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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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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보다는 본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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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영화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007시리즈다. 사실 007시리즈라고 해봤자 내가 제대로 본 것은 피어스 브로스넌과 다니엘 크레이그편 뿐이며, 피어스 브로스넌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007이 아니라 다니엘 크레이그일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본 시리즈도 굉장히 재미있게 보긴 했다(레거시를 제외하고). 본 시리즈의 백미라면 뭐니뭐니해도 본이 요원의 능력을 발휘해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흉기로 둔갑시키는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볼펜이나 잡지, 수건으로 싸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감탄스럽다. 전화로 실컷 얘기한 끝에 상대를 골려먹는 장면도 멋지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기관의 요인들이 나와서 직원들에게 뭘 모조리 찾아내라고 닦달하는 장면이나, 정치적인 공방전을 벌이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온다. 요는 주인공을 보고 싶은데 주인공이 나올 시간을 잘라먹는 장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최신편이었던 레거시에서는 그 정도가 극에 달한 나머지 영화의 앞쪽 절반이 거의 기관들의 정치적인 문제와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는 경위에 대한 설명이었다. 보고 있자면 가끔씩 '지들끼리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주인공이나 보여달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에 비하면 미션 임파서블은 주인공 팀을 정말 정성들여 꾸준히 보여준다. 반전도 적잖이 있지만 대체로 누가 나쁜 놈인지도 확실하고, 기가 막힌 초과학 장비를 이용해서 철두철미한 계획을 수행하지만 항상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여러 명이 힘을 합쳐 굉장한 일을 해내는' 영화로서의 약점도 있는데, 그건 바로 그건 바로 무슨 고생을 하든 결국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잘 끝날거라고 안심하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가 주인공끼리 키스하고 행복하게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고, 007시리즈 역시 그렇지만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가 된 이후로는 좀 달라졌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피어스 브로스넌에 비하면 불량아나 건달로 보일 정도로 다혈질에 복수를 좋아하고 일처리가 지저분하다. 종종 벌레처럼 구르고 개처럼 얻어맞으며 원한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원숭이 손'이 소원을 멋대로 이루어주듯이 임무도 자기식대로 해결할 것같다. 가령 파티장 안의 범인을 찾아 사살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면 파티장을 폭파한 다음 전화로 '처리했습니다' 하고 무뚝뚝하게 보고할 것 같다. 그렇게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 멋지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가 되면서 또 좋아진 점은 예전작들이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초과학 장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Q도 기껏해야 발터 한 정과 발신기를 줬을 뿐이다. 신기에 가까운 요원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자기 자신의 집념으로 해결한다. 피어스 브로스넌처럼 힘없이 붙들린 채로 적이 자기 볼펜을 몇 번 누르나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 여자 저 여자 꼬시는 모습도 피어스 브로스넌 때보다는 맥락이 있고 하드보일드한 매력이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 때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오늘 밤을 보내고 싶군요' 같은 대사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인간이 있나 싶었는데, 다니엘 크레이그는 그런 지리멸렬한 대사를 하지 않는다. '총을 가지고 있군' 처럼 무미건조한 대사만 해도 충분하다. 대체로 상대도 이미 넘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시리즈에는 본드가 겪는 정신적 고통과 고독을 표현하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망나니처럼 놀아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무튼 다니엘 크레이그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감독들도 다르지만 그가 출연한 세 편의 007은 모두 이런 류의 영화치고 몇 번이나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영화가 좋으면 감독을 칭송해야 마땅하지만 세 편의 감독이 다 다르니 다니엘 크레이그를 칭송하는 수 밖에 없다. 007이라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상 본드의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아주 잘못된 일은 아니리라.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를 아주 오래도록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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