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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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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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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목욕을 싫어했다. 어린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나도 숙성될 때까지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시간을 죽이는 게 지겹고 고역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라면 물 속에서 가지고 놀 장난감도 있었고 장난도 얼마든지 칠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나았던 것 같은데, 그보다 조금 자란 뒤로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도, 장난을 칠 수도 없게 되어 전보다 더 지루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목욕을 하고 나면 종일 정신이 몽롱해서 긴 목욕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목욕이 좋다. 어릴 때는 인내의 어트랙션에 불과했던 사우나는 더 좋아한다. 그걸 결정적으로 깨달은 곳은 엉뚱하게도 헬스클럽이었는데, 당시 입대를 앞두고 운동이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다니던 헬스클럽에는 사우나가 딸려있었던 것이다. 있으니까 한번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어 들어가 보았는데, 이게 웬걸, 운동으로 노곤해진 상태에서 들어간 사우나는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잘 반죽 된 뒤에 오븐에서 익어가는 빵처럼 멋진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운동을 하는 시간보다 사우나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 지경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우나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아줌마들이 나타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목욕이 좋다는 걸 실감한 것은 또다시 엉뚱하게도 ‘캐리비안 베이’였다.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알다시피 캐리비안 베이는 퍽 즐겁지만 입장하는 것까지가 몹시 고역스럽다. 머나먼 길을 거쳐 그곳까지 간 다음, 신기루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뙤약볕 아래 서서 의욕을 잃은 좀비 떼처럼 끝없는 줄에 끼어 느릿느릿 전진해서 표를 사고, 입장 시간까지 에버랜드에서 시간을 죽이고 오면 물놀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싶은 상태가 된다. 물론 물에 들어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이 나지만,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해가 질 때쯤이 되면 녹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쯤 되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물을 찾아 몸을 담그게 되었다. 다행히도 스파 같은 시설이 있어서 몸을 담근 채 공기 마사지를 받자니 영영 이것만 하고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당연히 그러진 못하고 끔찍스러운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돌아온 뒤,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쉬지 않았으면 자전거를 타고 또 몇 킬로를 달릴 생각은 절대 못 했을 것이다.

아무튼 죽도록 피곤할 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그나마 정신이 든다. 반대로 몸이 노곤해져서 졸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샤워나 목욕을 하고 나면 두어 시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체력과 정신력이 회복된다. 그래서 여행할 때도 숙소에 돌아오면 뜨거운 물에 오래도록 몸을 담근 뒤,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 욕조가 없는 숙소는 가지 못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몸을 담근 채 시간 죽이기가 꽤 수월해졌다. 스마트폰과 팟캐스트라는 문명의 이기가 생긴 덕에 좋아하는 방송을 들으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예전에도 라디오가 있긴 했지만 라디오는 원할 때 원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수시로 채널을 바꿔줘야 하니까 쓸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라디오를 듣지 않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방송은 음악을 별로 틀지 않고 진행자가 사연을 읽거나 게스트를 초빙해서 영화, 여행 얘기를 나누는 것들인데, 그런 방송을 듣고 있자면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시간은 퍽 귀중한 시간이다. 다음날까지 그렇게 잠들고 싶기도 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렇게 잘 수 있는 침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근 채 자면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온몸의 피로도 사라지고 매일 아침 다시 태어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드래곤 볼》을 보면 손오공이 그런 회복시설 안에서 산소호흡기를 단 채 ‘크리링의 기가 사라졌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볼 때마다 부럽다. 나라면 누구의 기가 없어져도 느끼지 못한 채 쿨쿨 잠들어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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