간에 늦었다. 별수 없이 다른 게 없나 검색하다가, 줄리 델피와 크리스 락이 등장하는 "2 데이즈 인 뉴욕"이 씨네코드 선재에서 상영되기에 쾌재를 부르고 출발했다. 줄리 델피는 비포 시리즈에서만 봤고, 크리스 락은 스탠딩 코미디 영상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둘 다 어쩐지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면 나로서는 실패하기 어렵기도 했다. 
일단 종로에 도착하자마자 아이폰 수리점에서 아이폰 슬립버튼을 수리했다. 젊고 건장한 기사는 삼만 원을 달라고 했다. 책이나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대신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말끔히 수리된 폰을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걸어갈 수도 있긴 했지만, 여유가 없으므로 마을버스를 탔다. 버스는 처음 보는 언덕을 올랐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 언덕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관광안내소도 있고, 지도를 들고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로는 통행량이 적었고, 보도는 고풍스러워서 이국적인 정취마저 느껴졌다. 
아이폰으로 길을 찾아서 극장을 향해 잠시 걸었다. 깔끔한 카페나 갤러리가 많이 보였다. 한쪽에 보호수도 보여서, 마치 일본의 신사 주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런 음악도 듣지 않고 걸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음악이란 분명 멋진 것이지만, 끊임없이 귀에다 꽂아넣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낯선 곳에 가면 음악보다는 낯선 곳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씨네코드 선재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상영관은 지하에 있어서, 지하로 내려가 표를 사고 상영까지의 몇 분을 기다리는 동안 책장을 구경했다. 당연히 영화에 관한 책이 많았지만, 일반 소설도 제법 있었다. 나는 책장이 있는 아담한 휴게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상영관은 영화 전용관이 아니라 강당에 좀 큰 스크린이 있는 형태에 가까웠다. 좌석에는 접이식 책상이 달려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상영회를 여는 듯한 분위기였다. 

영화는 꽤 마음에 들었다. 작은 일들이 쉴새 없이 꼬여대는 타입이었는데, 줄리 델피는 여전히 욱하면 종잡을 수 없는 프랑스 여자로 나왔고, 크리스 락은 예상 밖으로 멀쩡하고 참을성 있는 남자로 나와서 버락 오바마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었다. 줄리 델피가 너무 저런 역으로만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튼 영화는 트러블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면서도 하나를 지치도록 끌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감상주의에 젖어들지도 않았다. 오래간만에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서 외국에 나온 것처럼 구경하고 다녔다. 사람들이 퍽 많았다. 무엇보다 손잡고 데이트하는 커플이 많았고, 지도를 들고 다니는 외국인들도 있었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걷는 사람들도 적잖이 보였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걷기에 딱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내려가는 길목. 낡아보이는 건물들이 정겨웠다.)

완만한 언덕길을 내려가며 이어지는 상점가를 보니 어쩐지 기요미즈데라에서 내려가는 길이 떠올랐다. 기념품점이 즐비한 것은 아니고, 대신 카페나 음식점이 더 많았지만, 전통 가옥 형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내리막으로 늘어선 것을 보니 저절로 그 길이 떠올랐다. 

(기요미즈데라에서 내려가는 언덕길. 이곳도 몇 번 가도 재미있는 길이다.)


(민들레 영토 앞 길. 민들레 영토도 지점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는 특별히 달랐다.)

 

길을 내려가다 보니 골목 한 곳에 수공예품 좌판이 모여 있었다. 좌판이 길 곳곳에 늘어선 것보다 보기에 좋았다. 카드 지갑이나 풍경 같은 걸 구경하다 나와서 다시 걸었다. 종종 떡볶이집 같은 게 보이면 뭔가 먹고 싶었지만 커플과 외국인들 틈에서 혼자 군것질을 하는 게 민망해서 포기했다. 




(쭉 내려가는 길.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점포가 많았다. 길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거슬리지는 않았다.)



(연인들이 골목을 걷고 있다. 골목의 윤곽이 한국적인데, 너무 한국적이라 오히려 낯선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감고당길. 돌담길은 어째서 달리 특별한 것이 없어도 걷기 즐거운 것일까?)

 

길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길 자체의 고즈넉함을 어지럽힐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낯선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왜 진작 이곳에 와보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돌담길 중간에는 여중과 여고가 있었다. 아름다운 길로 등하교할 학생들이 부러운 한편으로, 어디서도 가깝지 않은 학교에 다니기는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걸었는데, 길 끝까지 가보니 대로 건너편에 인사동길이 보였다. 모르는 곳이면 곧장 버스나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인사동도 오랜만에 보고 가기로 작정했다. 
대로를 건너 인사동 길 입구로 가니 물이 샘솟는 화분 모양의 오브제가 몇 개 있었는데, 그 근처는 넓게 트여 있어서 유럽의 어느 광장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북적대는 인사동 길로 들어서니 곳곳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악기 가방을 펼쳐두고 저마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 모두가 서양인이라 나는 유럽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좋으니 이런 모습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서울에 여유 있는 인도가 확충된 뒤에나 가능한 일이리라. 

(인사동은 한국적인 곳이라고 소개되지만 신비하게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인사동 길을 마지막으로 걸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로부터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일단 사람이 많았고, 그중에는 외국인이 많았고, 늘어선 상가에서는 부채를 비롯하여 온갖 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기요미즈데라의 언덕길이나, 대만의 지우펀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관광지의 상인이 파는 것과 관광지의 관광객이 사는 것은 어느 나라든 그 국가적 특색을 지우고 나면 한 점으로 수렴하는 것은 아닐까. 

(음식점과 기념품점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지우펀)

(발길 가는 대로 걷다가 들어선 골목. 문득 기온의 골목길이 떠올랐다.)

