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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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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과 은닉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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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를 보면 청소년인 남자 주인공의 침대 밑에서는 반드시 성인 잡지가 튀어나오고, 미국 하이틴 영화에서도 플레이보이 따위가 적잖이 발견되는데,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성인 잡지가 그렇게 꼭 봐야만 할 정도로 재미있느냐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어째서 그렇게 발견되기 쉬운 곳에 숨기는가 하는 것이다. 성인 잡지야 그 나름대로 읽는 재미가 있을 테니 그렇다 쳐도, 그걸 침대 밑에 숨기는 것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침대 밑이란 언젠가 청소를 하기 마련이라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실상은 방바닥에 놓은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침대 밑은 귀신이 흔히 등장하는 심령스팟에 가깝다. 그런데도 굳이 거기에 성인 잡지를 두는 것은 귀신이 그걸 보고 ‘이런, 민망해서 도저히 여기 있을 수가 없군’ 하고 물러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기야 침대 밑에서 성인 잡지도 나오고 귀신도 나오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영적으로 불안정한 공간에 야한 무언가를 놓는것은 부적만큼이나 영적 기운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 남이 봐선 안 될 물건을 정말 지능적으로 악착같이 숨기는 작품도 있었다. 바로 만화 “데스노트”의 주인공 라이토였는데, 이 녀석은 머리도 비상한 데다 손재주까지 좋아서 이중 서랍을 만들고 특정한 방법으로 열지 않으면 설치해 둔 가솔린이 데스노트를 태워 버리는 장치까지 만들었다. 물론 성인 잡지를 그렇게 보관한다면 그건 편집증이라고 해도 좋을 거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모독적인 잡지가 아니고서야 남에게 보여주느니 책상 서랍과 함께 태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튼  데스노트는 남의 손에 넘어가면 심각하게 곤란한 물건이니까 나름대로 영리한 조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기세등등하게 만들긴 했는데 나중에는 매번 볼펜심을 뽑아서 구멍에 꽂아 발화장치를 해제하는 게 귀찮아진 게 아닐까?

현실적으로 미끼를 던져두는 타입도 있었다. “현시연”의 “마다라메”가 그랬다. 정말 숨겨야 할 물건은 책장 뒤에 숨겨두고, 성인 SM 비디오를 엉성하게 숨겨서 일부러 발각된 것이다. 찾는 쪽에서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고, 진짜 비밀은 모른 채 탐색은 끝났다. 나름대로 피해가 발생하긴 하지만 이것 참 현실적인 방법이다. 시체를 암매장하고 그 위에 짐승의 시체를 묻어두면 냄새로 추적하고 파보더라도 시체는 발견하지 못한다는 트릭이 있는데, 그것과도 비슷하다. 미드 “덱스터”의 덱스터도 연쇄 살인마로서 가정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아버지의 총을 핑계로 살인 연장을 숨긴다. 그러면서 덱스터는 자기 도구를 놓는 헛간까지 지으니, 비밀을 숨기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타입이 아닌가 싶다. 

성인 잡지나 살인 연장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뻔히 드러내기는 뭣한 물건들이 있다. 어릴 때는 장난감 총이나 만화가 그랬는데, 그런 것들은 대체로 책상 아래쪽 책장에 보관했다. 절대 발각되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쑤셔박는 것만으로 해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몰래 산 게임기 박스, 몰래 피우기 시작한 담배나 지포라이터 기름 따위는 단순히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두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책상 밑이야 침대 밑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는데, 일단은 책상 서랍 뒤가 쓰였다. 책상 서랍과 그 서랍을 둘러싼 박스 뒤쪽 사이에 10센티미터 정도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라면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존재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공간이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라이토나 마다라메, 덱스터도 무릎을 치고 애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랍을 끝까지 빼낸 다음 팔을 깊숙히 집어넣어 잘 보이지도 않는 뭘 꺼낸다는 건, 볼펜 심으로 발화장치를 해제하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여간 귀찮은 짓이 아니라 꺼낼 일이 없는 소장품이나 박스를 보관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 방법은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보드게임 박스에 넣어두는 것이다. 보드게임 박스 따위는 방안에 널리고 널린 데다 제법 크고, 안에서 뭘 꺼내기도 간편하며, 무엇보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열어볼 일이 없다. 그리고 박스가 하나 뿐이라면 의심스럽게 보일 법도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박스를 하나하나 열어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비슷한 박스가 많이 있으니까 이걸 딱히 숨길 필요도 없다. ‘나무는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나무 옹이에 보석을 숨겨둔 셈이다. 이제 와서는 숨길 것도 얼마 남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소리지만.

예전에 친구들과 물건 숨기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친구는 아예 자기 방에 개인 금고가 있다고 했다. 가족이라도 남들이 봐선 안 되는 물건은 모두 거기 보관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처럼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법이 없겠구나 싶었다. 비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것처럼 살면서 이리저리 물건을 숨기고 찾아내고 모른척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남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게 훨씬 깔끔하고 심지어 안전하지 않은가 말이다. 위에 소개한 캐릭터들에게도 하나씩 사주고 싶을 정도다. 그들에게도 안전을 보장받은 공간이 있었더라면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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