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두세 번쯤 동네 미소녀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제복을 입고 군사 훈련을 받는다. 다들 오래간만에 쥐어보는 M16A1의 무게감에 들떠서 야단이다.... 이렇게 써두면 마치 라이트 노벨이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지만, 사실은 라이트 노벨도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단순한 나의 망상이다. 최근에 갔던 동미참 훈련에서 나는 이런 망상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동미참 훈련이란 동원 훈련과 달리 3일 내내 훈련장에 출퇴근하며 받는 군사 훈련인데, 다른 날씨에 받는다고 특별히 편해지지는 않겠지만, 요즘처럼 찌는 날씨에 받자니 이만저만 고역스러운 게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마당에 방탄모를 쓰고 소총을 매고 걸으니 그것만으로 혼이 빠질 지경이었고, 비가 그친 산속에 있자니 온갖 날벌레가 날아들어 쫓아내느라 손을 쉴 수가 없었다. 밥도 당연히 맛이 없어 소나기를 맞거나 땡볕을 쬐며 줄을 선 끝에 PX에서 라면이나 소시지, 초코바 따위를 사다 먹었다. 구령대의 벤치에는 누군가 먹고 난 음료수 따위를 버려놔서 파리가 까맣게 꼬였다. 정말 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이런 불평을 늘어놔 봤자 대책 없이 길어지고 읽는 사람도 고통스러울 뿐이니 단순한 불평은 여기까지만 하자. 아무튼, 나는 이런 고통을 견디기 위해 훈련 첫 날부터 자신이 미소녀들과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뇌내 변환을 시작했는데, 그러고 보니 뜻밖에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미소녀로 바뀌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워지는 장면이 많았다.
일단 미소녀들이 제복을 입고 한데 모인다는 것부터 훌륭하다. 오래간만에 입는 군복 바지가 맞지 않는다고 울상을 짓는 모습도, 더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도 귀엽다. 강당 책상에 엎드려 자는 모습이나, 앞 분대가 나갔으니 시원한 자리로 옮겨달라고 요구하는 모습도 예쁘다. 핸드폰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숨겨뒀다가 몰래 쓰는 모습은 역시 여고생답고, 점심 시간에 비가 와서 군복 상의를 머리에 쓰고 다니는 모습은 쓰개치마를 쓴 것 같아서 재미있다.
미소녀: 조교야, 내일은 뭐 해?
조교: 예? 예비군 훈련을...
미소녀: (까르륵) 아니, 너 말고 우리.
하는 대화도 생생한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미소녀들 앞에서 긴장한 조교는 여간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각개전투가 끝난 뒤에는 동대장의 허가 하에 다들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참 건강미 넘치는 멋진 광경이다. 이 광경을 볼 수만 있다면 철조망 따위는 몇 개든 밑으로 통과할 수 있다.
쓰면서 점점 신이 나는 걸 보니, 정말 상상력은 위대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제정신인 이상 이런 망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주머니에 넣어간 문고본 소설과 포켓 사이즈 소설을 틈틈이 읽으며 버틴 시간이 더 길었다. 한국에는 주머니에 넣어도 부담되지 않는 사이즈의 책이 얼마 없긴 한데, 몇 권 구해놓으면 이럴 때 요긴하게 쓰인다. 아무튼 망상과, 책만 있다면 시간은 어떻게든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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