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롤플레잉 게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옛날에는 분명 재미있게 했는데, 요즘은 어째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총 플레이 시간 몇 시간의 대작이라는 말을 들으면 게임을 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대체 내가 왜 100시간이나 한 게임을 붙들고 늘어져야 하느냔 말이다(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게임을 하긴 틀렸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롤플레잉 게임은 설정이 아주 장황하다는 점도 이제 나와 맞지 않는다. 어느 대륙에 무슨 신이... 어쩌구 하는 설정부터 나는 이미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다. 환상에 몰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아마 한 때 판타지 소설 작가를 지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설정을 보기만 하면 자신이 무아지경으로 의미없는 단어들을 나열해서 대륙의 지도를 그리고 신화와 왕국의 역사, 문화를 만들어내던 과거가 떠오른다. 그 시절은 분명 좋았지만, 결코 이제 와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설정을 겨우 넘어간다 하더라도 이제는 스토리를 견디지 못한다. 나이를 먹어서 호기심이 줄어든 것인지, 어지간해서는 스토리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가 심화되는 가운데 대륙의 저편에서는 어둠의 군단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따위 이야기를 들어도 글쎄,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에 한쪽 발이라도 걸치고 있는 스토리가 아니라면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고,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재미있게 보지 못한다. 본다 해도 읽기 싫은 책을 억지로 읽는 기분이다. 그러니 순수한 판타지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게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환상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환상을 찾을 수 있나?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