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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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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엉덩이를 위한 슬림핏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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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쏙 드는 옷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것은 일단 디자인이 완전히 마음에 드는 옷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전반적인 모양은 마음에 드는데 주머니 닫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가 꼭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하나의 관문을 지난 다음에 따질 일인데, 그 관문이란 바로 몸에 맞느냐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디자인이 끝내줘도 입을 수 없으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아닌가? 
최근에 모 쇼핑몰에 가서 이것을 다시금 절감했는데, 내게 딱 맞는 바지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한 디자인을 무려 네 사이즈나 입어봤지만 딱 맞는 게 없었다. 허리에 맞추면 바지가 올라가지 않고, 엉덩이에 맞추면 허리에 주먹이 들어갈 지경이다. 요즘 유행하는 '슬림핏'이라는 것들은 다 이 모양이다. 물론 허리에 비해 엉덩이가 큰 내 잘못이라면 잘못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라고 좋아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옷에 맞춰 사람이 육체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뒤바뀐 발상이다. 
그리고 이 '슬림핏'이라는 게 불편한 게 바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셔츠나 마이(양복 웃옷)도 흔히 슬림핏으로 나오곤 하는데, 이것들도 입어보면 답답해서 마치 구속구라도 입은 듯한 기분이다. 어깨가 좁지 않은 편이라 움직이다 보면 옷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국, 내가 편히 입을만한 옷이라고는 슬림핏이 아닌 것들뿐인데, 웃옷은 그렇다 쳐도 바지는 슬림핏이 아니어도 마땅한 옷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 나오는 바지들은 슬림핏이 아니어도 대부분 밑위(가랑이부터 허리까지)가 짧은데, 이런 옷들은 하나같이 불편해서 입을 수가 없다. 많은 옷들이 그렇지만 남이 입은 걸 보면 참 멋진데, 내가 입어보면 꼴사납다. 그래서 최근에는 새 바지 사기를 사실상 포기하고 산 지 몇 년 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랜 친구처럼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던 바지만을 반복해서 입고 있다. 슬림핏이라는 흉악한 유행이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허리도 엉덩이도 편안하고 밑위도 충분하다. 거울에 비춰보면 확실히 펑퍼짐한 감이 좀 있지만, 어디 잘 보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편한 게 제일이다. 
예전에 모 탄산음료 광고 중에 한 아가씨가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느라 안간힘을 쓰다 결국은 단추가 떨어지고, 그녀는 잠시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탄산음료를 마신다는 것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잘 만든 광고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는 잔혹할 정도로 날씬한 것을 추구하고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멋있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키가 작고 날씬하지 않아도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각광받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날씬한 여성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니까 각광받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겠지만, 옷가게에 들어갔다가 마음에 드는 옷도 아니고 맞는 옷이 없어서 돌아 나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전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그건 당신 체형이 잘못된 겁니다." 라고 반박할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으리라. 정말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달리 할 말은 없다. 왜 하늘은 나를 내고 또 슬림핏을 냈는지 한탄할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긴 했지만, 사실 맞는 바지를 구할 곳이 정말 어디에도 없지는 않다. 바지들 중 언제 샀는지 기억이 나는 것 두 벌은 구제샵에서 샀는데, 놀랄 정도로 딱 맞고 편안하다. 구제샵에 가서 사이즈를 보고 이것 저것 입어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누가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딱 맞는 바지가 한 벌쯤은 나오는 법이다. 그런 물건을 발견하면 하느님이 한 쪽 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창문을 열어두신다는 말처럼 슬림핏을 낼 때 구제샵을 열어두셨구나 싶어 기뻐 날뛰게 되지만, 그런 한편으로 내 단골 가게의 탈의실에 덕지덕지 붙은, 한참 철 지난 광고지들을 보면서 옷을 갈아입고 있노라면 가끔씩은 비 오는 날 박스에 담겨 버려진 동물에게 우산을 씌워 주면서 '넌 나와 같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듯한 기분이 되곤 하는 것이다……. 이것도 자본주의의 비극이라면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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