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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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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하는 축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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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 시절 축제에 대해 아무 추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거의 있으나 마나 한 행사였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도 "축제? 그건 그냥 집에 일찍 가는 날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사는 동네는 대체로 축제가 학교의 중요  행사로 자리 잡고 있어서, 축제가 가까워지면 부마다 학생회와 협의해서 교실을 배정받고, 행사를 준비하고, 심지어 하루 전에는 학교에서 밤을 지내기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듯이 모든 반이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은 반드시 특별활동을 해야 했고, 특별활동 부 중 많은 수가 축제에 참가했으므로 학생은 거의 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축제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생회는 며칠 전부터 다른 학교 교문 앞까지 가서 홍보책자를 배포하고 인사하는 것이 동네 전체의 관례였기 때문에 축제 시즌이 되면 여고생들에게 인사하거나 여고생들의 인사를 받는 것이 모두의 소박한 행복이었다. 

어쨌건 나는 고등학교때 초자연 과학부였고, 타로카드를 했다. 꽤 인기 있는 부였기 때문에 2학년 때는 면접까지 봤고, 그렇게 뽑은 20명 정도에게 타로카드 강의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점쟁이를 육성한 뒤 축제 때는 천을 떼어다 교실에 부스를 몇 개 만들고,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불꽃이 일렁이는 모양의 조명까지 사서 장식하고 500원 정도에 점을 쳤다. 축제 날은 고3이 유폐된 건물만 제외하면 학교 전체가 개방되었으므로, 능력있는 아이들이 이성 친구들을 잔뜩 불렀고, 그렇게 불린 친구들이 친구들을 부르고, 그런 식으로 온 학교에 여고생이 가득찼다. 그리고 각 부의 호객꾼들이 재주좋게 여고생들을 자기네 부로 모셔가는 것이다. 초자연과학부는 타로점을 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이 가득찼으므로 나를 비롯한 점쟁이조는 교대로 끊임없이 점을 쳐야 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타로카드는 거의 만지지도 않게 되었지만 어쨌든 즐거웠다. 

그리고 물론 다른 학교 축제에 놀러가기도 했다.  그 때가 아니면 언제 여고에 들어가겠는가! 그때 간 것이 어느 학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발 보고 가라는 여고생의 호객에 못이기는 척 끌려가서 시화전을 감상하기도 하고, 금관악을 듣기도 했다. 시화전은 시화보다는 설명을 해주는 아이가 좋았고, 금관악은 과자를 먹으며 스타워즈 오프닝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에는 대강당에서 빅마마의 라이브공연을 보고 감탄했다(빅마마 멤버 중 한 명이 그 학교 출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끝내주는 하루였다. 지금도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이를 속이고 숨어들어가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반면에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의 축제는 도무지 흥이 나질 않는다.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의 축제라고 해봤자 결국 외대 이야기지만 세계 각국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흥이 나지도 않고 보고 싶은 것도 전혀 없다. 우리 동아리를 비롯해서 많은 동아리도 참가하지만 고등학교때 느끼던 열의나 맹목적인 즐거움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과의 주점이나 전시회도 가보고 싶지만 주변에서 전혀 호응해주질 않으니 전부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 다들 이렇게 축제를 남의 일로 생각하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것 같다. 우선 대학에서는 수업을 학년별로 나누지 않기 때문에 귀찮은 상하관계가 생기고(이 상하관계란 애초부터 술을 퍼먹이고 퍼먹히는 관계로 시작한다), 축제 행사도 이런 상하관계를 원동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게 싫은 사람들은 절대 가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둘째로 고등학교때와 달리 다들 바빠졌으며, 셋째로 애시당초 "즐거운 축제"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축제가 남의 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동안 첫번째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해왔는데, 알고보니 세번째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모양이다. 뭐든 어릴 때의 경험이 중요한데, 어릴 때부터 "축제는 집에 빨리 가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대학생 때는 "축제는 시끄럽고 학생회에서 돈지랄하는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학생과 축제가 따로 놀 수 밖에 없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정말 축제 따위는 한국에서 사라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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