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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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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취향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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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제작 “인터스텔라”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초반에는 좀 지지부진하고 지루한 감이 있긴 하지만 중반부터 그야말로 쉴 틈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서 대미를 장식하고, 그러고도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결말까지 치달아 영화가 끝났을 때는 “끝이야? 벌써 세 시간 끝?”이라고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래픽은 물론이고 스토리도 훌륭해서, 중반까지는 “크리스토퍼 놀란도 결국은 ‘유년기의 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군.” 싶다가 결국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큰 뜻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그래서 나처럼 우주와 SF를 좋아하는 사람, ‘웜홀’, ‘블랙홀’ 따위 단어에 가슴이 뛰는 사람은 물론이고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이 영화에는 열광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재미없었다는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전개는 지루하고, 과학적 고증은 엉망이며, 휴머니즘은 싸구려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긴 했다. 분명 기똥찬 액션이나 서스펜스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 행성 저 행성을 돌아다니는 한편으로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도 보여주는 전개는 보기에 따라서는 맥이 끊기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엄밀히 생각해보면 과학적으로 그럴 리가 있나 싶은 부분도 있었다. 늙어가는 속도가 서로 달라져 슬퍼하는 모습도 꽤 지겹도록 보아온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늙었는데 자기만 젊은 상태 그대로라는 얘기는 용궁 얘기 때부터 이어진 셈이니까. 그러고 보면 식상한 휴머니즘에는 짠 점수를 주는 나도 이게 SF가 되고 보면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자식이 조로증으로 부모보다 먼저 늙어가는 가운데 펼쳐지는…’ 어쩌고 하는 영화라면 절대 보지 않겠지만, 같은 소재라도 ‘상대성 이론에 의해 시간의 속도가 영향을 받아…’ 라면 ‘이야, 이것 참 좋은 이야기구나’ 하며 눈물을 훔치는 것이다. 요컨대 뭐든 취향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영화가 취향에 따라 평이 갈리기 마련이지만 인터스텔라 같은 SF, 또는 공포물 같은 ‘장르’ 영화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에 보이는 건 다 때려 부수고 정의 사도가 악당을 두드려 잡는 액션 블록버스터라면 다들 별생각 없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따라가게 되는 데 비해, 이런 장르물은 각자의 주관이 뚜렷하게 잡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드래그 미 투 헬”이 그랬다. 모 영화 평론가가 보기 드물게 멋진 공포 영화라고 썼기에 믿고 봤더니, 이건 공포 영화의 탈을 쓴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싹한 기분을 느낄만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만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어이쿠, 하고 넘어져서 여주인공의 가슴을 만지는 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시체와 엉겨서 썩은 물이 입에 들어가고 비명을 지르는 영화를 공포라고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볼 때처럼 처음부터 이건 여차하면 웃으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면 재미있을 영화였다. 그런데 나는 정반대로 무서워할 준비를 하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공포영화인데 어째서 좀 웃기지? 참아야 하나?’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 대부분이 그런 애매한 분위기로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그 평론가의 영화 평은 전혀 믿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유 아 넥스트”라는 공포 영화를 봤다. 가족 모임이 한창인 와중에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들고 괴한들이 습격하는 가운데 여주인공이 전사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내용이라 처음부터 이건 괴작이겠거니 하고 봤는데, 아니나다를까 요상한 작품이었다. 주성치의 킬빌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주성치가 만들었다면 훨씬 직설적으로 웃겼겠지만. 어쨌든 특수효과와 액션은 괜찮았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을 애매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근에 모 유명 트위터리안이 “유 아 넥스트”가 참 재미있으니 한 번 보라고 트윗한 걸 봤다. 처음에는 나만 당할 순 없지, 싶은 생각으로 하는 낚시인 줄 알았는데, 문맥을 보니 진지하게 추천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취향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 써놓은 감상도 내 취향을 거친 것들이라 전혀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영화를 고를 때는, 특히 공포 영화를 고를 때는 평론가의 말보다는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게 나은 것 같다. 추천을 해줄 때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재미있게 봤다면 ‘인터스텔라’도 재미있을 거야.”처럼 필터를 하나 거치는 게 좋다(사실 예는 너무 당연한 소리다). 자신의 평점을 기반으로 새 영화를 추천해주는 서비스인 “왓챠”도 이와 비슷한 방식이라 그럭저럭 믿을만하다. 적어도 왓챠에서 끔찍하게 재미없을 거라고 경고하는 영화는 확실히 재미가 없다.  “애나벨”이 개봉했을 때 재미없을 거라는 경고를 받고도 봤는데,  정말이지 재미없다는 점이 재미있을 지경인 영화였다. 그 뒤로 왓챠에 대한 신뢰도가 좀 더 높아졌다. 

다시 얘기를 돌려서, 이것저것 만들면서도 이런 취향들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뭔가를 만들어도 세상 누군가는 이따위 것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개탄하겠구나 싶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네모를 좋아하는 사람과 세모를 좋아하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네모난 세모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은 내 취향대로 만들고 내 취향대로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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