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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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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곳에는 카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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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가지 일이 겹쳐 혼이 빠지도록 바쁜데, 집에 있으면 흥청망청 놀기 일쑤라 대체로 일은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하고 있다. 집만큼 편한 건 아니지만(무엇보다 집에서는 돈이 안들고, 옷을 고르느라 골머리를 썩힐 필요도 없고, 모니터가 듀얼에, 필요할 때는 형의 맥북과 아이패드까지 동원할 수 있다) 사람이란 너무 편하면 늘어지기 마련이라 어쩔 수 없다. 집에서 나감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자신의 나태를 방지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집을 나서면 보통은 그나마 비용이 싸게 먹히는 도서관으로 간다. 하지만 도서관의 장점이라고는 사실 비용과 사물함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무엇보다 무선인터넷 상황이 개판이다. 어떻게 설계된 것인지 노트북 열람실 안에서는 도무지 무선인터넷이 잡히질 않아서, 일반적인 무선인터넷을 수돗물에 비유하면 이건 거의 꽃잎에 맺힌 밤이슬을 핥아먹는 수준이다. 게다가 일반 열람실에 비해 공기 순환이 되질 않아 갑갑한데다 인간의 열과 노트북의 열기가 모여, 심할 때는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반팔 차림으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다. 그렇게 반팔 차림으로 땀을 닦으며 일을 하다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엎드려 자다 깨기를 반복하자면 이게 도서관인지 탄광 지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각자의 칸막이 안에서 빛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레포트를 작성하거나 인터넷 강의를 보고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디스토피아적인 냄새가 난다. 시간 연장을 깜빡했다가는 가차없이 쫓겨나는 것도 세기말적이다. 종합적으로 기분 좋아질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카페는 여러모로 상쾌하다. 공기도 맑고 조명도 피로하지 않고 온도도 적당하다. 무엇보다 "내가 틀지 않았는데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올 확률이 높다"는 점이 훌륭하다. 최근에 다니는 곳은 재즈가 나올 때가 많아 즐겁다. 맥 더 나이프나 크리스마스 왈츠, 노라존스를 듣자면 소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심지어 이곳은 항상 디지털액자로 BBC의 셜록 시리즈를 틀어놓아서, 작업을 하다 눈만 들면 즐겁다. 화장실도 잊혀진 다락방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워서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카페라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개방된 공간이다보니 이미지 작업은 좀 민망한 감이 있고, 엎드려 자는 것도 좀 부끄럽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이 나오거나 시끄러운 손님들이 와서 떠들면 이어폰으로 귀를 쑤셔막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카페까지 와서 커피가 아닌 다른 것만 먹는 것도 뭐하지 않나 싶어서(그리고 커피가 아닌 것은 상대적으로 비싸서) 이런 저런 커피를 시도해보고는 있지만, 애시당초 커피맛이라는 걸 모르니 카페에서 아무리 훌륭한 커피를 내놓아도 알 길이 없고 그저 적당히 먹어치울 수 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이건 미하엘 키슬링과 볼프강 크라이머의 첫번째 합작으로..."라며 의기양양하게 보드게임을 내놓아도 보통 사람들은 듣고 흘려버릴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음, 예를 들어보니 이건 카페 쪽에 몹시 미안한 일이다. 태연한 낯짝으로 잔을 비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역시 잘 모르겠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주인장이 알면 쟁반으로 작신작신 머리를 두들기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부단한 노력 끝에 오늘은 각설탕 하나를 넣은 아메리카노가 맛있고, 마시고 나서 속도 비교적 괜찮다는 걸 발견했다. 아메리카노부터 먹어봤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간 데 만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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