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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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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작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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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콘텐츠라면 뭐가 되었든 간에 입이 벌어질 정도로 장대하고 스케일이 큰 대작이 있는가 하면, 그리 대단한 일도 일어나지 않고 기껏해야 배경도 한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품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대작보다는 그런 소품 같은 작품이 더 좋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반지의 제왕"처럼 어마어마한 작품보다는 "미드나잇 인 파리"나 "비포 선셋" 같은 작품이 좋다. 
대작은 보는 내내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담?" 하고 끊임없이 감탄하고, 장대한 이야기에 빨려들게 되는 매력이 있지만, 너무나 굉장한 나머지 나중에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극장을 나서면서 진짜 재밌었다고 환호해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면 어쩐지 흥이 식는다. 애초에 정서적인 문제를 떠나 시간적인 소모도 크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런 반면에 작은 작품은 볼거리가 쉴새 없이 쏟아지지는 않지만, 그 덕분인지 보는 동안 마음이 편하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자세로 각 잡고 감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실제로는 압축적이니까 열심히 봐야겠지만). 대작을 볼 때를 해외여행이라고 치면, 작은 작품을 볼 때는 동네 산책이 아닌가 싶다. 해외여행을 하면 평소에 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니 좋지만, 잘 아는 길을 다시 보고, 거기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멋지다. 무엇보다 해외여행은 하고 싶을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산책은 마음껏 할 수 있기도 하고. 
그래서 대작 하나를 보는 것보다는 작은 작품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게 좋다. 소설은 단권이 좋고, 영화는 90분 내외의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가 좋다. 최근에는 "천공의 섬 라퓨타"와 "마녀 배달부 키키"를 봤는데, 키키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라퓨타는 정말 두말할 것도 없이 어마어마한 대작이며, 단 두 시간에 이렇게 거대한 이야기를 밀도 있게 풀어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치밀하게 짜인 작품보다는 살짝 느슨한듯 하면서도 이런저런 얘기가 들어가 있는 키키가 더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절대 내가 체험할 수 없는 대모험보다는, 나도 종종 맛보는 두려움과 무력감, 보람과 행복이 가득한 일상이 공감하기도 좋다. 
이 이유 때문에 "비포 시리즈" 중에서는 "비포 선셋"이 가장 좋다. 이 시리즈는 약 9년마다 만들어져, 극 중의 인물들도 다음 편으로 넘어가면서 똑같이 늙었는데, 시리즈의 첫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는 유럽 여행을 하던 남녀가 우연히 만나 단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다는 얘기고, 비포 선셋은 이들이 9년 후에 다시 만나 안부를 묻고 신세 한탄을 한다는 내용이다. 이 짧은 소개로도 알 수 있겠지만, 비포 선라이즈에는 두 남녀가 하루 동안 서로 알아가고, 서로의 마음을 재보고, 사랑을 나누는 등 많은 극적 사건이 들어있는 반면, 비포 선셋에는 이렇다 하고 딱히 소개할 만한 내용이 없다. 여행도 아니니까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인물들이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닌데다 각자의 생활이 있어서 두근거리고 말 것도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두 남녀가 수다를 떨 뿐이다. "요즘? 잘 지내지", 하고 시작해서, "옛날에는 그랬지." 하다가, "사실 요즘 더럽게 힘들어.", 하고 신세 한탄이 줄줄 쏟아진다. 정말 익숙하고 현실감 넘치는 대화의 흐름이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다. 아무래도 여행 중에 천생연분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는 옛 친구를 만나 신세 한탄을 하는 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대체 그게 뭐가 재밌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그냥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 환상보다는 현실에 가까운 허구를 즐기게 되는 게, 바로 꿈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하는데, 부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쓸쓸하긴 하지만, "이런 것이 좋다." 하고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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