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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메모선장의 블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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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빙고와 잃어버린 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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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빙고는 펜과 종이 밖에 없는 제한적인 환경에서 즐길 수 있는 극상의 유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숫자 빙고보다는 단어로 하는 빙고가 재미있다. 가장 만만한 것이 영화와 동물인데, 어릴 땐 이걸 "블랙 빙고"라는 규칙으로 했다. 그냥 한 줄 완성으로 끝나버리면 재미가 없으니까(기껏 써놓은 것도 아깝고) 칸을 모두 다 채워야 끝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돌아가면서 한 단어씩 부르는 게 아니라 같은 걸 쓴 사람이 나올 때까지 혼자 계속 부르는 규칙까지 적용하면 꽤나 재미있다(지역별로 다른듯). 이렇게 되면 칸을 채울 때부터 공격과 방어를 나눠서 세팅해야 하는데, 공격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만한 기상천외한 것들로 준비해야 하고, 방어는 남이 쓸만한 것을 준비해서 차례를 빼앗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 비율이 맞지 않으면 신나게 공격하다 운이 없어 차례를 한 번 빼앗긴 뒤에 멍하니 남들이 게임을 끝내는 것을 지켜보게 되거나, 뭘 좀 해보려 할 때마다 차례를 빼앗기게 된다. 대체로 25칸 빙고라면 5칸 정도를 방어에 투자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를 먹은 뒤 이 블랙빙고를 다시 해보니 묘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주제를 동물로 했을 때가 심각했다. "개미"를 불렀을 때 "흰개미"도 체크할 수 있는 것인가? "일본 원숭이"를 불렀을 때 "원숭이"를 체크할 수 있는 것인가? "도마뱀"과 "목도리 도마뱀"은? "해파리"와 "아기백관해파리"는? 요는 세부적인 지식이 많아진 덕분에 논란이 생긴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한 단어가 다른 한 단어에 포함되면 그나마 낫지만 "앵무조개"와 "키조개", "조개" 처럼 여러 층위가 뒤섞이면 점점 판정이 까다로워진다. 때문에 종속과문강문계의 어디까지 허용하느냐는 얘기도 나왔고, 앞뒤로 붙는 건 다 떼고 적자는 얘기도 나왔는데, 전자는 사실 논의할 정도로 잘 알지도 못하고, 후자는 게임에서 독기가 빠져서 재미가 없다. 결국 그때그때 다수결로 판정하게 되었는데, 앵무조개와 키조개는 허용하지 않지만 조개와 키조개는 상호 체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상위 개념은 방어용으로, 하위 개념은 공격용으로 쓴 셈이다. 이런 게 가능한 게 바로 블랙 빙고의 매력이지 싶다.

빙고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스무고개도 꽤 재미있다. 그런데 천진난만하게 즐길 수 있었던 예전과 달리, 다시 해보니 점점 "최단 질문 파해법" 같은 것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만질 수 있습니까?
-유기물입니까?
-여기 있습니까?
-저 기둥을 기준으로 왼쪽에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합리적으로 범위를 좁혀나가는가 하면 "가격이 10000원 이상입니까?" 같은 세속적인 질문도 서슴지 않는다. 분명 옛날에는 "그건 노란 색입니까?" 같은 귀여운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어린왕자에서 어른들은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있는 집이라고 하면 잘 알지 못하고 얼마짜리 집이라고 해야 감탄을 한다는 대목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재미있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한다. 모두가 제라늄 화분에 감탄하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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