(기온의 비좁고 운치있는 골목. 종로도 밤에 다시 가봐야겠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달라진 부분도 있긴 있었다. 일단 거리의 악사들을 인사동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걷다 보니 서양인이 젤라또를 파는 가게도 있었는데, 그것도 처음 보았다. 또 골목 한쪽에 좌판이 모여있고 그 옆에 좌판에서 산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처음 봤다. 마치 타이페이의 야시장같은 광경이었다. 그 옆에는 사람이 둥글게 모여 서서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발돋움을 해서 보니 택견 시합 중이었다. 두 남자가 인파에 둘러싸여 무술을 겨루는 모습은 람보 2의 오프닝처럼 보이기도 했다. 흥미는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까치발로 구경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관람을 포기하고 닭꼬치 하나를 먹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높은 곳에 올라가 보는 것이 바로 택견이다.)


쌈지길은 여전히 훌륭했다.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을 알면서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져 가운데가 비어있는 쌈지길은 항상 그 가운데 공간에 고무장갑이나 우산 같은 것을 걸어 작품을 연출해 두는 데, 이번에는 긴 천을 여러 장 걸어서 시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오늘 따라 외국인은 더 많아 보였는데, 그중에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단체로 온 듯한 일본인들은 어디서 도시락을 사다 계단에서 먹기 시작했다. 이것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플랭카드처럼 긴 천을 걸어두어 시장 같은 느낌이 났다.)

(2006년 2월은 좀더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2006년 2월의 고무장갑 장식)

(2006년 11월의 우산 장식)

나선으로 난 길을 따라 자리한 상점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언제 뭐가 있었는지 전부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자마자 '이런 게 있네?'하고 놀랄법한 점포는 없었으니, 상점가의 맥락은 크게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카드 지갑 따위를 구경하며 올라갔다. 구경하는 동안 서양인 세 명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셋 중 여자 둘이 똑같은 복장을 한 쌍둥이 자매였던 것이다. 금발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어 눈에 잘 띄는 그녀들을 선글라스를 쓴 남자 한 명이 보디가드처럼 근심스럽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쌈지길 맨 위까지 올라가니 또 못 보던 게 눈에 띄었다. 한쪽에 샛길이 있었는데, 통로 벽에 딱지 같은 것이 잔뜩 걸려있었다. 통로 위에는 사랑의 담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보니 남산의 철조망에 자물쇠를 걸어놓듯이 딱지를 사다 소원을 적어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이건 일본의 신사에 걸린 에마 같기도 하구나 싶었다. 통로를 따라 가면 오른쪽에 작은 카페가 있는 공간이 나왔는데, 본 건물 옆으로 살짝 빠지면 연애에 관련된 뭔가가 있는 게 또 기요미즈데라의 신사 같았다. 기요미즈데라에도 옆길에 연애 방면으로 용한 지슈 신사가 있다. 

(쌈지길 옥상. 이곳도 이렇게 찍어놓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기요미즈데라와 닮은 구석이 있다.)

(사랑의 메시지가 빼곡한 사랑의 담장. 혼자서는 영 지나기 께름직한 길이다.)

(남산에 있던 자물쇠 메시지들)

(담장을 지나면 오른쪽에 카페가 나온다.)

(지슈 신사와 닮았다기보다는 문득 떠올랐다.)

샛길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전시관이 하나 있었는데, 굳이 거기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봐서 나쁠 건 없겠지만, 시간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쌈지길 끝까지 가서 계단으로 내려왔다. 올라가며 볼 때는 한참 걸리지만 나올 때는 순식간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어쩐지 아쉬웠다. 

해가 져 가는 인사동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원 상가가 보였다. 저기서 일렉 기타를 산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나는 일렉 기타를 사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기타를 치지 않게 되었다. 갈구하던 걸 손에 넣으면 그때부터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인사동 길에 대한 감흥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좌판에서 선물할 호박엿과 옛날 문방구에서 팔던 과자들을 좀 샀다. 
인사동 길을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한 노인이 벽에 캔버스 천을 박아놓고 유화를 그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구경했다. 노인의 작품이 사방에 걸려있었는데, 그중에는 그 자리와 전혀 무관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대로에서 성곽과 남산타워를 바라본 그림도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도 현대가 아니라 그의 심상에 남아있는 과거의 정경인 듯했다. 나는  그림이 퍽 마음에 들었으나,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고 산다고 걸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 돌아섰다. 


 

(가운데 그림이 퍽 마음에 들었지만 살 수는 없었다.)


 

대로를 건너 역으로 걷다보니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이 나왔다. 짐이 느는 것은 반갑지 않았지만, 책을 좀 뒤적이고 싶었다. 
종로점은 그동안 가 본 어느 알라딘 중고매장보다 큰 것 같았다. 강남점도 크긴 했지만, 종로점이 좀 더 빼곡한 느낌이었다. 사람도 많았다. 나는 사기로 마음먹었던 책 두 권을 찾고, 거기다 어쩐지 눈에 띈 스페인 소설 한 권을 집어들었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눈에 띄는 책은 아무거나 집어보는 습관이 생긴 탓이다. 
결국, 들어올 때는 생각지도 않은 책 세 권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하늘이 멀리서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짧아지면서 가을이 오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면서, 내가 타는 열차가 호텔로 향하는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뻔한 한나절 짜리 나들이가 아니라 가을을 맞이하는 여행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이 반나절짜리 나들이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고 만족해야 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영화도 봤고, 모르는 길도 걸었고, 호박엿과 불량식품도 샀고, 닭꼬치도 먹고, 책도 세 권이나 샀다. 여행지에서 보낸 하루보다 딱히 못한 게 없었다. 결국 서울도 다니기 나름인 것이다. 
나는 조만간 해가 진 뒤의 서울을 다시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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