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저링의 내용이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산 공포영화에서는 유난히 새집으로 이사 간 뒤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직장이 바뀌거나, 아니면 요양을 위해서 새집으로 이사 가면 십중팔구 호된 일을 겪는다. 동물이 허공을 보고 짖거나, 집안이나 어떤 공간에 가지 않으려고 하거나, 창문에 새가 부딪쳐 죽기 일쑤고, 집을 살 때는 몰랐던 지하실이나 다락방이 발견되며, 어린아이가 공상의 친구를 만들어 허공에 대고 이야기한다. 이 중에서 특히 마지막 현상이 가장 치명적인데, 이런 경우에는 진지하게 전문가의 상담을 받거나 퇴마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흔히 '애들은 원래 어릴 때 공상의 친구를 만들곤 하잖아요' 하고 웃어넘기는데, 개인적으로는 주변에서 그런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미국에서는 정말 혼자 남은 아이들이 공상의 친구를 만들고 노는 걸까? 아니면 단지 영화 속에서 당연시되는 장치인가?
그리고 이렇게 공상의 친구를 만들고 노는 아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보통 서툴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 그림에는 물론 그 공상의 친구나 초자연적 존재가 그려지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이 가족은 끝장났다고 봐야 한다. 정말, 공포 영화 속에 나오는 애들은 탄광의 카나리아와 마찬가지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공포 영화에서 이사를 하고 살아남는 방법 몇 가지를 뽑아봤다.
-가급적 작은 집으로 갈 것. 특히 쓸데없이 길고 어두운 복도가 있는 집은 피할 것.
-집을 구할 때 이상하게 값이 싸다면 그 집에서 살인 사건이나 사교의식 따위가 없었나 알아볼 것.
-애완동물의 행동에 주의할 것.
-액자와 샹들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해 둘 것.
-집을 살 때는 있는 줄도 몰랐던 지하실, 다락방, 옷장 뒤쪽 등의 비밀 공간이 발견된다면 신속히 봉인할 것.
-집안 곳곳에 어두운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조명을 배치할 것.
-침대는 서랍이 달린 것으로 골라 아래에 사람이 숨거나 잡동사니가 들어갈 수 없게 할 것.
-아이들이 공상의 친구를 만들 정도로 심심하게 방치하지 말 것.
-아무리 멋진 물건이라도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물건을 함부로 줍지 말 것.
-전문 지식 없이 카메라를 비롯한 이상 현상 관측 장비를 설치하지 말 것.
-미신적 의식과 퇴마사를 무시하지 말 것.
이렇게 적고 보니 이사라는 것도 참 큰일이다. 나야 이사를 기껏 두 번 밖에 해 본 적이 없고, 한국의 일반적인 집이야 빌라나 아파트니까 집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 따위를 느낄 일이 없지만, 확실히 이 정도로 영화 내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 미국에서 이사란 자주 있는 일이고, 새집에 적응하는 과정이나 큰 집에 대한 불안감은 전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정서인 모양이다. 하기야 이사를 가면 애완동물들도 적응하지 못해서 보기에 영 편치 않은 행동을 할 것이고, 누가 어디 있나 없나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로 집이 넓다면 겁이 날 법도 하다. 지하실이나 다락방도 대체로 무서운 공간인 게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나 홀로 집에'에서도 지하실의 난로가 말하는 모습이 나왔다. 케빈이 닥치라고 하면서 그 공포는 극복되지만.
하지만 이사도 다니지 않고 집도 좁아서 쓰지 않는 방이나 지하실도 없을뿐더러 애도 애완동물도 없는 입장에서는 이런 흐름에 영 공감할 수가 없다. 공포영화를 봐도 또 이런 식이군, 하고 팔짱을 끼고 보게 된다. 최근에는 컨져링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이것도 결국 마찬가지 흐름에 엑소시즘이 강조된 작품이었다. 새집의 공포를 이상 현상으로 강조하다가 악마의 빙의와 가족에 대한 위협으로 넘어가고, 이것을 퇴마의식과 가족애로 극복하면서 끝난다. '집'과 '가족'이라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철저히 공격하고 여기 저항하는 드라마로 진행되는 셈이다. 종교적 암시나 원혼, 혹은 괴생명체, 또는 피와 살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 아쉬웠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다루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퍽 재미있게 무서워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올만한 영화였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가족형 공포였던 셈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형식이 잡혀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아직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도 누구나 인정할만한 공포 형식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다. "집"이라는 가치를 공격하는 공포는 꽤 많지만, 아무리 그런 걸 많이 봐도 실제로는 집안에 공포가 숨을 구석이 없으니까 역시 이건 한국 상황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한국에서는 "인적이 없는 골목길"과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가 가장 공통적으로 두려워할 만한 소재 같다. 여기에 "시어머니"까지 등장하면 금상첨화다.
- 주인공은 이제 갓 결혼해서 아파트로 이사한 새댁.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보내지만,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신랑이 늘 청소를 해놓는 줄 알고 고마운 나머지 선물을 준비했더니 신랑은 정작 바빠서 청소한 적이 없다는 것. 착각일 거라고 애써 두려움을 떨치는 그녀는 어느 날부터 귀가할 때마다 골목길과 주차장에서 자신을 쫓는 시선을 느끼는데.......
생각나는 대로 써 본 이 이야기에서 물론 범인은 시어머니다. 오랫동안 하나뿐인 아들에게 의존하다 결국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공동현관 키를 만들어서 낮만 되면 신혼집 청소를 하러 오고 새아기의 행태를 감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포영화 하면 꼭 들어가는 반전까지 추가하면, 사실은 주인공이 실직한 충격으로 정신이 분열되어 낮에는 집안일을 하면서 자신이 회사에 있다고 생각하고 밤에는 제정신이 돌아와 그 상태를 이상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되겠다. 시어머니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고,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공포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싹한 얘기면서 한국인 정서에 딱 맞지 않은가. 이것저것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런 영화가 있다면 꼭 보고 싶다.
시어머니 해서 생각난 건데, 한국 공포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올가미"와 "하녀"였다. 우연히 두 작품 다 시어머니가 나온다. 시어머니란 그다지 원치 않게 생겨난 가족이면서 내가 절대 거역할 수 없고 배우자도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무서운 것 같다. 퇴치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는 귀신보다 더 무섭다. 쓰면 쓸수록 한국에서 시어머니처럼 무서운 소재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시어머니가 연쇄 살인마라든가, 악령에 빙의 당한다는가 하는 영화가 나와주지 않으려나.
(이미지의 저작권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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