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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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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없는 음악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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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까지 워크맨을 썼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CDP를 썼다. 물론 그때쯤에는 MP3P도 상당히 많이 보급되었고, MD를 쓰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CDP가 차지하는 비중도 제법 되었던 것이다(사실 나야 MP3P 살 돈이 없어서 그랬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바로 음악 생활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돈이 좀 있다 싶으면 서점이나 음반점으로 가서 CD를 사서 들었고, CD를 몇 장씩 가지고 다니면서 친구들끼리 서로 바꾸어 듣기도 했다. 물론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시기라 인터넷에서 음원을 구해 집에서 CD를 마구 구워대기도 했지만, 그렇게 구운 CD는 그리 즐겨 듣지 않았다. 그렇게 복제한 물건은 그야말로 자켓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데이터에 불과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때는 CD장이 모자랄 정도로 음반을 샀는데... 시대가 지나니 나도 MP3P를 쓰게 되었다.
이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음반을 사도 리핑해서 듣게 되니,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것이든 돈을 주고 산 것이든 최종적인 결과물 자체는 동일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예전처럼 '이 음반은 꼭 사서 들어야겠군' 하고 마음 먹는 일이 없어졌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다운 받는 것이 발품을 팔아 음반점에서 음반을 사다 리핑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 그리하여 그 시절에 받은 음원들은 내 컴퓨터의 하드에서 여지껏 살아남고, 그렇게 음원을 확보한 음반은 구입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제는 집에서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책들을 가져다 중고 서점에 내다 팔고, 중고 음반점을 오래도록 구경하다 정말 간만에 음반 하나를 사왔다. 집에 도착해서 그 음반을 리핑해서 듣는데, 음반의 곡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반을 사서 리핑하고 아이튠즈와 책장에 정리해 넣는 과정 자체가 새삼스럽게 즐거웠다. 음원을 불법적으로 다운 받는 습관이 그런 음악 생활의 즐거움을 방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저작권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편하게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서 커다란 부분을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음원들을 삭제했다. 놔두고 음반을 천천히 사서 모으는 방법도 있지만, 멀쩡히 듣고 있는 음원을 다시 사기도 힘들 것이고, 그래서는 음반을 사봤자 별로 기쁘지 않을 게 뻔하다. 여러 번 들어서 익숙한 곡을 만질 수 있는 음반으로 소유할 때 느끼는 기쁨이야말로 멋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드에서 많은 음반이 사라졌다. 스스로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취미의 일부가 부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고 나니 몹시 부끄럽다. 그리고 그런 한편으로 오랫동안 반밖에 즐기지 못했던 취미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건 그렇고 오랫동안 음악을 CD로 들은 탓인지 음원은 리핑을 하든 어쨌든 근본적으로 책장에서 꺼내어 만지고 자켓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그 컨텐츠겠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껍데기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음원과 내 방 책장에 꽂혀있는 음원 사이에는 모니터 안의 여자친구와 모니터 밖의 여자친구 사이에 있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차원이 벽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LP판이 요즘에 와서도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리라. 나 역시 턴테이블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꿈이긴 한데,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턴테이블 이전에 일단 외국 음악만 듣다보니 당장 들을 CD 구하는 것조차 번거롭다. 아이튠즈를 이용하면 음원 자체는 간단히 구할 수 있지만 기왕이면 실물을 소유하고 싶다. 디지털 세대와 거리가 멀 수록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돈을 쓰기 싫어 한다는데, 나 역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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