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캡이라고 ‘숙면을 위해 자기 전에 마시는 술’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나도 그 비슷하게 술을 마시곤 한다. 뭐,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심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누웠다 하면 금방 잠드는 인간이라 나이트캡을 빙자한 단순 음주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하루 일과를 만족스럽게 마쳤거나 불만족스럽게 마친 날에는 종종 하루를 마무리하는 종교적, 혹은 보상적 의미에서 술을 한 잔 정도 마시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마시는 술은 집에서 담근 술일 때도 있고, 양주일 때도 있고, 와인일 때도 있고, 스크류 드라이버처럼 간단한 칵테일일 때도 있고, 캡틴큐처럼 저렴한 술일 때도 있다. 요는 기분따라, 상황따라 다른 셈인데, 그렇게 조금씩 마시는 술도 쌓이다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어느날 보면 술 한 병이 작살나 있다. 이게 민망하기도 하고 재정적으로 부담되기도 해서 얼마 전부터 술 대신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의 좋은 점은 일단 아무리 많이 마셔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몸에 좋다고도 하는데, 정말 좋은지는 체감하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다만 최소한 정신이 혼미해지지는 않으니까 술보다야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리고 찻잎을 넣고 수돗물로 끓여내는 것이니까 술에 비해 압도적으로 싸다. 잭 다니엘 같은 것과 비교하면 공짜나 다름없으니, 일 파인트씩 마셔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과연 술 대신 차를 마시는 게 나이트캡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있다. 하기야 깊이 자려고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에 알코올이 들어있어 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카페인이 들어있는 녹차 따위로 바꾼다는 건 잘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나이트캡을 창안한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술병으로 때릴법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야 원래 잠드는 데 술기운이 필요없는 사람이라 순전히 정신적인 이유로 나이트캡을 즐기고 있으니 애초에 뭐든 별로 상관없었던 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에 쭉 들이켤 수 없는 액체'면 나이트캡 해결이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밤에 차를 마시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차가 좋긴 하지만 방에서 나가서 소리를 내며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것도 귀찮고, 무슨 차를 마실까 고민하는 것도 영 번거로운 참에 뭐든 별로 상관없다는 걸 깨달으니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찾아낸 것이 마시는 식초다. 흔히 ‘감식초’로 대표되는 과일 식초들인데, 나는 그중에서 ‘석류초’를 골랐다. 다른 것보다 특별히 좋아해서는 아니고 단순히 값이 쌌기 때문인데, 사서 마셔보니 썩 마음에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식초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신 탓에 그대로 마시기 힘들기로는 도수 높은 술 못지 않다. ‘한 번에 쭉 들이켤 수 없는 액체’라는 단 하나뿐인 조건에서는 만점인 셈이다. 게다가 신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맛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마시기 힘들기도 하고 그대로 마셔대면 차에 비해 비용이 높아진다는 게 문제였는데, 물에 타서 먹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애초에 병에 물에 타서 먹으라고 적혀있기도 했고.
아무튼 이제 술 대신 식초를 마시는 생활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이게 마음에 들기도 했다. 술처럼 장에서 꺼내는 것부터 어딘지 흡족한 구석이 있고, 찬물에 붉은 식초가 퍼져가는 걸 보는 것도 마음에 든다. 신기하게도 아래쪽으로 갈수록 농도가 진해지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같은 한 잔이지만 그날그날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종일 놀아 재꼈으니 조금만 타 주지.” “아앗, 제발, 조금만 더 줘요!” “크큭, 정말 욕심쟁이로군. 어쩔 수 없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농도를 조절하고 있노라면 세상의 욕망이 이 한 잔에도 있구나 하고 깨닫는 바도 있다.
부처가 아기를 잡아먹는 귀신이던 귀자모신에게 아기를 먹고 싶을 땐 이걸 대신 먹으렴, 하고 석류를 줬다는 얘기도 있는데, 귀자모신이 그 뒤로 석류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는 얘기는 보이지 않으니 나는 신이 되지는 못했지만 한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성공한 셈이다. 그나저나 석류초를 마시는 덕에 '식초는 몸을 유연하게 한다', '석류는 여성에게 좋다’ 두 가지 속설을 한 번에 체험하게 되었는데, 딱히 유연해진 것 같지도 않고 별로 여성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않는 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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