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실 나는 이어폰이나 헤드폰에 대한 욕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음향기기라는 것은 대체로 돈을 들이면 그만큼의 성능을 보여준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나의 경우 휴대용 리시버는 보통 대중교통 안에서 쓰기 때문에 제아무리 뛰어난 기기가 최고의 성능을 발휘해도 제대로 듣기 힘들 때가 태반이다. 차음성이 뛰어난 인이어나 헤드폰, 혹은 노이즈 캔슬링 기기를 사용하면 그나마 낫겠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전혀 못들으면 곤란하거나(내릴 역을 지나치거나), 위험한 (자동차가 오는 소리를 못듣는다) 상황이 종종 일어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폰은 헤드폰과 달라서 그 생명이 유한하다. 헤드폰은 고장나면 AS를 받아서 계속 사용할 수 있지만 이어폰은 대체로 소모품 취급되므로 고장나면 그걸로 끝이다. 중간계로 따지면 인간과 엘프 정도의 차이다. ...음? 그렇다면 속편하게 헤드폰을 쓰면 되잖아? 하고 헤드폰을 써 본적도 있지만, 머리가 큰 탓에 오래 쓰고 있으면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헤드폰은 영영 포기했다.
그리하여 줄창 이어버드만 쓰다가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한 것이 클립쉬 s3였다. 지하철에서 토익 공부를 하자니 차음성이 뛰어난 인이어 이어폰이 필요해서 고르고 고른 것인데, 다른 인이어 이어폰에 비해 압도적인 차음성을 자랑하는 한편으로 주변 소리를 들어야 할 때는 좀 당겨서 헐겁게 해놓아도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꽂혀있기 때문에 크게 만족스러웠다. 막귀라서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공간감도 훌륭하고, 소리도 저음부터 고음까지 잘 나온다. 문제가 있다면 선의 재질 때문에 옷의 마찰음이 유독 크게 들린다는 것이었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계속 듣다보니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어폰은 결국 이어폰이라, 결국 단선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교체식 AS가 가능한 모델이라 교체를 받긴 했지만,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한 번 더 고장나면 포기하는 게 좋겠구나 생각할 지경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나는 이 계속되는 단선이 '여름에 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핸드폰을 맨날 손에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유지비가 들어가지만 지속 가능한 방법을 택했다. 그 방법이란 ... 선을 짧게 개조하고 별도로 연장선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개조비용이 또 들긴 했지만, 가장 고장이 잘 나는 부분을 대단히 적은 비용으로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만족스럽다. 개조한 뒤로는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연장선을 여분으로 더 사놓은 게 아니라, 만일 연장선이 고장나면 새로 주문해서 교체할 때까지 이틀 가량 쓸 이어폰이 없다. 사실 멀쩡한 이어버드도 있지만, 이제와서 이어버드를 또 쓰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백업용으로 장안의 화제인 쿼드비트를 사봤는데, 확실히 칼국수형 선은 꼬임에 강해서 마음에 들었다. 폼팁은 너무 큰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들어보니 음질도 확실히 훌륭했다. 클립쉬보다는 못하지만(더 뛰어나면 좀 슬펐겠지...) 깔끔하고 공간감도 괜찮고, 가격을 생각하면 감탄할만한 수준이었다. 자율학습 하던 시절에 이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뭐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오디오 테크니카를 쓰는 친구가 있든 뱅 앤 올룹슨을 쓰는 친구가 있든 리시버에 대한 아쉬움 없이 잘 살았다. 사람은 확실히 더 좋은 것을 체험하면 눈이 높아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늘 아무 번들 이어폰이나 쓰고 살았어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뭐든 좋은 것은 하나라도 더 즐겨볼 일이다. 늘 듣던 음악에서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볼품없던 소꿉친구가 안경을 벗고 미소녀가 되어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놀랍고 신비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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